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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68
배용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시집을 손에 들고 한 편 한 편 읽다보면 시인이 보인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인간을 연구하는 사람인지. 노래 부르기를 즐겨하는지. 생각이 많은지 시의 결에서 언뜻언뜻 보인다.
이 시집에도 그 언뜻언뜻이 보인다. 바람의 집이다. 이 시집의 주인은 바람이다. 그안에는 바람이 산다. 잠들어 있는 바람, 고요한 듯해도 속에선 들끓는 바람, 비를 부르는 바람, 해를 반기는 바람, 인간의 형상을 한 바람들이 사는 집이다.
궂이 말하자면 나는 시를 읽는 게 아니라 '바람'을 따라 가는 중이다. 비가 퍼 붓는날 서점을 가고 그 많던 시집 코너에서 이걸 고르는 순간 바람에 감염되었는지도 모르지.
삶에서 바람은 위태롭다가도 사그라지는 불씨를 향한 풀무질 같은 것 인지도 모른다.
거미줄에 맺힌 이슬처럼 사정없이 휘둘리다가 흔적없이 사라지는 한이 있어도 한번쯤 걸어볼 만한 모험이다.
시인이 결마다 숨겨 놓은 바람은 불안이었다가 잊고 지내는 사람에게 묻고 싶은 안부기도 하다. 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것 같지만 이미 나무가 떨고 있는 것이다. 나무가 술렁일 때 바람을 보았다고 하는 시선처럼 때로는 그림으로 때로는 소리로 무수한 바람을 기억한다.
이 바람의 집에는 아파하고 외롭고 떠돌았던 생의 무수한 발자국들이 남아 있다. 그 흔적을 따라 가면 그동안 흘려 보냈던 온갖 슬픔의 종류들이 어지러운 흔적으로 남아 있는 듯하다.
삶의 외형은 다르지만 '외부에서 내부로 내부에서 외부'로 휘둘리며 살아가느라 드리운 그림자들. 아무래도 시인은 전생에 바람을 관장하는 신이 아니었을까. 수면위에 잠든 연꽃을 지나 거미줄에 거미를 지나 마침내 바람의 사원으로11년만에 돌아와 바람의 내부까지 관장하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