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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레퓨테이션: 명예 1~2 세트 - 전2권
세라 본 지음, 신솔잎 옮김 / 창비 / 2023년 11월
평점 :
세라 본의 [레퓨테이션: 명예 1-2]을 읽었다. 띠지에 쓰인 “당신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 무엇까지 할 수 있습니까?”라는 물음이 강렬하게 다가오며, 과연 어떤 내용이 폭풍처럼 휘몰아칠지, 어떤 반전이 도사리고 있을지 몹시 궁금했다. 눈앞에 법정 드라마 몇 회가 펼쳐지는 것처럼 긴장감이 넘치며 과연 어떤 판결이 내려질지 모른 채 두 손을 모으고 엠마 웹스터의 무죄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진실이 밝혀지고 나니 과연 엠마는 자신과 딸 플로라의 명예를 끝까지 지켜냈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한 인간이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음 이후에도 명예가 영원히 유지될 수 있는 일이 가능할까. 엠마의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나라 검사측에 해당되는 영국의 기소청 변호사가 엠마를 살인자로 만들기 위해 배심원단에게 마이크 스톡스와 주고 받은 문자 내용을 보여주는 장면은 개인의 사적 영역이 영원히 보장될 수 없다는 극단적인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지껄인 욕 몇 마디가 나중에 살인자로 판결받을 지 모를 결정적인 증언이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좋은 감점을 나누었던 상대가 갑자기 나를 배신하고 이용하려고 할 때 조차 자신이 불리해질 것을 예상하고 조심히 문자를 나누거나 응대할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결국 엠마 웹스터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인간은 누구가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단면이 존재하며, 많은 이들에게 공개가 된다면 마치 낙인이 찍힌 것처럼 괴로운 일이 지속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나 엠마가 딸 플로라를 지키기 위해서 평소와는 다른 보호본능이 폭력적인 언행을 드러내도록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엠마의 모든 삶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마이크의 죽음으로 더군다나 엠마가 재판에 이르기 전까지 수차례의 거짓말을 반복하면서 엠마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는 의심을 불러일으켰고, 증인과 증거가 없는 정황들은 엠마를 사면초가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주인공인 엠마 웹스터는 영국의 노동당 하원의원으로 나온다. 아무리 엠마가 에이미법을 만들어내는데 기여한 노동당의 투사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택시도 타지 못하고 비가 오는 날 자전거로 퇴근하는 모습이나, 다른 여성 의원들과 함께 공동 소유의 집에서 기거하는 모습등은 우리나라의 국회의원들과 너무 달라서 조금 놀라웠다. 더군다나 엠마가 지역 민원을 위해서 사람들을 직접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지만 그곳에서 혹시나 모를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도주로를 확보하거나 염산 테러에 대비해 물병을 놓아두는 모습 또한 우리나라의 의원도 과연 이런 위협을 느끼며 의정활동을 하는 것일까란 의구심이 생겼다. 엠마가 각종 폭력적이고 퇴폐적인 문구로 공격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을 호소하는 의원에게 안전이 보장된 거주지도 충분히 제공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놀랍게 느껴졌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의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우밖에 받지 못하는 엠마와 같은 영국의 여성의원들이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명예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야기는 엠마가 리벤지 포르노로 자살한 십대 소녀와 같은 일이 다시는 발생되지 않도록 에이미법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한 마이크 스톡스라는 기자와의 관계에서 사건이 발생된다. 엠마는 교사 시절 알고 지내던 플로라의 피아노 가정교사 캐롤라인과 남편의 부적절한 관계로 이혼하게 되었고, 플로라와는 주말에만 함께 지내고 있었다. 엠마의 전남편인 데이비드는 엠마가 지방의회에서만 일하기를 바랐지만, 설마했던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엠마의 분주한 생활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결국 캐롤라인의 유혹에 넘어가고 만다. 소설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시킨 것은 엠마의 재판이었지만, 엠마가 재판에 이르기까지 벌어진 모든 사건의 중심에는 보호받지 못하는 여성의 실존이 있었다. 더군다나 따돌림을 당하던 플로라가 순간적인 실수로 친구의 알몸이 담긴 사진을 전송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은 모든 문제가 복잡해지는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이런 취약함을 이용하거나 즐겨서는 안된다는 윤리적 의식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기에 현대의 수많은 여성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이는 일이 반복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어쩌면 엠마의 재판과정에서 마이크의 동료였던 후배 기자 레이철이 엠마를 공격하기 위해 내세운 공인에 대한 논리가 적용되는 잔인한 세상에 살고 있기에 불의를 보고도 외면하고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즐기는 샤덴프로이데와 같은 괴물이 재생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공인이라면 당연한 목표물이 되는 셈이죠(2-109)”
“나는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는 상태로, 괜찮아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그냥 서 있었다. 명예가 어떻게 될 거 같으냐고? 명예는 산산조각 나버린다. 찰나의 부주의로, 누가 슬쩍 한번 쿡 찌른 것으로, 어쩌면 빗나간 펀치로도 명예는 웨이터가 놓친 접시처럼 순식간에 날아간다. 레아의 것이든 플로라의 것이든 나의 것이든 캐럴라인의 것이든, 심지어 소냐나 코스타 판사의 것이라도. 명예라는 건 가장 위태로운 무언가다. 오랜 시간 쌓아도 단 몇 초 만에 무너질 수 있다.(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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