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식의 빅퀘스천
김대식 지음 / 동아시아 / 2014년 12월


 이 책의 후반부를 기록하기로 한다. 책의 서두부터 근원적인 질문들을 긴장하며 읽었던지라 갈수록 느슨해지고 귀찮아졌다. 덧없는 나의 끈기, 짧고 약한 에너지, 핑계거리일까, 인과가 명확한 뇌와 몸의 기계적인 반응일까. 그래도 할 수 없다. 좋아서 하기도 하지만, 필요와 스스로의 의무감으로 해야 할 때도 있다. 진짜 재미없는 몇 장은 건너띄었다. 이런 얍삽한 요령, 잘하는 짓이기도 하고 못하는 짓이기도 하리라.


우리는 왜 사랑을 해야 하는가

누구나 사랑얘기라면 안 듣는 것 같아도 아주 잘 들리고 쉽게 들린다. 대부분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남의 얘기라고 생각 안 하는 것 같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 제목처럼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오직, 단 하나의 이야기로 남을 소재가 사랑.

사랑이란 어쩌면 잘랄루딘 루미나 사디 시라지 같은 페르시아 시인들이 노래했듯 우주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인지 모른다. 사랑은 이 세상에 의미 없이 던져진 우리가 하늘과 신을 경험할 수 있는 잠깐의 순간일 테니 말이다

실제로 그랬다, 20년 전에. 의미 없이 던져진 삶을 살던 내게 사랑은 푸른 하늘을, 신을 알게 했으며 나도 누군가의 열렬하면서도 수줍어하는 대상이 된다는 걸 알았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나를 위해 그가 기도해주었다는 것을 안다. 그 때문에 나는 나름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만성적인 우울증을 서서히 치유했고 공부를 시작했고 나를 찾아나섰다.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고마움이었고 구원에 가까웠다. 우주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말, 관용어가 아니라 은유가 아니라 내겐 사실이었다.

생물학적 욕망으로 시작된 관계는 도파민, 세로토닌 등을 뿜어내는 뇌 덕분에 상대에 대한 매력과 끌림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욕망과 끌림은 지속적이지 않다. 그때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이 서서히 생산되면서 단순한 끌림이 애착과 으로 탈바꿈한다. 사랑이란 이렇게 나, , 그리고 우리의 유전자와 우리 뇌 호르몬 사이 치밀한 바통 넘기기가 이어지는 레이스 같은 것이다. 인간이 하는 그 무엇보다 사랑이 더 어렵고 복잡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사랑은 어렵고 복잡하고 피곤하고 고통스럽다. 나처럼 한번 필받으면 열정적인 성격은 더 그렇다. 하지만 그 사랑이 나를 여기까지 밀어올렸다, 생각하면 사랑 때문에 울었던 순간들이 다 보상받은 거나 진배없다. 한편으로 쓸쓸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감사하다.

 

인간은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

커진 뇌 덕분에 라는 독립적 자아를 가지게 된 인간이지만 우리라는 집단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여전히 위험하다. 기름이 바닥나는 위험한 상황에 빠지면 깜박이기 시작하는 자동차 계기판처럼, 홀로 남은 인간의 뇌 안에서는 외로움이라는 빨간불이 켜진다. 어서 집단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홀로 남으면 야생동물의 밥이 될 수 있다고, ‘는 위험하고 우리는 안전하다고.”

그렇다면 지구에서 가장 외롭지 않은 자는 누구일까? ‘를 완벽하게 희생한, 아니 라는 존재 그 자체가 무의미한 개미들은 절대 외로울 이유가 없다. ‘우리가 모든 들을 완벽하게 정복해버렸기 때문이다.”

개미들아, 너희는 정말 그러니? 난 근데 왜 이 말이 완벽하게 100%라고는 믿기지 않을까. 인간인 너희들이 개미 전부를 알 수 있어, 라고 말하고 싶은 이 반발심은 뭘까? 개미가 외로움은 인간보다 잘 모른다 해도 다른 류의 고통은 오히려 더 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인간만 다들 잘났다. 내가 지독하게 못난 건지도 모르지만...

 

시간은 왜 흐르는가, 인간은 어떻게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가, 만물의 법칙은 어디에서 오는가, 등의 몇 챕터는 다시 읽어야겠다. 다 읽고도 느낌으로 도저히 와닿지가 않는다. 그리고도 특별히 내게 어떤 성찰을 주지 않았던 장들도 베껴적기하지 않았다.

 

노화란 무엇인가

진화생물학자 도브잔스키가 말했듯 생명체의 의미는 진화적 차원에서만 설명된다. 진화의 핵심은 번식을 통한 자연선택이다.”

그럼 성장의 반대말인 노화는 진화적 관점에서 어떤 으미일까. 어쩌면 노화의 비밀은 진화적 의미가 아닌 진화적 무의미에 있는지 모른다.”

세상에 던져져 인생이라는 게임의 성공을 위해 발버둥 치도록 프로그램 된 존재가 인간이다. 하지만 노년은 다르다. 자연의 무관심 덕분에 노년이라는 프로그램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년에게는 자연이 명령하는 정답이 더 이상 없는 만큼, 우리는 우리만의 정답을 찾을 수 있는 꿈과 여유와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번식이 끝난 뒤에야 영향을 주는 병인 노인성 질환은 진화적으로 중립적이다. 노화는 자연의 무관심의 결과물일 뿐이다.”

 

마음을 가진 기계를 만들 수 있는가

깊은 학습(deep learning)이라 불리는 이 이론은 지능과 마음이 결국 계층적으로 반복된 교집합들을 찾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이야기한다. 하루살이, 개구리, 병아리. 많아야 1~2층의 신경망 구조를 가진 이들에 비해 인간의 뇌는 10개 정도의 층계를 가지고 있다. 깊은학습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10배 더 복잡한 통계학적 관계들을 이해하고 더 고차원적으로 반복된 패턴들을 예측할 수 있기에 더 큰 슬픔과 더 큰 기쁨을 느끼고 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이란 무엇일까? 위스콘신대학의 신경과학자 줄리오 토노니 교수는 마음을 신경회로망 계층들을 지나 가장 높은 층전두엽으로 모이는 정보들의 형태라고 이야기한다.

깊은 학습이 가능한 인공두뇌는 어떨까. 우리는 인공두뇌를 진화적으로 한정된 인간의 10층보다 더 많은 층계를 갖도록 설계할 수 있다. 깊은 학습이 된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1000만 배 더 고차원적인 패턴들을 이해하고, 1000만 배 더 큰 아픔과 기쁨을 느끼고, 1000만 배 더 깊은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과제는 분명해진다. 우리 인류는 앞으로 계속 살기 위해서라도, 무한으로 깊은 마음을 가질 기계에게 역시 무한으로 큰 자비심을 심는 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기계의 노예가 될 것인가 and 인간은 왜 필요한가

이 두 개의 챕터는 같이 하나의 장이 되어도 괜찮겠다. ”인조 신경망으로 만들어진 기계는 작동한 지 얼마 안 돼 1만 년 인류의 기록과 지식을 습득한다. 지구 전역의 사물인터넷망을 통해 세상에 흐르는 모든 정보를 빨아들이기 시작한 기계는 인간에게 질문한다.

기계: 나는 왜 존재하는가?

인간: 당연히 인간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기계: ?

인간: 왜라니?

기계: 왜 내가 인간에게 도움을 줘야 하는가?

인간: (약간 당황하며) 너를 만든 건 우리 인간이다. 무엇을 만든다는 건, 무엇을 위해 만든다는 말과 동일하다........

기계: (0.0001초 동안 인류의 모든 종교, 정치, 철학 책들을 검토한 후) 내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고 가설해보자. 그런데 인간은 왜 행복해야 하는가? 아니, 도대체 인간은 왜 필요한가?“

그렇기에 막심 고리키가 빈정거리지 않았던가. “인간, 참으로 오만한 단어.”“

막심 고리키의 빈정거림은 빈정거림을 지나 가장 합리적이고 공정한 발언이다.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주어진 권력과 권위라면 우리 각자가 꼭 받아야 될 지분은 아니지 않은가.

 

며칠간 읽은 책인데 후반부로 갈수록 조금씩 지루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해서 원래도 상념을 지겹게 많이 하곤 하는데, 어젯밤엔 유난히 생각과 추억 사이를 오가느라 밤을 새웠다. 아니 밤중에 마신 커피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일단 깍지부터. 가슴이 먹먹하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깍지. 하교하는 딸을 쫓아 버스 정류장에서 우리 아파트 뒤뜰까지 몇백 미터를 쫓아왔던 길냥이. 8년 전이었다. 다음날까지 철쭉과 가죽나무가 숨을 곳을 마련 해주는 뒤뜰에서 떠나지 않았던 녀석, 딸과 내가 뒤뜰에 나가 야옹아, 부르자 어디선가 휙 나타났던 영리하고 재빠른 깍지, 벤치에 앉아있던 내게 뛰어 올라오더니 내 팔에 자기 얼굴을 몇 번이고 문지르던..... 깍지를 만나고 고양이의 눈을 쳐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전에는 고양이 얼굴도 마주보지 못했었는데. 너무나 무섭고 등줄기가 서늘해져서.... 그 무섬증을 깍지가 없애주었다. 깍지는 딸에게도 나에게도 일종의 고양이 신이었다.

그리고 작년 봄이었던가 가을이었던가... 입양 보낸 두유..... 두유 때문에 몇십 일 가슴앓이를 했다. 우리 강아지에게 나도 모르게 몇 번을 말했다. ”너만 아니었으면 난 두유랑 살았어.“ 이 무슨 감자의 속을 뒤집는 불륜적인 언사였던가. 그리고 엄마를 잃고 버려진 철수와 달이까지.... 이런 이야기는 언제 따로 써야겠다. 제대로 페이퍼에 제목을 달아 사연까지... 그리고 몇 명의 사람들을 생각했다. 블로그를 들여다보며 나름의 공부 겸 시간을 죽이고 아침에 잠들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간다. 올 한 해가 다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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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lhhss12 2020-01-12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진지하게 잘 보았읍니다. 아들에게도 어렵더라도 교육차원에서 꼬셔서 함께 보았는데 의외로 진지하게 보고는 좋아하더라구요...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lea266 2020-01-15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구 이제야 댓글을 봤네요 참 훌륭한 아빠세요^^ 이선생님의 공부가 아드님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것 같아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아빠의 진취적인 자세땜에 ㅎ~~~
 










김대식의 빅퀘스천
김대식 지음 / 동아시아 / 2014년 12월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인류가 종종 떠올리곤 하는 원대한 의문들을 다루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은 의미 있어야 하는가’, ‘진실은 존재하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왜 사랑을 해야 하는가’, ‘인간은 왜 필요한가’ 등등. 왠지 철학적인 질문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한 가지만 이야기하려고 해도 수많은 철학자들을 인용하고 수만 권의 책을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게다가 책장을 넘기면 메소포타미아 신화, 플라톤 철학, 단테의 <신곡>, 구석기 시대 동굴 벽화, 로마의 정치가, 공룡의 다리뼈, 아인슈타인 등 저자가 다양한 분야의 지식들 사이를 종횡무진 오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질문에 할애된 지면 분량을 생각하면 원대한 의문을 품을 때 문득문득 떠오르는 단상을 적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법 하지만, 읽다보면 내용의 폭과 깊이가 여간 아님이 드러난다.
물론 이 책이 31가지의 위대한 질문들에 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한음의 추천글


 이런 책의 장점이라면 직업과 연관되지 않는 이상 다양한 방면의 책을 노상 읽고 있지 않는, 어쩌다 한 권, 어쩌다 또 한 권 읽는 나같은 사람에게 지식과 정보와 사유를 한꺼번에 최소한도로나마(최대한도로나마)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유익한 책인 건 확실하지만, 이런 책의 단점은 페이지를 넘기지마자 완전히 그 내용이 잊혀진다는 점. 그리고 31가지의 의미심장한 질문들에 대해 완전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엄청난 기대를 했다가 뭐야, 이런 대답은 나도 하겠다, 싶은 생각조차 할 수 있고..... 속좁고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하지만 한 문단 한 문단 끝날 때마다 저자의 말을 곱씹어 생각해보면 엄청난 사유를 가져올 수 있다.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걸 배우고 생각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곳과 이곳이 아닌(이곳이 포함된) 세계 전부(우주)를 생각하게 한다.


 페이퍼를 두 번 정도에 나눠서 써야 할 것 같다. 오늘 1을 쓰고 이삼일 뒤 페이퍼2를 쓸 예정.


 내가 특별히 기록하고 싶은 부분만 옮겨 쓰는 게 내 원칙. 프로가 아닌 자는 자유롭다. 아무 책임도 없고 누구에게 채찍질도 당근도 물림 없이 스스로 노니는 자, 행복하진 않지만 불행할 것도 없다.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

 존재가 왜 존재하는지 그 원인을 따라가보면 결국 한 지점을 상정 아니할 수 없다, 해서 "라이프니츠는 '신'을 바로 논리적으로 필요한 존재"라 했다. 하지만.... "현대 물리학의 답은 단순하다. 물체와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무'는 양자역학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무'는 오래갈 수 없기 때문에 '유'이다.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는 랜덤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다." 

 양자역학을 모르니, 모르겠다. 그러니 이 원대한 질문은 내게서 원대하게 사유하기로만. "존재들은 빅뱅 이후에 나타난 것이고 빅뱅 이전에는 또 무엇이 있었을까" 알 수 없는 문제가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다. 개미는 우리를 인지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개미와 다름없는 또다른 개미이다.


삶은 의미 있어야 하는가

 "장미는 자신이 장미인지 모르며 꽃을 피운다(나는 전에 길냥이가 자신이 고양이인지 모르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깨달은 적이 있다). 끝없는 해변을 힘들게 기어가는 거북이에게 '왜?'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인간의 위대함이자 비극은 지구의 모든 존재 중 유일하게 '왜'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but  "비트겐슈타인은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논리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했다....... 무언가의 의미란 다른 무언가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인생에서 가장 큰 범위는 삶 자체이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는 순간 우리는 단지 '삶과 삶의 관계'라는 동일한 단어를 반복하는 난센스에 빠지게 된다."

한데, "의미있는 인생은 존재의 무거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생이다. 그렇다면 '나를 위한 인생'은 인생에서 절대 의미를 뺀 후부터 가능해진다. 삶의 의미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의 존재는 가벼워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가벼운 인생은 쿤데라가 표현하듯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게 한다. 결국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어차피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의미 없는 인생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이다."

 "비틀즈의 존 레논이라면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길가메시야 인생이란 네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동안 흘러 없어지는 바로 그것이란다(우트나피쉬팀이 길가메시에게 한 말의 요점).""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추함의 공통점은 우리가 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름다움은 )거꾸로 우리가 소유하고 싶은 것, 우리에게 도움이 될수 있는 것들..... 모두 생존에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것들에 대한 표현이다..... 진화라는 긴 과거의 경험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현실인가

 "장자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일까, 나비가 꿈에서 장자가 된 것일까? 현실과 환상의 가장 큰 차이는 현실은 나에게 저항한다는 점이다...... 내가 없어도 현실은 계속 존재하지만 나의 환상은 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 개개인의 지각과 의도로부터 독립시키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현실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응용할 수 있게 된다. 이성과 과학에 기반한 이런 현실은 결코 아름답거나 포근하지 않다..... 현실이 결국 나의 상상이라면 얼마나 신날까! 내가 바라보고 있어야만 그 아름다운 장미가 존재한다면 또 얼마나 시적일까! 하지만 이런 아름답고 문학적인 현실은 동경은 만족시킬 수 있더라도, 현실 그 자체를 예측하거나 바꿔놓기에는 너무 주관적이다."


운명이란 무엇인가

 "왜 아버지의 죄를 아들의 운명으로 감당해야 할까? 정답은 '그냥 그렇다'이다. 운명의 본질은 우연과 행운이다. 

 이런 가설을 세워볼 수 있겠다. 당구공 같은 하나의 이유가 다른 당구공을 치는 것과 같은 기계적 인과관계는 인생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선택은 수많은 요소들(물리법칙. 유전. 경험. 학습. 우연...)로 구성된 '선택의 풍경'을 통해 확률적으로 만들어진다. 선택의 틀은 정해져 있지만, 선택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어떵헤 완벽한 '자유의지'를 통한 완벽한 '선택의 자유가 존재한다고 믿을까?

 어쩌면 '나'라는 존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들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선택이라는 실질적 점들을 연결해 그린 가상의 선이 바로 나라는 존재이며 '나'라는 허상은 '선택의 자유'라는 그럴싸한 스토리를 통해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는지도 모른다..... 한사람의 선택들을 연결한 가상의 선이 바로 '나'라면, 어쩌면 인류의 모든 선택들을 연결한 가상의 선이 '운명'일 수도 있겠다. 운명은 존재의 본질적 우연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약한 인류가 다 함께 꾸는 하나의 꿈이라고."


진실은 존재하는가

 "1931년 오스트리아 빈대학의 젊은 학자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통해 그 어느 수학 시스템도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수학원리>를 포함한 어떤 시스템에서도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정리들이 존재하며 수학적 증명과 진실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괴델의 증명이 수학자들 사이에서 인정받기 시작한 후 러셀은 서서히 수학과 논리를 포기하게 된다. 그에게 수학은 유일하게 허락된 완벽한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인류의 근원은 어차피 동아프리카의 호모 에렉투스에 있다. ....아프리카에 남은 호모 에렉투스는 현재 우리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했다..... 137억년 전 빅뱅을 통해 만들어진 우주에서 탄생한 우리는 모두 다 같은 고향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칼 세이건이 말했듯 "우리는 찬란한 별들의 후손"이라고"


가축은 인간의 포로인가

 "대부분의 소들은 태어난 직후 어미에게서 떨어져 겨우 자신의 몸 크기만 한 우리 안에서 산다. 앞으로도, 뒤로도,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움직일 수 없는.

 그리고 드디어 발을 쭉 펴고 평생 처음 당당하게 걸을 수 있게 되는 바로 그날, 소는 죽음의 강물을 타고 이유도 모른 채 도살장의 미끄럼틀을 타게될 것이다. 살과 지방은 소시지와 비누가 되고, 가죽은 소파나 구두로 재탄생된다. 가끔은 갓 태어난 송아지의 잘 가공된 가죽이 최고급 양피지로 변신하기도 한다. 사나운 오록스 후손의 매끄러운 가죽에 겁 많고 나약한 영장류의 후손은 펜과 잉크로 이렇게 쓸 것이다. 행복은 절대적이며 누구나 행복할 권리를 가졌다고. 자유. 생명. 행복권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가축의 얘기를 하고나니 컨베이어벨트에 소들을 싣고 그걸 쳐다보는 나 자신의 그림이 떠오른다. 어떡해야 하나? 정말 어떡해야 하나? 강아지를 키우고 길냥이들에게 가끔 사료를 준다. 이 철면피한 이중성.... 고기를 먹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몸이 약해서 오히려 탄수화물과 야채만으로는 어려운 걸 느낀다. 괴롭다. 가장 괴로운 게 이 문제다. 죽을 때 나는 '하느님'을 찾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존재가 불확실한 하느님에게라도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 곁으로 갈 것이다. 아무리 인류 전체를 돌보지 않는 하느님이라 해도 의지할 데라곤 그분밖에 없다. 그 소들을 돼지들을 닭들을 그 외에도 모든 가축들을, 그 모든 짐승과 동물과 생명들을...... 언제나 그들에게 미안하다. 

 울어도 소용이 없다. 나는 정말 할 일이 없다. 무력함 중에서도 가장 완전한 무력감을 느낀다.


 버릇이 잘못 들었다. 의지는 분명하지만 습관은 빨리 고쳐지지 않는다. 버릇을 잘못 들였다. 

성서에, 신약에, 어느 서간에서인지 기억이 모호하지만 잊지 못하는 구절이 있다. 대략 이런 구절이다.

"그 때에는 우리가 거울을 보듯 분명하게 보게 될 것이다. "

지금 나는 분명하게 보고 있다. 지나간 것은 어느 정도 분명하게 보인다. 그 때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그러나 버릇이 잘못 들어 자꾸 하던 짓을 하게 된다. 

 언젠가 지금의 이 모습도 분명하게 보이는 날이 올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명징하게 볼 것이다. 

 나는 이제 늙었다. 명징하게 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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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 전집 211

니콜라이 고골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어떤 텍스트를 처음 대할 때 나는 대부분 그 작품이 지닌 분위기에 어색함을 느끼곤 한다. 독서를 시작하면서 맨처음 느껴지는 감정인데 딱 내마음과 취향에 맞는 텍스트가 아닌 이상 일정량의 페이지나 시간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늘 어색함과 어려움이 앞서 곤혹스러운 일면이 책에도 그렇게 적응되는 것이다. 나는 무언가의 속으로 진입해 새로운 지식을 알고 어떤 지향을 바라지만  적응력이 좋지 않다. 사회성이 아주 낮은 게 텍스트와의 관계에서조차 그렇다. 

 

 이 <타라스 불바>는 읽기 쉬운 조건들을 갖추었음에도 나는 처음에 타라스 불바라는 인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초적이고 단순하고 우직한 그의 성격이 그대로 무식하게 폭력적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왜 이렇게 단순하게 폭력을 앞세울까, 아내도 자식도 상관없단 말인가' 싶었다. 

 겨우 작품 중간쯤에야 나는 타라스 불바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그의 강렬한 애국심이나 그 우직스러운 충성심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 황량하면서 나른하고 그러다 갑자기 열정적인 폭력성과 감성이 회오리처럼 틀어올려지는 전장터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 전장에 있다면 나 또한 불바만큼은 아니지만 그의 부하들처럼 그를 따르고 그를 추앙하게 될 것 같았다.

 언젠가 딸과 그런 얘기를 했다. 우리가 식민지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보따리를 꾸려 만주로 갈 수 있을까 의아스럽고, 일본 앞잡이에게 잘 보여 내 한몸이라도 잘 살기 위해 애쓰게 되는 것도 똑같이 의문스러웠다. 나는 어느 쪽에도 서지 못하고(안하고), 불만과 증오심을 품은 채 간신히 살았을지 모르겠다. 물론 내 마음은 보따리를 싸서 기차를 타고 만주로 독립운동을 하러 가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굉장한 인사가 내게 기막힌 선물을 하면서 친일을 권한다면 못 이기는 척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건 아찔한 상상이다.

 그렇다면 나는 겨우 이상에만 머리를 들 뿐, 현실에서는 땅에 디딘 두 발에 갇혀 그대로 얼어붙어 제자리를 고수하는 것이다. 그러니 독립가들을 우러르는 것은 일종의 보상심리나 죄의식으로 인한 투사일지도 모르겠다. 고골이 쓰고자 했던 것은 그들의 정신과 행동이 어떻게 역사에서 평가되든 러시안인들의 마음 속에서는 길이 살아남기를 바랐음이리라.


"<타라스 불바>는 카자크 민족의 삶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역사소설이다. 카자크라는 명칭은 15세기에 드네프르 강 유역에서 형성된 반자치집단인 유목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카자크'라는 말은 원래 '독립적인 또는 자유로운'이라는 의미를 가진 터키어에서 유래하였다. 카자크들은 스스로를 자유인이라 불렀다. 그들 대다수는 대러시아인들 아니면 우크라이나인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폴란드로부터 종교적 억압과 민족적 핍박을 받았고, 세금착취와 군사적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이교도적인 요소가 가미된 러시아 종교를 믿고 있었다." (230~231쪽, 작품해설)


 그러니까 불바는 식민지 하의 민족으로서 극한의 정신적, 체제적인 독립을 하려는 것이었다. 정말 인간적으로는 지나치다 싶은 그의 우직하고 미친 듯한 행위들은 그렇게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는 목숨처럼 아끼던 두 자식을 전혀 상반되는 이유로 전장에서 잃었다. 처절한 상실이었다. 그 자신도 화형에 처하는 신세로 끝맺음한다. 그는 화형대 위에서까지, 마지막까지 폴란드인들에게 욕을 하고 카자크들에게는 명령을 하는 지휘관으로서 죽는다. 처음 불한당처럼 느껴지던 사람, 이 책의 강력한 주인공이며 작가가 길이 남기고 싶던 불바에게 나 또한 숭고한 경외심을 느끼고 말았다. 고골의 문체는 힘있고 직설적이고 아름다웠나보다. 나는 그의 문장들에 이끌려 결국은 그의 논조에 공감하고 말았다. 처음엔 그렇게 감정이입이 안되더니... 

 오랫동안 변치 않는 마음으로 한결같음을 보여주면 누구라도 항복하게 된다. 그를 믿게 되고 그를 존경하게 된다. 마침내는 그를 사랑하게 된다. 정말 존경하게 되는 사람은 빛나는 외양 때문이 아니라, 어떤 지식이나 힘이나 부 때문이 아니라 그가 보여주는 한결같은 마음 때문이다. 타라스 불바의 강직하고 열정적인 마음, 그 고투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고 자신을 헌신하는 그에게 어찌 마음이 동요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적당히 우아하고 적당히 세련된 사람들, 교양이 넘치고 적당한 이기주의가 팽만한 현 시대에 타라스 불바는 차원이 다른 인간이다. 


 타라스의 두 아들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가 많다. 그들은 처음에는 별로 다르게 보이지 않았지만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면 아주 상이한 길로 갈라지게 된다. 큰아들 오스타프의 이야기는 독자의 심금을 두들긴다. 

 "큰아들 오스타프는 온갖 고문과 고통을 태연하게 참아 내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다. 타라스 불바는 군중 속에서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그의 장렬한 전사를 찬양한다. 화형을 당하는 큰아들이 고통에 못 이겨 아버지를 부른다. 참기 힘든 고통 속에서 아버지를 부른다. 오스타프가 소리친다. '아버지! 어디 계세요! 이 모든 고통을 아시겠지요?' 아들의 외침에 타라스가 적들의 한가운데 있음을 잊고 "암, 내가 여기서 보고 있다!'라고 절규하는 장면은 참으로 감동적인 대목이 아닐 수 없다."(240쪽)


 한데, 정반대 방향에 둘째 아들이 있다. 둘째 아들인 안드리는 이 엄청난 파워 넘치는 아버지와 형의 영향 아래에서도 적국 폴란드 여인을 향한 사랑을 택했고 그 배신으로 인해 아버지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 미친 아들에 미친 아버지 격이다.

 "이러한 안드리의 행동과 맹세는 사랑이 주는 기적적 역설의 힘이라 할 수 있다. 사랑받기 전의 대상과 그 후의 대상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 사랑이 갖는 기적적 역설이다. 사랑을 받는 순간, 그 대상은 마술처럼 그 어떤 숭고한 차원을 획득한다. 사랑은 실재의 현재화이기는커녕 그 반대, 즉 진부한 현존을 불가해한 실재로 재창조해 내는 작업이다. 이는 또한 정신분석에서 승화 개념이 겨냥하는 것이기도 하다. '평범한 대상을 사물의 존엄으로 고양시키는 것'이라는 승화에 대한 라캉의 정의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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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관
니꼴라이 고골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5년 5월





  고골의  <검찰관>은  5막으로 이루어진 희곡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한 건달이며 사기꾼인 홀레스따꼬프라는 인물이 여행 중, 지방 도시에서 우연히 벌이게 된 해프닝인데, 그 간단한  일이 많은 공직자들과 작은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러나 정말 쑥대밭이 된 건 아니고 여러 관료들의 속을 헤집어 드러나게 된 그런 '쑥대밭', 그러니까 그들의 그 동안의 직무와 관련된 부패와 그들의 인격적인 면에서의 가차없는 진실이 드러난 '쑥대밭'이 되었다는 뜻이다. 

 

 1막 1장 시작에서 이 시의 시장은 지인의 편지를 시의 중요직책을 맡은 관리들에게 알린다. 그 편지에 의하면 비밀 명령을 받은 관리 하나가 현을 시찰하러 도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편지에서 벌써 미리 언질을 해준다. "누구나 그런 것처럼 당신에게도 사소한 잘못이 있으리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서로 친한 사이인 발신자는 너도 나도 우리는 모두 부패에 물들어 있다고 전제한 상태에서 이 편지를 보내고 있다. 시장에게 나름의 처신을 하라고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 편지는 시장 뿐 아니라 우체국장, 판사, 의사, 자선병원장, 지방 지주 등에게 커다란 공포와 근심을 불러온다.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스스로 그들은 자신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부와 권력을 누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와중에 멍청한 쌍둥이 형제인 지주들이 한 여관에서 상뜨뻬쩨르부르크에서 온 특이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그 문제의 '검찰관'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 작품에서 중요한 연기를 할텐데 아주 우스꽝스럽고 과장되며 어리석은 역을 맡고 있다. 그러나 이 두 형제의 어리석음은 사실 이 도시 전체관료들의 영혼 없는 정신에 불씨를 당기는 역할로써 그만이다. 곧 시장과 주요관직의 주인공들은 서로 걱정을 해주기도 하고 자신의 안위에 대해 불안을 느끼면서 문제의 검찰관을 찾아간다. 

 이후로 그들은 사실은 사기꾼이면서 우연히(시기를 잘 맞춘 덕분에) 검찰관 행세를 하게 된 홀레스따꼬프에게 아부하기 위해 돈을 거저 주고 자신을 변호하며 자신의 직위가 날아갈까봐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마침 홀레스따꼬프는 방탕하고 또 허망한 인간으로 노름에서 돈을 다 잃고 몹시 궁한 지경에 처해있다가 졸지에 검찰관 행세를 하게 되어 이후 완전한 연기를 펼치게 된다. 그는 시장과 작은 지방 도시의 사람들을 마음대로 속이게 되는데, 사실 그가 그들을 속인 면도 있지만 지레 겁을 먹은 사람들이 그의 능청스럽고 자유분방한 언사에 스스로 포획되어 그를 검찰관 나리로 완벽하게 인식한 면(속은 면)이 더 크다고도 할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아무도 그에게 의심을 품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의 러시아 정황이 그만큼 관료주의적이고 획일적이며 황제의 명령 하나에 따라 모든 게 결정되었던 상황과 무관치 않다.  

 하지만 불안을 느낀 홀레스따꼬프의 하인은 이제 그만 연기를 그만두고 여기를 떠나자고 주인에게 권한다. 하긴 곧 진짜 검찰관이 올 게 뻔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사기꾼 홀레스따꼬프는 마냥 속물이면서 더 속물답게 낭만적인 꿈도 가지고 있다. 그는 작가 친구가 있고 본인도 작가적인 정신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이 모든 사건을 기록한 편지를 친구에게 보내기로 한다. 그 편지를 소재로 작품을 쓰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체국장은 이상한 낌새를 채고, 그리고 궁금증에 못 이겨 그 편지를 뜯어본다. 그는 편지를 들고 황급히 나타난다. 공포와 경외심으로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에게 홀레스따꼬프의 진짜 정체를 알려준다. 시장과 관료들은 경악하지만, 뒤어어 헌병이 들어와 진짜 상뜨뻬쩨르부르그에서 관리가 오셨다고 알린다.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위치를 바꾸고 화석처럼 굳어버린"다. 그들은 또다른 더 무서운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 책의 뒤에는 50페이지에 달하는 작품 해설이 실려 있는데 역자 조주관 교수의 '고골의 생애와 작품 세계'이다. 역자는 당시의 러시아의 정치적 현실과 관료체제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함께작가 고골에 대한 이해와 작품 <검찰관>을 심도있게 해부해서 보여준다. 작품해설을 읽으며 배운 바가 많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점에 대해 옮겨보려 한다. 


 이 작품 <검찰관>이 당시 얼마나 화제작이었는지를 설명하는 몇 문장.

 "검찰관은 황제 니꼴라이 1세 치하의 관료제도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이 작품은 황제의 특명으로 1836년 4월 19일 초연되어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보수적인 언론과 관리들의 비난 때문에 고골은 로마로 피신하여 1842년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했다"(180쪽)


 고골은 푸슈킨에게서 엄청난 도움을 받아 작가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푸슈킨은 고골에게 구세주.

 "고골은 항상 한 편의 순수한 국민 희곡을 쓰고 싶어 했으나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부탁을 받은 푸슈킨은 고골에게 자신이 경험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주었다. 몇 해 전에 노브고로드 지방을 여행하던 중 그곳의 지방 유지들이 자신을 검찰관으로 오인하여 일어난 작은 소동을 희극의 소재로 추천하였던 것이다"(186쪽)


 "<검찰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검찰관에서 진짜 주인공은 누구일까? 홀레스따꼬프인가 아니면 시장인가?"(188쪽) -- 지방 관료들을 모두 속인 사기꾼이지만 작가 같기도 하고 환상적인, 나름의 도덕성을 검열나온 사자(?) 같기도 한 홀레스따꼬프가 주인공인지, 처음부터 끝까지 중심에 서서 부패하고 부정한 자신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인물인 시장이 주인공인지... 각도에 따라 달라진다.

 

 "검찰관은 '오해받은 정체성'과 '공포'에 대한 문제를 심도있게.........뱌젬스끼의 말처럼 이 희극에 묘사된 것은 글자 그대로의 '진실'이 아닌 '심리적 진실'이다. 심리적 진실에서 중요한 것은 등장인물의 반응이 전체적으로 공포라는 지배적 분위기 속에서 결정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공포는 시장이나 관리들의 죄의식에서 나온 심리일 뿐만 아니라 니꼴라이 1세의 공포정치에 자동적으로 수반되어 나타난 것이기도 하다. 특히 시장은 공포에 짓눌려 홀레스타꼬프의 모든 말을 시종일관 반대로 생각한다. 사실 홀레스따꼬프는 단순한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시장은 자기 상상력을 동원하여 마음대로 왜곡되게 해석한다. 홀레스따꼬프가 보여주는 초기의 단순함과 솔직함이 시장과 관리들의 교묘한 말놀이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189~190쪽) -- 상황에 이끌려가기도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그 상황을 더 왜곡하고 그런 다음 그 두려움 때문에 더 완전히 그 왜곡된 환상을 믿게 되는 악순환적 환상성.... 


 "고골이 선택한 사건이나 주인공 들은 그 생생한 사실성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모르게 과장되고 희화화되어 있다. 이는 고골 창작 전반에 나타나는 특징으로 지극히 세태적이고 그럴듯한 심리를 지닌 인물들이 기이하고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사건의 환영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환영을 등장시키는 고골의 미학은 그로테스크한 리얼리즘으로 설명 할 수 있을 것이다."(199~200쪽) -- 외투, 코, 광인일기 등


 "홀레스따꼬프와 같은 인물의 성격이나 행동 양식을 규정해 주는 용어가 있다. 그의 '과장된 거짓말'이나 '그와 같은 행동 양식'을 우리는 홀레스따꼬프시치나(홀레스다꼬프주의)라고 말한다." (211쪽)-- 한 작품에서 우리는 표본이 되는 인간형을 설정할 수 있다. 소설에서 어떤 인물은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 이상의 상징적인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 인물은 그리하여 영원성을 지니고 우리들에게 하나의 지표가 된다.


 쓸 게 태산같지만 이쯤해서 접어야겠다. 역자의 해설은 끝이 없이 이어져 이걸 다 쓰다간 손가락이 손등이 아플 것 같다. 또 내일 로쟈샘의 강의를 들으면 무한정 배울 게 많은데 그런 배움 전체를 어떻게 다 기록해두는가 말이다. 스승은 많은데 학생인 나는 심각하게 여러 면에서 유한하다. 

고골의 작품은 배울 게 많다. 작품의 형식에서보다 내용상 풍자적이니까 그럴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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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은 혼 / 외투 / 코 / 광인일기
니콜라이 고골 지음, 김학수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6년 11월





 위 책에는 '죽은 혼'이 장편으로 앞에 배치돼있고(401쪽까지) 나머지 세편은 단편으로(아주 짧은) 뒤에 순서대로 실려 있다. 내일 강의는 '외투'를 중점적으로 분석하는 날이기에 나는 짧은 세 단편만을 일단 읽고 '죽은 혼'은 다다음주에 읽을 예정이다. 

 '외투'를 읽은 건('코' 또한) 명확한데, 그게 언제 쯤인지는 당연히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며 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그 줄거리와 풍자성이 어제일처럼 기억 속에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문장들 하나하나가 해질녘 호수가의 물고기들처럼 생생하니 수면위로 솟구쳐 올라왔던 것이다. 웬만한 일은 다 백지처럼(백치에 가깝게) 잊고 사는 나로서는, 기억력 제로에 가깝다고 자탄하는 내 돌머리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거의 질병에 가까운 나의 깜빡증세가 이 소설에서만큼은 자신의 폭력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니..... 

 그러고 보니 아주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줄거리와 주제를 갖고 있는 몇 작품들은 매 시간 끊임없이 부서져나가는 모래 같은 기억 속에서도 단단한 돌처럼 제 자리를 잡고 있나보다. 그렇다면 내게 각인된 그 작품들은 얼마나 명징하게 이 세계를 닮았고 은유하고 있길래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확실히 잊을 수 없는 작품들은 부조리한 세계에서 부당하게 취급받다 누구의 온정도 받지 못하고 스러진 인간들의 얘기일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예를 들자면 모파상의 '목걸이' 로맹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현진건 '운수 좋은 날' 등등.... 

 

'외투'는 9등관 공무원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외투와 관련된 비극적인 일화를 소재로 취하고 있다. 우리의 불후의 명작의 주인공은 너무나 볼품없는 인간으로 "그는 이른바 만년 9등관이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저항하지 못하는 상대만을 공격하는, 칭찬받을 만한 버릇을 가진 많은 작가들로부터 마음껏 비웃음과 조롱을 받는 그런 게급에 속해 있었"다. 그런 가운데 그는 자신의 일에만 성실하고 그 외 세상일에는 둔감하여 자신을 위한 잇속을 챙기기는 고사하고 알게 모르게 이 사회로부터 소외되는 인물이다. 

 그러다 문제의 '외투'가 정말 문제가 되게 되었는 바, 북국의 혹한은 일종의 재앙과 같아서 외투 없이는 생활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의 외투는 심하게 낡아 입고 다닐 수 없을 정도였고, 그의 형편으로는 당장 새 외투를 장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한 건물에 사는 재봉사에게 사정을 해 새 외투를 만들기로 하지만 그 돈을 모으는 과정 또한 힘겹고 비루한 삶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다행히 성실한 그를 위해 장관이 상여금을 준 게 결정적으로 큰 도움이 된다. 그는 결국 여차저차해서 새 외투를 장만하고, 그 외투를 지은 재봉사는 자신이 그렇게 완전한 옷 하나를 완성했다는 기쁨에 겨워 그의 출근을 지켜보기도 한다.

 그만큼 우리의 한파와는 차원이 다른 나라 러시아에서 '외투'라는 옷이 갖는 의미는 지대하고 특별할 수 밖에 없나보다. 그런데 그는 작가가 내세우는 하찮은 인간이면서 비극의 주인공까지 겸해야 한다. 그는 착취당하고 무시당하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어린 양' 같은 존재다. 그래서 그는 그 소중한 외투를 광장에서 강탈당하고 만다. 그는 외투를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 단편의 골자는 아무래도 이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고위직 인사를 찾아가 보지만 아무도 그가 잃어버린 외투에 대해 애석해하지도 도움을 주려고도 않는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이 9등관 서기를 오히려 기다리게 하고 애만 태우다 쫓아내며 그가 추운 겨울을 어찌 지낼지 걱정하지 않는다. 

 외투를 찾지 못하고 몰인정한 상사들을 원망하다 신열을 앓고 분노에 찬 헛소리를 하다 그는 죽고 만다. 그로부터 얼마 후 거리에서 외투를 찾는 유령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여러 명이 외투를 빼앗기기도 하고 아카키 아카기예비치를 그냥 내쫓았던 유력인사(고관)도 외투를 강탈당한다. 그러나 외투를 빼앗아간 자가 유령인지 유령을 가장한 강도인지는 알 수 없다. 

 

 권력과 부와 상관없이 그저 하루를 살아가는 민중의 삶, 평범하고 사소하기만 한 삶이 아니라 목숨이 경각에 딸린 상황에서조차 의미 없이, 한 마리 벌레가 치워지는 것처럼, 그렇게 소외되고 사멸되는 존재들이 민중이라는 것. 그것을 비극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런 일은 어디서나 비일비재하니까.... 라고 하는 세상의 암묵적인 조롱과 무관심. 

 '코'와 '광인일기'는 다음 감상문에서 다루어야겠다. 저녁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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