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작품
윤고은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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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고은 작가의 [불타는 작품]을 읽었다. 15년 전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수하물로 붙이고 울쩍한 마음으로 탄 비행 중에 우연히 구스타브 클림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워낙에 작품 ‘키스’로 유명했던 터라 그의 일대기를 무심한 눈길로 따라갔었다. 그로부터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비엔나를 방문하게 되었고, 그곳에 있던 후배에 의해 벨베데레 궁전에 있는 클림트의 미술관을 관람하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 전세계의 유명한 명화를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거대한 사이즈의 실제 명화를 감상하다보니 예술가의 개인적인 삶의 내력과 무관하게 예술작품만이 갖고 있는 무한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이후 정말 가뭄에 콩나듯이 가게 되는 미술관에서 아주 오래된 명화를 감상할 때마다 항상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나리자‘와 같이 정말로 유명한 작품들은 유리관 같은 것으로 감싸져 있다고 하던데, 그 외에 대부분의 미술 작품들은 일정 거리를 유지하게 하는 안내라인을 제외하고는 그 그림을 보호할 아무런 장치도 없다는 사실이 항상 신기하면서도 불안했다. 행여라도 어떤 미친 사람이 갑자기 그림에 이상한 물질을 부어버린다거나, 칼과 같은 날카로운 도구로 그림을 상하게 한다거나, 아니면 아무도 모르게 슬쩍 그림에 손상을 가하면 어쩌나 하는 우려이다. 


예술의 영역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문화적 사치품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예술 활동은 생계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는 이들과 무미건조한 일상을 견디는 이들과 예술활동을 적극적으로 즐길 줄 아는 여유있는 이들에게 모두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고 어떠한 고통과 슬픔에도 살아갈 이유를 찾게 해 주는 매개체가 아닐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불타는 작품]은 안지아라는 작가와 로버트 재단과의 최고의 작품을 소각시키려는 긴장감을 누리는 즐거움 뿐만 아니라, 어쩌면 정여울 작가가 작품 해설에서 말한 것처럼 예술활동을 지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힘을 내라고, 그가 원하는 활동을 멈추지 말라고 격려하는 소설이 아닐까 싶다. 


사건의 발단은 빌 모리라는 어느 사진 작가가 우연히 찍은 웨딩 사진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랜드캐넌의 멋진 뷰포인트에서 찍힌 그 사진은 SNS를 통해서 주목을 받게 되지만 웨딩 사진의 주인공인 여자가 거대한 회사의 딸이라는 사실과 그녀가 실종되었다는 소문에 빌은 행여나 사법적 책임을 추궁당할까 두려워서 사실을 실토하게 된다. 하지만 빌이 말한 사실은 더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바로 그 사진을 찍은 당사자는 빌 자신이 아니라 세워놓은 휴대폰 카메라의 버튼을 그곳 주위에 머물던 파피용 개가 찍었다는 사실이다. 실종당한 리나를 수사하던 경찰은 빌의 증언을 미심쩍어 했지만, 실제로 그 개가 동일한 상황에서 사진 버튼을 누르는 것을 보고 빌의 증언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후 파피용 종의 개인 로버트는 유명해지고 리나의 아버지는 로버트와 함께 미술 작가를 지원하는 재단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한국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하다가 그만두고 배달 알바를 하던 안이지 작가는 로버트 재단의 제안을 받게 된다. 


주인공인 안이지 작가는 영어로 표현하면 ‘Not easy’는 센스가 담긴 닉네임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주인공의 이름은 아마도 예술가로서의 삶을 이어나가는 것은 단순히 재능의 우열을 떠나 지속적인 작업을 이어나가기 위한 응원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안이지 작가가 로버트 재단의 제안을 제시하는 최부장을 만났을 때만 해도 안이지 작가의 천재적인 잠재력을 로버트가 단숨에 알아보았기에, 이제 로버트 재단의 프로그램을 성실히 참가하여 유명해지는 일만 남지 않았을까란 희망을 품게 만든다. 하지만 막상 공항에 도착한 주인공은 밤이 될때까지 재단에서 마중나온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허름한 호텔에 묵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원치 않던 1/2 화장실을 공유한 방을 배정받게 되고, 유일하게 한 장 가져온 신용카드는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가 없다. 두려움에 떨며 화장시를 공유한 옆방 사람이 샤워를 다 마치고 나서도 20여분이 지나서야 화장실을 사용하려고 하는 주인공의 심리가 얼마나 불안한지 독자인 나 또한 로버트 재단의 어이없는 대응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결국 주인공은 로버트 재단의 담당자가 실수로 데리고 간 비슷한 이름의 안영이라는 사람의 여정을 책임져 주는 동안 샘이라는 인턴 직원의 응대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재단으로 가겠다고 말한다. 화장실을 공유한 옆방 남자인 오디션을 보러온 한국배우의 도움으로 우여곡절 끝에 재단에 간신히 도착하지만, 로버트 재단의 사람들인 샘과 대니는 주인공의 돌발적인 행동으로 인해 자신들이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혼란스럽게 했다며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인다. 로버트 재단의 직원들이 보인 반응은 단지 소설 속에서만 그려진 황당한 설정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나라 사람들과 서양 사람들의 사고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 같으면 엄청 화를 내거나 황당하게 여겨질 일들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별로 대수롭지 않거나 미안하지만 자연재해와 같은 상황이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그것도 이해하지 못하냐는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이곤 한다. 


아무튼 산불로 인해 재단에 도착하는 것도 수월치 않았던 안이지 작가는 재단 사람들이 보인 황당한 대응 플러스 로버트와의 첫 번째 만찬을 앞두고 받은 편지에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이게 정말로 자신을 예술가로 초대한 호스트의 환영인사가 맞는 것인지 분노가 치밀고, 로버트와의 식사를 하면서 몇 단계를 거쳐 개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가 소통되는 가운데 과연 서로의 의사가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정말로 로버트인 저 파피용 개는 정말로 대화가 가능한 존재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로버트 재단은 작가가 얼마든지 자유롭게 원하는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지원을 하겠다는 시스템을 구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로버트 재단은 철저한 자본주의의 논리를 따라 자기들이 선택한 예술가를 통해 탄생된 예술작품의 가치를 최고로 높이고 그 작품을 소각하는 의식을 통해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부가가치를 상승시키는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곳이었다. 작가가 원하는 모든 창작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배려와 작가가 창조해낸 최고의 작품을 소각하겠다는 권리 주장과 같은 아이러니를 또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주인공은 로버트와의 불편한 식사와 산책을 지속하며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작업은 하나도 진행되지 못한 채 로버트 재단을 둘러싼 Q라는 도시와 관련된 각종 이익집단의 제안을 받게 된다. 이슈가 이슈를 만든다는 말처럼 로버트 재단에서 간택한 무명에 가까운 작가가 기발한 작품을 탄생시키고 그 작품의 모티브가 된 Q라는 도시는 작가의 작품의 소각됨과 상반되게 주가가 올라가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되는 것이다. 안이지 작가는 이후 열 개의 작품을 완성하게 되고 <R의 똥>이라는 로버트가 선택할 것이라 예상되는 작품을 만들게 된다. 9개의 작품을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R의 똥>에 로버트가 원하는 것들로 구성했음에도 막상 그 작품이 소각용으로 선택되자, 주인공은 똑같은 위작을 그리며 그 작품을 소각에서 구하고 싶어진다. 소각될 것이라 생각하자, 마치 예언처럼 그 작품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소각식을 앞두고 주인공은 작품을 구하기 위해 보관된 장소로 몰래 잠입하게 되고 그곳에서 로버트를 만나고 어떤 것이 자신의 원작인지 위작인지 구분이 되지 않은 채 하나만 들고 나오게 된다. 그리고 대니는 주인공에게 로버트를 어디로 숨긴 것이냐는 추긍을 당하게 되고 주인공의 작품을 사겠다는 런던의 s 갤러리의 딜러는 소각되지 않은 작품은 구매할 가치를 상실했다는 말로 처음의 제안을 거둬들인다. 과연 로버트는 어떻게 된 것일까? 대니와의 설전에서 드러난 것처럼 로버트 재단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처음의 로버트가 지금의 로버트와 같은 존재일 필요가 있느냐는 대답으로 보아 로버트를 대체할 파피용들은 어디선가 계속해서 관리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열린 결말에 대한 대답을 작가의 말에서 찾은 듯 하다. 


“작가의 책상 위에서 발견되는 것은 잔해뿐이다. 로켓 아랫단의 추진체처럼, 이야기를 중력 너머로 쏘아 올리기 위해 온몸을 불태우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버려지는 존재. 그러므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원본을 찾고 싶다면 독자의 책상으로 건너가야 한다. 우리가 읽던 책의 모서리를 삼각형으로 살짝 접을 때,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하거나, 굳이 흔적을 남기지 않더라도 책 속의 말이 그걸 바라보는 이를 흔들 때, 책을 비로소 원본이 된다. 하나뿐인 진짜가 된다. 

우리도 책처럼 저마다 원본인데, 과잉과 과속의 시대에 그 중요한 사실이 자주 누락된다. 각자의 고유성을 증명할 만한 모서리가 떨어져나가거나 닳아서 뭉툭해지고,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뻗어나간다. 소설에 등장한 ‘아트하이웨이’는 그런 불안감을 극대화한 설정이다. 예술가의 영감에서부터 예술의 파급력까지 이르는 과정을 단축하자는 움직임인데, 영감도 파급력도 우리가 제자리를 만들어둘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다소 우스꽝스럽다. 이런 주객전도의 코미디는 언제나 나를 매료시키는 것이므로 기꺼이 그 안으로 들어가 다른 사람을 초대했다.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344)”


#윤고은 #불타는작품 #은행나무 #897번째사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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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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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 작가의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를 읽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저자만의 깨알같은 재미를 만끽했는데, 역시나 에세이에서는 소설에 버금가는 한 마디로 '깬다'는 즐거움을 넘치게 전해주었다. 아니 이렇게 자유로운 영혼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은 빨치산의 딸이기 때문인 것인가? 술을 사랑하는 아니 무엇보다도 블루를 사람들과 함께 마시는 시간을 사랑하는 저자의 오래전 추억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보통 사람들은 하나도 경험하기 힘들 것 같은 진귀한 사연들이 에세이 답지 않은 몰입감을 선사했다. 


조니워커 블루는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발렌타인 위스키와 양대산맥을 이루는 보편적으로 잘 알려진 고급진 술이 아닐까 싶다. 술에 문외한인 나도 몇 번 맛을 봤었고 심지어 맛도 모르는 술을 선물로 받거나 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도 사람들이 블루 블루 하길래 그 이하의 술은 깡소주처럼 별 볼일이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위스키를 즐기는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시바스 리갈도 꽤 괜찮은 위스키라고 하니 대체 블루는 어느 정도의 고급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좋은 술을 소주 마시듯이 돌렸단 말인가? 술을 즐기기 위해서는 신체적으로 술이 받는 체질이라는게 무엇보다도 우선이겠지만, 몸이 술을 거부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가 다 술맛을 바로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메리카노를 마치 물처럼 마시게 된 게 불과 10여 년 밖에 되지 않은 것처럼 예전에 커피는 그냥 쓴 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하루 이틀 마시다 보면 그 쓴 맛에 감춰진 각 원두만의 고유한 향과 맛이 느껴진다. 그리고 더불어 각성되는 시간은 덤이고. 아마도 위스키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백날 소주만 마시던 사람이 위스키가 숙성된 시간을 단숨에 따라잡을 수는 없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술과 거리가 먼 몸을 타고난 나는 죽어도 위스키의 진정한 맛을 알지 못할 것 같아 몹시 아쉽지만 책에 나온 저자의 술자리를 대체삼아 즐기는 시간이 되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을 때만 해도 저자가 한 때 수배까지 받으며 도망다니는 삶을 살았는지 전혀 몰랐다. 생각해보면 불온 서적이라고 빨간 딱지가 붙은 검열에서 자유로워진지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사상검증이라는 사실 그게 가능이나 할까 싶은 그저 린치에 가까운 혹독한 폭력에 노출되면 누구라도 빨갱이가 될 수 밖에 없는 시대에서 잡히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이렇게 저자가 한창 강연도 다닐 수 있으며 두려움 없이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아마도 오늘을 사는 많은 이들에게 저자가 북한에 방문했을 당시 소식을 전해들은 아버지의 친구였던 비전향장기수의 사연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노동이 두렵다'는 인텔리 사회주의자였던 남한이 고향인 그분은 대체 어떤 마음으로 북송을 원했던 것을까? 


저자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선배, 후배, 제자, 스승 등은 정말 저자 만큼이나 개성이 넘치는 이들같다. 저자의 기억속에서 왜곡되거나 소설처럼 묘사된 이유도 있겠지만, 아마도 각 개개인의 삶을 면밀히 살펴보면 이 세상에 사는 누구라도 그렇게 소설같은 일을 견뎌내며 살아간다는 것을 저자가 살뜰한 애정을 갖고 살펴봤기에 이렇게 잘 표현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저자의 삶에는 과히 독보적이고 신기한 만남이 꽤나 많은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만남의 자리에는 항상 술이 함께 하고 있었고 시간의 압박을 벗어나 늘어진 술병들은 쌓이고 쌓여 저자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이니셜로 가끔은 실명으로 표기된 저자의 지인들이 누구일지 몹시 궁금하기도 하고, 그냥 그렇게 이니셜로만 짐작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간직했기에 이야기에 담긴 모습들이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하다. 


술에 대한 수많은 에피소드 중에 역시나 나 또한 무척 놀라고 감동 받았던 내용은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아프리카 초원 어딘가의 이야기를 다룬 '먹이사슬로부터 해방된 초원의 단 하루'라는 장이다. 나도 내용을 읽으면서 인터넷을 다 뒤져서라도 저자가 보았던 그 다큐멘터리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말미에 나온 저자가 소설을 썼더라며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아 아프리카 초원에서 발효되어 술로 변한 사과를 먹은 동물들이 날 뛰는 모습에 대한 각각의 감상은 분명 상이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의 감상은 어쩌면 진짜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이자 천국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그런 천국은 자연이 만들어낸 사과주가 선물 같은 시간을 자아낸 것이다. 그렇게 원숭이와 사자와 코끼리가 어우러지는 축제의 밤을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곰곰히 생각해 본다. 


"동물들이 잠에 든 사이, 외로운 달은 부지런히 하늘을 달리고, 달이 사라진 자리, 태양이 떠오른다. 청량한 첫 햇살이 가장 늦게 잠든 원숭이의 눈꺼풀에 닿는다. 반짝 눈을 뜬 원숭이가 하품을 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자기 눈 바로 앞에 놓인 사자의 머리를 원숭이는 인지하지 못한다. 잠시 뒤, 제가 베고 누운 것이 사자의 배라는 것을 인지한 원숭이가 화들짝 놀라 비명을 내지르며 평소보다 더 높이 더 멀리 튀어 오른다. 

그 소리에 먹이사슬의 맨 아랫것들이 먼저 깨어난다. 취기가 사라지고 현실로 돌아온 힘없는 것들이 우다다 초원의 먼지를 깨우며 사방으로 내달린다. 먹이사슬의 최상위, 사자와 코끼리는 그제야 곤한 잠에서 깨어난다. 끔벅끔벅, 대체 여기가 어딘지 주변을 돌아보던 사자와 코끼리의 시선이 마주친다.

씨발, 좆 됐다. 

인간의 언어로 해석하자면 그쯤일 눈빛으로 둘은 황망히 시선을 피한다. 술에 취해 처음 본 사람과 원나잇을 한 남녀처럼, 정신을 차린 여자가 황급히 옷을 입고, 이미 깬 남자가 자는 척 꿈쩍 않듯 사자와 코끼리는 겸연쩍게 몸을 일으켜 상대를 곁눈질한다. 그러고는 숙취에 찌든 무거운 걸음ㅇ,로, 정반대의 초원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긴다.(66-67)"


#정지아 #마시지않을수없는밤이니까요 #마이디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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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최은미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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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미 작가의 [마주]를 읽었다. 어느덧 병원과 관련된 곳이 아니라면 마스크를 꼭 써야할 필요가 없는 때가 돌아왔지만,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일상을 보내야만 하는 곳이 남아 있다. 불편함에 익숙해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편안함에 젖어드는 것은 순식간이라는 너무나도 보편적인 진리가 팬데믹 상황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했던 게 언제였었나 싶을 정도로 일상 회복이 되었다. 사실 팬데믹 초기에 실행되었던 많은 법적 행정적 절차들이 지금와서 돌이켜보니 과하다 싶었던 것들과 어떤 순간에도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강요한 것은 아닌가 싶다. 당연히 비슷한 재난이 발생된다면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이 과거와 같은 선택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생명을 살리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팬데믹 시기에 생명을 살리기 위해 행했던 선택이 과연 무조건 옳았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번 작품은 마치 3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것처럼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병된 직후의 1년 동안의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마스크를 벗은 편안함과 당연함에 불과 얼마전까지 그 긴장의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까막히 잊고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이나리는 은채라는 딸을 둔 엄마로 홈 캔들 공방을 8년 째 유지하다가 상가의 개인 공방을 연지 얼마 안 된 소상공인이다. 이야기의 시작이 마치 전생과 현생을 왔다 가는 것처럼 팬데믹을 거친 시기를 구분짓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을 경계하게 만들고 구분짓게 만드는 호흡기 질환인 코로나 바이러스와 더불어 주인공 나리는 잠재적인 결핵 보균자로 딴산 마을 사람들과 만조 아줌마를 떠올리며 추억을 그리게 된다. 


나리에게 은채라는 딸이 있듯이 같은 동네 주민 수미에게는 서하라는 딸이 있다. 은채와 서하를 키우며 가까워진 나리와 수미는 아이들을 키우며 친분을 유지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서로를 경계하는 얇은 벽이 느껴진다. 나리와 수미의 갈등은 극단으로 치닫지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봉합되지도 않은 채 팬데믹을 맞이하게 된다. 팬데믹 초기에 코로나에 걸린 수미는 석달 동안이나 격리병동에서 지내게 되고, 나리는 수미의 안위를 걱정하면서도 퇴원한 수미가 자신에게 바로 연락하지 않았음에 서운함을 느낀다. 남편과의 불화로 딸 서하를 소유하고자 하는 수미의 애착은 사춘기를 맞이한 딸과 오히려 거리감을 만들고 서하가 나리에게 사적인 말을 건네는 것이 못마땅하기만 하다. 술에 취한 수미가 나리에게 '네가 뭔데 자기 딸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하느냐, 네가 뭔데 내 삶을 판단하느냐'는 막막을 퍼붓게 되지만, 나리는 수미와의 관계를 절연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미와의 악화된 관계를 계기로 소식이 끊긴 만조 아줌마의 연락처를 받아내게 되고 다짜고짜 수미에게 만조 아줌마가 있는 여안 사과밭에 가자고 한다. 어릴 때 일주일에 한 번 씩 숨통을 트이게 해주었던 만조 아줌마와의 시간은 나리에게 있어 어떤 해방구의 역할을 했었고 만조 아줌마가 정성스레 담구었던 사과주는 나리에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신비로운 과거와도 같았다. 15년만에 다시 만난 만조 아줌나는 여전히 나리를 반겨주었고 그 옛날 작은 방 안에서만 만들었던 사과주는 커다란 양조장이 되어 나리와 수미를 하룻밤 더 묵게 만든다. 


소설에서 명확히 표현하지 않아도 나리의 엄마가 그토록 여안을 떠나고 싶었던 것은 만조 아줌마를 비롯한 딴산 일꾼들이 머무는 곳이 오래 전 결핵을 앓던 이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오래전 나병 또는 문둥병이라 불린 한센병에 그랬던 것처럼 전염성이 강하다고 생각되는 질병을 걸린 사람들은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었고 그들은 생존을 위해서 외딴 곳에 머물러야만 했다. 만조 아줌마를 비롯한 여든 너머의 노인들이 모여 사는 딴산 마을은 결핵 환자를 비롯해서 배척당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소설에서 나온 것처럼 딴산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은 코로나 팬데믹 사태 이전에는 있을 수 없었던 일이라고 묘사된다. 결국 딴산 할머니들에게도 코로나 바이러스는 감염되었고, 마치 딴산에 사는 사람들은 원래 격리시켜야 할 대상처럼 딴산 주변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코호트 격리에 들어가게 된다. 이미 고령의 나이에 합병증까지 겹쳐지면 금방 죽음의 위협이 다다를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면서도 이런 저런 이유로 딴산 마을의 노인들은 병원으로 호송되지 않는다. 


생명을 위해서라면 개인정보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공개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면서도 모두의 생명을 평등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정책과 선택이 팬데믹 시기에 여실히 드러났다. 소설 속에 등장한 딴산 마을 할머니들은 상상 속에 그려진 대상들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외면하고 싶은 어딘가에 살고 있는 이들을 대변하고 있다. 과호흡과 공황장애로 운전조차 하지 못하던 나리가 만조 아줌마와의 재회와 양조장의 사과주를 마시고 나서야 자식을 옥죄이던 증상에서 벗어난 것처럼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싶은 우리 사회의 그늘진 구석을 진심으로 마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나리가 겪는 공황장애와 같은 정신적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팬데믹을 지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어야 하는가? 학교를 떠나 진실을 마주하는 삶을 선택한 서하의 용기가 그리고 서하를 지지하는 나리의 응원이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진짜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나는 감각을 죽이고 사는 여자들을 알고 있었다. 살다보니 죽었지만 다시 살릴 엄두를 못 내는 것들. 다시 살릴 의욕도 기력도 없는 것들. 언젠가부터 접어두고 사는 것들. 잊고 사는 것들. '생기'라고 말해지는 것들.

수미는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죽이고 사는 감각 하나가 깨어나 무언가가 열리면 그동안 아무렇지 않은 듯 견뎌온 것들이 더는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이 깨어나 삶에서 다시 무언가를 바라게 된다면 겨우 살아내고 있던 하루가 뒤집힐 수도 있다. 그래서, 생각만 해도 두렵고 피곤해서. '사는 낙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서. 나는 그런 여자들을 알고 있었다. 기진맥진한 채 아이한테 이런 말을 하는 여자들. '니가 아니면 이게 다, 무슨 의미니?'"(86)


#마주 #최은미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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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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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었다.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그동안 하루키의 소설을 거의 다 읽었음에도 이번 작품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분권되지 않은 상태로 거의 벽돌책에 가까운 분량 또한 만만치 않았다. 어떤 사건의 흐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보다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때로는 의식과 마음의 거리를 인식하게만드는 이름이 없는 주인공의 서사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면 하루키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벌써 던져 버렸을지도 모를 감당하기 어려운 소설의 구조를 인내롭게 따라가보기로 했다. 하루키 작품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작기 후기에 나온 내용을 보니 이 작품의 첫 시작과 마무리에 무려 40년이라는 긴 터울이 있었고, 구체적으로 작품이 쓰여진 시기에 코로나 바이러스로 자발적인 감금이 지속된 시기인 것을 생각해보면, 이 암울한 실재가 현실과 비현실을 나누고, 주인공과 그의 그림자가가 대화를 나누는 부분과 결국 그림자를 살려 그림자가 주인공의 삶을 대체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상상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감히 예상해본다. 


이 세상 어딘가에 특별한 존재만이 들어갈 수 있는 빈틈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두터운 벽을 지키는 문지기가 있는 또 다른 곳이 존재한다는 설정. 그리고 그 도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그림자를 떼어내야만 하고 자신에게서 떼어진 그림자는 얼마 되지 않아 소멸되고 그림자가 없어진 존재는 다시는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설정. 그림자에게 인격적인 지위를 주고 본체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있지만 소설에 나온 것처럼 주인공을 대신해 주인공이 원래 있던 세상에서 그 대리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해 해 나갈 수 있다는 점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나온 것처럼 우리가 속한 세계에서 그대로 믿고 있는 진실들이 때로는 우리를 둘러싼 바깥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모티브로 삼지 않았나 싶다. 


주인공이 열일곱 살때에 첫사랑이었던 소녀와 함께 만들어낸 가공의 도시. 소녀는 그렇게 주인공에게 첫사랑의 애틋함을 남기고 연락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소녀를 잊지 못하는 주인공은 아주 오랜시간 타인과의 내적인 교감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고독하게 살아가다가 소녀와 함께 만들었던 도시에 가게 된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여전히 열여섯살인 소녀를 만나게 되고, 소녀는 소년과 만날 때 말했던 것처럼 그 도시에서는 주인공을 기억하지 못한다. 주인공은 소녀를 만나 도서관에서 오래된 꿈을 읽는 작업을 수행하게 된다. 시계탑에 바늘이 없는 도시에서는 계절의 변화는 있지만 시간의 흐름은 의미가 없다. 그곳에서는 시간이 멈춰있기에 본래 시간의 흐름으로 생겨나는 것들에도 의미를 둘 수 없게 된다. 주인공은 오래된 꿈을 읽어 정체되어 있던 무언가를 풀어 소멸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마치 꿈 속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수많은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일어난 일들을 더 이상 얽매여 있지 않도록 자유를 주는 것만 같다. 그 도시에서 오래된 꿈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주인공이 유일했는데, 주인공은 그림자가 소멸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그림자를 본래 자신이 있던 세상에 보내기 위한 선택을 한다. 


주인공은 그림자와 함께 문지기 몰래 그 도시에서 도망가려고 했지만 그림자만 보내고 자신은 남기로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깨어난 주인공은 자신이 원래 있던 현실 세계로 돌아왔음을 알게 되고, 그동안 일해온 직장을 그만두고 그 도시에서 오래된 꿈을 읽었던 것처럼 현실 세계의 도서관에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 소설의 말미에서 주인공의 업무를 대신할 수 있게 된 옐로 서브마린 파카를 입은 소년과의 대화를 통해서 현실 세계를 돌아간 것이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의 그림자임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 이전에 도서관장으로 일하며 펼쳐지는 이야기에서는 그런 기미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벽 안의 도시에 있는 주인공 또한 바깥세계에서 자신의 그림자가 대역을 하고 있다는 것을 소년과의 대화를 통해서 알게 된다. 하지만 주인공은 자신이 본체인지, 그림자가 본체인지 서로가 역할을 바꾼 것인지 의아해한다.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논하고 있기에 이야기를 흐름을 따라가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하루키 특유의 인간 내면에 대한 집요한 통찰은 어느 사람이든 인생을 쉽게 얏잡아보며 막사는 삶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는 타인에 대해서 특히나 타인의 선택과 인생에 대해서 너무나도 쉽게 폄하하며 단정짓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그 타인의 삶도 결코 그렇게 막나갈리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내면의 고독함과 어려움을 갖고 있기에 그것을 함께 나눌 이가 필요하지만 마치 일체를 이루는 것처럼 완벽한 분업이 가능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운이 좋아서 그런 대상을 일찌감치 만난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재능 때문에 그런 기회를 얻었다고 자신한다. 옐로 서브마린 파카를 입은 소년은 바깥세계에서는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소년으로 도서관의 어머어마한 양의 책을 읽으며 그 내용을 모두 기억하고 있지만, 가장 가까운 가족과의 소통도 원활하지 않다. 그 소년과 가족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 소년이 가족들과 소통이 잘 되지 않고 오히려 도서관장이었던 고야스 씨와 잘 통하는 것 같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 소년이 벽 안의 도시로 사라지자 주인공이 만난 소년의 아버지가 해왔던 고민을 알게 된다. 그리고 바깥세계에서 불완전해보였던 그 소년은 주인공의 양쪽 귓볼을 강하게 깨물어 주인공과 벽 안의 도시에 일체가 되고 주인공을 대신해 오래된 꿈을 읽는 역할을 능수능란하게 해낸다. 


바깥세계에서는 필담과 간단한 말 밖에 주고받을 수 없었던 소년이 벽 안의 도시에서는 주인공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서 자유로운 대화를 나누고 오래된 꿈을 해석하는 데 완전하지 못했던 주인공과는 다르게 수월하게 꿈을 읽는다. 현실과 비현실이 경계를 나누어 하나의 문으로만 출입이 가능한 그 불확실한 벽에 가려진 도시에서는 바깥세계에서의 판단과 기준이 모두 허물어진다. 주인공은 그곳에서 시간이 멈춰진 첫사랑 소녀를 만나게 되고 오래된 꿈을 읽는 작업이 끝나면 그녀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며 바깥세상에서 공허한 삶을 살아온 시간들을 위로받는다. 그림자가 다시 하나가 되어 바깥세상으로 돌아가자는 말에 주인공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한 것 또한 자신의 그림자를 잃어버리는 것보다 바깥세상에서 겪었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고독의 시간이 더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높은 벽돌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서는 특별한 자격을 얻는 것과 현실세계에서는 그 수많은 톱니바퀴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 사이의 간극이 주인공의 선택을 응원하며 동조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마치 뭔가 꺼림칙한 게 남은 것처럼 언젠가는 주인공이 있던 자리에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란 생각이 소설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자신을 대체할 능력을 가진 소년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주인공은 바깥세계로 돌아갈 것을 다짐하게 되고 촛불을 단숨에 불어 끔으로서 일장춘몽 같았던 오래된 꿈을 읽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로서의 역할을 마감한다. 


어쩌면 하루키가 이 소설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주제 중의 하나는 유령 혹은 영혼이 되어 주인공과 마주한 여정을 통해서 비현실과는 다르게 현실에서는 비루한 하루 하루를 보낸다 하더라도 분명 충분한 의미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싶다. 

“고야스 씨는 한때 자신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해 고뇌했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려나 상관없었다. 부모에게서 한 덩어리의 정보를 물려받아, 자기 나름대로 약간의 수정과 가필을 하여 다시 자기 아이에게 물려준다 - 결국 자신은 단순한 일개 통과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긴 쇠사슬의 고리 하나일 뿐이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설령 인생에서 의미 있는 일, 널리 회자될 만한 일을 이뤄내지 못한다 한들 뭐 어떻단 말인가? 자신은 이렇게 어떤 가능성을 -그거 가능성일 뿐이라 해도-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지금꺼 살아온 의미가 있지 않은가.(380)”


특히나 벽 안의 도시와 바깥세계에서의 극명한 차이점은 바로 시계바늘이 있느냐 없느냐인데, 반대로 양쪽 다 계절의 변화는 명확하게 드러나서 겨울을 지나 봄이 오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분명 시간은 흐르기에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이겠지만 , 벽 안의 도시에서는 시간이 흐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어리고 젊을 때에는 시간이 무한한 것처럼 느끼듯이 말이다. 

“나는 눈을 감고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예전에는 -이를테면 내가 열일곱 살일 때는- 시간 같은 건 말 그대로 무한에 가까웠다. 물이 가득찬 거대한 저수지처럼. 그러니 시간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 시간은 유한하다. 그리고 나이들수록 시간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점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어쨌거나 시간으 쉬지 않고 계속 나아가니까.(635-636)”


#무라카미하루키 #도시와그불확실한벽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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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주는 인생
이슬아 지음, 이훤 사진 / 디플롯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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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 작가의 [끝내주는 인생]을 읽었다. 이슬아 작가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견뎌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이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부모님과 조부무님의 이름을 아주 자연스럽게 언급하는 방식이, 앞에 가족 관계를 언급하는 말이 없으면 그냥 잘 아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친근하게 느껴져 잠깐 동안 부모와 조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먹을 정도이다. 그런데 그런 친근한 언급이 처음에는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이내 저자가 사랑하는 방식임을 그리고 그렇게 존중하며 애써 기억하려는 애정이 느껴져 참으로 사랑이 많은 사람이구나 여겨진다. 그리고 저자의 책을 읽다보면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전해준다. 아마도 가족들이 책의 내용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열렬히 응원해 줄 것이라는 담백한 믿음 때문이 아닐까. 


친구들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 작업으로 인해 마주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마치 딴세상 사람들처럼 보인다. 분명 요즘에는 어딜가도 쉽게 마음을 터놓지 못하고, 자기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하고, 손해볼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는 사람들이 가득한데, 저자는 어디서 이렇게 귀한 사람들만 골라서 만나는 것일까? 내가 그동안 너무 색안경을 쓰고 사람들을 바라본 것일까? 아님 사람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나부터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자명한 명제 앞에서 막연하게 책에 나온 사연들이 부러워지는 것은 나뿐일까 생각해 본다. 


그럼에도 어찌보면 강연의 달인일 것 같은 저자조차도 군부대에서의 강연과 공연에서는 동생의 말처럼 그야말로 ‘좆됐다’는 표현이 얼마나 리얼하게 다가오는지, 막바지에 극적 반전을 기대했으나 역시나 군대는 바뀌지 않는다는 DP  드라마 속 봉디샘의 말처럼 가장 흑역사로 남을 강연을 마치지 않았을까 싶다. 대체 이슬아 작가의 남자 팬은 어디에 있는 거냐는 질문에 읽는 동안 여기에 있다고 무음의 아우성을 보냈다. 그냥 지금처럼 익명의 소리없는 팬으로 남아 있을테니 그까이꺼 군대에서 지들끼리 킥킥거리는 애송이들의 무관심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길 바란다. 역시나 군대는 여전히 어렵다. 


이야기의 말미에 이르러 마감에 대한 그리고 글쓰기의 압박에 대한 저자의 마음을 토로한 부분이 있다. 어느 작가가 그렇지 않겠냐마는 ‘일간 이슬아’처럼 매일 무엇인가를 써내야 하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얼마나 클지 나 또한 어느 정도 경험해봤기에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다. 세상에 책을 읽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든다고 하지만 막상 새 책이 매일 무더기로 쏟아져 내리고 세상에 얼마나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많은지 경탄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반복된다. 강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저자가 오디오매거진을 들으며 전해주는 내용은 우리가 경탄해마지 않는 위대한 작가들도 어쩌면 여느 사람들처럼 고뇌와 자기연민의 시간을 견뎌내며 그렇게 조금씩 아주 천천히 성장해온 것이 아닐까 싶다. 오늘 우연히 본 신병 시즌2에서 어리버리하지만 엄청난 열정을 가진 FM소대장이 주인공 군수저 일병 빅민석의 찬사에 이렇게 대답한다. “잘하고 못하고는 우리가 할 일이 아니야. 그건 시간이 할 일이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하는 것, 그거 하나 뿐이야.”


“직업이든 공부든 생계든 해야만 하는 일이 있잖아요. 회피할 수 없는 일, 회피하면 모든 게 무너지는 그런 일이 누구한테나 있어요. 일루수한테 공은 그런 거죠. 그런데 그 일이 자신감이 없는 거예요. 감당할 수가 없는 거예요. 

잘 써야만 하는데 자신이 없는 원고를 마주할 때면 서툰 수영 실력으로 파도에 담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놀랐다. 이 사람도 무서워한다는 것에. 잘해야만 하는 소중한 일들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에. 선생님에게도 글쓰기가 그런 공이라는 사실이 무지막지한 위안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안을 하나 드립니다. 약간 느슨한 협회를 만드는 거예요. 삶이 감당이 안 되는 사람들의 모임. 그런 모임을 만들어서 각자 상황을 얘기해보면 어떨까. 세상의 모든 일루수한테 마음을 조금 보내주는 거죠. 마음을 조금 보내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모르는 사람이어도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서로 생각하는 거죠.(212)”


#이슬아 #끝내주는인생 #디플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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