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혼 / 외투 / 코 / 광인일기
니콜라이 고골 지음, 김학수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6년 11월
위 책에는 '죽은 혼'이 장편으로 앞에 배치돼있고(401쪽까지) 나머지 세편은 단편으로(아주 짧은) 뒤에 순서대로 실려 있다. 내일 강의는 '외투'를 중점적으로 분석하는 날이기에 나는 짧은 세 단편만을 일단 읽고 '죽은 혼'은 다다음주에 읽을 예정이다.
'외투'를 읽은 건('코' 또한) 명확한데, 그게 언제 쯤인지는 당연히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며 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그 줄거리와 풍자성이 어제일처럼 기억 속에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문장들 하나하나가 해질녘 호수가의 물고기들처럼 생생하니 수면위로 솟구쳐 올라왔던 것이다. 웬만한 일은 다 백지처럼(백치에 가깝게) 잊고 사는 나로서는, 기억력 제로에 가깝다고 자탄하는 내 돌머리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거의 질병에 가까운 나의 깜빡증세가 이 소설에서만큼은 자신의 폭력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니.....
그러고 보니 아주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줄거리와 주제를 갖고 있는 몇 작품들은 매 시간 끊임없이 부서져나가는 모래 같은 기억 속에서도 단단한 돌처럼 제 자리를 잡고 있나보다. 그렇다면 내게 각인된 그 작품들은 얼마나 명징하게 이 세계를 닮았고 은유하고 있길래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확실히 잊을 수 없는 작품들은 부조리한 세계에서 부당하게 취급받다 누구의 온정도 받지 못하고 스러진 인간들의 얘기일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예를 들자면 모파상의 '목걸이' 로맹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현진건 '운수 좋은 날' 등등....
'외투'는 9등관 공무원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외투와 관련된 비극적인 일화를 소재로 취하고 있다. 우리의 불후의 명작의 주인공은 너무나 볼품없는 인간으로 "그는 이른바 만년 9등관이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저항하지 못하는 상대만을 공격하는, 칭찬받을 만한 버릇을 가진 많은 작가들로부터 마음껏 비웃음과 조롱을 받는 그런 게급에 속해 있었"다. 그런 가운데 그는 자신의 일에만 성실하고 그 외 세상일에는 둔감하여 자신을 위한 잇속을 챙기기는 고사하고 알게 모르게 이 사회로부터 소외되는 인물이다.
그러다 문제의 '외투'가 정말 문제가 되게 되었는 바, 북국의 혹한은 일종의 재앙과 같아서 외투 없이는 생활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의 외투는 심하게 낡아 입고 다닐 수 없을 정도였고, 그의 형편으로는 당장 새 외투를 장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한 건물에 사는 재봉사에게 사정을 해 새 외투를 만들기로 하지만 그 돈을 모으는 과정 또한 힘겹고 비루한 삶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다행히 성실한 그를 위해 장관이 상여금을 준 게 결정적으로 큰 도움이 된다. 그는 결국 여차저차해서 새 외투를 장만하고, 그 외투를 지은 재봉사는 자신이 그렇게 완전한 옷 하나를 완성했다는 기쁨에 겨워 그의 출근을 지켜보기도 한다.
그만큼 우리의 한파와는 차원이 다른 나라 러시아에서 '외투'라는 옷이 갖는 의미는 지대하고 특별할 수 밖에 없나보다. 그런데 그는 작가가 내세우는 하찮은 인간이면서 비극의 주인공까지 겸해야 한다. 그는 착취당하고 무시당하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어린 양' 같은 존재다. 그래서 그는 그 소중한 외투를 광장에서 강탈당하고 만다. 그는 외투를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 단편의 골자는 아무래도 이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고위직 인사를 찾아가 보지만 아무도 그가 잃어버린 외투에 대해 애석해하지도 도움을 주려고도 않는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이 9등관 서기를 오히려 기다리게 하고 애만 태우다 쫓아내며 그가 추운 겨울을 어찌 지낼지 걱정하지 않는다.
외투를 찾지 못하고 몰인정한 상사들을 원망하다 신열을 앓고 분노에 찬 헛소리를 하다 그는 죽고 만다. 그로부터 얼마 후 거리에서 외투를 찾는 유령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여러 명이 외투를 빼앗기기도 하고 아카키 아카기예비치를 그냥 내쫓았던 유력인사(고관)도 외투를 강탈당한다. 그러나 외투를 빼앗아간 자가 유령인지 유령을 가장한 강도인지는 알 수 없다.
권력과 부와 상관없이 그저 하루를 살아가는 민중의 삶, 평범하고 사소하기만 한 삶이 아니라 목숨이 경각에 딸린 상황에서조차 의미 없이, 한 마리 벌레가 치워지는 것처럼, 그렇게 소외되고 사멸되는 존재들이 민중이라는 것. 그것을 비극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런 일은 어디서나 비일비재하니까.... 라고 하는 세상의 암묵적인 조롱과 무관심.
'코'와 '광인일기'는 다음 감상문에서 다루어야겠다. 저녁시간이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