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책들이 간혹 있다. 가독성 없는 문장, 빨리 이해되지 않는 서사, 수많은 인물들과 그들이 소설 어딘가에서 갑자기 돌출할 때...., 이 책은 그런 요소를 갖고 있다.
더구나 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인 가린을( 정말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그의 성과 이름을 따로 떼어내 두명으로 생각했다. 무지가 사람을 얼마나 한심하게 하는지.... 그러니까 피에르 가린을 나는 1부에서 피에르와 가린 두 명인 줄 알았다. 진작에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읽던지 아니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메모를 했어야 했는데, 설마하고 안일한 자세가저지른 과실.
때문에 처음부터 헤매기를 시작한 것이다. 중국의 역사도 잘 모르고 혁명가들의 삶도 오리무중인(너무나 평범한 주부로써의 삶은 매너리즘의 삶이기도) 나로선 고전의 연속이었다. 몇 페이지 읽고 잠이 쏟아지고, 몇 페이지 읽고 또 잠이...., 이렇게 1부를 읽느라 시간이 덧없이 지나갔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접근, 2부 권력, 3부 인간.
1부 접근은 '나'가 쑨원의 국민당 선전부를 맡고 있는 가린의 요청으로 광저우로 향하는 여정으로 시작된다. 이 여정 속에서 주로 가린과 나의 지난날의 기억을 통해 가린의 성향과 인간적 면모가 보여진다. 그리고 중국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조금씩 드러난다.
2부 권력은 광저우에 도착한 나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 하나하나에 대한 묘사와 설명이 주를 이루는데, 그들 인물은 제각기 혁명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방식이나 그것을 통해 권력을 쟁취하려는 행태가 조금씩 다르며, 그로 인해 발생하고 있는 갈등과 균열을 알 수 있다.
3부 인간은 군벌정권과의 교전도 다루지만 그보다 훨씬 국민당 내 지도부 안에서 벌어지는 권력투쟁의 결과로 죽고 실패하는 인물들의 말로를 묘사한다.
이 지점에 이르면 처음 가린이 했던 말처럼, 혁명정신은 혁명의 초기에만 존재할 뿐 그 이후에는 그저 정치가, 정치력이 주도권을 장악한다.
가린은 학질인지 이질인지 정확치 않은 중병에 걸려 전장을 떠나게 되고, 그 외 인물들 또한 비극적인 사건으로 맺음한다. 쩡다이는 자살인지 타살인지 모를 죽음을 맞고(죽은 이후에 그의 죽음은 목적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자살이 되기도 하고 암살이 되기도 하는, 이용하고 소비되는 죽음이 된다), 젊은 테러리스트 홍은 처형을 당하며, 클라인은 적의 고문과 잔혹행위에 비참한 시신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보로딘은 건재하다. 그는 사업가형 혁명가이며 내가 보기엔 오히려 권력과 명예를 지키며 자신의 테두리를 잘 보존하는 고위관료형 인물이라고 하는 게 더 적합한 표현일 것 같다. 이 지상의 역사에서 가장 자신을 잘 지키고 오래 살면서 권력을 향유하는 인간은 아마 보로딘 같은, 지독하게 타산적인 사람들일지 모른다. 그는 소설적인 인물이 되지 못한다. 불꽃같은 열정의 주인공 곁에서 끝까지 남아있는 현실지상주의 인간일 것이다.
정치에는 도덕도 눈물도 없다. 혁명도 결국은 정치적 행위로 귀결된다. 정치의 세계에는 명분을 위한 음모와 선전선동, 상대를 이용하고 제거하고, 어떤 사건을 거짓으로 포장하거나 반대로 고귀한 행위도 단지 쓰레기처럼 취급하며, 인간들은 하나의 역할로만 자신이나 타인을 사물화한다. 이 사물화는 안정이나 무의미의 뜻이 아닌, 황폐화되고 기능화되고 인간성, 생명을 잃어버린다는 의미다.
멀리 역사적으로 공간적으로 이동할 필요도 없다. 지금 한국에서도 정치인이란 믿을 수 없다. 그리고 더 슬픈 건 그나마 인간적이었던, 존경하고 싶었던 극소수의 정치인들이 전략과 음모 속에서 죽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자신의 심정이 없는 듯 끝까지 객관적인 르포를 쓴다. 이 소설은 정통소설이 아니다. 사건과 인물들의 세세한 내러티브가 없으며 대부분의 인물의 심리는 본인이나 타인들에 의한 긴 대화에 의해 제시되고 장황한 사건은 독자의 눈 앞에 직접 보여주지 않고 암시될 뿐이다.
하지만 이런 제한된 화자의 눈(관찰자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오히려 독자의 상상을 자극하며 긴장을 높이기도 한다. 소설의 방식과 구조는 앞으로도 발명되고 발견되어질 몫이 남아있는 것 같다.
앙들레 말로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