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로 받은 단편을 읽었다. 밑줄을 긋고 천천히 두 번씩.

  황정은의 문장은 깔끔하고 정갈하면서도 보여주어야 할 것은 꼭 보여준다. 모든 면에서 모범적인 글이라고, 늘 생각하게 된다. 

  이기호의 <권순찬과...>는 실제로 있을 법한 서사여서 재미있었다. 잔잔한 이야기가 삶의 모순과 사회적 부조리를 담고, 생의 비루함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작가의 따듯한 마음씀이 느껴진다. 주제 또한 아주 명료하게 살아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양의 미래...황정은

 

 '양'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여기서 '양'은 진주와 나를, 아직 어른은 아니지만 아이도 아닌 채로,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여자아이들을 가리키고 있다, 분명히. 그리고 중의적 다른 의미로는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속죄물(번죄물)로써의 양을 가리키는 것 같다. 왜 나와 진주는 제물로써의 '양'과 같은 '양'(예전에는 여자 신입사원이나 젊은 여자 대부분에게 '양'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일까. 권위와 권력, 부와 명예, 힘과 능력, 학벌과 환경에서 전무하고 초라한, 가난한 여자아이들이 겪게 되는 수치와 위험이 언제나 일상에서, 어느 세대보다 확연히 크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은 여자아이들을 누군가의 도구로 전락시키기도 한다. 도구가 될 때 여자아이는 단순히 인격적인 부분만 훼손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학대나 죽임까지도 당할 수 있다. 그걸 감당하고 싶은 인간은 세상에 없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과 가난은 여자아이에게 너무나 쉽게 당할 수 없는 일을 당하게 만든다. 소년보다 소녀가 훨씬 더 도구로써 피해를 입을 확률이 높고 평생에 걸친 상해를 입을 확률이 높다. '나'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완전히 사라진 '진주'를 평생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나' 또한 '진주'와 별반 다르지 않은 위치에 서 있기 때문에...

 정의란, 평등이란, 공평함이란  이사회에 없다. 그런 윤리와 덕목이 있을 때도 있지만 그것은 양지에 인간들이 모여있을 때나 작동한다. 어두운 그늘 뒤에는, 무언가의 그림자 뒤에는 그런 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희생자들이(제물) 존재한다. 그들의 존재는 존재로써가 아니라 비존재처럼 존재한다. 그러니 존재라는 말은 그들에게는 모순적이다. 그들은 비존재하는 것이다. 사라지는 것이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완전히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성인남자, 성인여자, 소년, 노인, 아이보다 열등한 존재가 아마 가난하고 못 배운 소녀일 것이다. 

  작가는 그런 '양'이 다른 '양'을 못 본 척한 것을, 그리고 그녀가 평생 사라진 '양' 때문에 아무도 모르는 죄의식을 혼자 지고 살아야하는 삶을 그렸다. 


공간: 서점

주제: '양'들의 삶, 죄의식, 공평하지 않은 삶, 무엇도 소유할 수 없는 가난한 젊은이의 현실 등등

형식: 회상적

*서점에서 일했던 호재와 호재 뒤에 들어온 재오는 이름이 비슷하다. 그들의 삶이 비슷할 거라는 추측을 만들어낸다. 

*벚꽃잎이 바람에 뒤집어지다 속절없이 떨어지는 풍경이 진주가 사라진 사건을 비유하는 것 같다.  

*아버지에 대한 표현: 남성성이 거세된 것 같은, 통 말이 없는, 할머니 같다는, 이런 표현들은 중년의 무능하고 무기력한 남성에 대한 표현으로써 적절하고 탁월하다. 슬픔까지 아우르는 문장들.

*고양이를 돌보아주는 호재는 인간적으로는 훌륭한 사람이지만 자본주의적인 사회에서는 한참 부족하다. 호재와 나는 헤어지지 않을 수 없다. 능력없는 두 사람이 함께 붙어있는 앞날은 자명하기 때문에

*나는 '양'이기 때문에 수치스러운 일을 간혹 당할 때가 있는데 그러면 나는 그것에 정면대응하지 않고 말없이 그곳을 떠나는 것으로 끝낸다. 

*진주 어머니는 "가난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났"을 것이라고, 그녀는 "몸집이 왜소하고 덜 자란 사람처럼 보인"다고, "비율이 축소된 인간"이라고. 인간의 외모가 얼마나 정확하게 가난을 보여주는지(모든 이가 그렇지는 않고, 오히려 사기적인 캐릭터도 많지만), 보여주었다. 작가의 사유가 섬세하고 날카롭다.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이기호


  현 시점에서 바로 얼마전의 과거를 회상하는 '나' 가 겪은 이야기이다. 마른장마가 이 주 이상 계속 되고 있던 7월 초순부터 첫눈이 내리고 며칠 뒤 12월에 접어든 시기까지, 6개월 조금 안되는 시간 동안 '그 이상한 남자'가 계속 내가 사는 아파트 건너편에 천막을 치고 대자보를 합판에 붙여 손에 든 채로 등장한다.

  남자는 권순찬이고 나의 눈에 그는 '먼지 뭉치'처럼 보인다. "유리창에 덧댄 패널처럼, 힘없이 날리는 눈송이처럼" 보인다. 그를 쳐다보던 사람들은 서서히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무언가 도움이 되려 한다. 이방인인 권순찬을 둘러싼 아파트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이다. 보통의 서민들은 사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권순찬이 아니더라도 분명 착한 사람들이 많다. 각자 사연은 다르고 삶의 방식은 다르지만 넓게 보아서는 좋은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남의 일에 마구 나서지는 않지만 가엾은 일을 당한 사람을 보면 동정하고 조금이라도 뭔가 나누려한다. 

  그런데 나는 "알 수 없는 무력증에 빠져 일 년 넘게 소설 한 편, 에세이 한 편 쓰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 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자꾸 화가 난다. 화의 이유를 모르겠고 얼마 전에는 별일도 아닌 일에 교무부처장에게 화를 낸 적이 있다. 서울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화를 낼까 조심해야 할 지경이다.

  그런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권순찬에게 어쩔 수 없이 엮이게 된다. 정말 실제로 엮인 것은 아니고 그를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않아 마음이 엮이게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무력증에 빠져 있던 나는 어떤 계기를 마련하고 권순찬에 대한 글을 쓰게 되는데...

  그러나 나가 정말 글을 쓰게 된 연유는 권순찬 때문이 아니라 권순찬이 피해를 입은(실제는 권순찬의 새어머니가) 사채업자 김석만의 출현 때문이었다. 이런 아이러니!!

  "나는 원래 그의 이야기를 쓸 마음은 갖고 있질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여기에, 그의 이야기를 썼다. 그건 지지난주 금요일,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서 내가 만난 한 사람 때문이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김석만. 쿠페형 외제차를 몰고 몇 년 만에 어머니집에 쇼핑백을 들고 나타난 남자는 칼라에 흰털이 달린 가죽재킷을 입고 꽉 끼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그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우리는 왜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애꿎은 사람들에게밖에 화를 내지 못한다. 정말 화를 내야할 곳을 안다해도 그것은(?) 내 말을 들어주지도 않거니와 아주 쉽사리 내게 보복을 가할지도 모른다. 아니, 처음부터 나는 그것의 기세에 눌려있어, 그것의 권력 앞에 너무 약하기 때문에 화를 낼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그것들은 더 기고만장하고 윤택하게 살면서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러니 애꿎은 것들끼리 애꿎은 것들에게만 화를 내게 된다. 약한 것들이 약한 것들을 얕보고 화를 내고 화풀이를 한다. 약한 자들은 각성할 일이다. 약한 자들은 강해질 필요가, 그래서 있다. 자신을 돌아보고 누가 정말 가해자이고 악한 자들인지 성찰해 볼 일이다. 

  이기호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야 할 차례가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 개와 같은 말
임현 지음 / 현대문학 / 2017년 10월




  오랫동안 손을 놓고 있었다. 책을 읽는 일, 독후 감상문 쓰는 일.

  늘 갈구하는데 상대는 아예 나를 모르는 짝사랑. 문학이라는 세계는 아득히 멀고 어렵고 높은 벽이 둘러친 저 너머의 대상이고 애달픈 짝사랑의 상대다. 끈질기게 사로잡으면서도 절대 틈을 보이지 않는 교활하고 음험한 대상. 


  <돈키호테>, <나의 투쟁>(칼 오베 크나우스  고르), 이상우의 <프리즘>을 대강 읽다가 그만 두고 임현에게로 갔다. 못 읽은 이 책들은 다음에 다시 읽어야 될 목록이 되어 책꽂이로 후진. 이상우의 "중추완월" 은 덧붙일 말이 많다. 절제되면서도 이미지가 끝까지 남는 출중한 작품이었다. 문학동네 신인상을 만장일치로 받은 작품이라고 한다. 끔찍한 스토리인데도 지독히 아름답게 기억에 남는다.  

 임현을 택한 것은 윤리와 도덕을 주 모티프로 다룬다는 데에 의미를 두어서였다. 엄정하면서도 모호한 소재를 어떻게 보여줄지 기대를 하고 페이지를 열었다. 아무나 쓸 수 없는 작가만의 의식이 복잡하면서도 미묘하게 얽혀있어 읽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모호함이 지나쳐 과연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싶을 정도의 작품도 있었다. '엿보는 손'이 특히 그랬다. 

  10개의 단편 모두 생각해 볼 거리이지만 집중하기가 자꾸 귀찮아지고 맥이 빠진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슬럼프라는 이름으로 건너뛰고 싶다. 그래서 젊은 작가상을 수상한 '고두'만 분석.


차례

가능한 세계

고두

엿보는 손

좋은 사람

무언가의 끝

그 개와 같은 말

거기에 있어

말하는 사람

불가능한 세계



고두


뜻: 공경하는 뜻으로 머리를 땅에 조아림.

  

  두 번의 고두가 등장한다. 두 번 다 연주가 하는 행위다. 물론 공경하는 뜻으로 연주가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지는 않는다.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이렇게 극복한다. 그녀가 고등학생 시절 그녀는 '나'라는 화자에게 이렇게 함으로써 '나'에게 완전한 복수를 했다. 그리고 십 수년 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가해자가 된 상황에서 피해자 부모들에게 무릎을 꿇고 몇 번의 따귀를 맞으면서 비극적인 상황을 견디어낸다.


 

1. 

 작가는 이야기를 단순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중심 이야기를 보여주기 전에 그 이야기가 어떻게 내게서 시작되어질지, 작은 삽화나 인물을 데려와 먼저 의미화를 심어준다.

 여기서 '나'는 화자이면서 주인공인데, 나는 내 아버지를 먼저 언급한다. 아버지는 군대에서 사고를 당해 유공자가 된 사람으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아버지 때문에 나는 속으로 부끄럽고 화가 나고 민망하고 슬퍼지기도 한다. 아버지는 그만큼 윤리나 체면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통해 사람이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러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버지처럼 하지 않는 게 더 큰 이익이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아버지의 이기적이고 무지한 행동들로 각성된 나는 단순히 부끄러움을 알아야겠다는, 선하고 의식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보다 부끄러움을 알고 이타적인 행동이 사실은 훗날에 내게 더 큰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화자인 나는 누구에겐가 말하는 투로 계속 이야기를 해나간다. 말을 듣고 있는 상대는 학생인 것 같은데 화자가 선생이라고 하니 그가 가르쳤던 학생일 거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어째서 화자는 청자에게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궁금해진다. 


2. 

  화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한다. 공립여자고등학교로 임용되었을 무렵, 나는 연주를 알게 된다. 그녀는 문제가 많은 학생이었고 안 좋은 소문을 달고 다니던 아이였다. 소문이란 알고보면 부풀려진 경우가 얼마나 많으며  주인공을 비하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연주의 짝은 유복한 가정의 모범적인 여학생이다. 두 여자아이는 대조적인 캐릭터이다. 물론 연주는 대부분의 주인공처럼 가난한 집안의 막돼먹은 불량한 여학생이다. 일단 겉으로는.


3.

  우연히 식당에서 일하는 연주를 만난 나는 그녀의 고단한 삶을 목격하게 되고 그동안 선생들조차 그녀에 대해 불량한 이야기들을 나눈 것에 대해 미안해진다. 나는 연주를 데려다주고 그녀와 둘만의 비밀스런 교감이 오간다. 그리고 공교로운 상황에서 그녀에게 책임을 전가하게 된다." 나는 정말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거든. 그러나 그때만큼은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단다."

아버지를 통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거라고 자신했던 나는 부끄러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남들은 모르지만 나는 내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그걸 알기 때문에. 


4.

  그리고 공교로운 상황에서 나는 그녀에게 책임을 전가하게 된다." 나는 정말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거든. 그러나 그때만큼은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단다."아버지를 통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거라고 자신했던 나는 부끄러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남들은 모르지만 나는 내가 어떻게 행동했는, 그걸 알기 때문에.(여기까지가 작품에서는 챕터3이지만 내용상으로는 4에 해당)

나는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의 상황으로는 물리칠 수 없는 일 같았다. 하지만.... 연주는 다음날부터 학교에 나타나지 않는다.


5.

  수많은 이들이 있는 교무실에 연주가 나타나 내게 무릎을 꿇고 죄송하다고, 사랑했다고 고백한다. 연주의 배가 불러있다. 이 사건으로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간신히 연고 없는 사립고등학교로 이직한다.


6. 

  나의 반에서 회장이었던 아이가 불량한 아이들에게 떠밀려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죽는다. 그리고 연주라고 믿어지는 한 여자가 나타나 사망한 아이의 부모들에게 무릎을 꿇고 뺨을 몇 번이나 맞는다. 나는 그녀를 몰래 뒤따라가고 너를(지금 말하고 있는 상대라고 독자는 느낄 것이다, 근데 또 아니다. 작가는 술래잡기를 하고 있다.) , 너라는 존재를 만나려고 한다. "너에게 사과하기 위해서. 나도 용서받고 싶어서."

  구치소 앞에서 자신의 아들일지도 모를 아이를 기다리던 나는 끝내 그 아이를 만나지 못한다. 그런데 "출소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그러나 너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사내아이 하나가 거기 오래 남아 있더구나." 

그 애에게 나는 "마치 그게 너인 것처럼 아버지 행세를 하려 했단다. 다를 것도 없었지. 누군가는 이 아이의 인생에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니?"


  




  이야기가 끝나는 지점에서야 화자가 너라고 말하는 너가 실제의 너는 아니며 너와 흡사한 불행한 다른 남자아이이며 나는 이 아이에게조차 사과를 해야한다는,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얘야, 내 말 좀 들어보렴. 인간들이란 게 말이다. 원래 다들 이기적이거든. 태생적으로 그래. 처음부터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거란다. 그게 나라고 뭐 달랐겠니." 마지막 문단의 마지막 몇 문장이다. 


  아버지의 무지와 치졸한 떳떳함이 싫었던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나는 한 가엾고 불행한 여학생과의 관계에서 부끄러운 짓을 했으며 그럼에도 잘 살고 있던 자신의 삶에 대해 깨닫는다. '나라고 뭐 달랐"는가를, 생판 모르는 삐딱하고 불량스런 소년 앞에서 고백하는 것이다. 


  아버지-나-유복한 여학생-연주-폭력에 죽은 우리반 회장-가해자인 비행소년의 어머니인 연주-구치소 앞에서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소년-나


  이 작품에서 아버지는 내 부끄러움이 얼마나 자기모순적인 부끄러움인지를 끊임없이 나와, 독자에게 각성시키고,구치소 앞의 소년은 내 아들과 여러면에서 동일시되는 인물로 등장한다. 아버지와 한 소년이 작품의 앞 뒤에서 중요한 배경이자 의미가 되어준다. 그리고 연주는 나의 가장 부끄러운 부분의 희생자이기도 하고 폭로자이기도 하다. 


  쓰고 나서 보니 이 작품이 정말 잘 만들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 아버지의 짧은 이야기가 중요한 키이고 나 또한 그 열쇠 구멍 너머의 이기적이고 졸렬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달음. 그런데 부끄러운 생각과 행동을 남모르게 하고서는 떳떳한 척 연기를 하며 자신과 타인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나 할까. 작금의 사태를 보면 자신이 하는 연기가 연기가 아니라 진짜인 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에 서글픔을 넘어 분노스러울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0년 3월





  소설이란 외로움과 괴로움, 소통 안되는 사회와 개인 간의 불목을 그리고 삶의 어느 국면에서  발생한 특별한 이야기를 다룬다고 대개는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의 내면과 심리가 소설의 가장 특징적인 소재라고, 소설은 인생을 다룬다고 흔히들 말한다. 

  그런 관습적인 소설관에서 이 소설집을  들여다보면 이게 이야기 거리인가,싶을 수도 있다. 매일 출근해서 어제와 비슷한 일을 하고 그것으로 생계를 삼는 도시의 화이트칼라의 일상이 소설의 주 소재가 될 수 있을까 싶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은 나오자마자 많은 독자를 거느렸다. 그간 볼 수 없었던 매일의 노동이 겪는 치열함과 비루함, 그 일자리를 얻기 위해 쌓고 노력했던 지난함, 수많은 예기치 못했던 상황들과 자기가 사라지던 순간들,  그런 일 자체에 대한 보고서이면서 그 일을 둘러싼 사람들의 절망이 그려지고 한편으로는 일 때문에 바라볼 수 있는 희망이 그려진다. 


  작가가 화자가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작가 장류진은 "여기 실린 소설들은 모두 회사에 다니는 동안 발표한 작품"이라고 작가의 말에서 밝힌다. 작가가 얼마나 치열하게 직장 생활을 했는지, 이 소설집을 다 읽고나면 느껴진다. 젊은 여성의 직장 구하기, 능력이 더 뛰어난데도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동기보다 훨씬 적은 연봉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충격과 허무, 급여를 포인트로 받은 여직원이 포인트를 현금화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 등,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일의 단면들이 드러난다. 

  그러는 과정에서 작가는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소설을 읽고 쓰면서 위로를 받았고, 반대로 아무리 붙잡고 있어도 소설이 잘 써지지 않을 때는 시간을 들인 만큼은 물리적인 결과물이 나오는 회사 일에서 위안을 얻곤 했다"고 한다. 회사생활이란 게 녹록치 않음을 보여주는 말이면서 한편으론 그래도 일이라는 건 결과물이 있다는 돼서 나름의 자기 증명이 된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을 쓰는 일, 그건 내 오래고 오랜 비밀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소설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동안은, 늘 누군가 내 귓가에 대고 '네가 무슨 소설을 써? 소설 쓰고 있네...'라고 속삭이며 하하 웃곤 했는데 그건 슬프게도 나였다. 그래서 절친한 친구나 가족에게조차, 소설을 쓴다는 사실을 꼭꼭 숨겨왔다.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신나게 웃고 떠들다가도, 내게는 너무도 중요한 나의 일부를 이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내가 자초한 일이면서도-한없이 외로웠다." 

  소설을 쓰겠다고 한 수많은 지망생들이 이런 자책과 슬픔을 느낀 적이 얼마나 많은지, 긴 시간 동안 이런 감정에 얼마나 시달리는지,  그래서 다른 무언가를 찾기도 하지만, 다시 돌아서곤 한다. 정말 못 말리는 병이다. 

  '일의 기쁨과 슬픔'보다 나를 돌아보며 독후감을 마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평범한 인생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2월


  차페크는 처음 읽는 작가이다. 그는 '카프카, 쿤데라와 함께 체코 문학의 길을 낸 국민작가'라고 한다. 희곡, 에세이, 비평, 동화, 번역에 이르기까지 그는 장르를 불문한 작품들을 썼다. 

  또한 고국인 체코가 독일에 침략당하자 동맹국들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작가들의 탄원서를 작성하였으며 정부 성명을 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면으로는 조국을 위해 심혈을 다 쏟은 작가였던 것 같다. 이런 이유로 노벨 문학상 후보로 재차 지목되었지만 독일이 두려워서 스페인에서 상 주기를 꺼렸다는 설이 있다고도 한다. 

  1938년 12월 25일, 망명제안이 있었지만  고국인 체코에 머무르던 그는 인플루엔자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그리고 평생 동지였고 보호자였던 그의 형 요세프 차페크는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그가 죽은지 7년 후인 1945년 4월 사망한다. 

  젊은 나이(48세)에 죽은 카렐 차페크는 그래도 한편으로는 복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문학적 소양이 있는 부모와 할머니까지 가문 자체가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의 형이나 누나 또한 같은 길을 걸었기 때문에 작가로서는 유복한 환경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데 차페크를 보며 그가 너무 빨리 죽은 것은  아닐까 싶다가 돌연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재능 전부를 완전히 발산했다. 아주 젊어서부터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원하던 분야에서 맘껏 펼쳐냈다. 그렇다면 그가 48세에 죽었다고 해서 너무 이른 죽음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80살에 죽어도 자신의 재능 한 조각도 표출하지 못하고 죽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평생을 낯선 길에서 두리번거리며 절망하다 자신이 짊어지고 온 에너지를  자신이 원하는 일에 쏟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은 지구상에 넘쳐난다. 그에 비하면 그는 태어날 때 가지고 온 에너지 전부를 발산하고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을 다 했으니 그만하면 짧기만 한 생이 아닐지도 모른다. 삶이란 시간만으로 측정할 수 없는 다양한 삶의 형태와 그 내용으로 재고되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요절한 천재들을 잠시 생각해보니 무한정 아쉽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부럽기도 했다. 자신이 원하는 일에 투신하고 거기에 인생을 걸었던 그들의 짧은 생은 그만큼 치열하게 남들보다 몇 배 더 열렬히 살았다는 뜻도 되니까. 그래서 누구보다 빨리 기력은 소진되고 에너지는고갈되었다는 뜻도 될 테니까... 

  

  작가 이야기는 이만하고 '평범한 인생' 책 이야기로 넘어가야겠다. 

  자신을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전직 공무원이었던 남자가 죽었다. 그는 동맥 경화로 일흔도 되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을 한 점 오류 없게 하기 위해 정리하고 또 정리하던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의 서랍과 자신의 유품이 될 물건들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시간이 남았고 그는 자신의 인생 전체를 되돌아보며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고 평범한 생을 살았노라고 썼다. 어려서부터 결혼하고 승진을 거듭해 고위직 공무원이 되었을 때까지를 기록하고 보니 정말 성실하고 조용하게 산 평범한 사람의 전형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글이 끝나가려던 즈음에 그는 자신이 쓴 글이 온전한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거짓말을 해야 할 사람도, 이유도 없었으니까." 그의 솔직한 내면이 그에게 말을 건 것이다. 

  뒤돌아보니 표피적으로는 평범한 생처럼 보였지만, 실제 그렇게 살았는 줄 알았지만 그의 내면은 그렇게 평범하고 고요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보니 그는 한때 열정적이고 타락했던 시절이 있었고 숨겨져있었지만 어둡고 더러운 것에 빠져들던 어린 시절도 있었다. 그렇게 그의 내면 깊숙이 숨겨있던 다른 자아들이 줄줄이 나타나자 그는 굉장히 복잡한 사람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일단 그의 가장 주된 자아는 평범한 자아(성실하고 책임감 강하고 조용한)였고 이것은 그를 공무원으로 사는 데에 적합한 성향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자. 인간이 그토록 선하고 조용하게 사는 것이 가능한가. 그는 평범한 자아를 내세우고 살았지만 사실 그 근저에는 억척스런 자아가 나름의 노력과 뻔뻔할 정도로 이기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의 결혼과 승진, 어린 시절 공부를 잘했던 이유도 사실은 억척스러운 자아의 성취였다. 그리고 이 억척이만큼 중요한 다른 자아도 있었는데 그건 우울한 자아였다. 이 자아는 그를 우울하게 하고 걱정하게 하고 두려움 때문에 큰 일을 하지 못하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위험한 용기를 용인하고 낭만적인 취향에 호응하여 그를 섬세한 인간이 되게 했다. 주인공은 이 세 자아가 가장 주된 자아였다고 시인한다.

  그리고도 젊은 시절 한때 시를 썼던 그의 내면에는 시인이 있었고, 늘 무언가를, 닿을 수 없는 무언가를 그리워하던 낭만주의자가 있었으며, 전쟁시에는 철도역에서 근무하는 자신의 지위 때문에 알게 되는 철도상황에 대한 비밀을 레지스탕스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한 적도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 집시 여자아이를 따라 가 캄캄하고 지저분한 집 안에서 문을 잠그고 기이한 행동을 했던 더럽고 지저분한 것을 편안해했던 자아, 성당 앞 마당에서 지나쳤던 거지처럼 모든 걸 버리고 유랑하고 싶던 거지 자아도 그의 내면엔 꺼지지 않고 살아있었다.

  죽음이 다가오는 시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죽음을 맞아들이는 시간, 그는 그 거지 자아가 아직까지 자신에게 남아있었고 마지막 순간에 그 자아가 자신의 전부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러고보니 자신 안에 수많은 자아가 있었고 그 자아들 중에 어떤 다른 자아가 자신을 지배했다면 자신은 다른 사람으로, 공무원이 아닌 다른 신분으로 살았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뿐이 아니라 우리가 겉으로만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수많은 자아를 갖고 있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나이지만 동시에 다른 나일 수도 있었고 다른 사람도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나이면서 다른 사람이며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이면서 나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신의 생 전부를 돌아보고 자신의 내면에 있는 수많은 다른 자아들을 이해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고 그들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추수감사절에 교회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각기 내 내면에 깃든 하나의 자아들과 상통하고 있고 그들도 그들 내면의 자아들이 거기 모인 수많은 사람들과 연관을 맺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교회에 앉아있는 사람들 전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며 그들은 하나일 수 있다. 그들은 나를 대표하고 있으며 나도 그들 중의 누군가의 이루지 못한 자아를 대표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 전부는 서로와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을 앞둔 철도청의 고위 공무원인 그는 그래서 이렇게 마지막을 쓴다. 

  "이제 시간이 되었군. 객차의 문이 철커덕 잠기고 모두들 거수경례를 한다. 출발. 기차는 전철기를 지나 어둠 속으로 무한궤도 위를 달리기 시작한다. 잠깐 기다려. 저기에는 사람들이 가득 탔다. 마르티네크 아저씨가 앉아 있고, 주정뱅이 대위가 구석에서 곤히 잠들어 있다. 얼굴이 검은 소녀가 창문에서 코를 들이밀며 혀를 쭉 내민다. 마지막 객차의 짐칸에서 선로 제동수가 깃발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기다려, 나도 함께 가겠네!"


 이 책을 읽고 나면 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있던, 또는 간혹 표출되는 또다른 자아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도 이 작가처럼 나 자신의 주된 자아와 보조적 자아들을 써 보았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테지만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여덟 개의 자아를 발견해냈는데, 쓰다보니 여덟 개의 자아도 많은 게 아니었다. 자아라는 말이 거창하다면 성향 정도로 고쳐서 말해도 되겠다

 일단 평범한 자아는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성향이고 사회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러기 위해 연기를 하거나 연출을 하기도 할 것 같다. 그리고 이 주인공처럼 억척스런 자아 또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그러면서도 성공하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성향일 테고, 우울한 자아 또한 누구에게나 내면에 깔린 성향일 것이다. 성공이라는 게, 인정받는다는 게 그리 쉽지 않은 일이고 사랑이나 행복이 그렇게 가깝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 이 세 자아를 가장 많이 언급할 것 같지만 조사를 해보지 않았으니 모르겠다. 

 그래, 어쨌든 나는 내게 아주 중요한 성향들을 끄적여보았다. 

 평범한 자아, 노력하는 자아, 우울한 자아, 불안한 자아, 꿈꾸는 자아, 굴종하는 자아, 냉소하는 자아, 용기있는 자아, 질투하는 자아, 허무주의에 빠진 자아, 거지 자아. 11개에 이른다. 

 책 한 권을 읽을 때마다 배우는 게 참 많지만 차페크의 이번 책도 많은 수확이 있었다. 또 며칠 지나면 완전 까먹겠지만....

  코로나로 아팠고 후유증이 아직도 끝나지 않아 모든 면에서 능률이라곤 없다. 하긴 언제나 매사에 능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 지금만 이런 건 아니었다. 어쩜 내게 가장 주된 자아는 평범한 자아와 더불어 나태한 자아가 아닐까 싶다. 

  '돈키호테'를 택배시켰고(기대가 정말 크다), 그 후에는 다시 차페크의 철학3부작 중의 하나인 '호르두발'이나 '별똥별'을 읽어야겠다. 독서야말로 참 스승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산월기

나카지마 아쓰시 지음, 김영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6년 10월



  이 책 띠지에 쓰인 '60여 년 동안 일본 교과서에 수록된' 이라는 구절에 호기심이 동했다. 도대체 얼마나 지고의 윤리와 삶의 핍진성을 띠었기에 한 작품이 교과서에 60 년 간 실릴 수 있을까. 
  
  '산월기'는 자신의 생을 뒤돌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한탄했을 법한 회오를 품고 있다. "인생이란 아무것도 이루지 않기에는 너무나 길지만 무언가 이루기에는 너무나 짧다"는 경구가 실로 우리의 생을 표현하기에는 딱 들어맞는 것 같다. 그러니 정작 중요한 것은 생의 유한한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현재를 어떻게 살고 있느냐일 것이다. 길고 짧은 시간은 이미 정해진 시간이라 인간으로선 불능이고 그런 와중에도 그 시간을 어떻게 채우는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산월기'의 이징은 자신이 가진 '약간의 재능을 다 허비'하고 끝내 맹수 호랑이가 되고 만다. 
  맹수라니, 사람이 맹수가 되었다고? "인간은 누구나 맹수를 키우는 사육사이며, 그 맹수는 바로 각자의 성정이라고 한다." 쓸데없는 자존심과 거만한 수치심으로 자신과 타인을 괴롭히며 상처를 주고 그러다 외모까지 '속마음과 어울리게 바꾸어버'려 결국 호랑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까는 왜 이런 운명이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지는 않다. 인간이었을 때, 나는 애써 남들과의 교제를 피했다. 사람들은 나를 오만하다, 거만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은 그것이 거의 수치심에 가까운 것이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 
  나는 시로써 이름을 떨치려고 생각하면서도, 스스로 스승을 찾거나 기꺼이 시우와 어울리며 절차탁마를 하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또한 나는 속물들 사이에 끼는 것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이 모두가 나의 소심한 자존심과 거만한 수치심 탓이었다. 내가 옥수슬이 아닐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애써 각고하여 닦으려 하지 않았고, 또 내가 옥구슬임을 반쯤 믿는 까닭에 그저 줄줄이 늘어선 기왓장들 같은 평범한 속인들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나는 점차 세상에서 벗어나고 사람들과 멀어지며 번민과 수치와 분노로써 내 속의 소심한 자존심을 더욱 살찌게 했다."
  위 글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나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도 조금 생각나게 한다. 속으로는 자신을 대단히 고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을 드러낼 자신은 없고 속인들을 속으로 비웃으면서도 세상과 섞이지 못해 외롭고 괴로웠던 그들과 닮았기 때문이다. 이들 주인공들은 전부 나와 한통속인 인간들이다. ㅠㅠ

  이 산월기는 아주 짧은 단편이다. 그러나 무게로 치자면 대단히 무거운 작품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읽으면 누구나 깨닫게 되고 말 테니까. 몇 페이지 읽으면서부터 나는 필사를 한 번 제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책의 구성은 '중국의 고담'에서 가져온 이야기들이 9편, '식민지 조선의 풍경'아래 묶인 3편해서 모두 12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이중 공자와 그의 제자인 자로의 이야기도 재미있었고 조선에서 작가가 직접 겪은 듯한 '범사냥'과 '순사가 있는 풍경'도 좋았다. 조선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탓인지 경성을 고향처럼, 그러면서도 잘 아는 이국의 도시처럼 말하는 듯한 이중적인 뉘앙스가 특이했다. 작가 나카지마 아쓰시는 어려서부터 이미 감수성이 예민하고 지성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특히 '순사가 있는 풍경'을 읽으면 일본 학생인 그가 조선인이면서 일제에 충성해야하는 순사에 대한 고뇌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는 게 사뭇 놀라웠다. 어릴 때에는 그런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할텐데 말이다. 이런 천재적이고 양심적인 작가 나카지마 아쓰시는 33세에 기관지 천식으로 요절했다고 한다.ㅠㅠ

다른 단편들에 대해서는 생략하겠다. 산월기 하나만으로 충분해서라기보다 독후감을 쓰는 일이 별로 재미있지가 않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