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의 빅퀘스천
김대식 지음 / 동아시아 / 2014년 12월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인류가 종종 떠올리곤 하는 원대한 의문들을 다루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은 의미 있어야 하는가’, ‘진실은 존재하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왜 사랑을 해야 하는가’, ‘인간은 왜 필요한가’ 등등. 왠지 철학적인 질문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한 가지만 이야기하려고 해도 수많은 철학자들을 인용하고 수만 권의 책을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게다가 책장을 넘기면 메소포타미아 신화, 플라톤 철학, 단테의 <신곡>, 구석기 시대 동굴 벽화, 로마의 정치가, 공룡의 다리뼈, 아인슈타인 등 저자가 다양한 분야의 지식들 사이를 종횡무진 오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질문에 할애된 지면 분량을 생각하면 원대한 의문을 품을 때 문득문득 떠오르는 단상을 적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법 하지만, 읽다보면 내용의 폭과 깊이가 여간 아님이 드러난다.
물론 이 책이 31가지의 위대한 질문들에 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한음의 추천글
이런 책의 장점이라면 직업과 연관되지 않는 이상 다양한 방면의 책을 노상 읽고 있지 않는, 어쩌다 한 권, 어쩌다 또 한 권 읽는 나같은 사람에게 지식과 정보와 사유를 한꺼번에 최소한도로나마(최대한도로나마)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유익한 책인 건 확실하지만, 이런 책의 단점은 페이지를 넘기지마자 완전히 그 내용이 잊혀진다는 점. 그리고 31가지의 의미심장한 질문들에 대해 완전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엄청난 기대를 했다가 뭐야, 이런 대답은 나도 하겠다, 싶은 생각조차 할 수 있고..... 속좁고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하지만 한 문단 한 문단 끝날 때마다 저자의 말을 곱씹어 생각해보면 엄청난 사유를 가져올 수 있다.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걸 배우고 생각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곳과 이곳이 아닌(이곳이 포함된) 세계 전부(우주)를 생각하게 한다.
페이퍼를 두 번 정도에 나눠서 써야 할 것 같다. 오늘 1을 쓰고 이삼일 뒤 페이퍼2를 쓸 예정.
내가 특별히 기록하고 싶은 부분만 옮겨 쓰는 게 내 원칙. 프로가 아닌 자는 자유롭다. 아무 책임도 없고 누구에게 채찍질도 당근도 물림 없이 스스로 노니는 자, 행복하진 않지만 불행할 것도 없다.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
존재가 왜 존재하는지 그 원인을 따라가보면 결국 한 지점을 상정 아니할 수 없다, 해서 "라이프니츠는 '신'을 바로 논리적으로 필요한 존재"라 했다. 하지만.... "현대 물리학의 답은 단순하다. 물체와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무'는 양자역학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무'는 오래갈 수 없기 때문에 '유'이다.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는 랜덤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다."
양자역학을 모르니, 모르겠다. 그러니 이 원대한 질문은 내게서 원대하게 사유하기로만. "존재들은 빅뱅 이후에 나타난 것이고 빅뱅 이전에는 또 무엇이 있었을까" 알 수 없는 문제가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다. 개미는 우리를 인지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개미와 다름없는 또다른 개미이다.
삶은 의미 있어야 하는가
"장미는 자신이 장미인지 모르며 꽃을 피운다(나는 전에 길냥이가 자신이 고양이인지 모르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깨달은 적이 있다). 끝없는 해변을 힘들게 기어가는 거북이에게 '왜?'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인간의 위대함이자 비극은 지구의 모든 존재 중 유일하게 '왜'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but "비트겐슈타인은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논리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했다....... 무언가의 의미란 다른 무언가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인생에서 가장 큰 범위는 삶 자체이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는 순간 우리는 단지 '삶과 삶의 관계'라는 동일한 단어를 반복하는 난센스에 빠지게 된다."
한데, "의미있는 인생은 존재의 무거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생이다. 그렇다면 '나를 위한 인생'은 인생에서 절대 의미를 뺀 후부터 가능해진다. 삶의 의미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의 존재는 가벼워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가벼운 인생은 쿤데라가 표현하듯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게 한다. 결국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어차피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의미 없는 인생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이다."
"비틀즈의 존 레논이라면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길가메시야 인생이란 네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동안 흘러 없어지는 바로 그것이란다(우트나피쉬팀이 길가메시에게 한 말의 요점).""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추함의 공통점은 우리가 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름다움은 )거꾸로 우리가 소유하고 싶은 것, 우리에게 도움이 될수 있는 것들..... 모두 생존에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것들에 대한 표현이다..... 진화라는 긴 과거의 경험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현실인가
"장자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일까, 나비가 꿈에서 장자가 된 것일까? 현실과 환상의 가장 큰 차이는 현실은 나에게 저항한다는 점이다...... 내가 없어도 현실은 계속 존재하지만 나의 환상은 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 개개인의 지각과 의도로부터 독립시키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현실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응용할 수 있게 된다. 이성과 과학에 기반한 이런 현실은 결코 아름답거나 포근하지 않다..... 현실이 결국 나의 상상이라면 얼마나 신날까! 내가 바라보고 있어야만 그 아름다운 장미가 존재한다면 또 얼마나 시적일까! 하지만 이런 아름답고 문학적인 현실은 동경은 만족시킬 수 있더라도, 현실 그 자체를 예측하거나 바꿔놓기에는 너무 주관적이다."
운명이란 무엇인가
"왜 아버지의 죄를 아들의 운명으로 감당해야 할까? 정답은 '그냥 그렇다'이다. 운명의 본질은 우연과 행운이다.
이런 가설을 세워볼 수 있겠다. 당구공 같은 하나의 이유가 다른 당구공을 치는 것과 같은 기계적 인과관계는 인생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선택은 수많은 요소들(물리법칙. 유전. 경험. 학습. 우연...)로 구성된 '선택의 풍경'을 통해 확률적으로 만들어진다. 선택의 틀은 정해져 있지만, 선택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어떵헤 완벽한 '자유의지'를 통한 완벽한 '선택의 자유가 존재한다고 믿을까?
어쩌면 '나'라는 존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들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선택이라는 실질적 점들을 연결해 그린 가상의 선이 바로 나라는 존재이며 '나'라는 허상은 '선택의 자유'라는 그럴싸한 스토리를 통해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는지도 모른다..... 한사람의 선택들을 연결한 가상의 선이 바로 '나'라면, 어쩌면 인류의 모든 선택들을 연결한 가상의 선이 '운명'일 수도 있겠다. 운명은 존재의 본질적 우연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약한 인류가 다 함께 꾸는 하나의 꿈이라고."
진실은 존재하는가
"1931년 오스트리아 빈대학의 젊은 학자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통해 그 어느 수학 시스템도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수학원리>를 포함한 어떤 시스템에서도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정리들이 존재하며 수학적 증명과 진실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괴델의 증명이 수학자들 사이에서 인정받기 시작한 후 러셀은 서서히 수학과 논리를 포기하게 된다. 그에게 수학은 유일하게 허락된 완벽한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인류의 근원은 어차피 동아프리카의 호모 에렉투스에 있다. ....아프리카에 남은 호모 에렉투스는 현재 우리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했다..... 137억년 전 빅뱅을 통해 만들어진 우주에서 탄생한 우리는 모두 다 같은 고향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칼 세이건이 말했듯 "우리는 찬란한 별들의 후손"이라고"
가축은 인간의 포로인가
"대부분의 소들은 태어난 직후 어미에게서 떨어져 겨우 자신의 몸 크기만 한 우리 안에서 산다. 앞으로도, 뒤로도,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움직일 수 없는.
그리고 드디어 발을 쭉 펴고 평생 처음 당당하게 걸을 수 있게 되는 바로 그날, 소는 죽음의 강물을 타고 이유도 모른 채 도살장의 미끄럼틀을 타게될 것이다. 살과 지방은 소시지와 비누가 되고, 가죽은 소파나 구두로 재탄생된다. 가끔은 갓 태어난 송아지의 잘 가공된 가죽이 최고급 양피지로 변신하기도 한다. 사나운 오록스 후손의 매끄러운 가죽에 겁 많고 나약한 영장류의 후손은 펜과 잉크로 이렇게 쓸 것이다. 행복은 절대적이며 누구나 행복할 권리를 가졌다고. 자유. 생명. 행복권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가축의 얘기를 하고나니 컨베이어벨트에 소들을 싣고 그걸 쳐다보는 나 자신의 그림이 떠오른다. 어떡해야 하나? 정말 어떡해야 하나? 강아지를 키우고 길냥이들에게 가끔 사료를 준다. 이 철면피한 이중성.... 고기를 먹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몸이 약해서 오히려 탄수화물과 야채만으로는 어려운 걸 느낀다. 괴롭다. 가장 괴로운 게 이 문제다. 죽을 때 나는 '하느님'을 찾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존재가 불확실한 하느님에게라도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 곁으로 갈 것이다. 아무리 인류 전체를 돌보지 않는 하느님이라 해도 의지할 데라곤 그분밖에 없다. 그 소들을 돼지들을 닭들을 그 외에도 모든 가축들을, 그 모든 짐승과 동물과 생명들을...... 언제나 그들에게 미안하다.
울어도 소용이 없다. 나는 정말 할 일이 없다. 무력함 중에서도 가장 완전한 무력감을 느낀다.
버릇이 잘못 들었다. 의지는 분명하지만 습관은 빨리 고쳐지지 않는다. 버릇을 잘못 들였다.
성서에, 신약에, 어느 서간에서인지 기억이 모호하지만 잊지 못하는 구절이 있다. 대략 이런 구절이다.
"그 때에는 우리가 거울을 보듯 분명하게 보게 될 것이다. "
지금 나는 분명하게 보고 있다. 지나간 것은 어느 정도 분명하게 보인다. 그 때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그러나 버릇이 잘못 들어 자꾸 하던 짓을 하게 된다.
언젠가 지금의 이 모습도 분명하게 보이는 날이 올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명징하게 볼 것이다.
나는 이제 늙었다. 명징하게 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