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주제 또한 저번 주 읽은 <정복자들>과 비슷하다고 보여진다. 혼자 있어도 고독하지만, 어떤 목적을 향해 함께 연대하고 나아갈 때도 그의 심연엔 고독과 고뇌가 따라다닌다.
앙드레 말로가 그렇게 문제가 복잡한 이국땅을 찾아다닌 이유가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고뇌와 고독 때문이었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물론 이것은 상당히 형이상학적인 관점이고, 그는 돈을 벌어야했고, 자신의 탐구적인 욕망과 활동지가 필요해서이기도 했으리라).
왜 말로는 고뇌하고 고독했던 것일까. 그의 이력을 보면 상당히 권력지향적이고 명예에 충실하며, 천재적인 언어감각과( 4개국어를 했다고) 미술사에까지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다재다능했던 그가 하루를 살기에도 바빴을 것 같은데 고독과 고뇌는 그의 안에 왜 또아리를 틀고 놔주지 않았을까.
천재에게도 범인에게도 둔재에게도 자신이 살아온 삶은 무시 못할 배경이 된다. 말로는 어려서 부모가 이혼했고 외가 동네에 가서 살았다. 그의 어머니는 늘 생활에 시달렸고 어린 말로에게 따듯한 말이나 사랑을 챙겨주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로는 가끔 만나는 아버지를 나름 자부심을 갖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허황되고 행위가 앞서는 사람이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로의 허언증은 자신의 아버지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채워지지 않은 애정결핍과 자긍심의 부재 때문으로 느껴진다.
실제의 말로는 중국혁명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고백들도 상당수 거짓이라고 한다. 거짓과 사실이 날실과 씨실로 얽혀 있는 말로의 인생. 환한 햇살 속에 빛을 뿜고 있는 모습 뒤로 검은 그림자는 떨쳐지지 않는다. 정치가, 미술사가, 혁명가라는, 타이틀이 무수히 훈장처럼 걸린 대작가의 내면에는 어려서 받지 못한 사랑이 채울 수 없는 공허와 갈증이 되어 안개처럼 깔려있었던 건 아닐까.
<인간의 조건>은 어떤 소설보다 인물들이 행동하는 소설이다. 그러나 그들의 배경엔 언제나 고독과 고뇌가 깊은 상처를 낸 상태에서, 그들은 그에 힘입어 혁명에 정진한다. 기요, 카토프, 첸, 에멜리크...
첸은 장제스가 타지 않은 차에(정보가 없었다. 무리였다) 수류탄을 들고 뛰어든다. 그의 몸은 찢기고 피투성이가 된 채 총으로 자살한다. 기요, 카토프, 촨 등은 잡혀가 함께 죽을 운명에 처한다. 기요는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한다. 카토프는 자신의 바지춤에 보관하던 청산가리를 두 동료에게 나눠주고 불타는 기관차의 보일러 속에 던져지는 운명을 선택한다. 에멜리크는, 이 인물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운명을 증명해준다.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
그 외 인물들, 클라피크 남작은 어지러운 운명 속에서 되는 대로 살던 사람이지만 요행이 그를 파리로 무사히 데려다 준다. 페랄 또한 마찬가지.
운명은 바르고 착한 자의 편에 서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나 혹시 죽음이라는 미지의 존재가 징벌이 아니라 상일지도 모른다고 역설적으로 생각해보자 .잘 모르지만 운명은 간단치 않고 인간의 삶 또한 오묘한 것이니 혹시 내세가 있을 수도 있으니..... 어쩌면 내세라는 인간의 말보다 훨씬 복잡하고 차원 높은 우주의 질서가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니 살아남은 자들이 혹시 징벌을 받는 건 아닐까. 지독하고 순정하지 못한 사람들이 더 잘 사는 세상이 부조리해 보이지만 그들이 과연 은총을 받았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깊이 생각해보면, 사실은 삶과 죽음 어느 것이 더 좋고 무겁다고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기요의 아버지 지조르는 기요의 죽음 후, 가마 화가와 함께 일본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를 기요의 아내였던 메이가 찾아온다. 메이는 혁명가였던, 죽은 기요와 함께 살아가는 일상, 이에 반해 지조르는 이제 기요가 없는 세상에서 다른 희망이 없다. 그저 살아지는 대로 환상과 평화 속에서 살아간다. 동양적 명상이 그에게 남은 삶의 무게를 져 주려한다.
말로의 작품은 사상과 사유가 공기처럼 온 지면을 덮고 작동시킨다. 배울 부분이 많은 수많은 문장들이 많지만 독자로서는 피곤한 것 또한 사실이다. 내 사유가 부족할 때, 다시 한 번 읽을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