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그의 뼈를 비운다. 대나무처럼 뼈 속을 비운다. 그리고 몸속 공기주머니에서 뼈 속으로 끊임없이 바람을 불어 넣는다. 새의 조상은 파충류다. 뱀은 하늘을 날려고 오천만 년이 넘도록 '날개짓'을 꿈꿨다. 저주받은 몸통에 깃털을 틔우기 위하여 수도없이 허공에 뛰어 오르다 뒹굴었다. 온몸은 시퍼렇게 멍들었고 밤마다 피울음을 울었다. 그리고 마침내 쥐라기 시대, 익룡의 몸이 두둥실 하늘로 떠올랐다.

 

새의 날개는 앞발이다. 파충류의 앞발이 피눈물 나는 날개짓 끝에 깃털로 변한 한것이다 하지만 아직 새들의 꿈은 끝나지 않았다. 보다 높이 보다 멀리 날기 위해 몸부림친다. 높이 나는 새는 멀리본다. 날개짓을 많이 하는 새는 그만큼 높이 ,멀리 날 수 있다. '상상속의 새'붕새는 한 번 날개짓에 구만리를 난다. 벌새는 일초에 아흔번이나 날개짓을 해도 몇 십미터도 못간다."(196쪽)

김화성 기자의 <책에 취해 놀다>. ​중에서

연꽃구경을 하다 새 한마리를 봤다. 도심속 인간이 만든 연못에 와 있다. 신기해하는 내게 카메라 든 노인이 해오라기라고 알려준다. 어릴적 먼빛으로 보았던 고고한 녀석을 바로 눈앞에서 본다는게 신통방통하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해오라기는 도심속 비둘기처럼 벌써 인간을 적응한 걸까.

카메라를 들이대고 조무래기들이 놀라 소리지르고 봐도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다. 연못의 수초속에 긴 부리를넣었다 빼는 행위가 카메라를 든 노인같다. 생의 노련함이랄까. 긴 목을 쭈빗거리며 걷는 걸음걸이 마저 여유롭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앞발인 날개는 옆구리에 고이 접어주고 뒷발로 중심을 잡고 서 있다. 어쩌면 저 녀석은 지금 먹이를 핑계삼아 잠시 쉬고 있는 중이 아닐까. 붕새처럼 구만리장천을 날아오지 않았어도 여기까지 날아서 오느라 수도없는 날개짓에 날갯쭉지에 멍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새들은 허공에 자신을 내던질 줄 안다. 하지만 우리 삶은 어쩌면 정상을 오르는데 있지 않고 저마다 처한 위치에서 그냥 있는 그대로 보며 감사하고 감동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오는 날 문득 걷고 싶어 연못에 왔다가 뜻하지 않게 연꽃을 보고 해오라기를 보며 예쁘다하고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는 짠한 마음이 정상에서 얻는 깨달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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