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위너 1~2 세트 - 전2권 베어타운 3부작 3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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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배크만의 [위너 1-2]을 읽었다. 스웨덴이라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위치한 북유럽 국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 그런지, 아님 하키를 빼놓고는 도저히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기 때문인지, 요즘 북유럽이 영하 40도에 육박하는 혹한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뉴스 때문인지 읽는 내내 나도 어딘가의 빙판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베어타운과 헤드라는 하키팀을 둔 스웨덴 북쪽의 어느 시골 마을이 반드시 있을 것만 같은 상상을 불러일으켰고, 작가가 마치 하늘 위에서 그 지역의 전방위를 내려다보며 그 마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자연스럽게 묘사한 것처럼 느껴졌다. 벌써 6년이 되어가는 베어타운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를 읽게 되었을 때, 이 장구한 이야기가 이렇게 마무리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냥 추운 나라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하키에 열광적인 사람들이 양쪽으로 갈라져 얼마나 옥신각신하는지, 그 안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드러나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베어타운]은 주인공 가족인 페테르 안데르손의 딸인 마야 안데르손이 파티에 갔다가 베어타운 하키팀의 기대주인 케빈에게 성폭행을 당하면서 급진전하게 된다. 


십대 청소년이 범한 성폭행이라는 다루기 쉽지 않은 소재를 선택했다는 것이, 더불어 북유럽이라고 하면 막연히 고소득 국가에 복지가 가장 잘 준비된 나라라는 선입견으로 인해 그런 흉악한 범죄률이 몹시 낮지 않을까란 아무 근거없는 믿음을 보기좋게 부숴버렸다.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든지 입에 올리기 조차 꺼려지는 악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며, 생각하면 할수록 우울함과 무력함이 밀려오는 사건들을 외면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기에 그 쉬운 선택을 해왔던 지난날의 역사를 보기좋게 비웃는다. 베어타운 시리즈를 읽노라면 우리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인간의 추악한 면모를 낱낱이 들춰내는 것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베어타운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의 제목이 [위너]인 것은 아이스링크 위에서 상대편을 무참히 넘어뜨리고 퍽을 세차게 때려 골을 넣어 큰 스코어 차이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성정체성이 드러나 마을과 하키를 떠난 벤이가 무참히 가해지는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낳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희생이라는 어머어마한 사랑만이 가능함을 몸소 보여주며 진정한 위너임을 온 마을에 알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시리즈의 대단원을 마무리하는 이야기라 그런지 이번 작품에는 여럿 인물들의 죽음이 그려진다. 심지어 전직 A팀 코치였던 수네가 기르던 개이자 베어타운 하키팀의 마스코트였던 ‘탕’이 쥐약이 들어간 간 파테를 먹고 죽는 일까지 벌어진다. 펠센이라는 이름의 오래된 맥주집을 운영하던 라모나는 집에서 고요히 죽음을 맞이하고 라모나가 자식처럼 생각했던 불량배 티무를 비롯한 검은 자켓의 무리들은 그녀의 죽음을 몹시도 슬퍼하고 그리워하게 된다. 그리고 전편에서는 주이공인 페테르와 각을 세우며 갈등의 대척점에 있던 티무의 무리들이 오히려 이번 시리즈에서는 페테드를 도와주는 관계의 전복이 일어난다. 라모나의 죽음과 펠센이라는 맥주집은 그냥 무턱대고 시간을 죽이는 공간이 아니었음을 페테르와 티무의 변화를 통해서 보여준다. 


이야기는 마야의 그 사건이 벌어지고 2년 반이란 시간이 지난 이후 라모나의 장례식을 계기로 집을 떠났던 이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면서 시작된다. 마야의 사건은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알게 된 후 온갖 구설수가 난무하는 가운데 마야를 지키기 위해서 아빠 페테르와 엄마 미라의 헌신적인 사랑 덕분에 마야는 자신을 온전히 내버리지 않게 되고, 자신이 좋아하던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천킬로나 떨어진 남쪽 대도시로 떠나게 된다. 케빈과 단짝이었던 벤이는 마야 사건으로 동성애자임이 드러나 아시아 지역을 떠돌며 방황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야가 피해자임을 증명했던 용기 있는 목격자 아맛은 NHL에 드래프트에 떨어지면서 하키를 손 놓게 된다. 어쩌면 이렇게 베어타운 하키팀을 중심으로 삶의 기반을 삼았던 10대 청소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무엇을 계기로 성장하게 되는지 보여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전작에서는 주로 베어타운 하키팀을 이루는 이들의 이야기가 주된 흐름이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베어타운과 영원한 라이벌인 헤드팀의 마을 이야기도 큰 축을 이루고 있다. 베어타운팀에 페테르와 미라와 마야가 있다면 헤드팀에는 요니와 한나와 테스와 동생들이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족은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양 팀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횃불을 들고 행진하는 봉기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기점이 된다. 그리고 이 두 가족이 이렇게 양쪽 마을의 정신적인 지축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한 선한 인간의 영향력이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누군가 아주 오랜시간 묵묵히 몸으로서 올바른 삶의 방향을 보여준다면 설사 불량배와 깡패짓을 일삼던 이들까지도 결국은 그 선한 누군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고 심지어 그 선한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존경이 담긴 시선마저 외면할 수 없게 만든다. 베어타운의 티무가 헤드의 레브가 그렇게 페테르와 요니를 도와줄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저자가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은 주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가 어떤 요란한 방법을 다 동원한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악은 문 틈새과 열쇠 구멍으로 쉼없이 새어나오기에, 그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게 새어나오는 악을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벤이가 보여주었던 사랑이고 남겨진 사람들은 벤이를 그리워하며 또 다른 벤이의 모습으로 사랑이라는 선물을 누군가에게 증여하는 것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마테오가 열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사이비 종교에 현혹되어 자식을 돌보지 않는 부모의 무관심과 더불어 누나 루트를 죽음으로 몰고간 사이코 로드리와  로드리의 성폭행을 방관한 옹알이에 대한 분노만이 아니다. 마테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무언가의 일부분이 될 수 있는 소속감이었다. 마테오가 추운 겨울밤에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넘어져 체인을 갈아끼우며 피를 흘려도 아무 관심이 없다면 결국 마테오는 레브에게 총을 구하러 가게 되는 것이다.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선물은 소속될 수 있는 집단이다. 우리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무언가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남들과 다른 아이가 상처받는 이유다. 어느 누구와도 어린 시절을 공유한 적이 없기에 학교에서 찍은 사진을 나중에 보아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아이. 사람들의 울타리 밖에 있으면 너무 추워서 혼자 얼어 죽을 수도 있다.(2-233)”


“우리는 악을 물리칠 수 없다. 우리가 건설한 세상의 가장 견딜 수 없는 점이 그거다. 악은 근절하지도 어디 가두지도 못한다. 그걸 없애겠다고 폭력을 쓰면 쓸수록 악은 문 틈새와 열쇠 구멍으로 스며나오며 점점 더 강력해질 뿐이다. 악은 우리 안에서 자라나기에, 어떨 때는 심지어 우리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들 안에서, 또 어떨 때는 심지어 열네 살짜리의 안에서 자라나기에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그것에 대항할 무기가 없다. 그것에 대처할 수 있도록 사랑이는 선물을 받았을 뿐이다.(2-486)”


#프레드릭배크만 #위너 #다산책방 #베어타운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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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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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작가의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를 읽었다. 고독과 침묵은 훈련이 필요하다. 시간이 참 빨리 간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다가도 갑자기 혼자 남겨졌을 때 당황스러운 마음은 잠시 나를 훓고 지나갈 뿐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아무런 방비책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를 못견디게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고독과 침묵이다. 사방이 가로막힌 작은 독방에 감금되기라도 한 것처럼 째깍째깍 초침이 지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세차게 머리를 뒤흔들며 이건 정말 아니라고 부정의 독설을 날린다. 그래서 문을 걷어차고 나가 세상에 온갖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나의 알몸이라도 드러내보여줄 것처럼 낱낱이 마음의 이야기를 토해내리라 다짐하지만, 막상 마주한 이들과 시답잖은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다가 허무와 공허가 물밀듯이 밀려와 다시금 나를 유폐시키려 한다. 고독과 번잡스러움, 침묵과 소음은 짝을 이루어 나를 저울질한다. 어느 쪽으로 가든 나의 선택으로 인해 삶은 변화된다. 


참으로 억울하게 느껴지는 것은 오랜 훈련으로 고독과 침묵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단련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하더라도 단 하루만의 번잡스러움과 소음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 고독과 침묵은 다시금 처음의 고통의 순간으로 나를 되돌려 놓는다는 것이다. 마치 지난 나의 모든 훈련이 헛되기라도 한 것처럼. 에라 모르겠다의 심정으로 어차피 이렇게 되돌려지게 될텐데 그냥 범부처럼 뇌피셜을 마구마구 내뱉으며 살아도 되지 않을까란 체념에 이른다. 하지만 그 자포자기의 마음은 왜 이렇게 오래가지 못하는 것일까. 자신을 내버려두는 것 또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 금방 겁이 나서 다시금 고통의 시간으로 나 자신을 초대한다. 실패와 낙담의 연속이더라도 다시금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기꺼이 마주하게 된다. 


저자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수도원 기행을 꽤 감명깊게 읽었던 터라 이번에는 어찌보면 성지순례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을 방문했다는 예고에 더욱 기대가 되었다. 저자도 언급했듯이 이번 책은 세 번째 수도원 기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저자의 신앙을 고백하는 문장들이 빼곡히 차 있다. 특히나 최근 가자 지구 전쟁으로 인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티나의 오랜 갈등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기에, 예루살렘이 왜 그렇게 서로 다른 종교에 가장 중요한 성지인지부터 그리스도교의 시점으로 예수님의 삶과 연결된 굵직한 사건들을 기념하는 장소에 대한 묵상으로 가득하다. 사실 순례를 떠나게 되면 수천년이란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 장소가 주는 신비한 느낌이 있다. 성경에 나오는 역사적 사건의 장소에서 미사를 봉헌하며 그때의 사건을 되새기며 예수님의 말씀을 곱씹어 보면 그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게 된다. 


특히나 저자가 예루살렘과 나자렛을 오가며 들려주는 프란치스코 성인과 샤를 드 푸코 성인의 이야기는 우리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마주하기 위한 용기의 실마리를 건네 준다. 단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엄청났기에 가능했던 고통으로의 투신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정면으로 마주하고자 하는 성인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저자의 시선과 묵상으로 잠시나마 함께 그곳의 공기를 마시는 듯했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 나의 삶의 목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원론적이고 근원적인 이 질문 앞에서 성인들의 삶의 흔적들은 이 물음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던지는 것을 포기하지 말 것을 권한다. 


“그저 어제처럼 사는 것, 내게 젊은이들보다 알량한 권력이 약간 있어, 어제처럼 살아도 나는 불편하지 않고 나만 불편하지 않은 것, 이것이 늙음이다. 죽음보다 못한 늙음을 우리는 흔하게도 본다.(73)”


“너의 자세는 무엇이냐? 이 삶을 바라보는 너의 방향은. 그가 성자가 된 것은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신을 만나 황홀한 접선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고통은 성자가 아니라도 온다. 상처도 온다. 가난도 오고 멸시와 따돌림도 온다. 그때 비로소 인간은 선택하는 것이다. 성자가 될 것인지, 희생된 비참한 늙은이가 될 것인지.(193)”


#공지영 #너는다시외로워질것이다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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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지나가다 소설, 향
조해진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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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작가의 [겨울을 지나가다]를 읽었다. 소설, 향 시리즈 8번째 작품이다. 한파가 몰아닥치는 시기라 그런지, 소설의 소제목인 동지가 가까워서 그런지, 엄마를 떠나보낸 소설 속 주인공 정연의 마음이 너무나도 깊이 와닿아서 그런지 나 또한 깊은 겨울을 지나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냥 찬바람이 부는 쌀쌀한 온도가 아니라 잠시도 밖에 서 있기 힘든 매서운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시기가 오면 마음이 더 쓸쓸해지는 기분이다. 몸의 어딘가에도 서리가 맺히고 점점 굳어지는 것처럼 삐그덕거리는 것 같은 착각은 행여나 비슷하게 굳어진 무엇과 부딪혀 깨지기라도 할까봐 더욱 몸을 사리게 만드는 것만 같다. 이렇게 세상 모든 것을 얼게 만들 정도로 추워 모든 기능을 멈추게 할 것만 같지만, 실상 두터운 얼음 밑에서도 생명의 기운은 사라지지 않고 조금씩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정연을 위로하는 "모든 건 잊힌다고, 세상에 잊히지 않는 것은 없다고."라는 엄마의 말처럼, 세상의 절대 강자인 시간은 무던히도 흘러가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든 쓸쓸함과 허전함을 밀어내고 만물의 생명을 다시 숨쉬게 만드는 촉촉한 비를 내리는 때를 가져온다. 그렇게 물기를 흠뻑 머금은 것들은 새싹을 튀우며 언젠가 발화할 아름다움을 한껏 웅그린 채 감춰두고 고이고이 키워낸다. 서울에서 분주하게 편집 일을 하던 큰 딸 정연은 엄마의 투병과 죽음으로 엄마가 칼국수 가게를 하던 집으로 내려와 엄마의 흔적을 붙잡고만 싶어 한다. 


누군가 돌볼 사람이 있다는 것은 슬픔과 무력의 늪에서도 스스로 걸어나갈 수 있는 힘을 북돋워주기에 정연의 동생인 미연은 언니를 혼자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 못내 걱정스럽지만, 정연은 엄마가 키우던 정미라는 개를 산책시키며 조금씩 살아갈 의지를 보듬게 된다. 그리고 엄마가 남겨둔 김치를 덜어내 칼국수를 먹으며 데워진 몸은 남겨진 이들의 시간이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음을 인정하게 만든다. 엄마가 남겨준 것은 머물 집과 옷가지와 털신만이 아니라 정미와의 산책 그리고 정미의 보금자리를 맡긴 목공소 주인 영준과의 만남 또한 해당되었다.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영준이 갑자기 일을 그만두고 한적한 곳에 취미생활로 하던 목공소를 열게 된 데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 짐작하게 되는데,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영준의 사정이 드러나게 되고 영준의 가슴 아픈 고백과 다현이라는 소녀가 머물던 자리를 방문함으로써 정연 또한 엄마와의 이별을 제대로 마주하게 된다. 


어른이 되고 하던 일에 익숙해지면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충분히 계획하고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무리 철두철미하게 준비한다 하더라도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이별의 시간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무상함,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무력함의 긴 터널을 지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 또한 나의 의지와 노력과는 무관하게 선물처럼 다가온다. 마치 내가 흘려온 눈물에 대한 보상이라도 되는 듯이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따스한 손길과 손수건의 부드러운 만남은 잃어버린 끈을 다시 이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만들어 준다. 


"칠십일 년 동안 엄마의 몸 안에 축적된 시간과 지상에는 더 이상 흔적을 남기지 못할 미래으 ㅣ시간까지 함께 묻혔다. 엄마의 삶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과 인연을 맺었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미완성된 역사가, 하지 못한 말과 가보지 못한 곳, 끝내 이루지 못한 일들까지...(41)"


"집으로 걸어가는데 바람 끝에 둥글고 나른한 온기가 배어 있는 게 느껴지긴 했다. 겨울에서 봄 사이의 국경을 지나가는 기차 안의 승객이 된 것만 같았다. 기차는  느리게, 그러나 쉬는 일 없이 규칙적으로 달릴 것이고 겨울 나무와 봄 나무가 섞여 있는 기차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주머니 안을 을 뒤적이면....

시곗바늘은 없지만 타이머는 내장된, 그러나 그 타이머가 언제 멈추는지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시계가 내 손에 딸려 나올 터였다.(131)"


"언제나 그랬다. 조해진의 소설을 읽는 것은 언젠가 크게 발을 헛디뎌 무너져 내렸을 때 스스로 일으켜 세울 힘을 비축해두는 일이고, 적대적인 얼굴을 하고 불쑥 나타난 타인 앞에 잠시 멈춰 그가 나쁜 건지 아픈 건지를 헤아려볼 수 있는 숨을 준비해주는 일이고, 미래로 함께 나아가야 할 이 시대의 가장 약한 존재들의 이야기를 들어두는 일이다. [겨울을 지나가다]를 읽으면서는 이미 아프게 겪었던 죽음들을 다시 제대로 애도할 기회를 갖는 동시에, 언젠가 이런 커다란 상실을 마주했을 때, 시간을 들여 요리한 칼국수를 맛보고 씹고 삼키는 행위에만 온전히 몰두하며 추상적인 고통이 마음에 그어놓은 어지러운 선들을 지워내고 구체적인 감각으로 삶을 채워가기 시작했던 정연을 떠올리며 어떤 시도를 해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쌓아둔다. - 김혼비(6)"


#조해진 #겨울을지나가다 #소설향8 #작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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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는 사생활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5
장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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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영 작가의 [취미는 사생활]을 읽었다. 은행나무 시리즈 N 15번째 작품이다. 거주 불안. 영혼까지 끌어모아서라도 자가를 마련하지 않으면 영원히 집주인에게 질질 끌려다닐 것만 같은 막막함을 하염없이 퍼붓는 시대이다. 은협의 가족이 그렇다. 은협의 남편 보일씨의 직업이 무엇인지, 벌이는 얼마나 되는지 나오지 않았지만 아이가 넷인데도 아들 둘을 태권도 학원에 보내고 방 3개짜리의 전세 아파트에 살고 있다면 아주 나쁜 편은 아니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보일이 은밀한 취미생활을 시작하며 숨통을 틔우고 싶게 만든 이유 중의 하나는 빚을 져서 라도 아파트를 구매하자는 의견에 은협이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은협이 마음을 바꾼다 하더라도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져야만, 아니 대출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 이를 정도로 아파트 값은 올랐고 은협의 가족은 영원히 전세살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아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집주인이 아들에게 신혼집으로 내줄 것이니 어서 빨리 집을 나가라고 독촉한다. 집주인이 기존 전세세입자에게는 5% 이상의 전세비를 올릴 수 없기에, 새로운 세입자를 찾으려는 꼼수인 것인지 진짜로 아들의 신혼집을 마련해주려고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대부분의 집주인들이 자기가 들어와 살 거라는 말로 세입자를 내보내고 월세로 바꾸어 이득을 취하려는 경우가 더 많지만, 은협은 집주인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낼 방도가 없고, 괜히 보일러를 교체할 것인지 물어보려고 전화해서 이런 파국을 맞게 된 것이라 자책한다. 은협에게 남은 선택은 서울 근교의 지방으로 이사하던지, 서울에 남으려면 빌라로 이사하는 것 밖에 없었다. 하지만 빌라는 너무나도 싫었다. 


은협의 경우처럼 초등학교 남학생 두 명의 자녀와 아직 곧 취학을 앞둔 유치원생 소연과 갓난 아기 민희까지 네 명의 아이를 두었다면, 소연이 피가 날때까지 긁어서 피부과를 데리고 가는 동안 민희까지 돌보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누군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갓난아이를 잠시라도 맡아준다면 훨씬 더 수월하고 빠르게 소연이의 진료를 마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소설의 화자인 ‘나’는 은협을 도와주는 착한 이웃으로 등장한다. 23층짜리 아파트 맨 윗층에 사는 은협과 바로 아랫층에 사는 ‘나’는 민희를 돌봐주다가 소연이 이모라고 부르며 애착을 갖게 되면서 언니, 동생 사이로 가까워지게 된다. 화자가 나중에 은협의 전세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자신의 집을 은협에게 전세로 내주고 자신은 은협이 세입자로 있던 곳에 새로운 세입자로 들어가는 나름의 희생 정신을 발휘한 결단을 내리며 농담처럼 층간 소음을 복수할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은협의 미안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을 애써 그럴 필요 없다고 통 큰 결단을 내린 사람의 말처럼 들리지만, 결말에 이르게 되면 화자가 농담처럼 던지 말은 진심이었을지도 아니 그런 복수의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사기를 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화자가 은협네 가족을 도와주면서 은협의 남편 보일의 은밀한 사생활을 알게 되었고, 여장을 즐기며 일상에서의 탈출을 꿈꾸던 보일은 아내와 화자의 습격으로 인해 모든 게 들통나고 난 후에야 자신이 원한 것은 여장이 아니라 잠시도 혼자 일 수 없는 집에서의 탈출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보일의 무책임한 행동이 정당화될 수 없기에 보일이 땅을 팔라는 제안에 화자가 동의한 것 또한 남편을 갑작스럽게 잃은 이가 은협의 가족을 통해 위로받고자 하는 선행이 아니었을까란 기대를 하게 만든다. 하지만 화자의 기인한 행동들과 현 프로라는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얼핏 화자가 남편의 죽음으로 삶에 대한 모든 기대를 내려놓았고 서서히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해가는 과정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든다. 결국 화자 또한 비참하고 어이없는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지만, 남겨진 은협의 가족은 그리고 소연이 착한 일을 하고 받은 10원짜리 동전 50개를 모아 마지막 선물로 전해준 새콤달콤은 너무나도 가슴 아리는 선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장진영 #취미는사생활 #은행나무시리즈N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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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레퓨테이션: 명예 1~2 세트 - 전2권
세라 본 지음, 신솔잎 옮김 / 미디어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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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 본의 [레퓨테이션: 명예 1-2]을 읽었다. 띠지에 쓰인 “당신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 무엇까지 할 수 있습니까?”라는 물음이 강렬하게 다가오며, 과연 어떤 내용이 폭풍처럼 휘몰아칠지, 어떤 반전이 도사리고 있을지 몹시 궁금했다. 눈앞에 법정 드라마 몇 회가 펼쳐지는 것처럼 긴장감이 넘치며 과연 어떤 판결이 내려질지 모른 채 두 손을 모으고 엠마 웹스터의 무죄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진실이 밝혀지고 나니 과연 엠마는 자신과 딸 플로라의 명예를 끝까지 지켜냈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한 인간이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음 이후에도 명예가 영원히 유지될 수 있는 일이 가능할까. 엠마의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나라 검사측에 해당되는 영국의 기소청 변호사가 엠마를 살인자로 만들기 위해 배심원단에게 마이크 스톡스와 주고 받은 문자 내용을 보여주는 장면은 개인의 사적 영역이 영원히 보장될 수 없다는 극단적인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지껄인 욕 몇 마디가 나중에 살인자로 판결받을 지 모를 결정적인 증언이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좋은 감점을 나누었던 상대가 갑자기 나를 배신하고 이용하려고 할 때 조차 자신이 불리해질 것을 예상하고 조심히 문자를 나누거나 응대할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결국 엠마 웹스터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인간은 누구가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단면이 존재하며, 많은 이들에게 공개가 된다면 마치 낙인이 찍힌 것처럼 괴로운 일이 지속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나 엠마가 딸 플로라를 지키기 위해서 평소와는 다른 보호본능이 폭력적인 언행을 드러내도록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엠마의 모든 삶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마이크의 죽음으로 더군다나 엠마가 재판에 이르기 전까지 수차례의 거짓말을 반복하면서 엠마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는 의심을 불러일으켰고, 증인과 증거가 없는 정황들은 엠마를 사면초가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주인공인 엠마 웹스터는 영국의 노동당 하원의원으로 나온다. 아무리 엠마가 에이미법을 만들어내는데 기여한 노동당의 투사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택시도 타지 못하고 비가 오는 날 자전거로 퇴근하는 모습이나, 다른 여성 의원들과 함께 공동 소유의 집에서 기거하는 모습등은 우리나라의 국회의원들과 너무 달라서 조금 놀라웠다. 더군다나 엠마가 지역 민원을 위해서 사람들을 직접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지만 그곳에서 혹시나 모를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도주로를 확보하거나 염산 테러에 대비해 물병을 놓아두는 모습 또한 우리나라의 의원도 과연 이런 위협을 느끼며 의정활동을 하는 것일까란 의구심이 생겼다. 엠마가 각종 폭력적이고 퇴폐적인 문구로 공격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을 호소하는 의원에게 안전이 보장된 거주지도 충분히 제공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놀랍게 느껴졌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의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우밖에 받지 못하는 엠마와 같은 영국의 여성의원들이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명예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야기는 엠마가 리벤지 포르노로 자살한 십대 소녀와 같은 일이 다시는 발생되지 않도록 에이미법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한 마이크 스톡스라는 기자와의 관계에서 사건이 발생된다. 엠마는 교사 시절 알고 지내던 플로라의 피아노 가정교사 캐롤라인과 남편의 부적절한 관계로 이혼하게 되었고, 플로라와는 주말에만 함께 지내고 있었다. 엠마의 전남편인 데이비드는 엠마가 지방의회에서만 일하기를 바랐지만, 설마했던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엠마의 분주한 생활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결국 캐롤라인의 유혹에 넘어가고 만다. 소설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시킨 것은 엠마의 재판이었지만, 엠마가 재판에 이르기까지 벌어진 모든 사건의 중심에는 보호받지 못하는 여성의 실존이 있었다. 더군다나 따돌림을 당하던 플로라가 순간적인 실수로 친구의 알몸이 담긴 사진을 전송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은 모든 문제가 복잡해지는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이런 취약함을 이용하거나 즐겨서는 안된다는 윤리적 의식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기에 현대의 수많은 여성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이는 일이 반복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어쩌면 엠마의 재판과정에서 마이크의 동료였던 후배 기자 레이철이 엠마를 공격하기 위해 내세운 공인에 대한 논리가 적용되는 잔인한 세상에 살고 있기에 불의를 보고도 외면하고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즐기는 샤덴프로이데와 같은 괴물이 재생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공인이라면 당연한 목표물이 되는 셈이죠(2-109)”


“나는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는 상태로, 괜찮아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그냥 서 있었다. 명예가 어떻게 될 거 같으냐고? 명예는 산산조각 나버린다. 찰나의 부주의로, 누가 슬쩍 한번 쿡 찌른 것으로, 어쩌면 빗나간 펀치로도 명예는 웨이터가 놓친 접시처럼 순식간에 날아간다. 레아의 것이든 플로라의 것이든 나의 것이든 캐럴라인의 것이든, 심지어 소냐나 코스타 판사의 것이라도. 명예라는 건 가장 위태로운 무언가다. 오랜 시간 쌓아도 단 몇 초 만에 무너질 수 있다.(2-250)”


#세라본 #REPUTATION #명예 #미디어창비 #신솔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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