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 광기의 시대를 생각함
문부식 지음 / 삼인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1.
책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언제였더라? 잘 기억나지 않는다. 메마른 성정을 소유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에 문부식 씨가 쓴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광기의 시대를 생각함]을 읽으면서 며칠을 끙끙 앓아야 했다. 펑펑 울어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말 그대로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앞쪽의 글들은 저자의 성찰에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였지만 뒤쪽 부분들, 서 승, 윤이상, 김경환에 대한 글에 이르러 코끝이 찡했다.

보통 독자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책은 신파조의 소설 아니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감동의 휴먼스토리’ 정도 되겠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패배의 기록이며, 불꽃같았던 시대를 온 몸으로 헤쳐온 한 지식인의 자기반성의 책이다. 패배와 반성의 책이 메말라 있던 내 심정을 자극한 이유? 첫째, 나는 이 책에서 한 때 유행처럼 번졌던 ‘과거 386세대의 고백’이 아니라 진지하면서도 뼈를 깎는 자기성찰의 솔직함과 진정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둘째, 이 책이 패배의 기록은 되어도 결코 절망의 기록이 아니라는 점에서 또한 그러했다.

신문지상을 통해서,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무수히 많은 사람의 변절과 변신을 보았다.
김지하, 박노해, 김영환, 이재오, 김문수... 혹자는 생명에 대한 경외로 방향을 잡았고, 혹자는 ‘주체사상의 선구자’에서 ‘주체사상 공격수’로 바뀌었고, 혹자는 민중당이라는 한국 정치지형의 극좌파(?)에서 보수 여당의 차기 대권주자로까지 정치적 색채를 바꾸었다.
좋다. 나는 변화를 믿는다. 그래서 인간의 변화도 믿고, 불완전한 인간이 만들어낸 사상과 이념도 마땅히 변화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나는 이들에게 “절망은 어디에서 오는가?”라고 묻고 싶다. 저자의 말대로 “절망은 패배한 역사가 아니라 언제나 굴절된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그것과 단절하거나 반성하는 것이 어떻게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그 행위가 패배를 넘어서는 인간의 솔직함을 보여주기 보다 권력지향적으로 굴절된 것이라는 데에 있다.
변절과 변신이 회자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한사회변혁운동의 아이콘’들이었다. 그들은 주위에 많은 사람들을 이끌었던 위치에 있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말 그대로 ‘운동의 지도자’였다. 그렇다면 그들의 비판과 반성이 위치해야 할 곳은 어디인가? 권력자들 앞인가, 아니면 그들을 믿고 그들 주위에 모였던 ‘동지들’의 앞이어야 하는가?
진정한 반성은 그가 어느 길로 가든지 사상과 이념의 동질성을 떠나 박수를 보내주고 격려의 말을 건네게 한다. 하지만 반성이란 것이 주위의 사람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그들의 기억까지 모욕하는 것이라면 그건 반성이라 할 수 없다. 그건 허위로 가득찬 말장난일 뿐이다.

2.
나는 아직도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질문이 하나 있다.

1995년 가을은 뜨거웠다. 취업준비로 바쁜 도서관의 복학생 형님들까지 거리로 불러낸 당시의 구호는 “광주학살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바로 그거였다. 그리고 그 외침이 결실을 맺어 특별법 제정이 발표되는 날, 우리는 감격했다. 새벽에 경남 합천 고향집에서 수사관들에게 양팔을 잡혀 끌려 나오는 전직 대통령의 모습은 가슴후련함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 두 전직 대통령과 학살 관련자들의 재판과정을 보면서 오히려 혼란에 빠져버렸다. 문부식씨도 같은 점을 지적하는 걸 보니 내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뭐냐하면 두 명의 ‘학살 주범’을 재판정에 세우고 사형언도까지 받게 한 건 좋다고 치자. 그런데 문제는 누구도 그들이 진짜로 사형을 받게 될거라고 믿지 않는다는 점이다. 판결을 내린 판사도, 구형한 검사도, 변호사도, 일반 국민들 어느 누구도 그들이 진정으로 죄값을 치를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법정에 세운 것으로, 얼마간 감옥에 갇혀 있는 것으로(그나마 그들은 감옥에서도 특급대우였다) 그들은 면죄부를 받았다. 국민의정부라던 DJ정부는 그들을 사면했다. 그리고 그들은 현직에서 횡령한 돈으로, 그리고 단돈 29만원만 가지고도 지금도 잘 산다.

왜? 과거와의 화해와 국민통합 때문에? 거리에서 그들을 처벌하기 위해 수업도 거부하고 화염병까지 투척하며 나섰던 사람들은 그 현실 앞에 왜 침묵했나? 적어도 법적, 정치적으로 면죄부를 받은 그들에게 이제 누가 광주의 책임을 지라고 말할건가?

나는 그 대답을 모르겠다. 왜 그들이 사면받을 때 우리는 침묵했는가? 사면조치를 내린 ‘헌정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라는 영광을 얻은 정부를 우리는 부정할 수 없어서? IMF 경제위기로 먹고 사는 것이 더 큰 문제라서? 아니면, ‘이 정도로 그만 되었다. 광주 시민들의 명예도 회복된 셈이고, 5.18묘역도 국립묘지가 되었고, 이제 그만 잊고 그만 용서하자.’ 이런 국민적 합의가 있어서?

5.18 광주가 관련된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여러 가지로 듣게 된다. 희생자와 그 가족은 물론이고, 진압작전에 참가한 일부 공수부대원들도 대인기피증을 비롯한 각종 정신질환에 시달린다고 한다. 그들에게 5.18은 현재진행형이다. 1980년 5월 18일이라는 물리적 시간은 다시 돌아올 수 없겠으나, 그 시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한 역사적, 사회적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린 그걸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3.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광기의 시대를 기억함]에서도 몇 차례 언급되는 영화이기도 한데, 영화관과는 원래 거리가 먼 내게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기억되는 것이 바로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이다. 이 작품을 영화관에서 두 번 보고, 비디오로도 몇 차례 더 보았는데, 볼 때마다 역사가, 그리고 국가가 어떻게 개인을 옥죄면서 망가뜨릴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순수했던 한 청년으로 하여금 결국에는 달려오는 기차에 정면으로 마주설 수밖에 없도록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박정희식 개발독재가 극점에 이르렀던 1979년 구로공단과 그렇게 이루어 놓은 천민자본주의의 사망선고였던 1999년의 경제위기는 결국 한 길일 수밖에 없었고, 그 속에서 개인 역시 한 쪽 방향으로만 흘러가게 되었다. 전체주의 사회가 무엇인가? 하나의 사상, 하나의 이념적 잣대하에 모든 사회구성원이 하나가 되어 달려가는 것 아닌가? 그 속에서 뭔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뭔가 반대하는 사람은 부적응자로 생각하여 배제하는 것이 전체주의 아닌가?

그런 점에서 <박하사탕>의 전체주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광기의 시대를 기억함]에서 한 부분을 인용하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에 쓰여진 이 글이 2010년 현재 무엇을 말해주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전체주의 사회가 국가에의 통합을 거부하고, 상품 시장화에 저항하거나 혹은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인간을 철저히 배제하고 소외시켜 버린다는 데 있다. 고비용/저효율을 이유로 노동자는 일자리에서 쫓겨나고, 그리하여 일자리가 귀할수록 그것이 노동하는 인간들에게 작용하는 포섭력은 강해지고, 실용적 가치가 인문적 가치를 몰아내고, 고부가 가치를 생산하는 ‘신지식인’이 지식인 일반의 무능력을 비웃는 사회, 모든 국가 구성원의 정신적 가치가 이윤과 결합되어 있고, 자신의 상품성을 광고하는 면접고사장 앞에 사람들이 언제나 늘어서 있고,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비판적 시민 의식을 거세당한 채 안락에의 자발적 예속을 기꺼이 감수해야 하는 사회, 바로 이 ‘끔찍한 신세계’가 지금 우리 사회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은 아닌지. 한편 세계적 차원의 권력 중심부에서 오는 통합의 요구와 동질화의 메시지가 강할수록 정권 담당자는 국가 경쟁력 강화라는 목표에 매달리게 되고, 종국에는 사회적 합의나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민주주의적 가치를 기피하게 됨으로써 내부로부터 그러한 가치를 지켜가는 힘을 잃고 제도적 절차만 남는 ‘민주주의의 안락사’로 귀결되는 것은 아닌지. 국가의 일체의 행위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 정신의 구축이 자기 이해관계를 떠나서는 좀처럼 구축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야말로 그러한 독립적 정신의 가치가 절실하게 느껴지는 때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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