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고바야시 서점에 갑니다
가와카미 데쓰야 지음, 송지현 옮김 / 현익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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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카미 데쓰야의 [오늘도 고바야시 서점에 갑니다]를 읽었다. 음악, 영화, 책은 공통적으로 그것을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상상의 나래를 즐기고 누리게끔 해 준다는 것이다. 이는 감상하는 이에게 실질적인 의식주를 해결해주지 않지만 1차원의 욕구를 넘어서는 2차원 이상의 욕구들을 충족시켜 주기에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문화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보편화되어 있다. 하지만 막상 감상하는 이들에게 충족감을 주기 위한 창작자들은 그다지 여유롭지 않은 편이다. 소수의 히트작을 만는 이를 제외하고는 상당수의 음악가와 영화 관련 종사자와 작가들은 때로는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순수 창작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누군가 가깝고 아끼는 이가 그러한 창작의 길을 직업으로 삼고자 한다면 대부분은 응원보다는 진심어린 걱정으로 염려하며 그가 큰 좌절을 겪지 않을까 우려할 것이다. 그런데도 신기하게도 음원 사이트에서는 매일매일 신곡이 넘쳐나고 영화 또한 매 주일 새 영화가 상영관에 걸리며 서점에 가면 대체 누가 어디서 이렇게 많은 책을 쓰는 것인지 신간 또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출판된다. 


음악과 영화도 상당 부분에서는 비슷한 부분이 많겠지만 책과는 좀 다르다고 생각된다. 각종 TV 프로그램에서 음악과 영화를 설명해주고 짤막하게 요약해서 보여주는 경우도 많고 유튜브에서도 십분만에 두 시간짜리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감상할 수 있는 채널들이 많다. 하지만 가뭄에 콩나듯 책을 소개하는 TV프로그램이 생겼다가도 얼마 안가서 없지기가 일쑤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책과 저자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정보가 있어야 관심도 생기고 흥미가 유발될텐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작가는 유명한 소수에 불과하며 그 작가를 안다고 해도 실제로 그 작가의 저작 중에 읽은 것은 한 두 권에 불과하기 때문에 보편적인 관심과 인기를 끌기란 여간해서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책은 음악과 영화와 비교해서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음악과 영화는 대중 교통을 이용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다. 스마트폰의 발달로 미디어의 향유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되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정기 구독료를 내며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고 있다. 하지만 책은 그렇게 즐기기가 어렵다. 특히나 멀티태스킹과 인터넷 서칭에 길들여지게 되면 우리의 뇌 구조가 활자를 인식하여 생각하고 고뇌하는 것에서 멀어지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보니 아무리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해도 책을 읽는 것이 너무나도 괴롭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몇 시간 동안 활자에 집중해서 책에 나온 내용을 즐길 수 있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언젠가 서점과 도서관에 가서 책을 고르고 있다보면 생각지도 않게 갑자기 응가가 마려워졌다. 처음 몇 번은 그냥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생각에만 머물렀는데, 그런 현상이 몇 차례 반복되지 혹시 책장을 마주하면 그런 생체적인 반응이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데 실제로 서점과 도서관에서 책에 쌓인 먼지와 책에서 나는 냄새가 배변활동을 왕성하게 만든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그런 신기한 화학 반응이 생겨나는 이유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내 몸이 이상한게 아니라는 점을 다행스럽게 여기며 책을 고르다 자연스럽게 화장실을 다녀오곤 했다. 최근 몇 년 동안의 굳어진 습관 중의 하나는 매일 아침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업데이트된 신간을 살펴보는 것이다. 마치 트랜드에 민감한 MZ 세대인 것처럼 마음에 드는 신간을 누구보다도 빨리 읽고 싶다는 욕구가 밀려온다. 그리고 MZ 세대가 힙한 장소에서 사진과 동영상을 찍고 SNS에 올리는 것처럼, 나또한 신간을 빨리 읽어서 서평을 쓰고 업로드 하고 싶어하는 관종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런지 인터넷 서점보다 신간 판매가 늦는 오프라인 서점에는 잘 가지 않게 되었다. 서점에 가더라도 대충 매대 위에 놓인 서점과 출판사가 판매고를 올리기 위해 주력하는 책들만 살펴보고 어딘가에 숨겨진 채 보석같은 매력을 고스란히 간직한 책들을 고르는 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책에 나온 실제 모델인 고바야시 서점 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점점 독립서점이 늘어가고 있다. 제주도에 머물 때에는 소리소문 서점에 가끔 들르곤 했었는데, 일반 대형서점과는 다르게 베스트셀러와 메이저 출판사 위주가 아닌 평소 대형서점과 인터넷 서점 메인에서는 한 번도 볼 수 없는 양식의 책들이 소개되어 있기도 했다. 독립서점에 가면 마치 책을 좋아하더라도 편식해온 습관을 고치라고 종용받듯이 신선한 충격을 받으며,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이렇게 자신만의 세계관을 펼치는 작가들이 있다는 사실이 못내 부럽기까지 했다. 가끔 독립서점에 가면 어떤 주인분은 가까이 다가와서 어떤 책을 고르냐고 묻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해서 꺼려지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독립서점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비대면과 시니컬함을 대명사로 하는 차가운 현대사회에서 자신이 읽은 책을 자신있게 권하며 대면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마음은 지속되어야 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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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부탄에 삽니다
고은경 외 지음 / 공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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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경, 이연지, 김휘래 님의 [우리는 부탄에 삽니다]를 읽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다보니 예전에는 그렇게 많이 출판되는 것 같던 여행기들이 자취를 감춰서 더 그런지 다른 나라에 대한 신간 정보에 더욱 눈길이 끌린다. 특히나 ‘부탄’이라니,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책을 읽기 전 부탄에 대한 정보라면 히말라야 부근에 있는 작은 나라, 그리고 언젠가 보았던 행복지수가 엄청 높아 거의 1위에 랭크된 경제적인 지표는 낮지만 국민들이 행복함을 느끼는 나라라고 알고 있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탄은 여행을 가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쉽게 갈 수 없다는 것 정도. 


히밀라야 트래킹을 다녀온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 마디로 가서 정말 드럽게 고생을 하고 드럽게 지내다가 와야 하고 잘못하면 고산병에 걸려 고생만 하다가 온다는 내용이 주류였다. 그런데도 적은 비용이 아님에도 전문 산악인이 아닌 일반인들이 오를 수 있는 높이까지 트래킹을 다녀온 분들은 마치 중독된 것처럼 또 다시 히말라야 트래킹을 꿈꾸고 있었다. 남미에 다녀온 이들 또한 남아메리카의 상당수의 나라가 높은 지대에 형성된 곳이 많기에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뭔가 어질한 느낌이 들며 마추픽추 같은 곳에 오르기 위해서는 고산병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하고 올라가기 전까지는 당최 누가 고산병에 약한지 전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은 1,950미터이기에 고산병의 증세를 느껴보기란 불가능하다. 언젠가 방송인 알베르토가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고 싶어하는 곳 중의 하나인 알프스를 가기 위해서 뭐하러 비싼 돈 들여 스위스를 가냐고 말한 적이 있다. 알프스는 스위스, 이탈리아, 프랑스를 거치는 거대한 산맥이기에 스위스의 융푸라우와 인터라켄 같은 곳에 가고 싶다면 차라리 이탈리아 북부의 돌로미티를 가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라고 말한다. 알베르토의 말이 맞다.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알프스 물가는 아마도 거의 두 배 정도 차이가 날 것이다. 이탈리아의 돌로미티는 상당히 커서 높은 지대에 오르는 코스가 여러 갈래로 나눠져 있다. 그런데 3,000미터 이상의 높은 지대를 물론 트래킹으로 오를 수도 있지만, 케이블카가 워낙에 잘 되어 있어서 두 번 정도 바꿔서 타게 되면 순식간에 3,000미터 이상의 고지대를 밟을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8월을 보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한낮의 더위와 뜨거움은 상상을 초월한다. 내가 돌로미티를 갔을 때에도 산을 오르기 전에는 35도 정도 되는 무더위가 한창이었는데,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15도 정도가 되어 쌀쌀함이 느껴졌다. 공기는 얼마나 맑고 하늘은 얼마나 파란지 정말 무릉도원이 따로 없구나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그 높은 고지에 관광객들을 위한 펍도 있어서 시원한 맥주 한잔과 티롤 지역의 소세지를 먹노라면 세상 모든 시름이 사라지는 것 같은 행복감이 밀려온다. 그러니 비싼 돈 주고 스위스를 갈 것이 아니라 돌로미티를 가자는 알베르토의 말은 일리가 있다. 함께 선배가 신이 나서 그런지 평소와 다르게 무척 업이 되어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케이블카를 타러 가는 길에 신나게 뜀박질을 했다. 그런데 케이블카를 타자마자 선배형이 마치 고꾸라지듯이 맥을 못추며 잠이 들어버렸다. 지상으로 내려와 보니 아마도 알콜 기운과 뜀박질 때문에 고산병 증세가 살짝 온 것 같았다. 선배는 무척 신기한 경험을 한 것처럼 잠시 후에 멀정해졌다. 


이렇게 높은 지대에 대한 기억은 돌로미티의 추억이 유일한데, 부탄의 수도 팀푸는 2,400미터 고지에 있다니, 더군다나 도시의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니 신비한 미지의 나라라는 수식어가 잘 들어맞는 것 같다. 부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세 명의 저자는 신기하게도 70년대, 80년대, 90년대를 대표하고 있다. 부탄에 사는 우리나라 교민이 10명 정도 밖에 안된다고 하니 이들이 서로 만나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쁘고 신기했을까. 그런데 막상 책에 삽입된 사진을 보면 부탄 사람들의 외모가 우리나라 사람들과 너무 흡사하여 말을 하지 않는다면 누가 외국인인지 구별하기 힘들 것 같아 보인다. 아니 어째서 인도, 네팔 그 부근의 사람들은 우리와 확연히 다른 외모인데 부탄만이 그렇게 비슷한 외모를 갖고 있는 것일까? 


첫 번째 이야기를 전해주는 은경 님은 코이카 코디네이터로 부탄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이미 제주에서도 유사한 일을 해왔기에 가능하겠지만 저자의 가족이 모두 거주지를 옮긴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텐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쉽게도 코로나 19로 인하여 해외봉사단원들이 다시 돌아가게 되고 결국은 사무실마저 철수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부탄의 문화적 특성을 살뜰히 전해주기에 부탄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왕성해지고 지구상에 우리와 너무나도 다른 가치관과 습성을 지닌 국가가 존재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운다. 두 번째 이야기를 전해주는 연지 님은 어찌보면 세 명의 저자 중에 가장 부탄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벌써 10년 째 부탄에서 살아가고 있고 무엇보다도 부탄 사람과 혼인하여 살고 있기에 저자가 전해주는 말은 외부인의 시선보다는 부타인들의 삶에 충분히 녹아들어간 부타인들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삶의 중요한 요소들을 충분히 전해주고 있다. 특히나 불교국가로서 집집마다 정성스레 꾸민 제단을 갖고 있는 그들의 신실한 믿음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의 나눔은 그들이 믿는 불교가 단지 종교로서의 기능을 넘어서 인본주의 사상에 흠뻑 젖어든 현대인들에게 인간이 이 모든 자연을 마음대로 할 권리가 없음을 몸소 보여주는 것만 같다. 부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 보니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져 왔던 동물과 식물에 대한 채집과 식용의 권리가 과도하게 남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심지어 파리 한 마리를 때려 죽이는 것에도 신경을 쓰는 연지 님의 남편 타시의 에피소드에서는 부탄 사람들이 경제적 빈국임에도 행복함을 누리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세 번째 이야기를 전해주는 휘래 님은 세 저자 중에 가장 젊은 피로 부탄을 가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지만 우연이 아닌 인연으로 부탄과의 만남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부탄 정부의 일을 도와주는 유엔 상주조정관실에서 분석관으로 일하며 알게 된 내용을 어찌보면 세 명의 저자 중에 가장 객관적인 수치와 평가로 전해주고 있다. 부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전해들은 것처럼 가장 행복한 나라가 맞는가? 부탄에는 우리와 비슷한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전해주며 과연 행복이란 무엇일까라는 추상적인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지고 있다. 그리고 저자가 부탄 유엔 사무실에서 만난 직장 동료들과의 이야기는 세상 어느 곳이나 일터에서 발생되는 갈등과 어려움은 비슷함을 전한다. 하지만 저자가 만난 이들과의 산행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곳과는 뭔가 다른 따뜻함과 산뜻함이 느껴졌다면 그게 바로 부탄이 가진 힘이려나?


“무엇인가에 쫓기듯 무섭도록 속도가 빨라져버린 세상 속에서 자기만의 걸음을 유지하고 있는,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이곳을 특별하고 이상한 나라로 만들어버린 부탄에서, 나는 나이를 먹어가는 앨리스가 된 기분이다.(220)”


“Don’t try to find yourself, just be you.

비슷하게, 나는 부탄에서 산을 오르면서 내가 조금 더 좋아졌다. 산을 잘 올라서가 아니라, 무엇을 더 잘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사람이 되어서가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되어서가 아니라, 산을 잘 못 올라도, 중간에 포기하더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더라도, 더 좋은 사람이 되지 않더라도. 이 아름다운 자연의 한 부분이 나라면, 그냥 그 자체로 충분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좋아하게 되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따라 바뀌는 산처럼, 나도 삶의 단계를 따라 자연스럽게 그냥 내 자신이 되어 살아가고 싶다.(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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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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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었다. 한 홉의 쉼도 없이 흠뻑 빠져들이 단숨에 읽히는 감동과 재미를 담고 있음에도, 마음 속 어딘가 묵직함이 자리하게 만드는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가 담겨 있기에 책장을 덮고 나서도 쉬이 고상욱이라는 인물에서 해방되지 못할 것만 같다. 제주의 4.3 사건을 알게 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학창시절에는 그 사건에 대해서 들어본 적 조차 없었다. 4.3에 대한 내용을 알게 되니 자연스럽게 여순사건의 내막도 꼬리를 무는 것처럼 달려왔다. 그리고 이번 작품을 통해 여순사건에서 마지막까지 투항한 이들이 빨치산이 되어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인채로 본인 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도 연좌제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간혹 뉴스에서 비전향장기수에 대한 내용이 보도될때면 대체 무엇때문에 그렇게 긴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이 꿈꾼 것은 이상적인 사회주의의 단면이고 지금 북한에서 자행되는 정치논리와는 전혀 맞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전향서에 사인하지 않는 것일까? 사돈에 팔촌까지 빨갱이 낙인을 찍혀가면서까지도 지켜야 할 이념이란 무엇인지 납득하기 힘들었다. 


우리나라의 빨갱이 색깔론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빨갱이 운운하느냐고 하지만 전쟁을 겪은 세대가 아직 살아있고 그들이 겪은 공포가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해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극우세력의 집회때마다 성조기가 나붓기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태극기를 사리사욕을 위해서 남용하는 것도 기분 나쁜데, 거기에 성조기까지 대동시켜 아직도 미군의 하수인인 것처럼 부르짓는 이들을 보면 치가 떨릴 지경이다. 그들은 어쩌면 아직도 4.3사건을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빨갱이를 소탕한 것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제주에서 무참히 양민들이 학살된 배경에 미군정의 야욕과 허용이 있었기에 벌어진 일이라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다면 감히 성조기를 그렇게 아무때나 함부로 들고 설치지 않을텐데 말이다. 


읽는 내내 이건 소설이 아니라 저자가 살아온 삶을 전해주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는데, 마지막 저자의 말에서 아버지를 보내드리는 딸의 사부곡임을 알게 되었다. 전라도의 구성진 사투리가 대화의 거의 모든 부분에 나오기에 몇 번을 반복해서 읽어야 때로는 소리를 내봐야 이해가 되는 내용들이 많았지만, 아무래도 이 책의 백미는 바로 그 사투리에서 느껴지는 묘한 뉘앙스의 정겨움이었다. 고아리와 아버지 고상욱의 대화에서 사투리가 아닌 표준말로 대화를 나누었다면 어쩌면 고상욱은 빨치산이 아니라 일제 앞잡이로 뒤바뀌었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소설의 첫 머리부터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병원으로 실려가 죽음을 맞이하는 기구한 운명의 아버지는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후 180킬로의 속도로 달려와 아버지의 장례를 준비하는 딸 고아리는 아버지가 한 평생 지켜온 유물론자의 삶으로 관계를 맺은 온갖 사람들의 문상을 받는라 정신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 문상을 온 이들이 아버지와 어떤 관계였는지 하나씩 이야기가 펼쳐지며 빨갱이로 낙인찍힌 고상욱의 삶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어찌보면 소설의 가장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작은아버지가 형의 유골함을 안고 우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작은 아버지가 한 평생 술에 쩔어 자신의 앞길을 막다 못해 망가뜨린 형에게 한탄과 원망을 하며 지내온 내용도 가슴 아프고 안타까웠지만, 소설의 후반부에 큰언니를 통해서 처음 듣게 되는 작은 아버지의 사연은 그야말로 기막힌 일이었다. 형 고상욱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동생인 작은 아버지는 형이 여순사건 이후 14연대의 군인들과 함께 군인들을 피해 산으로 올라간 사이 고상욱을 잡이들이려고 학교에서 온 이들에게 자신이 고상욱의 동생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며 총부리를 들이댄 그들을 집으로 데려가 결국은 좌익이 아니라 당당하게 집에 머물던 할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하게 된다. 촉새라고 입을 다물지 않던 작은 아버지가 그 이후로 입을 다문 채 술에 몸을 기댄 채 한 평생 살아가며 분노하고 원망한 것은 어쩌면 형이 아니라 자신이었을지 모른다. 


이내 아버지의 오죽하멘 이라는 말로 생면부지 타인에게까지 온정을 쏟아붇는 마음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주인공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고 뻿가루를 아버지의 삶의 흔적이 담긴 곳에 뿌리며 깨닫게 된다. 아버지가 결코 잘못된 삶을 살아온 게 아니라고 말이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이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231)"


"고통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잘 참는 사람은 싸우지 않고 그저 견딘다.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들고일어나 누군가는 쌈꾼이 되고 누군가는 혁명가가 된다.(68)"


"타인의 눈물이 가문 날의 태양 별처럼 내 마음에 가득 차오른 습기를 불태웠다.(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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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편지에 마음을 볶았다 - 귀농하고픈 아들과 말리는 농부 엄마의 사계절 서간 에세이
조금숙.선무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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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숙, 선무영 님의 [그 편지에 마음을 볶았다]를 읽었다. 부제는 "오해의 잡초를 헤치고 피어난 이해의 말들"이다. 책 표지 귀퉁이에 '귀농하고픈 아들과 말리는 농부 엄마의 사계절 서간 에세이'리는 설명도 있다. 우선 귀농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고, 이어서 엄마와 아들의 이어지는 편지라니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릴 때에는 성인이 된 자녀들이 혼인을 하지 않아도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설사 혼인을 한다 하더라도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에야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이 여러모로 좋지 않을까란 단순한 생각을 했었다. 왜냐하면 연로하신 부모님 두 분만 함께 사는 것을 걱정하는 자녀들의 불안함과 또 아직 혼인하지 않은 자녀가 홀로 어렵게 살아가는 모습을 염려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많이 지켜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거의 대다수의 부모와 자녀들은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살림을 분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품안의 자식이라는 흔한 말처럼 이제 성장한 자녀는 더 이상 부모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헬리콥터 맘과 같은 보호 속에 있으면 퇴보할 뿐 자립할 수 있는 기회는 점점 박탈당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와 아들의 사계절 서간 에세이라니 떨어져 살아도 이렇게 서로의 마음을 전하고 이해할 수 있는 진심을 꾹꾹 눌러담은 편지를 나눌 수 있다면 오히려 같이 사는 것 이상의 정이 생기지 않을까 내심 부러운 마음이 든다. 귀농을 선택한 아들의 편지와 귀농을 말리는 엄마의 답장이 오고가는 중간에 아버지, 며느리의 편지도 중간에 삽입되어 온 가족이 편지로 소통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이제 갓 결혼한 새신랑이 귀농이라니, 그것도 도시에서 충분히 좋은 직장을 얻고 살 수 있음에도 시골로의 귀환이라니 남이라면 그냥 작은 응원을 해주는 것에 그칠지 모르겠지만, 내 자식이라면 아마도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쌍수를 들고 말리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아들인 저자가 귀농을 선택할 수 있는 큰 빽은 뭐니뭐니해도 10년 전에 귀농을 선택한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으며 귀촌과 귀농을 별 생각없이 사용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둘 다 시골 한 적으로 곳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것은 같겠지만, 귀촌은 그저 도시가 아닌 자연을 만끽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고 귀농은 그야말로 논과 밭을 일구는 농부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엄청난 차이였다. 사실 전망 좋은 곳에 시설만 잘 갖출 능력이 된다면 한 적한 곳에 집을 짓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삶의 터전만 바뀌었을 뿐이지 하는 일이나 라이프 스타일에 변화를 주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귀농을 한다는 것은 하루 아침에 오랜시간 농부로 살아온 분들의 영역에 끼어든다는 것이다. 농부의 공동체에 들어간다는 것은 텃새로 무시를 당하고 농삿일을 모른다고 피잔을 듣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 어마어마한 육체 노동량을 감당할 자신이 있냐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편지의 엄마가 몇 번이나 강조하듯이 농사짓는 품목들은 높은 수익을 올리기 어려운 구조이고 날씨에 큰 영향을 받기도 한다. 특히 귀농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아킬레스건처럼 다가오는 조언은 시골에는 아이들이 공동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기관이 별로 없거나 또래의 아이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과 제대로 된 의료 혜택을 받기가 힘들다는 사실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면 젊은 청년 농부들이 무척 행복하게 나온다. 도시의 변변치 않은 삶에서 벗어나 어릴적 엄마와 단둘이 살던 집으로 귀향한 주인공은 엄마 덕에 삼시세끼를 알차게 만들어 먹는다. 영화속에 나오는 단촐하지만 평화롭고 안정된 장면들은 시골 고향집이 없는 게 내심 아쉽게만 느껴질 정도로 매력적이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자연의 흐름과 나와는 무관하게 생존하는 수많은 짐승들과 미생물의 반격이 비지땀을 흘린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기도 하리라. 그 모든 좌절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농삿일을 마다하지 않고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온 많은 분들이 새삼 존경스럽게 다가온다. 별 생각없이 고깃집에서 상추를 리필해주지 않을 때 요즘 채소값이 왜 이렇게 비싸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뉴스에 나오는 불합리한 유통 구조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나와는 상관없는 혹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지 않겠냐고 담념해왔는데, 따지고보면 내가 먹는 모든 것이 결국 농삿일과 연관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지 못하는 과감한 용단을 내린 저자에게 큰 박수를 보내며 좋은 결실을 맺기를 응원한다. 그리고 엄마와 아들의 편지처럼 마음을 나누는 대화들이 많아지길 기원한다. 


"아내는 자신을 감추는 법이 몸에 익었답니다. 보통 사람들은 무얼 입고, 보통 어디서 살고, 보통 무슨 일을 한다는 말에 그렇게 마음이 쓰인다 해요. 무엇이 '보통'이고 어떻게 보통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지 모르겠으니, 본인이 무얼 좋아하는지보다 주변에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마음이 쓰일 수 밖에 없다 합니다. 자꾸 그런 생각이 행동을 주저하게 만든다나요.(63)"


"'노나메기' 정신이라고 들어봤니. 온몸의 힘을 박박 긁어 낼 때 흘리는 박땀, 안간땀, 피땀. 그렇게 흘린 땀만큼 서로서로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노나메기란다.(154)"


"삶을 향기롭게 하려면 용기가 꼭 함께해야 하는 것 같아. 나이가 들어서도, 소소한 일상에서도,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217)"


"척박함 속에서도 평화로움을 유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을 수 있다면, 오늘을 사는 나에게도 그들이 누리는 것과 같은 평화가 찾아올 것으로 믿었다.-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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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동 사람들 - 공단 마을 이야기 보리 만화밥 12
이종철 지음 / 보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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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작가의 [제철동 사람들]을 읽었다. 부제는 ‘공단 마을 이야기’이다. 3년 전 코로나가 시작되기 얼마 전에 [까대기]를 읽고 흡족한 마음에 저자 신간 알림을 해 놓았는데, 이번엔 저자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긴 내용으로 포항제철 인근의 마을에서 30년간 식당을 해온 부모님과 동네 친구들, 학교 친구들, 그리고 저자의 마음 고백이 담겨 있다. 바로 전에 [쇳밥일지]를 읽어서 더 그런지 모르겠지만, 쇳가루 날리는 공장 지대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눈앞에 그려지는 착각마저 든다. 만화속에 그려진 제철동의 모습은 작업복을 입고 식사를 하러 온 사람들의 모습마저 깔끔하고 상쾌해 보인다. 마치 가을 하늘의 모습으로 둔갑한 채 30도가 넘는 한 여름의 바깥 풍경을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실내에서 바라보면 상쾌해보이는 것처럼, 노동자들의 옷에 알알이 박힌 철가루와 먼지와 냄새는 직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어릴적 살았던 동네는 제철동 같은 거대한 공단이 있는 곳이 아니었음에도 수출입 부두항이 가까워서 그런지 어머어마하게 큰 대형 트레일러들이 쉴세없이 지나다녔다. 그리고 그 거대한 창고에 들러 물건을 싣거나 내리곤 했을 것이다. 워낙에 큰 화물들을 싣고 다니는 차들이 쉴세없이 지나다니다보니 먼지가 항상 가득했고 대형 트럭에서 울리는 클락션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어릴 때는 그렇게 큰 차들도 무섭지 않았는지 요리조리 피해다니며 겁도 없이 뛰어다니곤 했다. 지금 우연히 그 곳을 지나치게 되면, 운전하기가 겁날 정도로 여전히 대형 트럭들이 많이 어서 빨리 그 구간을 지나가려고 한다. 그럼에도 그곳에서 참 많은 친구들을 만났고 학교를 다녔다. 그때는 어떻게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대형 트레일러들이 다니는 길을 한참이나 걸어내려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혼자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녔다. 나와 같은 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다 그랬으니 당연하게 느껴졌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조금 아찔한 기분도 든다. 


제철동 사람들의 주인공 강이의 유년 시절을 재미있게 읽다보니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저자의 상상력이 가미되기도 했겠지만, 어떻게 함께 지낸 사람들의 사연들을 잘 기억하고 있는지 신기하기도 하고 어릴때부터 사람들과의 관계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든 적이 있다. 험난한 유년시절을 보낸 적이 없기에 딱히 드라마틱한 일도 없어서 나중에 무용담처럼 해줄 얘기도 없다는 게 아쉽게 느껴진 적이 있다. 당연히 배부른 투정이요, 철없는 소리겠지만 유년시절 고난의 시기를 딛고 일어선 이들의 성장기는 많은 부분에서 감동적이고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의 확장은 아마도 그 힘든 시기를 통해서 형성된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 특별히 고생을 한 적도 없고 엄청난 실패의 늪에 빠져본 적도 극도의 사춘기를 보내며 못된 짓만 골라삼던 적도 없이 무던하고 범생처럼 지내왔다. 그래서 그런지 학창시절을 그리워 하는 이들의 마음이 잘 헤아려지지 않는다. 그때가 뭐가 재미있다고 돌아가고 싶은 것일까란 생각이 든다. 학교 폭력을 당한 적도 그렇다고 친구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도 뭔가 항상 외로웠던 것 같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남들이 보는 나와 내가 느끼는 나는 많이 다른 것 같다. 저자의 그림을 보고 과거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렇게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어가는 것인가란 생각을 해 본다. 후회되는 일도 아쉬운 일도 많겠지만 그럼에도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렇게 살다보면 또 언젠가는 지금과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란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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