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멩코 추는 남자 (벚꽃에디션) - 제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허태연 지음 / 다산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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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태연 작가의 [플라멩코 추는 남자]를 읽었다. 제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다. 해외여행을 갈 수 없고, 아니 집 앞에 카페도 맘편히 머물 수 없는 상황이다보니 타국에 대한 동경과 아쉬움은 배가되어 ‘플라멩코’라는 제목만 보고도 가슴 설레는 느낌이 들었다. 주인공인 굴착기 기사 남훈 씨는 이제 은퇴할 나이가 되어 그동안 애지중지 해왔던 장비를 누군가에게 넘기기 위한 절차에 들어선다. 십년 넘은 중고이기는 하지만 그의 굴착기는 매트에 먼지 한톨 머물지 않도록 쓸고 닦아 깨끗이 유지되어 있었다. 또한 작업 중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튜닝도 잘 되어 있었다. 굴착기를 넘길 제대로 된 주인을 찾기 위해 매매자를 만나 이런 저런 쓸데없는 질문을 던지는 남훈 씨는 그야말로 꼰대의 전형처럼 보인다. 결국 남훈 씨는 굴착기를 넘기지 못하고 그의 인생 2차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남훈 씨는 굴착기를 넘기고 은퇴 후 계획을 실천하려고 한다. 그가 오래전 삶을 놓아버릴 정도로 망가져가다 다시금 생의 의지를 되찾으며 쓴 ‘청년일지’의 내용이 시작될 때인 것이다. 마치 버킷리스트처럼 남훈 씨는 ‘청년일지’에 은퇴 후 반드시 하고 싶은, 해야만 하는 일들을 적어 놓았다. 
과제1. 남보다 먼저 화내지 않기.
과제2. 청결하고 근사한 노인 되기. 낡은 속옷은 몽땅 버릴 것. 멋지고 깔끔한 새것으로 구입한다. 그다음 백화점에서 명품 정장을 살 것!
소설 속에서는 코로나19가 종식되어 해외여행이 가능해진 상황을 가정한다. 남훈 씨는 그동안 고생한 아내와 해외여행을 계획하며 오래전 꿈이었던 언어학자를 포기한 자신을 떠올린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에 뭔가 독특한 언어의 전문가가 되고싶은 바람에 남훈 씨는 스페인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과제3. 외국어 배우고 해외여행 하기.
과제4. 건강한 체력 기르기.
스페인어를 배우기 시작한 남훈 씨는 내친 김에 체력관리를 위해 플라멩코 교습소에 등록을 한다. 남훈 씨는 이제 굴착기 기사에서 행복한 노년 생활을 그리는 평범한 가장처럼 보였다. 그런데 사실 남훈 씨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었다. 바로 지금 배우자인 아내와 딸 선아를 낳기 전에 이혼했던 전처와의 딸 보연이었다. 남훈 씨는 그동안 사느라 6살 이후로 만나지 못한 이제는 마흔이 나이가 되었을 딸 보연을 다시 만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행여나 그동안 애써 모은 돈을 보연에게 보상해줘야 할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보연이 원망하고 분노하며 왜 이제서야 다시 자신을 찾아왔느냐고 따지지는 않을까란 고민에 휩싸인다. 

남훈 씨는 굴착기 기사를 은퇴하며 만나게 된 세 명의 청년들(굴착기를 넘겨줄 사람, 스페언어 강사 카를로스, 플라멩코 강사)에게 직접 만든 스페인 음식을 대접하며 보연을 만날 용기를 얻게 된다. 그리고 남훈에게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아내는 남훈이 딸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어준다. 아내와의 해외여행을 꿈꾸던 남훈은 그의 첫 스페인 여행을 30년 만에 다시 만난 딸 보연과 떠나게 되고 그곳에서 응어리진 딸 보연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된다. 스페인 세비야 광장에서 멋진 양복을 입고 플라멩코를 추는 남훈 씨의 모습은 그동안 모진 삶을 견뎌온 남훈 씨와 그의 딸 보연의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해피엔딩을 꿈꾸게 만들어준다. 나이가 들어 시간이 흐르면 과거의 잘못된 선택을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 불가능한 것들이 대부분이며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다 괜히 잠잠했던 문제를 부풀리게 될까 걱정도 된다. 하지만 우리가 이 삶을 마감하지 전에 남겨진 가장 중요한 숙제는 마음의 터럭을 말끔히 해소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잘못한 일들을 마치 없었던 것처럼 바로잡을 수는 없겠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용기는 그와 나를 분명히 변화시킬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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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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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나 작가의 [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을 읽었다. 엄청난 흡입력으로 한 순간도 주인공 메이의 서사에서 한 눈을 팔지 못하도록 이끌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생각을 저 멀리 내던지도록 페이지를 넘기는 손을 멈추지 못하게 만들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인도의 시골 마을 마이소르와 나와는 요원하게만 생각되었던 아쉬탕가 요가가 눈 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그리고 메이가 죽음을 결심하고 올라서 차문디 언덕에서 마주한 강령한 태양빛이 나의 가슴을 두방망이질 해댔다. 


마치 저자가 이 소설을 준비한 5년 동안의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단숨에 토해내듯이 그녀의 말을 듣는 내내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도록 중간 중간 '응, 음, 그럼'이라는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이야기가 끝이 나기를 그래서 메이는 삶이란 무엇인지 알게 되었는지 나 또한 간절한 목마름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메이가 처한 현실이, 메이가 겪은 지난 날들이, 그리고 앞으로 메이가 살아갈 날들이 단지 매듭을 짓듯이 결단낼 수 없는 것들이기에 한 페이지를 넘기며 토해내는 분노의 문장들은 곧바로 나를 집어삼킬 듯이 아파왔다. 지금의 생각으로는 지금의 마음으로는 단 한 장면도 받아들 수 없을 것만 같은 부조리함이 가득한 곳에서 메이는 폭식이라는 방법으로 자신을 학대하며 상처와 삶이 던지는 물음에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부모 자식 사이라면 당연히 아낌없이 주어야만 하는 내리사랑이라는 명제가, 온전한 육신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명제가 메이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냉대와 견주어 메이를 비굴하게 만드는 것을 즐겼던 고모네집 딸 언니와의 관계는 메이에게 무엇이 결핍된 것인지 인식할 기회마저 앗아가 버렸다. 철이들고 어른이 되어 요가를 통해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삶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자 수련할수록 메이는 그 안에 잠재되어 있던 엄청난 분노와 모멸감을 불러일으켰고 반복된 폭식으로 수련을 방해했다. 


결핍된 이들만이 세상의 고귀함을 깨달을 수 있는 것처럼 요한과의 사랑은 메이가 결코 가질 수 없었던 충만함에 대한 그리움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고, 맘 편히 자신의 몸조차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요한의 상태가 온전한 육신을 가졌음에도 감사하지 못하는 불평등한 세상을 향한 분노로 이어지고, 그렇게 가면을 쓴 채 악한 마음을 숨겨온 자신을 원망하고 자책하는 현실로 돌아오곤 한다. 요한과 헤어지고 떠난 인도로의 여행은 어쩌면 메이가 마지막으로 자신을 찾고자 한 결심이었을지 모르겠다. 그곳에서 케이를 만나고 불과 보름만에 케이에게 빠져버린 메이는 케이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되고 절망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간 케이에게 메일을 보내며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줌으로써 메이는 차문디 언덕에서 내려와 삶을 포기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어렴풋이나마 얻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어른이 되면, 나이가 들면, 좋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오래 유지할 수 있을 줄만 알았어.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아. 나는 이미 삼십대 중반이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왔지만 진심으로 서로 믿고 의지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한 명도 없어. 아니, 오히려 나는 인간관계에 있어 매우 이상한 경계 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어렸을 적에는 어쨌거나 사적인 친구 관계라는 게 있었잖아. 그 친구들과 싸워서 오해가 생겼건 관계가 틀어졌건 어쨌건 간에 그것은 순수하게 '친구 관계'라는 걸 가지기 시작해. 이 관계에서는 진실도 거짓도 모두 통하지가 않아. 가식적인 모습과 진심이 담긴 모습을 적절히 섞어서 그 관계를 유지해가야만 하는데, 나는 그것을 어떻게 적절히 조절하고 유지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면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다가가고 싶고,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라면 뒤돌아서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을 뿐이야. 한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감정을 딱히 마음에 담아두지 않은 채 형식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그러면 서로 서로 더 깊이 다가가거나 진심을 내보이지 않는 거야. 조금이라도 진심을 내보이며 진실하게 사람을 대하면, 그러면 그것은 그냥 자기 마음 하나 제대로 조절하 못하고 감정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 멍청한 사람인 거야. 나는, 진실하게 살고 싶었어. 형식적으로 혹은 위선적으로 살고 싶지 않은 것뿐이야.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나는 그게 너무 어려워. 그래서 내 곁에 아무도 남지 않은 것 같아.(81-82)"


"아무튼 저한테는 독서가 뭐 대단한 취미라기보다는 그냥 습관이에요. 책을 읽는다는 건 발레를 한다거나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잖아요. 그런 것들은 전문적인 교육 과정과 교육비가 필요하지만 독서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다만 요즘에는 책 읽는 인구가 워낙에 적다 보니 독서라는 걸 뭔가 대단한 취미생활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책 좀 읽는다고 하면 신기해하면서 우러러보거나, 반대로 먹고살기 편한가보다 하며 아니꼬워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불편할 때가 많았어요. 그런데 저는 이게 겸손도 자기비하도 아니고 진짜 그냥 습관일 뿐이라 사람들 앞에서 책 이야기는 잘 안하게 돼요. 책에 읽은 이야기를 할 때에도 그냥 어디서 주워듣거나 티브이에서 얼핏 보기라도 한 것처럼ㄹ 얼버무려서 말하게 되더라구요.(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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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이치조 미사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모모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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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조 미사키의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를 읽었다. 일본 문화의 특징인 것일까? 아니면 유일신 사상에 입각한 종교가 아닌 신도라는 특정한 종교와 문화의 영향 때문일까? 일본 영화, 소설, 드라마의 멜로 타입에 단골 소재로 쓰이는 것은 주인공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다. 그리고 남겨진 이는 떠나간 사람을 잊지 못하고 그와의 추억을 되새기는 장면들이 비슷한 맥락으로 반복된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면이 없지만 일본 문화에서 젊은이들의 애틋한 사랑에는 피할 수 없는 불치병이 반복된다. 어쩌면 생과 사에 대한 선택권이 인간에게 없음을 너무나도 빨리 간파했음에도 그러한 무력함과 수동성이 오히려 애틋함이 가중된 문학의 형태로 발전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꽤 오래 전에도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혹은 드라마 [Summer Snow]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와 같은 눈물 샘을 자극했던 영화와 소설들도 모두 주인공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절절한 러브스토리를 그리고 있다. 이번 책도 비슷한 맥락의 소재로 결말이 이어지지만 이야기의 시작은 좀 다르다. 주인공 도루와 히노는 아무런 사적인 만남이 없이 시모카와를 괴롭히던 학생에 의해서 유사 연애를 시작하게 된다. 도루는 여느 인물과는 구별되는 일희일비 하지 않는 성격을 가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히노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를 돕다가 여자친구가 생기자 도루에게도 예전과는 다른 일상이 조금씩 펼쳐지게 된다. 

도루가 갑작스럽게 사귀자는 제안에 덥석 그러자고 대답한 히노는 세 가지 단서를 붙인다. 마지막 조건은 자신을 좋아하지 말것이라는 조금은 이상한 제안이었는데, 그 이유는 히노가 얼마전 사고로'선행성 기억상실증'이라는 장애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 잠들기 전까지는 그날의 일들을 기억하지만 잠을 자고 그 다음날 일어났을 때에는 전날을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히노는 잠들기 전에 그날 있었던 일들을 수첩과 일기에 기록을 남기고 다음날 확인하며 일상을 버티어가고 있었다. 도루와의 교제가 이어지던 어느 날 히노는 도루에게 자신의 증세를 고백한다. 하지만 도루는 히노에게 자신이 그 사실을 말했다는 사실을 기록하지 말 것을 부탁하고 히노는 다음 날 도루에게 자신의 병을 고백한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야기의 주요 인물은 도루와 히노 그리고 히노의 절친 와타야까지 세 명이지만, 도루의 친누나도 중요한 서사의 맥락을 이어가는 인물로 등장한다. 일본의 저명한 신인상 아쿠타가와상을 받게 된 도루의 누나는 도루의 아버지가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외면했던 현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도루의 아버지와 누나의 이야기는 아마도 히노가 처한 상황을 망연자실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심각한 우울증의 상황으로까지 갈 수 있겠지만, 그 현실을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따라 서술 기억이 아닌 절차 기억으로 조금씩 히노의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만든다. 결국 도루의 제안으로 히노는 잊고 지냈던 그림 그리기에 다시 집중하게 되고 히노가 그린 도루의 크로키화는 마지막 순간에 히노가 도루의 기억을 재생시키는 도화선이 된다. 

노화가 진행되면서 생겨나는 수많은 병들이 우리를 위협하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 하는 것은 어쩌면 과거의 기억을 잃는 병일지도 모르겠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라는 영화처럼 수십년간 함께 해온 사람들과의 기억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게 된다면 우리는 살아갈 힘을 놓아버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주인공 히노도 가장 꽃다운 나이에 몹쓸 장애를 얻게 되었지만 도루와 같은 위생감을 중요시 하는 친구와의 공감과 사랑 덕분에 머리 속에서 떠오르지 않는 기억들을 마음 속에서 불러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게 된다. 

"기억이 하루 이상 남아 있지 못해도, 눈앞에 있는 사람을 정보로만 알아도, 그 사람이 나를 알고 있고 그 사람에게 나와 함께 보낸 기억이 있으면 이렇게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봐준다.(104)"

"나한테도 결국 도루는 과거가 될 거야. 내가 계속해서 소설을 쓰고 있더라도 인터뷰하다가 도루의 죽음을 무심코 입 밖으로 낼 수 있을 정도로. 언젠가는 과거의 일부가 될거야. 어떤 상처든 한번 입고 나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아. 상처는 기억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아픔이 계속되진 않거든. 그렇게 해서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해. 추억 속의 바람이 문득 불었을 때, 원고를 쓰다가 키보드로 도루란 글자를 쳤을 때 생각나는 일은 있어도.(35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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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 밀라논나 이야기
장명숙 지음 / 김영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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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숙 님의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를 읽었다. 부제는 '밀라논나 이야기'이다. 올초 유퀴즈를 통해 저자를 알게 되어 십여년 전에 출간된 [바다에서는 베르사체를 입고 도시에서는 아르마니를 입는다]를 접했는데, 유튜브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벌써 87만의 구독자를 가진 유튜버로서의 두 번째 책을 읽게 되었다. 전작에서는 저자가 패션 공부를 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유학생이 거의 없던 시대에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게 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면, 이번 책에서는 밀라논나로서 인생의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감없이 들려준다.


비록 펜데믹의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유례없는 경제적 부국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볼 수있다. 전란을 겪은 동시대의 사람들과 살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급격한 사회 변화를 몸소 체험하고 있다. 언제 어디에든 빈부의 격차와 차별 등은 존재해 왔지만 경제적 성장을 이룬 후의 변화는 우리를 당혹케 만든다. 특히나 우리나라가 초고속으로 고령화되는 것과 동시에 출산율이 너무나도 낮다는 사실은 향후 몇십년 안에 위기가 닥쳐올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낳게 한다. 평균 수명이 길어졌다는 것은 단지 오래 살 수 있다는 희망과는 반대로 은퇴 후의 안정적인 생활에 대한 불안함과 노후의 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막막함으로 확장된다. 더불어 젊은이들은 결혼과 자녀출산에 대한 기성세대에 강요에 대해 완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그러한 의견을 서슴치 않고 내뱉는 이들을 꼰대라 칭하며 비꼰다. 


단지 세대차이라고 말하기에는 전란을 겪은 세대와 MZ 세대의 차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렇기 때문에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로 인생의 선배들이 겪은 경험담과 충고도 마다한다. 이러한 격차와 갈등들을 조금이라도 염려하는 어른들은 젊은이들과의 대화를 어렵게 생각하고 조심스러워질 수 밖에 없다. 밀라논나는 오랜 시간 우리나라와 문화가 다른 서구 사회에서 지낸 경험을 토대로 세대간의 갈등을 해결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삶의 자세와 타인을 이해하고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견고하게 만들 수 있는 조언들을 친절하게 건네준다. 인생 선배의 조언이 무조건 고리타분하고 수직적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난다면 충분히 나의 삶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특히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저자의 배려와 관심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듯 하다. 


"멘토라는 말은 그리스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 이타카 왕국의 왕인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출전하면서 자신의 아들인 텔레마커스를 잘 보살펴 달라고 어떤 친구에게 부탁했는데, 그 친구의 이름이 멘토였다고 한다. 멘토는 인생을 이끌어주는 지도자, 현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담자, 지혜를 나눠주는 스승이라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43-44)"


"미국의 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언어, 음악, 논리수학, 공간, 신체 운동, 인간 친화, 자기 성찰, 자연 친화 등 여덟 가지를 담당하는 지능 이외에 실존지능 혹은 영성지능이라 부르는 지능이 있다고 한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 인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면서 실존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이홉 번째 지능이라고 한다.(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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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 르완다 나의 첫 다문화 수업 1
엄소희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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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소희 님의 [있는 그대로 르완다]를 읽었다. ‘나의 첫 다문화 수업 01’ 시리즈 첫 번째 책이다. 앞으로도 이어서 출간될 다양한 나라의 이야기들이 기대된다. 로마에 머물 때 르완다 신부들 2명과 거의 1년간 매일 같이 식사를 했음에도 잊고 살아왔다. 깊은 친분을 쌓기에는 피상적인 대화들이 대부분이었고, 공부하느라 바쁘게 학교를 오가느라 그들의 삶에 대해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저 그들의 나이가 나보다 좀 많았을 뿐인데, 당시 르완다의 평균 수명을 이미 넘은 상태였다는 것과 한 명은 공부와 더불어 의학적 진료를 받기 위해서 왔다는 내용 정도였다. 아프리카 신부들과 친분을 쌓는데 경계가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무턱대고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는 선입견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언어적 한계에 매일 매일 허덕이는 나와는 달리 이미 프랑스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그들에게 또 다른 유럽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일은 너무나도 수월해보였기 때문에 ‘배알이 꼬이다’는 말처럼 생겨난 질투심으로 인해 아프리카에 가본적도 없으면서 내전과 기아에 허덕이는 불쌍한 사람들로만 보려고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미 그들을 만나기 전에 나 또한 이탈리아 노인들에게 비슷한 편견이 있음을 느껴왔으면서도 말이다. 당시 어학을 배울 때 머물던 수도원의 너그러운 할아버지 신부님은 내가 기숙사비를 낼 때마다 ‘너에게 그 비용이 너무 부담되는 거 아니냐?’는 표정을 짓곤 했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좀 깍아달라고 할까라는 생각이 교차되며 어쩌면 이 할아버지에게 우리나라는 아직도 6.25 전쟁 후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모습으로 남아있는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 할아버지가 우리나라 공항에 내린다면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라겠지만 말이다. 저자가 르완다에 머물며 이 책을 통해서 말하고자 한 바도 이와 일맥상통하지 않을 듯 싶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우리나라는 전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빠른 시간에 엄청난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다보니 그에 부산되는 문제점들이 산적해있지만 언제부터인지 백인을 제외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적 시선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기 시작했고, 아프리카라 하면 그 수많은 나라들을 한 번에 싸잡아 가난하고 마실 물 조차 없어서 오염된 물을 마신 어린 아이들이 병에 걸려 죽어가는 와중에도 종족간의 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곳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공영방송과 케이블 방송 중간에 지속적으로 홍보하는 국제구호활동 NGO와 같은 단체들의 후원회원을 유치하기 위한 공익광고에서 비춰진 모습들이 하나같이 차마 눈을 뜨고 보기 힘들 정도의 궁핍하고 열악한 모습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르완다]는 우리의 이러한 편견을 보기 좋게 무너뜨리고 제목처럼 있는 그대로 아프리카라는 거대한 나라가 아니라 르완다라는 한 나라를 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다. 1994년 거의 100일동안 지속된 제노사이도로 인해 100만명에 가까운 이들이 죽음을 당했다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질 당시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가만히 생각해 보게 된다. 지구상의 어딘가에서는 지금도 생과 사의 갈림길을 오가며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을 텐데,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그게 나와 대체 무슨 상관이나며 상대적 박탈감에서 오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거리에서 배설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는 이기주의자가 되어가고 있다. 제노사이드를 극복하고 국민들의 투표로 대통령에 오른 지도자가 2034년까지 연임할 수 있는 법 개정이 있었다고 하니, 그가 정치, 경제를 비롯한 국가 안정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해도 여느 나라들의 독재자와 같은 말로가 그려지는 것은 아닐까 모르겠다. 그럼에도 마운틴고릴라 보호에 진심으로 열성을 다하며 멸종 위기를 막고 개체 수를 늘려가는 모습은 경제적 부와 상관없이 벌써 예전에 플라스틱 비닐 사용을 엄격히 금지하고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고자 하는 르완다 국민들의 성숙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아프리카 문화권에서 시간은 넓은 평면 위에 찍힌 점과 같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명확하게 구분 지어 생각하지 않는 편이고 ‘현재’에 집중하여 사고한다. 1년 내내 기후가 비슷하고 환경의 변화가 크지 않은 데다가 공동체를 이루어 농경이나 목축을 해왔기 때문에 개인의 경험보다는 공동체의 경험이 시간을 인지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개인은 그 사이에서 늘 현재에 집중할 뿐이다.(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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