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페이퍼에 쓴 <콘트라베이스>에 대한 독후감은 나의 책읽기 과정을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도 후다닥 읽고 책 한 권을 던져버리려는 무책임한, 낙서 수준의 페이퍼였다. 내게 독서라는 건 무보상의 순수한 일이고 즐겁기도 한 일이지만, 의미와 지략를 얻으려는 목적이기도 하다. 그 목적의식 때문에 간혹 업무량을 채우려는 회사원의 야근처럼 책을 향한 우격다짐일 때가 있다. 너 책아, 나는 너를 정복해야겠으니 어떤 식으로든 빨리 페이지를 넘기고 끝장을 보자, 이런 식의 우격다짐 말이다. 

 이런 태도는 시간 낭비이며 나의 지향점에서 멀어지는 일이다. 차분히 읽고(원래는 정독이 내 스타일인데) 그 의미와 작가의 전략을 헤아리기도 전에 읽기를 마쳤다며 한 권의 책을 집어던져 해방감을 맛보려는 나의 얄팍함을 반성해야 한다. 

 해서 이 책 <콘트라베이스>의 리뷰를 제대로 쓴 네이버 블러그의 한 페이지를 그대로 옮겨온다. 책 내용에만 집중하고 그것을 전반적인 우리 삶과 연결시킨 수작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면서도 어렵지 않은 말로 그 의미를 충실히 전한 것 같아 읽으면서 참, 성실하고 겸손한 리뷰이다 싶었다. 

 우연히 읽게 된 네이버 블로그의 '거문고자리의 베가'라는 닉네임을 쓰는 분의 리뷰 전문을 그대로 옮긴다. 나의 독후감도 그의 감상과 같기 때문에 그대로 옮기는 게 오히려 의의 있을 것이다. 복사, 붙여넣기가 아니라 읽으면서 그대로 타이핑해 옮겨 적는다. 

 





콘트라베이스 - 파트리크 쥐스킨트

거문고자리의 베가(2016. 7.21. 네이버 블러그에서)


오케스트라에 아니 클래식이라는 음악 장르에 취약한 나로선 잘 알지 못하지만 콘트라베이스라는 악기는 대략 알고 있었다. 


사실 따분하고 별것 없어 보이는 이것을 가지고도 치밀한 탐구를 통해 작가는 그 위치의 삶을 치열하게 보여준다. 


물론 책에서처럼 대부분의 콘트라베이스 주자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그가 말하는 콘트라베이스의 위치와 - 팀파니 보다도 존재감이 덜 하다는- 자신이 다루는 악기의 특징, 다른 악기나 음악가와의 비교 등을 섞어 오케스트라의 한정된 공간을 보편적 삶의 무대로 치환해서 보여준다. 


모노드라마로 혼자 열과 성의를 다해 말하는 어느 순간 작중 주인공은 나 자신이 되고, 또 지금 내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지금의 자리를 지키는지 이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를 토로함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런 행동이 더욱 부질없음을 나를 대신해서 보여주기도 한다. 그만큼 이입력이 높은 설득력 높은 자신의 주장을 계속해서 누군가에게 열변을 토한다.

대부분의 일상은 사실 그렇다. 나도 콘트라베이스의 주인공과 같다. 수많은 대스타들을 질투하기도 하고 평가절하하기도 상대적인 내 위치를 애써 옹호하고 추켜세우기도 한다. 그런 모습은 작중 주인공의 삶과 나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 


정말이지 자신의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열성적으로 설명하다가도 진저리내며 미워하고 보란듯이 내팽겨치기도 하는 그런 주인공의 모습은 여느때와 다를 게 없는 내 일상인 것만 같다.


거기에 더해 자신이 동경하거나 사랑하거나 질투하는 대상들의 이름을 다 말해도 자신의 위치처럼 제 3열의 콘트라베이스의 주자인 이름조차 없다. 마치 연극에서 나무3의 역할이나 행인2의 역할인 듯 필요는 하되 전혀 눈에 보이지않아 이름조차 없는 존재 그 자체이지 않은가.


물론 바이올린도 연주자도 지휘자도 작곡도 할 수 있었겠지만 자신의 실력이 그렇게까지는 없었다고 고백하는 주인공은 공교롭게도 지금의 내모습과 닮아 격한 공감을 불러오기 충분했다. 나의 지금의 현실을 책에서 이름없는 콘트라베이스 주자를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름 주제 파악을 못하던 내게 경종을 울린 순간이 되었다. 


다행히도 희망이 있다면 나도 주인공도 한가지 사실엔 똑같은 생각이란 점이다.


"누구나 각자 자기 나름대로 서 있어야 할 위치가 있고, 또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왜 그 사람이 그 일을 하게 되었고, 그가 왜 그 일을 계속하고 있는지 따위는 물어 볼 필요가 없는 겁니다." 


마지막 세라를 결국 외치진 못하겼겠지만 그가 떠나며 올려둔 음반의 경쾌한 멜로디처럼 그가 다시 본래의 콘트라베이스로 돌아가도 또 여전히 거기 남아도 그것으로 됐다라는 생각이다. 그의 말대로 그는 결국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겠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살아가면서 말이다. 


**거문고자리의 베가님은 제주에 사는 일러스트, 화가인 것 같다. 여러방면으로 다재다능한 사람이며 활동도 많은 것 같다. 네이버 블로그에 가면 찾을 수 있다. 그림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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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어제 저녁부터 밤까지 이 책을 읽으며 맘이 편치 않았다. 내가 하는 집안 일들이 꼭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잡다한 일에 불과할 뿐, 어떤 성취나 보람도 느끼지 못하는 일이라는, 자주 드는 회의와 책 한 권에 몰입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짜증이 났다. 자주 느끼는 일상적 회의지만 그 중 어떨때엔 그 결과로 무기력함이 직접 나를 지배하기도 한다. 무기력함은 정신이 들러붙은 신체로 전이돼 마음보다 더 방만하게 반마비 상태를 만든다. 

 그래서 나는 흐리멍덩한 상태로 이 책을 읽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 내 정신이 먼저 무력해져 있어서였는지, 아니면 이 책의 흐름이 피로를 불러왔던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그래 다시 생각해보자. 

 

 이 텍스트는 시작부터 끝까지 특별한 사건없이,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자신을 토로하는 방식이기 때문에(모노드라마) 지루하기 쉬운 면을 갖고 있다. 더구나 몇 페이지에 걸쳐 콘트라베이스와 다른 악기를 비교하면서 음악용어도 나오고 클래식의 거장들이 거명되기도 한다. 그쯤에서 나는 지쳤다. 음악에 관한한(다른 면에서도 그렇지만) 문외한인 나로서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자신의 악기에 대해 숭배에 가까운 찬사를 반복하는 데에 벌써 지겨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작가가 치밀하게 세운 전술적인 서술이었지만 말이다. 하여 나는 반마비상태에 빠진 채 건성건성 페이지를 넘겼다. 비슷한 내용과 문장들이 반복되면 '가차없이'가 아니라 멍한 상태로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다가 성악가인 한 여자가 드디어 등장한다. 옳다구나, 드뎌 나왔구나, 사건이 될지 안될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 지겨움에서 해방시켜줄 인물이 등장하셨어. 그러나 여자는 한두 문장을 호흡하더니 다시 또 사라진다. 아, 그러니 이 한심한 콘트라베이스 주자는 그녀를 짝사랑하든지 아니면 특별한 삶의 계기가 없는 자신의 일상을 밝히기 위해 그녀를 멋대로(자기 맘대로 떠들고 있으니) 상상하며 불러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너의 콘트라베이스와 너의 연주와 짝사랑인지 동경인지 모를 그녀와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어찌 돼 가는지 좀 보자. 

 그러며 페이지마다 중요한 부분을 찾아 몇 줄 읽고 넘기기를 계속 했다. 이제 좀 알겠구나, 사라라는 여자 성악가와 그는 얼굴도 한 번 제대로 마주쳐보지 못한 관계였다(그러니 관계라는 어휘도 안 되는, 그의 일방적인, 너무나 멀고 먼 짝사랑이다). 그러니 이제 콘트라베이즈 주자인 그 남자는 자신의 초라한 몰골을 여지없이, 그는 그럴 마음이 없었지만 그의 진실이 다 토로되고 나니, 드러나고 만다. 

 콘트라베이스 연주는 돈이 되지 않는다. 4년제 대학을 나왔고 매일 수련을 쌓았고 성실히 홀로 살고 있지만 비전이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성악가인 그녀는 무대가 끝나고 나면 이남자 저남자가 환대하는 자리로 가 그의 월급으로는 참 먹기 힘든 생선요리를 먹는다. 그가 그녀에게 그 음식들을 사주려면 그는 내핍 수준이 아니라 거덜이 날 지경이다. 그나저나 그녀가, 그가 거덜이 나게 무언가를 접대하고 싶어해도, 일단 서로 안면이나 터봐야 할 것이 아닌가. 

 이쯤되면 독자는 그에 대해 어느 정도는 다 알게 된 상황이다. 예술가의 삶이지만 가난한 소시민의 삶이며 무지하고 천한 삶은 아니지만 프롤레타리아의 삶과 다르지 않다. 그에게는 희망이 전무하다. 실낱같은 소망 하나를 잡아올리려 하지만 잡아올릴 만한 거리가 전혀 없다. 어찌해야 이 가난과 비참함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그는 그녀, 사라의 눈을 사로잡아야 한다. 그래야 뭐가 되든(그게 혹시 엄청난 실수가 되어 파멸이 따른다하더라도), 밥이 못돼면 죽이라도 돼야(못먹는 죽) 하지 않겠는가. 그는 앞으로 다가올 콘서트에서 그녀 사라를 갑자기 연주 중에 부르리라 다짐한다. 그 무대 앞엔 수상이 앉아있을 것이고 저명한 인사들이  참석할 연주회가 될 자리다. 거기서 그는 그녀에게 신호를 보내고 소리를 칠 것이다. 그러면 최소한 그녀에게 평생 잊지 못할 자신을  각인시킬 수라도 있지 않은가.

 이런 엄청나게 충격적인 계획(엄청 바보멍청한 짓)을 세우고 그는 밖으로 나간다. 

 과연 그는 정말 그녀, 사라를 연주 중에 부를 수 있을까. ㅠㅠ.........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인 한 남자의 신산한 삶의 한 지점을 가차없이 리얼하게 보여준 파트리크 쥐스킨트에게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제대로 다시 한 번 읽을 마음은 없다. 다음 읽을 그의 책이 책상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깊이에의 강요>,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를 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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릿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학교 다닐 때 그 텍스트는 전혀 몰라도 시험을 위해 외우는 게 있다. 역사에서는 연도와 이름을 외우고 국어에서는 두음법칙이나 의존명사를 외운다. 수학은 공식을 외우고 과학에서는 단 하나도 이해할 수 없거니와 무슨 물질인지 모르는 기호로 된 물질명을 외운다. 그때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을 외웠다. 그리고 나중에 대충 어디선가 읽었을 것이다. 

  그 비극 중에서도 가장 심각하게 고뇌하는 주인공, 그래서 연민을 자아내는 인물을 꼽으라면 햄릿이라고 무조건 생각했다. 그건 책 내용 때문이 아니라 햄릿이 그만큼 우유부단하고 사념에 사로잡힌 인물이라는 소문(?)에 휘둘려서였다. 햄릿만큼 확실한 캐릭터로 세계인들에게 각인된 인물이 몇이나 있을까. 돈키호테, 어린왕자, 개츠비,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 귀여운 여인, 안나 카레니나 등등..... 무수히 많지만 단연코 고뇌를 짊어진 인간의 대명사는 햄릿이다. 그 후광에 힘입어, 햄릿이라는 전형적 인간상에 기대어 여전히 햄릿은 유효하고 각광받는 것 같다. 

 나는 햄릿이 얼마나 고뇌하는지, 햄릿이 홀로 얼마나 외로움에 사무치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햄릿을 읽었다. 허나 소설이 아니라 희곡이어서, 햄릿에 대한 설명과 묘사 없이 대사 뿐이어서 내가 상상했던 것 만큼의 햄릿의 고통을 헤아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햄릿이 처한 상황이나 그를 둘러싼 인물들이 너무나 전형적이고 역사의 한 장면을 가져다 붙인 것 같아서 그 점이 아이러니하게 신선했다. 그런 점이 당시의 '비극'이라는 연극에 합당한 내용이었을 것이고 당시의 관객에게 어필했을 것이다. 21세기 현재의 연극이나 소설에 비하면 훨씬 스케일이 크고 전형적인 인물들이  배열되어 있다. 

 사실 햄릿은 셰익스피어가 완전히 창작한 작품이 아니라고 한다. 12세기 말경에 씌어지고 1514년에 처음 출판된 삭소 그라마티쿠스의 <덴마크 역사에> 실려있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셰익스피어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천재라기보다 주어진 이야기를 재구성 혹은 재해석하는 천재라고 말해진다. 그는 자유롭게 소재를 빌려와 자기 의도에 맞추어 그것을 자르고, 붙이고, 늘리고, 틈새를 메웠다..... 셰익스피어가 구성과 인물짓기를 통하여 생기 없는 이야기에 생동감을, 평면적인 인물에 입체감을, 평범한 주제에 새롭고 깊은 의미를 부여하였는지 알수 있다...... 물론 셰익스피어가 삭소의 이야기를 직접 읽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오히려 삭소의 이야기를 재서술한 프랑스 사람 벨포리스트의 <비극적 이야기>를 읽었을 가능성이 훨씬 많다...... 그러나 그런 원형의 책들(이야기)이 있다해도, 그것들은 항상 셰익스피어의 창조적 변형력을 입증해 주는 자료로 쓰이지 그의 의존성을 증명하는 자료로 쓰이지는 않는다. (작품해설213~214쪽)

 나 또한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셰익스피어의 풍부한 어휘와  문장구성력에 놀라웠다. 천재작가다운 대사가 페이지마다 영롱하게 빛났다. 어떤 때는 나의 무디고 무지한 해석력 때문에 그 문장(대사)이 얼마나 오묘한지 모르고 넘어갔을 것이다. 

 또한 그간 막연히 추측했던 햄릿이 사실은 그렇게 고뇌하기만 한 왕자는 아니었으며 폐쇄적이기보다 상당히 사교적이고 통솔력이 있으며, 기지에 능하고 전략도 세울 줄 아는, 인기있는 왕자였다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자신을 팔푼이, 미친사람으로 연기를 해 주위를 속이는 장면에서는 지략이 뛰어난 전형적인 궁중의 노련한 왕자임이 명백했다. 

 하지만 이 작품 전체에 흐르는 비극적 결말은 인간의 계획이라는 게 얼마나 무모하고 허망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햄릿이 자신의 삼촌인줄 알고 찌른 검에 죽은 사람이 다름 아닌 오필리아의 아버지 폴로니어스인 건 무얼 의미하는가. 레어티즈와 왕 클로디어스가 햄릿을 죽이려고 모의한 결투에서 어이없게도 거트루드와 자신들(레어티즈와 왕)이 죽는 것은 햄릿이 곧이어 죽었다해도 얼마나 모순에 찬 한심한 음모에 불과했던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미쳐버린 오필리아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미칭광이 행세를 한 햄릿과 얼마나 닮아있는가. 그리고 아무 죄도 없이 미치고 물에 빠져 죽은 오필리아의 생에 대해 누가 책임져 줄 것인가. 

 햄릿은 자신의 복수를 하려다 연인의 집안을 파멸시켰다. 클로디어스는 햄릿을 죽이려다 사랑하는 거트루드를 죽이고 자신도 죽게 된다. 레어티즈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다 자신마저 죽는다. 인간이 하려는 계획은 미리 계산된 것이었지만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다. 서로가 내민 독에 서로 감염되어 공멸하고 만다. 생은 겨우 이렇게 이어지다 어이없이 내리막을 걷고 어두운 땅 속으로 사라진다. 너무나 허무해서 당장 죽고 싶을 지경이다. 그러나 그마저 의미없는 짓이다. 인간의 몸짓은 거대한 자연 앞에, 완전한 시간 앞에 그저 나부끼다 떨어져 뒹굴다 어디론가 사라지는 낙엽 하나일 뿐.... 

 갑자기 모든 의미가 사라진다. 아, 안된다. 내가 이 햄릿을 읽은 의미마저 사라지면 안된다. ㅠㅠ . 하나도 의미없는 가운데 어떤 의미 하나가 일어선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대사들을 써야할 의미가 있다. 그 오묘한 문장들이 의미를 일으켜 세워줄 것이다. 


동족보단 좀 가깝고 동류라긴 좀 멀구나.


어서 밤이 왔으면. 그때까진 종용해라 내 영혼아. 악행은 천길 만길 파묻어도 사람 눈에 발각되리.


악담의 타격은 미덕의 화신도 못 피해. 봄의 새싹들이 봉오리를 열기도 전에 자벌레가 너무 자주 그들을 갉아먹고 청춘의 아침이슬 속에는 전염성 마름병이 당장에라도 생길 수 있다. 젊음은 곁에 뉘 없어도 자기에게 반항해.


피가 끓을 때면 영혼이 얼마나 아낌없이 혀에게 맹세를 빌려주는지.  얘야.


내가 몰라 터질 것만 같으니 말해 봐라. 죽었을 때 예를 갖춰 입관한 시신이 왜 수의를 찢었으며, 우리가 그 안에서 조용히 누운 너를 보았던 묘지가 왜 육중한 대리석 아가리를 열고 너를 다시 토해내었는지.


이성이나 맑은 정신 가지고는 이렇게 꼭 들어맞는 말을 할 순 없지.


저하, 그들의 값어치에 따라 그들을 대접하겠나이다.

나 원 참, 봐요, 훨씬 더 낫게 해야지. 모든 사람을 각자의 값어치대로만 대접하면, 태형을 피할 사람있어요? 당신의 명예와 가치에 버금가게 그들을 대접하시오.


경건한 외모와 신성한 행동으로 우리가 악마조차 달콤하게 만듦은 너무 흔히 입증되는 사실이다. 


자신의 분별력을 교사로 삼으라고. 행위를 대사에, 대사를 행위에 맞추게.


왜냐하면 필요한 게 없는 자는 친구 보족 절대 없고, 모자람이 있는 자가 속빈 친구 시험하면 그와 바로 원수지기 때문이오.



** 장맛비가 주욱주욱 내리고 있다. 바람도 시원하고 빗소리도 시원하다. 토프레소에 내려가 맛난 디저트빵과 달콤한 비엔나커피를 마실 예정. 햄릿도 비엔나커피 한 잔이면 잊을 만할까. 아니, 햄릿이 이슈가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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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학적 인간론

털없는 원숭이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김석희 옮김 / 문예춘추(네모북) / 2006년 2월





차   례


1994년판 머리말 

인간의 편견이라는 잠자는 거인을 깨우며 

 "인간은 아직도 자신의 생물학적 본성을 인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동물적 특성을 자세히 바라보고 거기에서 교훈을 얻을 준비가 되어 있을 줄 알았다."

 "도시는 콘크리트 정글이 아니라 '인간동물원'이라고 나는 결론 지었다."

 "당신의 동물적 본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길 바란다."



여는 글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고찰



1 기원

 놀랄 만큼 강렬하고 극적인 진화

 "동물을 동물이라고 부르는 데 익숙해져 있는 동물학자들조차 인간을 연구할 때는 주관을 개입시키는 오만함을 피하기 어렵다."

 "초기 유인원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기후가 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 시작하여, 약 1500만 년 전에는 그들의 본거지인 숲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털없는 원숭이가 숲을 떠난 뒤부터 이룩한 성공담...."

"일단 문지방을 넘어서면, 그 동물은 막대한 진화 에너지를 가지고 새롭게 주어진 역할 속으로 힘차게 뛰어든다. 그 과정이 너무 급격하기 때문에, 옛날에 갖고 있던 특성들을 모조리 벗어던질 시간이 충분치 못했다. 고대의 물고기들이 처음으로 마른땅을 정복했을 때, 그들은 물속에 살던 때의 속성들을 그대로 질질 끌고 다니면서 땅 위에서 사는 데 필요한 새로운 자질들을 황급히 개발했다..... 털없는 원숭이도 바로 그런 이상야릇한 혼합형이다."

"벼룩은 전형적인 육식동물처럼 일정한 기지를 갖고 있는 동물에게만 붙어살 수 있는 기생충이다."

"유태보존- 유아기의 어떤 특성을 어른이 된 뒤에도 그대로 계속 간직하고 있는 것. 진화 과정에서 이런 요술 같은 일이 일어난 경우는 결코 드물지 않다. 어린 시절을 연장하여 부모와 다른 어른들에게서 보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신체 발달 과정을 차별적으로 지연시키는 작용. "

"그의 가장 큰 문제는 문화적 진보가 유전학적 진보보다 앞서간다는 사실..."



2 짝짓기

 강력하지만 완벽하지 않은 성애

 "털 없는 원숭이는 오늘날 성적으로 약간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다. 영장류로서 갖고 있는 본능과 나중에 채택한 육식동물의 특성은 그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잡아당긴다. 그리고 정교한 문명사회의 제도는 그를 또다른 방향으로 끌어들인다."

"젤라다 비비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유형의 자기모방이 일어났으리라고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불룩 솟아오른 반구형의 젖가슴은 통통한 엉덩이의 복사판일 게 분명하고, 뚜렷한 윤곽을 가진 입 주위의 빨간 입술은 틀림없이 선홍빛 음순의 복사판이다."

"강력한 성적 각인은 결혼한 부부를 결합시켜주지만, 외도에 대한 관심마저 없애주지는 않는다.... 해결책은 넓은 의미의 엿보기 취미인데... 엄밀히 말하면 엿보기 취미는 다른 사람이 성교하는 것을 엿봄으로써 성적 흥분을 얻는 것을 의미하지만, 논리적으로는 성행위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남의 성행위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 취미에 포함시킬 수 있다. 거의 모든 표본 집단이 이 취미를 즐기고 있다. 그들은 남의 성행위를 보고, 성행위에 대한 글을 읽고, 성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모든 텔레비젼과 라디오, 영화, 연극 및 소설이 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에 관여한다. 잡지와 신문, 그리고 일반적인 대화도 여기에 상당히 이바지한다. 엿보기 취미는 이제 거대한 산업이 되었다. 성행위를 엿보는 사람은 실제로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3 기르기

 가르치고 모방하는 탁월한 능력



4 모험심

새것 좋아하기와 새것 싫어하기

네오필리아(neophilia): 새것 좋아하기

네오포비아(neophobia): 새것 싫어하기



5 싸움

 달아나고 달려들려는 충동

"'시선'은 강력한 효과를 갖고 있기 때문에, 많은 동물들이 자위수단으로 눈알 모양의 무늬를 발달시켰다. 나방은 날개에 적을 깜짝 놀라게 하는 한 쌍의 눈알 무늬를 갖고 있다."

"동물이 공격적이거나 공격적이 될 가능성을 가진 동물에게 비공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수단으로 새끼의 행동양식이나 성적인 행동양식, 또는 털을 다듬어주는 행동양식을 보인다는 이야기는 여러분도 기억할 것이다. 이런 몸짓이 불러일으킨 비공격적 감정은 난폭한 감정과 싸워 그것을 억제한다. "

"공격 방법에서 그후에 나타난 경향은 경격자와 피공격자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이었다. 이 경향이야말로 우리 인류를 거의 파멸로 몰고 간 원인이다. 창은 멀리서도 효과를 발휘하지만, 사정거리가 제한되어 있다. 활은 그보다는 낫지만 정확성이 부족하다. 총은 사정거리를 극적으로 넓혀주었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은 훨씬 더 넓은 지역을 공격할 수 있고, 지대지 로켓은 공격자의 '주먹'을 훨씬 더 멀리까지 가져갈 수 있다. 그 결과, 경쟁자들은 패배하는 게 아니라 무차별로 살해당한다. "

"접촉을 꺼리는 행동양식 덕분에 우리는 아는 사람의 수를 인간에게 적절한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다."



6 먹기

 결코 변하지 않는 식습관

"우리가 전형적인 영장류라면, 먹이를 조금씩 쉬지 않고 우적우적 먹어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형적인 영장류가 아니다. 우리는 육식동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이 모든 체계를 바꾸었다."

"전이활동- 정신적 압박을 받는 순간 긴장을 풀기 위해 대수롭지 않지만 엉뚱한 행동을 하는 것.

....껌은 오로지 전이활동을 위한 수단으로 발달한 것 같다."



7 몸손질

 털손질의 독특한 대용품




8 다른 동물들과의 관계

 공생과 경쟁, 애정과 증오심

"우리가 다른 동물과 공생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에는 그 동물보다 우리 쪽이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되는 경향이 있지만, 적어도 그 동물을 죽이지는 않기 때문에 먹이와 약탈자라는 가혹한 관계와는 구별해야 한다. 그러나 상황을 통제하는 쪽은 우리이고, 우리와 공생하는 동물은 대개 이 점에서 선택권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기 때문에, 이것은 편파적인 공생관계라고 할 수 있다."

왜 사랑하고 왜 혐오하는가?- 인기순위 10위권에 들어있는 동물들이 갖고 있는 사람 비슷한 특징들... 털을 갖고 있다. 둥그스름한 윤곽을 갖고 있다. 넓적한 얼굴을 갖고 있다. 얼굴 표정을 갖고 있다. 그들은 작은 물건을 다룰 수 있다. 등 -- 동물의 의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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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몇 페이지 넘기기도 전에 잠으로 넘어간다.

페이지보다 잠으로의 이동이 더 빠른 책.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읽다가 짜증이 났다. 이 비슷한, 싫은 책이 김승옥의 '무진기행'인데 그래도 그건 재미있게 읽었다.

남자의 시점에서 여성을 대상화하는 게 선히 드러난다.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3월


카뮈의 상찬에 기대어 산 책이고 좋은 에세이이지만 지루했다.

아주 특별할 거라고 너무 기대했기에 오히려 실망스러운 면도...









라인

조제프 퐁튀스 지음, 장소미 옮김 / 엘리 / 2020년 1월


 노동현장과 그 주변을 잘 스케치했고 아름다운 문체의 글이었지만  작가의 서술을 따라가다보면 많은 고전을 거론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작가는 비록 노동현장에서 땀흘리는 노동을 하고 있지만 순수 프롤레타리아는 아니다. 지식인의 노동이 글로 피어났다는 데에서 오히려 어떤 이질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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