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조선 운동사 -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역사
한윤형 지음 / 텍스트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1.
‘안티조선운동’과 그 취지에 동감했던 사람들의 온라인 모임인 ‘우리모두’는 내게도 최소한의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는 가입 이후 뚜렷한 활동이 없는 눈팅족에 불과했지만 나름 안티조선운동의 목표에 공감했고, 그렇게 공감대를 이룬 사람들이 모여서 펼치는 백가쟁명이 스스로의 생각 정리에 좋은 기회도 되었다. 지금은 유명해진, 그러나 당시로서는 그렇지 않았던 진중권, 홍세화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진보정당 지지자에게 보여준 민주당 지지자들의 배타적 태도에 혼자 분개하기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후보의 당선에 환호했다.

안티조선운동은 언제 시작된 것일까? 어떤 활동가들은 그 출발점을 1970년대의 언론운동에서 찾는다. 반드시 틀린 말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본격적인 의미의 안티조선운동은 1998년 조선일보가 시도한 소위 ‘최장집 교수 사상검증기사’에서 촉발되어 1999년 ‘우리모두’ 사이트가 개설된 시기부터 2007 대통령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기까지의 기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문좌파의 촉망받는(?) 재원이면서 ‘아흐리만’이라는 닉네임으로 안티조선운동에서 활동했던 한윤형은 이 10여년 동안 펼쳐졌던 역사를 꼼꼼하게 되살려낸다.

여기서 잠깐! 나는 바로 앞 문장에서 저자인 한윤형을 ‘인문좌파’라고 지칭했다. 사실 이건 이택광 교수의 표현을 빌려온 것인데, 그가 정의내린 바, 인문좌파의 특징은 정치지형도 상에서 왼쪽에 속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의 이념을 모두 회의하고 냉정히 평가하는 사유를 보여주는 사람을 의미한다. 한윤형 본인은 ‘인문좌파’라는 나의 멋대로 평가에 동의할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안티조선운동사]를 읽으면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저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기에 그에게 이런 명칭을 붙여도 큰 문제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인문좌파라느니, 치우치지 않는다느니 하는 말을 꺼낸 것은 그게 바로 이 책, [안티조선운동사]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나만 해도 조선일보, 월간조선 등등 ‘조선’ 형제들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조선일보의 정치적 지향점이 나와 다른 위치라는 점도 그렇지만,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에 서슴없이 사상의 굴레를 씌우고, 기사나 인터뷰를 정치적으로 ‘마사지’하여 교묘하게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윤색해 내기 때문이다. 나는 조선일보가 사용하는 ‘좌파’라는 용어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붙이는 ‘좌파’라는 용어의 이면에는 <좌파=빨갱이>라는 이미지를 부지불식중에 각인시킴으로써 좌파라는 딱지가 붙여진 정치적 입장을 우리 사회에서 매도시키고자 하는 사고방식이 숨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를 싫어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내 성질을 버려놓는다는 거다.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침마다 ‘만나’가 내려왔듯이 아침마다 우리 집 현관문 밖에 곱게 접은 조선일보를 놔 둔다. 출근하려고 문을 나서면서 그 제호를 보는 순간 짜증이 확 몰려온다. 말을 섞기도 싫고 배달하는 양반들이 뭔 죄가 있으랴 싶어서 “조선일보 사절”을 붙여 놓아도 별반 소용이 없다. 결국에는 보급소에 전화하여 소리를 빽빽 질러 기분을 상하게 한 후에야 겨우 그만 둔다. 그리고 한 1-2년 지나면 또 슬며시 ‘만나’를 내려주신다.

2.
개인적 글이 좀 길어졌지만 결론은 하여튼 ‘나는 조선일보가 싫어요!’ 이거다. 이런 내가 한윤형만한 필력과 기억력을 가지고 안티조선운동에 대해 글을 쓴다면 어떠했을까? 아마 제1장에서는 친일행각, 냉전적 사고방식 등 ‘조선일보의 죄악상(!)’을 들이대어 조선일보가 ‘악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했을 것이고, 제2장에서는 안티조선운동이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영웅적으로 활동해 왔는가를 찬양할 것이다. 그런데 한윤형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일방적이거나 근거없이 조선일보를 비판하거나 안티조선운동을 옹호하지 않는다. 그는 매우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안티조선운동을 평가한다. 그가 책 말미에서 내린 결론은 이렇다.

안티조선 운동의 공과를 판단해 볼 때, 나는 이 운동이 한국 사회에 충분히 기여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게 안티조선운동은 실패한 운동이다. (중략) 그러나 본질적으로 볼 때, 안티조선 운동은 <조선일보>의 보도 행태로 대표되는 기존 매체의 저급한 편향성을 극복해야 했다. 그 점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이 운동이 실패했다고 감히 말하는 것이다. (p.464)

저자의 결론을 내 마음대로 정리하면 이거다. ‘좋다. 조선일보는 언론이 가져야 한다고 믿어지는 불편부당함을 가진 매체가 아니라 특정 정파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온 매체였다. 저급한 보도행태이고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조선일보의 행태에 대한 잣대는 반대편의 소위 ’진보지‘라고 하는 언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안티조선운동은 단순한 일개 신문에 대한 반대에서 출발했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성공적인 운동으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언론 전체에 편향성 극복이라는 메스를 들이대고, ’공론‘이란 것을 형성하기 위한 그릇으로 기능하도록 노력했어야 한다.’

일면 양비론으로 들릴 수도 있는 주장이지만 자신이 몸담고 참여했던 사회운동에 대한 냉정한 자기 성찰과 새로운 언론운동의 방향성 제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에 대한 비판 지점 중 하나는 자신들의 입장에 유/불리한 주장을 구분한 후, 유리한 주장들로 일종의 ‘세력’을 이루고, 그 세력을 통해 불리한 주장들을 배타적으로 밀어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 아프게도 이런 모습은 안티조선운동 내부에서도 있었다. 오히려 좀 더 유치한 방법으로 말이다. 우리모두 사이트가 2002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겪은 심각한 내홍은 ‘민노당이건 다른 진보정당이건 민주당 후보(노무현)를 지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둘러싼 대립이었다.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진보정당의 희생을 강요하였던 측면이 있었고, 그 반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진중권씨가 이 시기 민주당 지지자들을 ‘김대중 광신도’로 거칠게 비판(비난?)하였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물론 이런 갈등은 우리나라에서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한 진보진영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안티조선운동에 참여한 사람이라고 해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가장 큰 문제는 그 때문에 안티조선운동이 ‘선명성’을 획득했다는 자화자찬에 있지 않았을까. 선명했었는지는 모르지만 안티조선운동은 그 폭을 협소하게 만들었다. 안티조선운동은 조선일보에 제 몫을 찾아주어야 한다는 취지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가능한 장이었고, 또 계속하여 그런 원칙 하에서 외연을 확장함으로써 우리나라 전체 언론, 나아가 정치행태에 대한 문제게기가 가능했던 운동이었다. ‘적과 싸우면서 적을 닮아간다’라고 했던가. 안티조선운동에서 일어났던 그 모든 일들은 또다른 분열이었고, 또다른 무리짓기였으며, 세상과 사람들을 향해 날선 대립각만을 세운 모습이었다.

3.
저자의 성찰을 바탕삼아 본다면, 안티조선운동은 조선일보의 편향성을 지적하고 그것에 대한 대중의 여론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는 성과가 없지 않으나, 편향성의 문제를 조선일보의 문제로 축소시킴으로서 한국사회에서 언론의 역할과 바람직한 보도행태라는 좀 더 큰 담론으로까지 끌고 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남겼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안티조선운동 내부에서 나타난 ‘조선일보스러운’ 모습은 상당히 뼈아프다고 할 것이다.

전술하였듯이 안티조선운동의 본격적인 출발은 조선일보가 최장집 교수의 논문 중 일부를 발췌, 짜깁기 하여 <최장집 교수=국가관에 의심이 가는 좌파>라는 꼬리표를 달아 당시 김대중 정부에 대한 생채기를 내고자 하였던 의도적인 보도행태에서 비롯하였다. 이것은 사상과 학문의 자유에 대한 침해일 뿐만 아니라 정확한 사실관계는 부차적인 것으로 돌려지고 목적에 따라 기사를 재구성하는 전형적인 ‘세력화’ 행태였다. 따라서 안티조선운동은 일차적으로 특정 정치사상의 시녀로 전락하여 기사를 윤색함으로써 상대방을 견딜 수 없도록 몰아붙이는 보도행태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어야 했다. 이 점에서 안티조선운동의 성과는 작지 않다. 어쩌면 이후 모든 진보진영의 운동에서 ‘조중동’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아이템,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아이템이 되었으니 말이다.

안티조선운동이 제기한 문제의 출발점은 옳았다. 그리고 그 대상이 어쨌거나 가장 영향력있는 언론인 조선일보였기 때문에 더더욱 문제를 본격화시키기에 좋았고 대중화시키기에도 좋았다. 그러나 운동 과정에서 안티조선운동은 우리 사회의 언론이 지향해야 할 바를 제시하고 새로운 언론의 상을 창조해 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오히려 소설가 이문열이 제기한 소위 ‘홍위병’으로 대표하는 보수 진영의 공세 속에서, 그리고 스스로의 운신폭을 좁혀 버린 배타성 속에서 안티조선운동이 원래 가지고 있던 건강한 비판이 힘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본다. 그런 점에서 저자인 한윤형이 인용하여 지적한 다음 내용은 매우 가슴 아프다.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한국 언론의 심각한 문제는 이른바 ‘세력화 방식에 의한 여론화’다. 이를테면 언론이 자기주장에 동조하는 지지자에게 아첨하거나 그런 지지자를 규합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양적 분석을 통해 볼 때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의 사설이 ‘세력화 방식에 의한 여론화’를 가장 많이 추구한다는 사실을 씁쓸하게 지적했다. (p.467)

4.
매우 딱딱할 것 같은 책이지만 [안티조선운동사]는 매우 재미있는 책이다. 어떤 대목은 마치 무협지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힐 정도이고, 만약 안티조선운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면 더더욱 실감나게 책을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참여정부에 대한 적극적 지지층에게는 조금 불편할 수도 있겠다.

안티조선운동에 대한 저자의 평가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하지만, 나는 그래도 안티조선운동은 성과가 많았던 운동이라는 평가 쪽에 좀 더 점수를 주고 싶다. 언론은 불가피하게 현실 정치와 이런저런 관련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런 점을 인정한다면, 사실 다종다양한 이해관계와 성격을 가진 집단의 목소리를 객관적인 틀로 받아 안는 ‘공론화’ 또는 ‘공론장’으로서의 언론은 매우 이상적인 상이다. 그리고 이상적이라는 것은 다분히 실현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저자도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의 사례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지금은 정부 권력과 불화하는 매체가 겪는 어려움보다 자본 권력과 불화하는 매체가 겪는 어려움이 훨씬 크다. 공론장으로서의 역할을 위한 물적 조건이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서 과연 고상한 이상을 이룰 수 있는 시기는 언제쯤이 될 것인가. 어쩌면 지금 우리가 해 나가야 할 언론운동은 싫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지저분하면서, 그래서 흙탕물에 뒹굴거려야 하는 것이 아닐런지. 그리고 그런 각오를 하고 뛰어들었을 때에만 언론 민주주의에 한발자국 더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다시 총선과 대선이 펼쳐질 2012년을 앞두고 있다. ‘보수라는 이름의 야만’, ‘자본 권력’이 지배하는 시대에 안티조선운동이 제기했던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나는 [안티조선운동사]가 과거 참된 언론의 모습을 고민하며 들었던 깃발을 다시 한 번 세우는 계기로 작용하기를 바란다. 안티조선운동의 과정은 세련되지 못하였고, 수많은 시행착오와 한계, 상처를 거쳐 ‘일단은’ 실패한 운동으로 나타났지만, 그 경험이 결코 ‘파산’이 아닌 승리의 자양분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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