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할 때 시집을 꺼내들고 싶지만, 꺼낼 수가 없었다. 시간은 갑작스레 흘러들었고 그 속도보다 빠르게 흘러갔으니까.
힘들었다. 돌아보면 흘려보낸 시간의 사이사이에 작고 큰 구멍들이 뚫려 있었음을 알아채지만, 흘러들고, 흘려보내는 시간은 언제나 꽉 차 보였고, 도저히 헤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다.
시간. 그 말 참 곤혹스럽게도 아찔하다.
그리고 이 곳에서 시간은 나에게는 '시'를 읽는 시'간' 사이의 공'간'으로 읽힌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지나고 나면 존재했음을 알게 된 시간 속 구멍에 나는 지금 들어가고,
그 속에서 그동안 흘려보내기만 했던 시를 다시 만나고 다시 읽는다.
심보선의 시집이 또 눈에 끌렸다.
하나씩 읽고 맛본다. 눈과 입으로. 그리고 이제는 손가락과 혀로.
그 감각과, 감각이 있었다는 감각으로 구멍을 채우고, 곧바고 다른 구멍을 찾아나선다.
시, 간이다.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
전날 벗어놓은 바지를 바라보듯 / 생에 대하여 미련이 없다 / 이제 와서 먼 길을 떠나려 한다면 / 질투가 심한 심장은 일찍이 버려야 했다 / 태양을 노려보며 사각형을 선호한다 말했다 / 그 외의 형태들은 모두 슬프다 말했다 / 버드나무 그림자가 태양을 고심한다는 듯 / 잿빛 담벽에 줄줄이 드리워졌다 밤이 오면 / 고대 종교처럼 그녀가 나타났다 곧 사라졌다 / 사랑을 나눈 침대 위에 몇 가닥 체모들 / 적절한 비유를 찾지 못하는 사물들 간혹 / 비극을 떠올리면 정말 비극이 눈앞에 펼쳐졌다 / 꽃말의 뜻을 꽃이 알 리 없으나 / 봉오리마다 비애가 그득했다 / 그때 생은 거짓말투성이였는데 / 우주를 스쳐 지나는 하나의 진리가 / 어둠의 몸과 달의 입을 빌려 / 서편 하늘을 뒤덥기도 하였다 / 그때 하늘 아래 벗은 바지 모양 / 누추하게 구겨진 생은 /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였다 / 장대하고 거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