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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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나 작가의 [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을 읽었다. 엄청난 흡입력으로 한 순간도 주인공 메이의 서사에서 한 눈을 팔지 못하도록 이끌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생각을 저 멀리 내던지도록 페이지를 넘기는 손을 멈추지 못하게 만들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인도의 시골 마을 마이소르와 나와는 요원하게만 생각되었던 아쉬탕가 요가가 눈 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그리고 메이가 죽음을 결심하고 올라서 차문디 언덕에서 마주한 강령한 태양빛이 나의 가슴을 두방망이질 해댔다. 


마치 저자가 이 소설을 준비한 5년 동안의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단숨에 토해내듯이 그녀의 말을 듣는 내내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도록 중간 중간 '응, 음, 그럼'이라는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이야기가 끝이 나기를 그래서 메이는 삶이란 무엇인지 알게 되었는지 나 또한 간절한 목마름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메이가 처한 현실이, 메이가 겪은 지난 날들이, 그리고 앞으로 메이가 살아갈 날들이 단지 매듭을 짓듯이 결단낼 수 없는 것들이기에 한 페이지를 넘기며 토해내는 분노의 문장들은 곧바로 나를 집어삼킬 듯이 아파왔다. 지금의 생각으로는 지금의 마음으로는 단 한 장면도 받아들 수 없을 것만 같은 부조리함이 가득한 곳에서 메이는 폭식이라는 방법으로 자신을 학대하며 상처와 삶이 던지는 물음에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부모 자식 사이라면 당연히 아낌없이 주어야만 하는 내리사랑이라는 명제가, 온전한 육신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명제가 메이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냉대와 견주어 메이를 비굴하게 만드는 것을 즐겼던 고모네집 딸 언니와의 관계는 메이에게 무엇이 결핍된 것인지 인식할 기회마저 앗아가 버렸다. 철이들고 어른이 되어 요가를 통해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삶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자 수련할수록 메이는 그 안에 잠재되어 있던 엄청난 분노와 모멸감을 불러일으켰고 반복된 폭식으로 수련을 방해했다. 


결핍된 이들만이 세상의 고귀함을 깨달을 수 있는 것처럼 요한과의 사랑은 메이가 결코 가질 수 없었던 충만함에 대한 그리움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고, 맘 편히 자신의 몸조차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요한의 상태가 온전한 육신을 가졌음에도 감사하지 못하는 불평등한 세상을 향한 분노로 이어지고, 그렇게 가면을 쓴 채 악한 마음을 숨겨온 자신을 원망하고 자책하는 현실로 돌아오곤 한다. 요한과 헤어지고 떠난 인도로의 여행은 어쩌면 메이가 마지막으로 자신을 찾고자 한 결심이었을지 모르겠다. 그곳에서 케이를 만나고 불과 보름만에 케이에게 빠져버린 메이는 케이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되고 절망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간 케이에게 메일을 보내며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줌으로써 메이는 차문디 언덕에서 내려와 삶을 포기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어렴풋이나마 얻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어른이 되면, 나이가 들면, 좋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오래 유지할 수 있을 줄만 알았어.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아. 나는 이미 삼십대 중반이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왔지만 진심으로 서로 믿고 의지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한 명도 없어. 아니, 오히려 나는 인간관계에 있어 매우 이상한 경계 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어렸을 적에는 어쨌거나 사적인 친구 관계라는 게 있었잖아. 그 친구들과 싸워서 오해가 생겼건 관계가 틀어졌건 어쨌건 간에 그것은 순수하게 '친구 관계'라는 걸 가지기 시작해. 이 관계에서는 진실도 거짓도 모두 통하지가 않아. 가식적인 모습과 진심이 담긴 모습을 적절히 섞어서 그 관계를 유지해가야만 하는데, 나는 그것을 어떻게 적절히 조절하고 유지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면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다가가고 싶고,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라면 뒤돌아서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을 뿐이야. 한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감정을 딱히 마음에 담아두지 않은 채 형식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그러면 서로 서로 더 깊이 다가가거나 진심을 내보이지 않는 거야. 조금이라도 진심을 내보이며 진실하게 사람을 대하면, 그러면 그것은 그냥 자기 마음 하나 제대로 조절하 못하고 감정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 멍청한 사람인 거야. 나는, 진실하게 살고 싶었어. 형식적으로 혹은 위선적으로 살고 싶지 않은 것뿐이야.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나는 그게 너무 어려워. 그래서 내 곁에 아무도 남지 않은 것 같아.(81-82)"


"아무튼 저한테는 독서가 뭐 대단한 취미라기보다는 그냥 습관이에요. 책을 읽는다는 건 발레를 한다거나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잖아요. 그런 것들은 전문적인 교육 과정과 교육비가 필요하지만 독서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다만 요즘에는 책 읽는 인구가 워낙에 적다 보니 독서라는 걸 뭔가 대단한 취미생활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책 좀 읽는다고 하면 신기해하면서 우러러보거나, 반대로 먹고살기 편한가보다 하며 아니꼬워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불편할 때가 많았어요. 그런데 저는 이게 겸손도 자기비하도 아니고 진짜 그냥 습관일 뿐이라 사람들 앞에서 책 이야기는 잘 안하게 돼요. 책에 읽은 이야기를 할 때에도 그냥 어디서 주워듣거나 티브이에서 얼핏 보기라도 한 것처럼ㄹ 얼버무려서 말하게 되더라구요.(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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