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3년 9월
평점 :
정지아 작가의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를 읽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저자만의 깨알같은 재미를 만끽했는데, 역시나 에세이에서는 소설에 버금가는 한 마디로 '깬다'는 즐거움을 넘치게 전해주었다. 아니 이렇게 자유로운 영혼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은 빨치산의 딸이기 때문인 것인가? 술을 사랑하는 아니 무엇보다도 블루를 사람들과 함께 마시는 시간을 사랑하는 저자의 오래전 추억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보통 사람들은 하나도 경험하기 힘들 것 같은 진귀한 사연들이 에세이 답지 않은 몰입감을 선사했다.
조니워커 블루는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발렌타인 위스키와 양대산맥을 이루는 보편적으로 잘 알려진 고급진 술이 아닐까 싶다. 술에 문외한인 나도 몇 번 맛을 봤었고 심지어 맛도 모르는 술을 선물로 받거나 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도 사람들이 블루 블루 하길래 그 이하의 술은 깡소주처럼 별 볼일이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위스키를 즐기는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시바스 리갈도 꽤 괜찮은 위스키라고 하니 대체 블루는 어느 정도의 고급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좋은 술을 소주 마시듯이 돌렸단 말인가? 술을 즐기기 위해서는 신체적으로 술이 받는 체질이라는게 무엇보다도 우선이겠지만, 몸이 술을 거부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가 다 술맛을 바로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메리카노를 마치 물처럼 마시게 된 게 불과 10여 년 밖에 되지 않은 것처럼 예전에 커피는 그냥 쓴 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하루 이틀 마시다 보면 그 쓴 맛에 감춰진 각 원두만의 고유한 향과 맛이 느껴진다. 그리고 더불어 각성되는 시간은 덤이고. 아마도 위스키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백날 소주만 마시던 사람이 위스키가 숙성된 시간을 단숨에 따라잡을 수는 없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술과 거리가 먼 몸을 타고난 나는 죽어도 위스키의 진정한 맛을 알지 못할 것 같아 몹시 아쉽지만 책에 나온 저자의 술자리를 대체삼아 즐기는 시간이 되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을 때만 해도 저자가 한 때 수배까지 받으며 도망다니는 삶을 살았는지 전혀 몰랐다. 생각해보면 불온 서적이라고 빨간 딱지가 붙은 검열에서 자유로워진지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사상검증이라는 사실 그게 가능이나 할까 싶은 그저 린치에 가까운 혹독한 폭력에 노출되면 누구라도 빨갱이가 될 수 밖에 없는 시대에서 잡히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이렇게 저자가 한창 강연도 다닐 수 있으며 두려움 없이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아마도 오늘을 사는 많은 이들에게 저자가 북한에 방문했을 당시 소식을 전해들은 아버지의 친구였던 비전향장기수의 사연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노동이 두렵다'는 인텔리 사회주의자였던 남한이 고향인 그분은 대체 어떤 마음으로 북송을 원했던 것을까?
저자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선배, 후배, 제자, 스승 등은 정말 저자 만큼이나 개성이 넘치는 이들같다. 저자의 기억속에서 왜곡되거나 소설처럼 묘사된 이유도 있겠지만, 아마도 각 개개인의 삶을 면밀히 살펴보면 이 세상에 사는 누구라도 그렇게 소설같은 일을 견뎌내며 살아간다는 것을 저자가 살뜰한 애정을 갖고 살펴봤기에 이렇게 잘 표현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저자의 삶에는 과히 독보적이고 신기한 만남이 꽤나 많은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만남의 자리에는 항상 술이 함께 하고 있었고 시간의 압박을 벗어나 늘어진 술병들은 쌓이고 쌓여 저자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이니셜로 가끔은 실명으로 표기된 저자의 지인들이 누구일지 몹시 궁금하기도 하고, 그냥 그렇게 이니셜로만 짐작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간직했기에 이야기에 담긴 모습들이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하다.
술에 대한 수많은 에피소드 중에 역시나 나 또한 무척 놀라고 감동 받았던 내용은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아프리카 초원 어딘가의 이야기를 다룬 '먹이사슬로부터 해방된 초원의 단 하루'라는 장이다. 나도 내용을 읽으면서 인터넷을 다 뒤져서라도 저자가 보았던 그 다큐멘터리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말미에 나온 저자가 소설을 썼더라며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아 아프리카 초원에서 발효되어 술로 변한 사과를 먹은 동물들이 날 뛰는 모습에 대한 각각의 감상은 분명 상이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의 감상은 어쩌면 진짜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이자 천국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그런 천국은 자연이 만들어낸 사과주가 선물 같은 시간을 자아낸 것이다. 그렇게 원숭이와 사자와 코끼리가 어우러지는 축제의 밤을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곰곰히 생각해 본다.
"동물들이 잠에 든 사이, 외로운 달은 부지런히 하늘을 달리고, 달이 사라진 자리, 태양이 떠오른다. 청량한 첫 햇살이 가장 늦게 잠든 원숭이의 눈꺼풀에 닿는다. 반짝 눈을 뜬 원숭이가 하품을 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자기 눈 바로 앞에 놓인 사자의 머리를 원숭이는 인지하지 못한다. 잠시 뒤, 제가 베고 누운 것이 사자의 배라는 것을 인지한 원숭이가 화들짝 놀라 비명을 내지르며 평소보다 더 높이 더 멀리 튀어 오른다.
그 소리에 먹이사슬의 맨 아랫것들이 먼저 깨어난다. 취기가 사라지고 현실로 돌아온 힘없는 것들이 우다다 초원의 먼지를 깨우며 사방으로 내달린다. 먹이사슬의 최상위, 사자와 코끼리는 그제야 곤한 잠에서 깨어난다. 끔벅끔벅, 대체 여기가 어딘지 주변을 돌아보던 사자와 코끼리의 시선이 마주친다.
씨발, 좆 됐다.
인간의 언어로 해석하자면 그쯤일 눈빛으로 둘은 황망히 시선을 피한다. 술에 취해 처음 본 사람과 원나잇을 한 남녀처럼, 정신을 차린 여자가 황급히 옷을 입고, 이미 깬 남자가 자는 척 꿈쩍 않듯 사자와 코끼리는 겸연쩍게 몸을 일으켜 상대를 곁눈질한다. 그러고는 숙취에 찌든 무거운 걸음ㅇ,로, 정반대의 초원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긴다.(66-67)"
#정지아 #마시지않을수없는밤이니까요 #마이디어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