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최은미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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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미 작가의 [마주]를 읽었다. 어느덧 병원과 관련된 곳이 아니라면 마스크를 꼭 써야할 필요가 없는 때가 돌아왔지만,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일상을 보내야만 하는 곳이 남아 있다. 불편함에 익숙해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편안함에 젖어드는 것은 순식간이라는 너무나도 보편적인 진리가 팬데믹 상황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했던 게 언제였었나 싶을 정도로 일상 회복이 되었다. 사실 팬데믹 초기에 실행되었던 많은 법적 행정적 절차들이 지금와서 돌이켜보니 과하다 싶었던 것들과 어떤 순간에도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강요한 것은 아닌가 싶다. 당연히 비슷한 재난이 발생된다면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이 과거와 같은 선택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생명을 살리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팬데믹 시기에 생명을 살리기 위해 행했던 선택이 과연 무조건 옳았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번 작품은 마치 3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것처럼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병된 직후의 1년 동안의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마스크를 벗은 편안함과 당연함에 불과 얼마전까지 그 긴장의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까막히 잊고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이나리는 은채라는 딸을 둔 엄마로 홈 캔들 공방을 8년 째 유지하다가 상가의 개인 공방을 연지 얼마 안 된 소상공인이다. 이야기의 시작이 마치 전생과 현생을 왔다 가는 것처럼 팬데믹을 거친 시기를 구분짓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을 경계하게 만들고 구분짓게 만드는 호흡기 질환인 코로나 바이러스와 더불어 주인공 나리는 잠재적인 결핵 보균자로 딴산 마을 사람들과 만조 아줌마를 떠올리며 추억을 그리게 된다. 


나리에게 은채라는 딸이 있듯이 같은 동네 주민 수미에게는 서하라는 딸이 있다. 은채와 서하를 키우며 가까워진 나리와 수미는 아이들을 키우며 친분을 유지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서로를 경계하는 얇은 벽이 느껴진다. 나리와 수미의 갈등은 극단으로 치닫지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봉합되지도 않은 채 팬데믹을 맞이하게 된다. 팬데믹 초기에 코로나에 걸린 수미는 석달 동안이나 격리병동에서 지내게 되고, 나리는 수미의 안위를 걱정하면서도 퇴원한 수미가 자신에게 바로 연락하지 않았음에 서운함을 느낀다. 남편과의 불화로 딸 서하를 소유하고자 하는 수미의 애착은 사춘기를 맞이한 딸과 오히려 거리감을 만들고 서하가 나리에게 사적인 말을 건네는 것이 못마땅하기만 하다. 술에 취한 수미가 나리에게 '네가 뭔데 자기 딸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하느냐, 네가 뭔데 내 삶을 판단하느냐'는 막막을 퍼붓게 되지만, 나리는 수미와의 관계를 절연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미와의 악화된 관계를 계기로 소식이 끊긴 만조 아줌마의 연락처를 받아내게 되고 다짜고짜 수미에게 만조 아줌마가 있는 여안 사과밭에 가자고 한다. 어릴 때 일주일에 한 번 씩 숨통을 트이게 해주었던 만조 아줌마와의 시간은 나리에게 있어 어떤 해방구의 역할을 했었고 만조 아줌마가 정성스레 담구었던 사과주는 나리에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신비로운 과거와도 같았다. 15년만에 다시 만난 만조 아줌나는 여전히 나리를 반겨주었고 그 옛날 작은 방 안에서만 만들었던 사과주는 커다란 양조장이 되어 나리와 수미를 하룻밤 더 묵게 만든다. 


소설에서 명확히 표현하지 않아도 나리의 엄마가 그토록 여안을 떠나고 싶었던 것은 만조 아줌마를 비롯한 딴산 일꾼들이 머무는 곳이 오래 전 결핵을 앓던 이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오래전 나병 또는 문둥병이라 불린 한센병에 그랬던 것처럼 전염성이 강하다고 생각되는 질병을 걸린 사람들은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었고 그들은 생존을 위해서 외딴 곳에 머물러야만 했다. 만조 아줌마를 비롯한 여든 너머의 노인들이 모여 사는 딴산 마을은 결핵 환자를 비롯해서 배척당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소설에서 나온 것처럼 딴산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은 코로나 팬데믹 사태 이전에는 있을 수 없었던 일이라고 묘사된다. 결국 딴산 할머니들에게도 코로나 바이러스는 감염되었고, 마치 딴산에 사는 사람들은 원래 격리시켜야 할 대상처럼 딴산 주변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코호트 격리에 들어가게 된다. 이미 고령의 나이에 합병증까지 겹쳐지면 금방 죽음의 위협이 다다를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면서도 이런 저런 이유로 딴산 마을의 노인들은 병원으로 호송되지 않는다. 


생명을 위해서라면 개인정보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공개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면서도 모두의 생명을 평등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정책과 선택이 팬데믹 시기에 여실히 드러났다. 소설 속에 등장한 딴산 마을 할머니들은 상상 속에 그려진 대상들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외면하고 싶은 어딘가에 살고 있는 이들을 대변하고 있다. 과호흡과 공황장애로 운전조차 하지 못하던 나리가 만조 아줌마와의 재회와 양조장의 사과주를 마시고 나서야 자식을 옥죄이던 증상에서 벗어난 것처럼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싶은 우리 사회의 그늘진 구석을 진심으로 마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나리가 겪는 공황장애와 같은 정신적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팬데믹을 지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어야 하는가? 학교를 떠나 진실을 마주하는 삶을 선택한 서하의 용기가 그리고 서하를 지지하는 나리의 응원이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진짜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나는 감각을 죽이고 사는 여자들을 알고 있었다. 살다보니 죽었지만 다시 살릴 엄두를 못 내는 것들. 다시 살릴 의욕도 기력도 없는 것들. 언젠가부터 접어두고 사는 것들. 잊고 사는 것들. '생기'라고 말해지는 것들.

수미는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죽이고 사는 감각 하나가 깨어나 무언가가 열리면 그동안 아무렇지 않은 듯 견뎌온 것들이 더는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이 깨어나 삶에서 다시 무언가를 바라게 된다면 겨우 살아내고 있던 하루가 뒤집힐 수도 있다. 그래서, 생각만 해도 두렵고 피곤해서. '사는 낙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서. 나는 그런 여자들을 알고 있었다. 기진맥진한 채 아이한테 이런 말을 하는 여자들. '니가 아니면 이게 다, 무슨 의미니?'"(86)


#마주 #최은미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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