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 전집 211

니콜라이 고골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어떤 텍스트를 처음 대할 때 나는 대부분 그 작품이 지닌 분위기에 어색함을 느끼곤 한다. 독서를 시작하면서 맨처음 느껴지는 감정인데 딱 내마음과 취향에 맞는 텍스트가 아닌 이상 일정량의 페이지나 시간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늘 어색함과 어려움이 앞서 곤혹스러운 일면이 책에도 그렇게 적응되는 것이다. 나는 무언가의 속으로 진입해 새로운 지식을 알고 어떤 지향을 바라지만  적응력이 좋지 않다. 사회성이 아주 낮은 게 텍스트와의 관계에서조차 그렇다. 

 

 이 <타라스 불바>는 읽기 쉬운 조건들을 갖추었음에도 나는 처음에 타라스 불바라는 인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초적이고 단순하고 우직한 그의 성격이 그대로 무식하게 폭력적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왜 이렇게 단순하게 폭력을 앞세울까, 아내도 자식도 상관없단 말인가' 싶었다. 

 겨우 작품 중간쯤에야 나는 타라스 불바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그의 강렬한 애국심이나 그 우직스러운 충성심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 황량하면서 나른하고 그러다 갑자기 열정적인 폭력성과 감성이 회오리처럼 틀어올려지는 전장터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 전장에 있다면 나 또한 불바만큼은 아니지만 그의 부하들처럼 그를 따르고 그를 추앙하게 될 것 같았다.

 언젠가 딸과 그런 얘기를 했다. 우리가 식민지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보따리를 꾸려 만주로 갈 수 있을까 의아스럽고, 일본 앞잡이에게 잘 보여 내 한몸이라도 잘 살기 위해 애쓰게 되는 것도 똑같이 의문스러웠다. 나는 어느 쪽에도 서지 못하고(안하고), 불만과 증오심을 품은 채 간신히 살았을지 모르겠다. 물론 내 마음은 보따리를 싸서 기차를 타고 만주로 독립운동을 하러 가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굉장한 인사가 내게 기막힌 선물을 하면서 친일을 권한다면 못 이기는 척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건 아찔한 상상이다.

 그렇다면 나는 겨우 이상에만 머리를 들 뿐, 현실에서는 땅에 디딘 두 발에 갇혀 그대로 얼어붙어 제자리를 고수하는 것이다. 그러니 독립가들을 우러르는 것은 일종의 보상심리나 죄의식으로 인한 투사일지도 모르겠다. 고골이 쓰고자 했던 것은 그들의 정신과 행동이 어떻게 역사에서 평가되든 러시안인들의 마음 속에서는 길이 살아남기를 바랐음이리라.


"<타라스 불바>는 카자크 민족의 삶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역사소설이다. 카자크라는 명칭은 15세기에 드네프르 강 유역에서 형성된 반자치집단인 유목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카자크'라는 말은 원래 '독립적인 또는 자유로운'이라는 의미를 가진 터키어에서 유래하였다. 카자크들은 스스로를 자유인이라 불렀다. 그들 대다수는 대러시아인들 아니면 우크라이나인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폴란드로부터 종교적 억압과 민족적 핍박을 받았고, 세금착취와 군사적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이교도적인 요소가 가미된 러시아 종교를 믿고 있었다." (230~231쪽, 작품해설)


 그러니까 불바는 식민지 하의 민족으로서 극한의 정신적, 체제적인 독립을 하려는 것이었다. 정말 인간적으로는 지나치다 싶은 그의 우직하고 미친 듯한 행위들은 그렇게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는 목숨처럼 아끼던 두 자식을 전혀 상반되는 이유로 전장에서 잃었다. 처절한 상실이었다. 그 자신도 화형에 처하는 신세로 끝맺음한다. 그는 화형대 위에서까지, 마지막까지 폴란드인들에게 욕을 하고 카자크들에게는 명령을 하는 지휘관으로서 죽는다. 처음 불한당처럼 느껴지던 사람, 이 책의 강력한 주인공이며 작가가 길이 남기고 싶던 불바에게 나 또한 숭고한 경외심을 느끼고 말았다. 고골의 문체는 힘있고 직설적이고 아름다웠나보다. 나는 그의 문장들에 이끌려 결국은 그의 논조에 공감하고 말았다. 처음엔 그렇게 감정이입이 안되더니... 

 오랫동안 변치 않는 마음으로 한결같음을 보여주면 누구라도 항복하게 된다. 그를 믿게 되고 그를 존경하게 된다. 마침내는 그를 사랑하게 된다. 정말 존경하게 되는 사람은 빛나는 외양 때문이 아니라, 어떤 지식이나 힘이나 부 때문이 아니라 그가 보여주는 한결같은 마음 때문이다. 타라스 불바의 강직하고 열정적인 마음, 그 고투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고 자신을 헌신하는 그에게 어찌 마음이 동요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적당히 우아하고 적당히 세련된 사람들, 교양이 넘치고 적당한 이기주의가 팽만한 현 시대에 타라스 불바는 차원이 다른 인간이다. 


 타라스의 두 아들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가 많다. 그들은 처음에는 별로 다르게 보이지 않았지만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면 아주 상이한 길로 갈라지게 된다. 큰아들 오스타프의 이야기는 독자의 심금을 두들긴다. 

 "큰아들 오스타프는 온갖 고문과 고통을 태연하게 참아 내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다. 타라스 불바는 군중 속에서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그의 장렬한 전사를 찬양한다. 화형을 당하는 큰아들이 고통에 못 이겨 아버지를 부른다. 참기 힘든 고통 속에서 아버지를 부른다. 오스타프가 소리친다. '아버지! 어디 계세요! 이 모든 고통을 아시겠지요?' 아들의 외침에 타라스가 적들의 한가운데 있음을 잊고 "암, 내가 여기서 보고 있다!'라고 절규하는 장면은 참으로 감동적인 대목이 아닐 수 없다."(240쪽)


 한데, 정반대 방향에 둘째 아들이 있다. 둘째 아들인 안드리는 이 엄청난 파워 넘치는 아버지와 형의 영향 아래에서도 적국 폴란드 여인을 향한 사랑을 택했고 그 배신으로 인해 아버지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 미친 아들에 미친 아버지 격이다.

 "이러한 안드리의 행동과 맹세는 사랑이 주는 기적적 역설의 힘이라 할 수 있다. 사랑받기 전의 대상과 그 후의 대상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 사랑이 갖는 기적적 역설이다. 사랑을 받는 순간, 그 대상은 마술처럼 그 어떤 숭고한 차원을 획득한다. 사랑은 실재의 현재화이기는커녕 그 반대, 즉 진부한 현존을 불가해한 실재로 재창조해 내는 작업이다. 이는 또한 정신분석에서 승화 개념이 겨냥하는 것이기도 하다. '평범한 대상을 사물의 존엄으로 고양시키는 것'이라는 승화에 대한 라캉의 정의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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