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피곤해서 이 책의 첫번째 단편 <너무 한낮의 연애>만 적고 페이퍼를 접었다. 해서 별로 두껍지도 않은 책인데 2번째의 감상문을 올리게 됐다. 다시 목차를 소환해보면,
너무 한낮의 연애
조중균의 세계
세실리아
반월
고기
개를 기다리는 일
우리가 어느 별에서
보통의 시절
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잔존의 파토스(강지희)-해설
조중균의 세계
화자(나이면서 관찰자)는 경력이 괜찮은 (대학원도 다녔고 성인 단행본은 아니지만 아동서 편집을 맡은 적이 있던) 영주. 나(영주)는 인턴으로 출판사에 다니게 됐다. 해란씨와 나, 둘이 구인광고를 보고 지원했는데 인턴기간이 끝나면 한 명만 남게 될 것이다. 부장이 나에게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 영주씨는 말 그대료 버젓한 경력, 응? 정식 회사에서 일한 경력으로 이 자리에 왔고 말하자면 팩에 든 고기지. 원래 생산할 때부터 정식 팩에 든 고기. 해란씨는 주먹고기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어. 목살 근처 아무 살이나 주먹구구식으로다가 막 썰다보니까 어, 제법 이게 어엿한 상품이 돼 있는 거 말이야. 주먹고기. 내가 비유가 이렇게 좋아. 주먹고기 좋아하나?"
사람을 '고기'로 표현하는 부장은 자신의 비유가 적절하다고 자찬하기까지 한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 단박에 설명되는 말이다.
그러나 이 작품 주인공은 이 두여자가 아니라 조중균씨다. 그는 교정교열만 담당하는 직원인데. 오직 일만 하는 사람이다., 점심을 먹지 않고 그 점심값을 받아내기 위해 자신이 점심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직원식당 입구에서 점심시간 내내 서 있는 사람. 수첩을 갖고 다니며 자신이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확인을 본부장에게 받고 본부장이 식당에 오지 않는 날엔 식당 아주머니들에게 확인사인을 받는 사람.
그러다 한 노교수의 한국사를 다룬 책을 출간하기 위해 교정할 일이 조중균씨에게 떨어진다. 조중균씨는 노교수의 닦달을 들은체도 하지 않고 책상 옆에 수많은 논문집과 참고할 책을 쌓아놓고 기나긴 일을,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은 일을 매달려한다. 그럴수록 그는 부장의 미움을 받고 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해란씨는 그의 편에 서서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를 나에게 말해준다. 나는 점점 그들 둘이 떨어져나가고 내가 이 회사에 남게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셋이서 회식을 한 날, 조중균씨가 두 여자를 데려간 곳은 '지나간 세계'라 쓰여있는, 조중균씨와 친구가 사는 술집겸 그들의 거처. 그 곳에서 조중균씨의 친구(형수)는 조중균이 얼마나 영웅적인 사람인지 과거사를 들려준다.
이름만 적으면 학점을 주겠다는 교수의 시험 시간에 이름을 적지 않고 조중균은 시험지에 자신의 시를 썼단다. 결과는 "망했지, 유급했지, 군대갔지. 사고났지." . 그의 시는 데모대를 선동하는 힘이 있어 '전단시'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지나간 세계"를 자기의 시라고 하지 않았다. 누구나의 시라고....
그러다 데모 중에 그는 경찰서에 끌려갔고 풀려날 때, 한 형사가 목욕이나 하고 들어가라며 오천원을 준 것을 돌려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항상 주머니에 이만원을 넣고 다닌다. 혹시라도 그 형사를 만나게 되면 돌려주겠다는 의도에서. 그건 모욕을 되갚는다는, 복수를 잊지 않겠다는 일종의 증표라고...
해란씨는 어두운 길을 걸어가다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찍는다. 꽃 하나, 고양이 한 마리 없는데...
그리고 정말 나만 남고 조중균씨는 직무 유기, 태만이라는 명목으로 해고 되었고 해란씨는 수습기간을 끝내고 정식 채용되지 못했다. 나는 지나간 세계가 어디 있었던가를, 그 술집에 한 번 가볼까, 생각한다. 조중균씨의 세계, 거기엔 문장과 시와 드라마는 있지만 이름은 없는 세계....
권여선의 <팔도 기획>이었던가, 그 단편이 생각났다.
맞다. 학벌이 형형하지 못한, 부르주아가 아닌, 적당한 세련미와 적당한 처세를 하지 않는, 자신의 올곧은 심성을 기준으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권력에 눈치껏 아부하지 않는, 그들, 그런 사람들은 그 맑음의 댓가를 더러움이라는 정반대의 것으로 당하기 쉽다. 희생양이 되기 쉽다. 적당히라는 말, 합리적이라는 말, 좋은 게 좋다는 말, 그런 뭉뚱그려지는 의식을 가져야 주류에 편입해 잘 살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답답하고 꼬장꼬장하고 우습기까지 하고 촌스런 사고의 조중균씨야말로 이 세계를 청정하게 지켜주는 나무같은 존재들이다. 그런 사람은 그런데 어디에 있나? 있기를 바라면 그것 또한 우습기까지 한 촌스런 사람쯤 되겠지.
그런데 계속 이런 식으로 한 편 한 편을 쓰다간 한두 시간으로는 어림도 없겠다. 이제부터는 세 줄로 요약하기.
세실리아
요트 동아리에서, 대학 때 학부에서의 동창생들 중에 세실리아가 있다. 동문회를 하면 일 년에 한 번쯤 모두를 만나게 되는데 세실리아는 한번도 오지 않는다. 인천 세실리아의 레지던스를 찾아가 20대 때의 트라우마를 힘겹게 안고 사는 세실리아를 만난다. 그녀의 치열한 예술과 정직한 삶, 생의 속물성에 물들지 않는 아직도 젊고 아픈 세실리아...
반월
섬에 사는 이모를 온 식구가 찾아가 여름 한 철 나는 이야기. 이모의 평범하지 않은 삶의 표면이라도 만지게 된 나, 이모와 함께 반월이 뜬 밤, 파도에 휩쓸리게 된다. 반월은 하늘에 걸려있고 해변의 불꽃은 반월을 향해 터지며 올라간다.
고기
첨부터 끝까지 긴장과 미스터리함이 지배하는 작품. 육식성의 인간들, 그러나 누가 진짜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누가 진짜 이 악을 탄생시킨 건지, 모든 게 얽혀 헷갈린다. 진실을 완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의심과 공포가 뒷목을 누른다. 상한 고기를 사게 되어 그 일을 신고하고 그것(고객의 컴플레인)을 되돌리려는 지사의 정육담당 남자와 그녀의 대치, 알 수 없는 일을 하는 수상한 남편. 남편을 부리는 고모는 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그녀는 모든 것이 붕괴될 것 같은 불안 속에서 컴플레인에 마지막 에너지를 쏟고 있는 것인가.
개를 기다리는 일
유학 중에 개를 잃어버렸다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 귀국한 그녀는 공원 옆에 미니쿠퍼를 세워놓고 매일 개를 기다린다. 한 중학생이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준다며 개는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녀의 엄마가 죽였을 거라고, 매일 마주치는 순찰도는 경찰은 이상하게 애매한 소리를 하고, 전화를 하는 제보자들은 단지 돈을 받으려고 거짓말을 하고... 하지만 엄마는 부부싸움 중에 개가 스스로 날뛰다(거울을 보고) 죽었다고 한다. 엄마의 말은, 경찰은, 중학생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사실일까. 그들은 사실 진실을 말하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어떤 상황 때문에 선의의, 어쩔 수 없는 이야기를 하게 된 건 아닐까..... 이 작품 또한 미스터리하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화천, 옥수수밭이 무성한 언덕 위의 고아원에서 그녀는 자랐다. 수녀님은 언제나 공정했고 표독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성인이 되어 옥수동에 월세를 얻어 독립했다. 그녀는 간호보조원이다. 자신이 사는 집은 그녀 전에 한 남자가 살았단다. 그는 일하지 않고 하늘의 별이나 보는 백수였다. 그녀는 병원에서 도어맨인 남자를 만난다. 그들은 아직 사랑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도시에서 주변인들이다. 그들은 옥상에서 별을 바라본 적이 있다. 화천에서는 자꾸 고아원이 문을 닫게 되었으니 후원금을 보내달라고 한다. 그녀는 셈을 해보고 다시 셈을 해보고, 그 편지를 읽지 않는다. 그녀는 구조가 이상해서 간호사들도 헷갈리는 병원 안에서 오늘도 헤맨다.
보통의 시절
얼마나 웃었는지.... 암에 걸린 큰오빠가 자신들의 원수를 찾아가자고 한다. 큰오빠, 작은오빠, 언니, 나, 나의 학생이며 이제 청년이 된 상준, 이들은 일산의 한 임대아파트를 찾아간다. 그곳엔 목욕탕에 불을 내 결국 부모가 죽게 되고 이렇게 망하게 된 원수 김대춘이 살고 있다.
가는 중에 일어나는 에피소드들, 김대춘 집에 도착해보니 막상 그는 비쩍 마른 데다 그의 딸은 장애를 가진 딸.... 남매들이 그를 몰아세우지만 김대춘은 사실 그들이 복수할 사람이 되지 못한다.
돌아오는 길. 장대한 여정이었던 것이 범상한 하루가 되어버린 사실에 나는 안도하고...
그 순간은 엄청난 충격과 슬픔이었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그저 흐려져 심상한 일상 중의 하나가 되어버린다. 유머와 비트는 솜씨가 일품이다. 읽으면서 엄청 웃었다.
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고양이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죽지 못하는 한 중년이 넘은 남자.
그는 가구회사의 과장이었다. 주문제작하는 가구들은 아주 세심하고 정확해야하는데 그는 그일에 뛰어난 장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해고되기 직전의 수순으로 좌천되었다. 많은 해고직전의 직원들은 회사를 상대로 어떤 행동을 하려하나 그는 순순히 회사가 시키는 대로 한다. 아주 열심히.
그리고 저녁이 되면 고양이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 고양이를 찾아주러 다닌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서도 고양이 주인들을 위해서도 아닌, 헤매고 다닐 고양이 때문에 화를 내면서 그 일을 한다. 그가 죽지 못한 것은 그가 죽으려던 결정적 순간에 앞 마당의 다라이에 고양이 새끼들이 낳아져 있던 걸 보았던 까닭이었다. 그 새끼들 때문에 그는 삶을 자꾸 연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회사 마당에서 사장을 만난다. 30년 가까이 그가 일해온 회사의 사장, 사장은 자전거를 타며 그에게 직능계발부서를 만들테니 그 장이 되라고 한다. 해고해야 될 직원들을 해고시키는 장이 되라고...
사장이 떠난 후, 그는 굴뚝 아래로 떨어져 흔들리는 현수막의 글자가 궁금해 굴뚝을 타고 오른다. 고양이들을 찾아달라는 전화가 울리는데 그 전화를 받을 수 없다. 해고자가 걸려던 그 현수막의 글자는 무슨 글일까. 고양이를 잃어버리고 전화를 하면서 우는 여자들을 견딜 수 없다고, 그는 그런 것에는 단련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굴뚝을 오른다.
작품마다 사건과 인물이 매혹적이다. 작가의 안목이 넓고 유머가 깔려있어 미끌어져 끌려가듯 읽었다. 체홉을 읽을 때의 느낌과 대척되는 느낌이라면, 그래서 체홉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그만큼 사건을 다루는 묘사나 서술이 다르다는 뜻이다. 선조적 작가의 이야기톤과 그 방식이 지금의 작가들과 다른 건 당연한 일. 그들, 옛날 작가와 현재의 작가 모두 내겐 흔연하고 흔연하다.
세 줄 요약? 어림도 없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