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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렐의 발명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5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평점 :

나는 사형선고를 받고 도망치다가 ‘빌링스’라는 무인도에 도착한다.
아무도 없는 섬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나는 잡힐 것을 두려워하여 섬 한 편에 숨어 사람들을 관찰하는데,
매일 오후 바위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는 한 여인(포스틴)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내가 아무리 위험을 무릅쓰고 가까이 가도, 내 존재를 알려주려 하여도 포스틴은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다른 사람들도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나기도 하고, 매번 같은 대화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나는 포스틴의 사랑을 얻기 위해,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보르헤스와 더불어 라틴 아메리카 환상문학의 대표작가로 불리는 카사레스의 [모렐의 발명]은 이런 당혹스러운 현실에서 출발한다.
우리나라에서는 SF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던 이 책에는
다루기가 그리 녹록하지 않은 담론들이 들어 있다.
그냥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을 스쳐갔던 주제들만 꼽아보더라도
인간의 복제성과 그 복제의 진정성, 복제된 정보의 조작가능성, 인간과 영혼의 불멸성,
현실과 가상의 독립성 또는 융합성과 같은 무거운 철학적 질문에서부터
순간과 영원, 기술에 대한 고민, 인간의 고독과 진정한 사랑에 대한 것까지 매우 다양하다.
독자에 따라서는 자칫 지루하게 읽힐 수도 있는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느낀 큰 매력은
인형 속에 작은 인형이 들어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러시아 인형’과 같이
지속적으로 눈과 머리를 현혹시키면서 현실과 가상(또는 환상)의 의미를 묻고 있는 점에 있었다.
결국 ‘빌링스’ 섬의 사람들과 내가 사랑에 빠진 포스틴은
모렐이란 사람이 발명해낸 기계가 만들어낸 환상임이 밝혀진다.
환상이라 해도 단순한 영사기나 축음기가 재생하는 차원이 아니라,
시각, 청각, 후각, 촉각적으로 완벽하게 재현된 환상이다.
모렐은 생전에 사람들의 모습을 촬영한 후 이 환상을 제작했고,
그 환상을 무인도에서 반복적으로 재생함으로써 영원함을 얻고자 하였다.
동력은 역시 영구적인 조수를 이용한 발전기를 사용하여 해결하였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등장인물이 서가에서 책을 한 권 빼내는 장면이 나온다고 한다.
그 책이 바로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Simulacres et Simulation)]인데,
시뮬라크르는 복잡한 철학용어이고 보드리야르는 ‘기호’라는 의미로 사용한 경향이 짙긴 하지만 그냥 간단하게 ‘가상’ 또는 ‘가장(假裝)’이라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아마 요즘 경제학 또는 공학에서 자주 쓰이는 ‘시뮬레이션’을 생각하는 것이 빠를지 모르겠다.
보통 우리는 현실을 진실과 대응시키고, 가상은 허구와 대응시키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잠깐!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이 사실은 가상이고, 허구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가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진실을 무수하게 복제한 복제품이라면?
그럴 경우 진실은 어디로 날아가버리는가?
<매트릭스>를 다시 생각해 보면,
매트릭스 안의 세계를 실재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매트릭스 밖의 세계를 실재라고 할 수 있는가?
매트릭스 안에서는 모든 것이 기호의 형태로 환원되는데, 이건 결국 모든 것의 복제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복제하지 않은 네오와 친구들은 매트릭스의 시스템을 망가뜨리는 ‘바이러스’가 되고,
가상인 바이러스를 대표하는 스미스 요원은 현실을 나타내는 네오를 쫓는다.
카사레스의 [모렐의 발명]의 중요한 주제의식은 <매트릭스>와 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아서 영화이야기가 길어졌다.
마지막으로 [모렐의 발명]에서 환상속에 처한 주인공의 대처방법은 어떠했나 궁금하다.
이제 나는 ‘빌링스’ 섬에서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일을 부족하게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두가지 있다.
하나는 기계가 고장나거나 하여 멈추게 되면 이 ‘영원’한 환상은 사라져버린다는 것인다는 문제고,
또 하나는 내가 사랑하는 포스틴과 영원히 같이 있고 싶다는 욕망의 문제이다.
결국 나는 모렐의 발명품을 조작하여 나 자신을 촬영한 후 재생하도록 한다.
포스틴과 대화하도록, 포스틴과 서로 좋아하도록, 포스틴과 함께 지내도록
나는 나의 환상을 창조하고, 나의 가상을 창조한다. 그리고 죽어간다.
가상과 현실이 뒤죽박죽이 된 세상.
진실과 허구가 섞여서 이젠 진실을 찾는 것이 아니라 허구를 폭로함으로써 진실에 조금씩 다가서야만 하는 세상.
자본의 힘으로 복제된 상품이 소비의 주축이 되는 것도 모자라서,
아예 그 복제된 힘은 영원한 왕좌를 얻어 인간의 고유성을 억압하는 세상.
카사레스의 [모렐의 발명]에서 지금의 ‘매트릭스’ 사회를 읽으면서 다시 현실과 가상을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