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이미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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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었다. 수록작에는 이미상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 김멜라 ‘제 꿈 꾸세요’, 성혜령 ‘버섯 농장’, 이서수 ‘젊은 근희의 행진’, 정선임 ‘요카타’, 함윤이 ‘자개장의 용도’, 현호정 ‘연필 샌드위치’ 이렇게 일곱 작품이다. 이번에 수록된 작품에는 처음 듣는 이름의 작가들이 여러 명 있었고, 몽환적인 세상을 헤매는 것처럼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내용들도 있었다. 그리고 한 동안 핫한 주제였던 젠더에 대한 소재들이 다소 줄어들었지만 오히려 이야기의 다양성은 더욱 확대된 것 같아 낯설음을 반가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록된 작품들에 대한 공통된 느낌은 한 마디로 대체 어떻게 이런 이야기들을 상상해 낼 수 있을까란 경탄이다. 다소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도 녹아들어가 있겠지만 1도 염두해두지 않았던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 마치 원래 있었던 사람의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어 그대로 진행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흘러간다는 것은 기적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내가 한 순간에 읽고 지나친 내용을 위해서 그 몇 십배, 몇 백배의 노력을 기울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대상을 받은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목경과 무경의 부모가 육아에 지쳐 권태기가 왔다는 내용이었다. 내리사랑이라고 하지만 부모들도 분명히 자녀를 돌보고 키우는 데 지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고, 자녀를 낳아 키우기 전의 자유로웠던 때를 그리워하며 열정을 갖고 아이를 돌볼 때에는 엄격히 제한했던 것들을 즐기도록 방관할 수 있다는 사실. 때가 되면 다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자식을 아끼는 부모의 모습으로 돌아오겠지만 말이다. 그 절묘한 타이밍에 혼자인 고모가 목경과 무경을 돌보며 부모 이상의 관계를 맺게 되는 내용이 이어진다. 그리고 쌀, 보리도 되지 못한 모래인 고모가 목경과 무경을 데리고 사냥을 떠나 총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곳에서 두 남자를 만나 희롱 비슷한 놀림을 받으며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목경과는 다르게 조용했던 무경은 고모가 잃어버린 총을 찾게 되고 목경이 동경했던 고모는 무경에게 딸의 칭호를 내리게 된다. 그리고 무경의 말은 섬뜩하리 만큼 성숙하며 송곳같이 폐부를 찌른다. 고모가 할 수 있지만 하기 싫은 일을 대신 하게 되었다는 말. 마치 논리의 3단 논법 같은 대답을 어린 목경은 이해할 수 없지만 고모를 언니에게 빼앗겼다는 사실만은 확실해졌다. 


‘버섯 농장’에는 기진이 진화의 부탁으로 사기를 친 진화의 전 남친의 후배의 아버지가 있는 요양원으로 향하며 시작된다. 그리고 기진과 진화는 서로의 부모를 혐오하는 공통점으로 친해졌지만 기진과 진화의 경제적 사정은 전혀 달랐다. 그래서 기진의 부모가 교통사고로 한 순간에 돌아가셨음에도 진화와의 사회적 출발과 관점은 달랐다. 진화는 오랜만에 만난 기진에게 전 남친의 후배가 벌인 사기행각을 설명하며 어째서 그 후배의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지 설명한다. 요양원에서 마주한 후배의 아버지는 자신도 아들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시켰는데 그 이후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도 아비라는 이름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어서 자신 또한 어머니를 돌보고 위해서 부인과도 이혼을 해야 했고 남겨진 돈으로 비싼 요양원의 비용을 산술적으로 계산하여 알려준다. 후배의 아버지의 뻔뻔한 말에 대응하지 못한 진화는 후배가 사기 친 돈을 돌려달라는 말을 하지 못한 채 후배의 아버지의 차를 뒤쫓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돈을 받으러 가는 진화가 사간 참외를 먹으며 상상치도 못했던 사건이 벌어진다. 진화는 정말 어떤 의도를 갖고 후배의 아버지를 만나러 간 것일까?


‘젊은 근희의 행진’은 관종에 대한 새로운 시선이 주목된다. 문희는 성소수자로 강하와의 알콩달콩한 삶을 기대하지만, 엄마가 늙으막에 더 이상 셋집에서 살 수 없다며 덜컥 빈지하방을 매수하고 세입자의 계약이 1년이나 남아 있어 문희의 집에 함께 살게 된다. 어릴때부터 제맘대로 하고 싶은 것만 해온 동생은 절대로 엄마랑 같이 살 수 없다며 문희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는 것만 같아 얄밉기만 하다. 한동안 근희와 연락을 안하던 문희는 엄마의 재촉으로 근희에게 전화하지만 통화가 되지 않는다. 급기야 우려하는 마음으로 근희의 원룸에 들어가보니 근희는 핸드폰도 나둔채 어디론가 사라졌고 근희의 폰을 통해서 동생이 신종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벗방은 아니지만 응근히 몸매를 드러내는 북튜버를 직업으로 선택한 동생이 못마땅했던 문희는 근희를 관종이라고 치부하며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상대라 생각한다. 문희 몰래 근희와 연락해온 강하는 문희에게 손편지를 써서 연락해보자고 권유하고 근희의 답장을 전해준다. 엄마가 근희에게 보내는 편지를 엿보고 근희가 보내온 답장을 읽으며 문희는 동생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이 작품에 대한 강화길 작가의 심사평 중에 문희가 근희를 이해하기까지의 어려움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세상에 가족만큼 가까운 사이는 없지만, 또 가족만큼 서호를 모르는 관계도 없다. 게다가 상대의 새로운 모습, 내가 모르는 훌륭한 모습은 인정하기 싫어한다. 그건 그 사람을 판단해온 나의 오랜 괸점을 파괴해야만 가능하니까, 이 소설은 그 파괴에 대한 이야기다.(335)”


‘요카타’라는 일본어의 뜻은 다행이다 라는 말이다. 요카타 할머니로 불리는 서연화 할머니는 100세를 맞이하여 새해 첫날 관공서의 방문을 받아 사진도 찍고 지역 신문사에 소개되며 시장에서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덩달아 어느 라디오의 전화 인터뷰에도 섭외를 받아 요카타 할머니를 담당한 지역 사회복지사 진의 코칭을 받으며 대답을 준비하고 있다. 사실 요카타 할머니는 이름부터 나이까지 아기때 죽은 언니의 신분을 갖고 살아왔다. 자신은 이름도 없이 자라다 언니가 죽자 언니의 역사를 되물림한 요카타 할머니는 인터뷰를 준비하고 진행하면서도 그러한 진실을 전해주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바로 이렇게 한국전쟁과 일제강점기를 보낸  백 살의 할머니가 자신이 살아온 삶을 온전히 사실대로 전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복지사 진의 질문에 에둘러 답하며 내용을 각색한다. 그 이유를 강화길 작가가 이렇게 설명한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대신,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흔한 서사의 주인공으로 남는다. 그런 방식으로 자신만의 경험을 애써 감춘다. 하지만 독자는 알 수 있다. 바로 그 부정이야말로 그녀가 자신의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사실과 다르게 말하고, 속내를 간직하는 것. 그렇게 진실은 그녀만의 것으로 남는다(‘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인 세상 속에서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드는 건, 어쩌면 홀로 간직하는 비밀인지도 모르겠다).(336)”

신형철 평론가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작가는 서연화의 눈꺼풀 안쪽까지를 들여다보며 그의 진실을 함께 지켜낸다. 너무도 긴 시간과 많은 감정이 응축돼 있어서 다른 말로 바꿔 쓸 수조차도 없는 한 단어 ‘요카타’로 귀결되는 그런 진실을. E. M. 포스터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진실하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게 말하는 다른 인간을 만나고 싶어 소설을 읽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딱 그런 소설이다.(345)”


‘자개장의 용도’는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시간 여행을 가능케 하는 옷장을 연상시키는 자개장이 나온다. 영화에서는 옷장에 들어가서 눈을 감고 힘을 주며 집중을 하면 과거로 돌아갈 수 있지만, 소설 속에서의 자개장은 원하는 곳을 떠올리면 그곳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해 준다. 다만 돌아올 때는 자개장의 힘을 빌릴 수 없다. 그래서 4대에 걸쳐 여성들에게 대물림되는 자개장의 용도를 알려줄 때는 항상 돌아올 때를 염두해두고 원하는 장소를 떠올려야 한다는 주의를 받게 된다. 아직은 엄마에게 자개장을 물려받지 못한 큰 딸인 ‘나’는 서울로 대학을 가면서 엄마에게 자개장을 빌리게 된다. 편도 교통비를 아끼는 목적으로 빌려온 자개장이지만, ‘나’는 엄마의 독촉에도 집에 가지 않는다. 자개장 덕분에 애인 비슷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고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을 찰나에 ‘나’는 자개장이 가진 놀라운 비밀을 알려주려다 그만 거짓말을 하게 된다. 이후 정우는 말도 없이 사라지고, ‘나’는 돌아올 것을 대비하여 떠나야 한다는 염려의 말을 뒤집게 된다. 바로 엄마에게 가장 멀리 떠난 곳이 어디냐는 질문을 통해서. 엄마는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뜻을 가진 타클라마칸사막에 갔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으며 자개장을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돌아올 길을 전혀 개의치 않아야만 제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오히려 멀리 떠나야먄 제대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진실을 주인공 또한 돌아올 길을 생각하지 않고 떠나고 나서야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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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슬픔의 거울 오르부아르 3부작 3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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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르메트르의 [우리 슬픔의 거울]을 읽었다. 3년 전 어떤 책을 통해서 피에르 르메트르의 [사흘, 그리고 한 인생]을 알게 되었다. 놀라운 흡입력과 인간의 내면에 대한 깊은 통찰이 느껴져, 바로 저자의 다른 소설을 탐닉하게 되었다. 이어서 [오르부아르]와 [화재의 색]을 연달아 읽고 나자 오히려 너무 빨리 읽어버린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 정도로 아쉬웠다. 언제쯤 저자의 신간이 나올까 오매불망 기다리던 차에 드디어 <참화의 아이들>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우리 슬픔의 거울] 출간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전작을 읽었을 때도 느꼈던 부분이지만, 대체 이렇게 장대한 스케일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공들여 치밀히 준비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세계사를 공부했다고 해도 또한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이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쳤음에도 단순히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지나온 역사로만 여겨왔었다. 설마 21세기에 이토록 문명화된 사회에서 끔찍한 전쟁이 다시 벌어지지는 않겠지라는 안일에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가, 뒷통수를 제대로 맞은 것처럼 벌써 1년 째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속되고 있다. 전쟁의 초반기에는 뉴스에서 우크라이나의 피해 상황을 어느 정도 실시간으로 보도해주곤 했는데, 요즘은 일부러 인터넷을 통해 업뎃되는 내용을 찾아보지 않는 이상은 자세한 진행 상황을 알기 어려울 정도로 새로운 뉴스를 접하기 힘들어졌다. 어차피 저 먼 나라 이야기니까 라는 식의 피부에 와닿지 않는 거리감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겪고 있는 전쟁의 참상을 외면하게 만들고, 그러거나 말거나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한국전쟁을 겪었고 비극의 틈바구니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생이별을 했으며, 그 참극의 사연을 가진 주인공들이 현재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먼 타국의 이야기라 해서 전쟁에 무심하다면 우리는 한국전쟁이 가져온 고통에 슬퍼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이번 작품의 시작에는 초등학교 교사이면서 주말에 카페에서 일하는 루이즈, 전쟁의 포화 속에서 두려움에 떨지만 군의관의 천식 진단으로 죽음과 폭력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음에도 고집스레 주어진 군인의 책무를 다하려는 하사 가브리엘과 권모술수로 위장하여 온갖 교묘한 방법으로 이득을 취하는 깡패같은 병사 라울 랑그라드, 그리고 마치 디카프리오가 주연이었던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주인공처럼 아무런 자격도 없지만 현하지변의 말솜씨로 변호사, 선생님, 파일럿, 대변인 그리고 가톨릭 사제에 이르기까지 변신을 감행하며 사기를 치는 데지레, 마지막으로 소설의 중간에 등장하는 헌병대원 페르낭 상사의 이야기가 순차적으로 반복되며 진행된다. 처음 루이즈와 가브리엘, 라울과 데지레의 이야기가 펼쳐질 때만 해도 전쟁의 참상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루이즈는 고약한 심보를 가진 카페 주인 쥘 씨의 가게에서 서빙을 하다가 수년 간 같은 자리에 앉아 머물다 가는 나이든 의사에게 기이한 부탁을 받게 된다. 혹시나 매춘을 시도하는 것이 아닐까 우려되는 의사의 제안은 단지 루이즈에게 옷을 벗어달라는 것이다. 루이즈는 내키지 않지만 무엇에 홀린 듯 의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한 호텔 방에서 옷을 벗게 되고 그 순간 의사는 준비해 온 총으로 자살한다. 극도의 충격에 혼비백산된 루이즈는 피갑철한 알몸으로 거리에 뛰쳐나와 사람들의 주목을 받다 실신하여 병원에 실려간다. 경찰의 조사를 받으며 루이즈는 의사의 아내를 만나게 되고 소식을 듣게 된 쥘 씨를 통해서 숨겨진 기구한 사연의 실마리를 잡게 된다. 루이즈가 기억하는 엄마 벨몽 부인은 극심한 우울증을 앓아 무기력하게 삶을 마감했는데, 초등 교사가 될 수 있었던 엄마가 자살한 의사의 하녀로 자원하게 된 것은 벨몽 부인과 의사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기 때문이었고 그로 인해 아내가 있던 의사의 집에서 아이를 갖게 되고 그 아이를 빼앗기며 삶의 의지를 소멸시켜 버린 것이 원인이었다. 


쥘 씨를 통해 기막힌 사연을 듣게 된 루이즈는 자신에게 이복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복 동생의 흔적을 찾아 헤매다 그의 이름이 라울이라는 것에 다다르게 된다. 루이즈의 이복 동생이 라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에 진행된 이야기는 소심하고 유약하지만 고난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가브리엘을 괴롭히는 라울의 모습이 그려진다. 전시상황이라는 특수한 정황을 차치하더라도 양아치같은 라울의 행동은 비난받기에 충분했지만, 생존을 위한 피치못할 적응의 한 단면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브리엘과 라울이 독일군의 공격을 받아 후퇴하던 와중에 가브리엘의 용맹한 모습에 탄복한 라울이 전과 다르게 가브리엘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아직은 얄팍한 라울의 꼬드김으로 전열에서 이탈한 그들은 곧바로 다른 부대에 발각되어 탈취범으로 수감되고 만다. 이후 독일군이 파리 가까이에 진군한다는 소식으로 인해 가브리엘과 라울을 비롯한 각종 범죄로 수감된 이들은 남쪽으로 이감 명령을 받게 된다. 전시에 형편없는 감시 인력으로 천 명이나 되는 수용자들을 탈주나 폭동 없이 이동시킨다는 것이 가능할까? 수용자들이 이감될 장소에 도착하자 그곳에서는 도저히 그들을 수용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고 그 수많은 수용자들을 먹이고 재우고 용변을 해결할 곳이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게 된다. 


가브리엘과 라울이 페르낭이 속한 부대원들의 통솔하에 남쪽으로 이감되는 동안, 루이즈는 쥘 씨와 함께 이복동생을 찾아 나서게 된다. 1940년이 배경이기에 피난길에 오른 수많은 파리 시민들은 자동차, 마차, 수레, 자전거가 뒤엉킨 채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여 걷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어쩌면 이 소설의 가장 특징적이고 독보적인 부분이 기나긴 피난민들의 행렬을 묘사한 내용이 아닐까 싶다. 전쟁이란 살생 무기로 서로를 죽이고 원하는 것을 얻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 사람들이 쌓아놓은 삶의 현장을 처참하게 무너뜨리는 것이다. 루이즈가 쥘 씨와 만난 수많은 피난민들의 행렬에서, 그리고 독일군의 폭격으로 사람들이 숨지고 가족에게서 떨어져 나간 쌍둥이와 어린 아기(나중에 루이즈가 마들렌이라고 이름을 붙이는)를 돌보게 될 때 순식간에 걸인으로 전락되는 루이즈의 상황을 통해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다는 후회와 자책이 밀려왔다.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고향을 떠난 수많은 이들이 폴란드의 국경을 넘어서는 장면들이 많이 보도되었는데, 시간이 이렇게 흘러 소설 속에 묘사된 일이 또 다시 반복되고 있다니 정말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무너지고 부서진 삶의 자리는 가장 1차원적인 인간의 행위들을 불능케 만들고 그로 인해 제대로 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하는 인간은 또 다시 쉽게 병에 노출된다. ‘vulnerable’ 이라는 단어가 그야말로 인간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루이즈와 라울의 여정이 진행되는 중간에 데지레의 기막힌 변장술은 소설의 감초와도 같은 역할을 맡는다.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독일군의 진격으로 공포에 휩싸인 파리 시민들은 연합군이 얼마나 적절히 대응하고 있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데지레는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갑자기 연합군의 전시 상황을 시시각각 공표하는 독보적인 공보관의 위치에 오르고 엄청난 말빨로 청중을 휘어잡는다. 사실 데지레는 이미 연합군이 독일군을 대항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고 얼마 후 파리마저 점령당하게 될 것을 짐작하면서도 불안에 떠는 기자와 시민들에게 연합군이 독일군을 잘 상대하고 있기에 걱정하지 말라는 호언장담을 하게 된다. 그가 얼마나 유려한 언변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지, 그리고 데지레의 말이 사실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의 발표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하지만 데지레의 가짜 역할은 언제든 빈틈이 있기 마련이고 그의 이력에 의아함을 느낀 이들이 의심어린 눈초리를 기울이자 순식간에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데지레는 신출귀몰하는 모습으로 갑자기 사제 복장인 수단을 입고 베로 예배당에서 프랑스 사람만이 아닌 다국적의 피난민들을 돌보며 가장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엉뚱하면서도 그야말로 기막힌 재능을 타고난 데지레의 베로 예배당은 이 소설의 주인공을 한데로 모으는 최종착역이 되고, 그들이 죽음과의 사투를 벌이며 천신만고 끝에 베로 예배당에서 마주하게 될 때 모든 갈등은 한 순간에 해소되는 듯한 클라이막스에 도달하게 된다. 전쟁은 순식간에 너무나도 많은 이들을 굶주림에 빠지게 만들고 생존의 위협을 느낀 이들이 서로를 배려하기 보다는 약탈과 폭력이 난무하는 원시시대로의 회귀를 가져오지만, 청소부와의 협력으로 소각될 뻔한 엄청난 돈을 빼돌린 페르낭이 기지를 발휘하여 수용자 천여명이 아사하지 않도록 먹거리를 사들인 일이나 데지레와 같은 사기꾼이 위급한 상황에서 자기 것을 내놓지 못하는 이들을 설복하도록 만들었기에 피난민들의 공동체가 형성되는 기적같은 일들도 생겨나게 된다. 어찌보면 전쟁과 같은 재난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극도의 이기주의자로 만들지만, 단 한 명의 헌신적인 사람으로 인해 상황은 완전히 전복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계기와 이유가 어떻든 같에 루이즈, 가브리엘, 라울, 페르낭, 데지레는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서로를 지키기 위해 연대했기에 후대의 사람들에게 지난 시간을 돌아볼 수 있는 위대한 거울을 선물로 남겨준 것이다. 지난 역사의 거울로 자신의 민낯을 돌아보지 않는 이에게는 희망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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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그 길 끝에 행복이 기다릴 거야 - 흔들리고 지친 이들에게 산티아고가 보내는 응원
손미나 지음 / 코알라컴퍼니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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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미나 작가의 [괜찮아, 그 길 끝에 행복이 기다릴 거야]를 읽었다. 부제는 "흔들리고 지친 이들에게 산티아고가 보내는 응원"이다. 10여년 전에 우연히 산티아고 여행기를 읽고 나서 언젠가는 꼭 산티아고 길을 걷겠다는 다짐을 하며 연이어 몇 권의 산티아고 관련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다양한 루트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 안에 담긴 감동적인 사연들로 인해 산티아고는 한 동안 나에게 있어 어떤 유토피아 같은 곳이었다. 그 이후에 우리나라에서도 산티아고 길을 다녀온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유행처럼 번지게 되었고 알베르게에서 벼룩에 물렸다던지, 한적한 길을 혼자 걷다가 강도를 만났다던지 라는 좋지 않은 후문들도 들려왔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던 때가 되어 스페인에서 몇 개월 동안 머물기 위한 비자도 수령했는데, 설마 이러다 금방 종식되겠지 했던 코로나 사태가 극도로 악화되면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산티아고 길을 꼭 걷지는 못하더라도 몇 개월 동안 준비했던 계획이 틀어지는 것 뿐만 아니라, 확진자 동선 공개에 대한 스트레스로 방콕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길어지자 짜증과 신경질만 늘어갔던 기억이 난다. 


작년 이맘 때 우리나라는 여전히 코로나 확진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던 때에 이미 초기에 재난급의 상황을 거친 유럽의 대다수의 나라들은 서서히 일상을 되찾기 시작했고, 오버 투어리즘으로 몸살을 앓던 유명한 관광지들도 한산하게 둘러볼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했다. 저자의 SNS를 통해 산티아고 길을 걷는다는 포스팅을 볼 수 있었고, 간간히 업뎃 되는 사진과 라방을 통해서 본 산티아고 길 현지의 모습은 마스크를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하는 우리나라의 상황과는 거리가 먼 별나라처럼 느껴졌다. 마스크를 벗고 맘편히 숨을 쉬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넘어 오로지 초록과 황토빛 흙길이 전부를 이루는 기나긴 순례길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갑갑한 영혼을 구원할 천국처럼 여겨졌다. 1년이 지나 저자가 걸은 그 길이 다큐멘터리 영화로도 개봉되고 이렇게 책으로 만나게 되니 지난한게만 느껴졌던 팬데믹 시기를 무사히 보낸 몇 년의 시간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훌쩍 지나온 것처럼 느껴진다. 


노란 화살표와 조가비 문양의 장식고리는 산티아고 길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어디선가 그 비슷한 모양을 보기만 해도 저 가슴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열망이 어서 빨리 세상 밖으로 자신을 내보이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다. 이미 산티아고 길에 대한 많은 여행기가 나와서 그런지 저자의 책은 순례길을 상세히 안내하는 내용은 생략되어 있었다. 800 킬로미터의 길을 걷기 위한 준비물이나 알베르게에서 어떻게 숙박을 하는지와 같은 내용 또한 거의 담겨 있지 않았다. 오로지 그 길을 걷는 자신에게 집중하며 길을 걷는 동안 우연히 마주친 이들의 사연을 간간히 전해주었다. 어찌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육체적 한계를 접하게 될 40일 동안의 대장정을 마치고 나면 그 길을 걷기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내가 어떤 모습일지 집중하고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저자가 전하는 자연이 보여주는 신록의 아름다움은 온 몸에 근육통이 생기고 더 이상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할 것 같은 극한의 고통 중에서도 그 길 위에 서 있는 모든 이들에게 존재의 기쁨을 만끽하게 해 주었다. 


사진 속에 나온 길과 풍경 그리고 저자가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얼굴을 통해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어떤 정화의 특별한 힘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세파에 찌들고 이래저래 미간의 주름만 깊어지는 감정의 동요 속에서 벗어나 온 몸의 근육들을 이완시키고 산티아고 길이 주는 햇살과 바람과 비와 그늘이 함께 하는 자연에 내 몸을 맡길 때 그런 표정이 완성되는 것이 아닐가 싶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민낯도 모른 채 살아가고 그렇게 순진무구한 얼굴이 자기 마음의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 또한 잊고 살아가는데, 우리 삶에 있어서 산티아고 길과 같은 정화의 장소가 우리의 본모습을 되살려 주지 않을까 싶다.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다시 한 번 그 길을 걷기를 꿈꾸며 일상을 살아가야겠다. 


"순례길은 세 단계로 나뉜다는 것이다. 처음은 육체의 한계를 시험하는 시간이고, 다음은 정신과의 싸움이며 앞의 두 과정을 잘 거치고 나면 마지막에 심장이 열리는 경험을 선물받게 된다는 것이다.(144)"


"운명이랄까, 뭐 그런 것이 우리 삶을 궁지로 몰며 힘들게 만들 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여러 가지예요. 가장 쉬운 길은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나 이제 다 그만둘래, 희망이 없어, 라고 불평하며 힘들어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건 병이 만드는 한계 속에 스스로 갇히는 거죠. 내가 선택한 길은 병이 닥쳤어도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하면서 인생이 주는 선물을 계속 즐기는 거였어요. 물론 그런다고 병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중요한 건 갑자기 닥친 불행이 내 삶을 지배하게 두지 않는 거예요. 내 인생은 나의 결정과 선택으로 내가 주도해야 하는 거니까요. 그 두 가지 길에는 큰 차이가 있어요.(241)"


#괜찮아그길끝에행복이기다릴거야 #손미나 #코알라컴퍼니 #산티아고 #caminodesanti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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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 베이비
김의경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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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경 작가의 [헬로 베이비]를 읽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초면인 사람들과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어려워한다. 미국에서는 일명 스몰 토크라는 이름으로 연회와 모임 같은 곳에서 처음 만나는 이들과 이야길 나누는 것이 일상적이라고 하던데, 우리는 그런 문화가 거의 전무한 편이다. 그럼에도 경직된 분위기를 한 번에 누그러뜨리는 강력한 무기가 있으니, 바로 아기의 등장이다. 부모 품에 폭 안긴 아직 걸음마를 떼지 못한 아기를 볼 때면 주변 사람들의 긴장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아기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요리조리 고개를 돌리는 사람, 아기의 주목을 받기 위해 요상한 소리를 내는 사람 등등. 아기를 보면서 다들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아기가 까르르 웃기라도 한다면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가 또 있을까란 생각이 들며 천사가 따로 없다는 말까지 나오게 된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은 그렇게 편하고 행복하기만 한 일이 아니다. 근래에 이르러 육아의 고충이 얼마나 큰지 너도 나도 토로하는 터라 이제서야 제대로 주목을 받게 되었지만. 사실 과거의 어머니들도 똑같은 어려움과 고통에 직면했을 것이다. 단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지. 그리고 육아의 어려움이 커진 이유 중의 하나는 출산과 육아의 연령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20대에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과 30대, 40대에 육아를 하는 것은 엄청난 체력의 차이를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20대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자세한 상황을 대입해보지 않아도 20대의 청년들은 거의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국가에서는 벌써 수년 째 출산장려를 위한 다양한 대책을 내놓고 있다고 말하지만, 출생율이 점점 더 현저하게 줄어드는 걸 보면 아무 실효성이 없는 정책들만 난무하고 있는 듯 하다. 


아무리 평균 수명이 길어졌다고 해도 생식능력까지 무한히 길어지는 것은 아니다. 안타깝게도 어느 정도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는 연령대는 이미 육아의 길에 들어서기에는 한참 늦어진 시간이다. 그래서 딩크족이 많아지기도 하고 의학의 힘을 빌어 자녀출산을 계획하기도 한다. TV에서 의학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갖게 된 부부들이 많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인공수정이 쉽고 간단하지 않을까란 착각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실제 인공수정을 준비하고 실행한 이들은 그 과정이 얼마나 힘겹고 고통스러운지 알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부가 얼마나 간절히 아이를 기다리는지 깨닫게 된다. 


이번 작품은 이렇게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갖기를 원하는 난임부부들의 이야기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난임병원에서 우연히 만나 알게 되었고 서로의 성공을 응원하며 헬로 베이비라는 단톡방을 만들어 모임을 유지해 나간다. 헬로 베이비 멤버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남편이 있는 여자이지만, 소설 속의 남편들은 한결같이 인공수정을 준비하는 아내의 고충을 외면하는 이기적인 존재들이다. 소설 속에서는 인공수정의 갈래 중 체외인공수정에 해당되는 시험관 수정을 시도하는 이들의 이야기이기에 남편과 아내 모두 정자와 난자를 인위적으로 채취해야만 한다. 남편의 정자 채취는 고환에서 직접 채취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자위행위를 통해 채취하기에 간단하지만, 소설 속의 남편들은 난임병원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수치심을 느끼며 아내와 동행하기를 꺼려한다. 반면의 아내의 난자 채취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선 배란을 자극하는 주사를 맞아야 하고 인위적으로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 또한 신체에 부담을 주는 시술이 병행된다. 그렇게 힘겹게 난자를 채취하고 시험관에서 수정을 한 후 다시 여성의 몸에 주입하여 착상되기를 기다리지만, 그것 또한 마음대로 되지 않아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하게 된다. 정상적인 임신 과정에도 입덧을 비롯한 많은 어려움이 동반되는데, 인위적인 착상이 여러차례 실패하게 될 경우 육체적인 고통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압박과 상실감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간절히 아기를 원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되는 인공수정의 경우에도 실행 이전에 고민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바로 시험관 수정을 통해서 생성된 배아에 대한 윤리적 문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배아에 대해서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만일 수정된 그 순간부터 모든 인간과 동일한 존재로 인정하게 된다면 낙태와 인공수정 시 발생된 배아를 처분하는 것은 모두 살인 행위에 해당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법적으로 배아는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하기에 또 배아를 인간이 되기 위한 이전의 세포 단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낙태와 배아 처분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곤 한다. 체외인공수정의 경우 임신성공율을 높이기 위해 여러 개의 배아를 만들어 이식하기 때문에 이식에 부적합한 배아는 실험대상이 되기도 하고, 여러 개의 배아가 착상되었을 경우 인위적인 낙태를 권유받기도 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는 인간의 자기 결정권에 대한 자율적인 선택을 존중하는 의미에 원천을 두고 있다. 우리는 정말 우리 몸의 주인으로 모든 것을 마음대로 결정해도 되는 것일까? 


여타의 문제를 배제하더라도, 소설 속에서 등장한 여러 난임여성들 중에 정효의 극단적인 행동은 난임병원을 다니는 이들의 심리적인 상태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얼마나 큰 심리적 압박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어찌보면 정효가 폐경에 이르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임에도 생리가 몇 달 간 멈추자 인공수정이 성공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난 후에 받은 폐경 판정은 그녀가 신생아 병동에서 모르는 사람의 아기를 데리고 나가는 이상 행동을 저지르도록 종용했을 것이다. 그 모든 정황을 알고 있던 헬로 베이비의 구성원들은 지난 1년 동안 소식이 없던 정효의 행동을 이해하며 함께 슬퍼하고 아파한다. 어쩌면 정효의 극단적인 행동은 단지 한 개인의 정신 이상이나 일탈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병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헬로베이비 #김의경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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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은 안전을 배달하지 않는다 - 배달 사고로 읽는 한국형 플랫폼노동
박정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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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 님의 [플랫폼은 안전을 배달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부제는 "배달 사고로 읽는 한국형 플랫폼노동"이다. 배달 음식이라고 하면 의례히 짜장면과 같은 중국 음식을 떠올렸다. 은색의 철가방을 싣고 도로를 활주하는 배달노동자를 볼 수 있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옛말이 되어버린 어느 중국집의 배달원이라는 말은 배달노동자가 더 이상 하나의 음식점에 귀속되지 않는 마치 프리랜서와 같은 위치로 변경되었다. 책에서도 수없이 언급되는 배달의 민족, 요기요, 쿠팡이츠는 우리의 스마트폰 속에 공통된 앱 카테고리에 담겨 있다. 끼니때가 되면 별 생각없이 주문 앱을 만지작 거리다가 땡기는 음식 후기를 살펴보고 배달비까지 헤아려본 후에 결제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 팬데믹 이전에는 배달 앱을 사용해 본적이 거의 없었는데, 거리두기가 심화되면서 배달 앱을 자주 사용하게 되었다. 음식을 고르고 주문을 하고 나면 조리 중이라는 단계 다음에 픽업 그리고 배달 상황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음에 신기해하곤 했다. 특히나 배달노동자의 위치가 귀여운 이모티콘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 앱 지도 상의 오토바이가 엉뚱한 위치로 가면 갑자기 기분이 상하면서 음식맛이 떨어지지 않을까 염려하기도 했고 배달노동자가 길을 헤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푸념을 하기도 했다. 날씨가 궂은 날에는 배달노동자가 조심히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운전을 하다가 요리조리 시야를 방해하거나 갑자기 끼어드는 배달노동자의 오토바이를 볼 때면 저절로 욕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짜장면 한 그릇도 무료로 배달을 해주던 때에는 배달료를 따로 지불한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배달 앱 초창기에는 배달비가 어느 정도 지정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정말 그때 그때 다른 것 같다. 팬데믹 상황이 악화될수록 거리를 달리는 배달노동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배달비 또한 같이 오르기 시작했다. 어차피 배달노동자에게도 생계가 달린 일이기에 이왕 배달료가 오른다면 그들의 수입이 올라 과속이나 신호위반과도 같은 운전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마치 대부분의 배달 앱 사용자와 배달노동자를 호갱으로 여기는 것처럼 배달료가 상승한다는 것은 음식점 사장님도 배달노동자에게도 이득이 아닌 의문의 승자가 있다는 기사를 읽고 플랫폼 사업의 심각함게 눈을 뜨게 되었다. 


인터넷이 상용화되고 특히나 스마트폰과 SNS의 범람과 더불어 알고리즘이라는 개념이 우리 삶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에는 무수한 개인정보들이 들어가 있고 우리가 알게 모르게 노출된 개인정보들은 어딘가에서 무분별하게 이용되고 있어 별 생각없이 클릭한 상품을 줄기차게 나의 스마트폰으로 노출시킨다. 어찌보면 알고리즘은 AI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으로 마치 선택장애가 있는 나에게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AI의 알고리즘을 이용한 서비스는 의외로 많다. 우리나라의 전국민적인 채팅창인 카카오톡은 일상생활의 전방위적인 부분에서 카카오톡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 극심한 불편함을 느끼도록 잠식해오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기능을 통해서 노동을 하고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AI의 지배를 받으며 노동을 영위하는 동안 그 서비스를 이용하던 사람들도 그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카카오톡 택시가 시작되었을 때, 앱으로 택시를 부르고 비용도 지불할 수 있다는 사실에 열광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덧 카카오 택시의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각종 수수료가 포함된 다양해진 등급은 오히려 소비자의 부담을 가중시켰고 택시 기사님들 또한 알고리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배달노동자 또한 각종 배달앱을 켜고 AI가 지정해주는 배달콜을 받을지 말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더군다나 배달을 원하지 않는 곳을 거부할 경우 한 동안 콜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1시간에 적어도 2개 이상의 배달을 완료해야만 최저임금이 준하는 돈을 벌 수 있다는 압박을 가중시켜 AI의 콜에 얽매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배달노동자들이 왜 그렇게 신호위반과 과속을 일삼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배달 오토바이가 인도를 오가고 골목에서 갑작스럽게 튀어 나올 때 신체의 위협을 받는 일반 시민들은 그들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기에 무턱대고 화를 내거나 욕을 할 수 밖에 없다. 


저자가 말하듯이 배달노동자가 사고를 당했을 때 사람들은 그렇게 난폭하게 오토바이를 모니까 그런 사고가 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는 것처럼, AI의 통제를 받는 배달노동자가 처한 노동현장의 악순환은 쉽게 해결될 수 없다. 오토바이는 다른 교통 수단에 비해서 너무나도 사고에 취약하다. 가만히 서 있다 넘어지기만 해도 골절을 입을 수 있는데, 자동차와 비견한 속도로 달리다 사고가 날 경우에는 생명을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플랫폼 구조는 배달노동자의 안위를 보장하기는 커녕 마치 악덕업주처럼 일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 알아서 제 몸을 챙기라는 사고다. 플랫폼이라는 것은 거대한 프로그램으로 사람이 일일이 계산하고 통제할 필요가 없는 효율성을 극대화시킨 형태이지만, 결국 배달노동자에게 명령을 시키는 플랫폼을 만들고 조정하는 것은 소수의 사람들이 아닌가. 그 플랫폼을 구성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이 노동자들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 요리조리 피해가는 형태의 사업들이 점점 더 많이 양산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결국 하나의 소모품으로 전락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가 된다. 


"배달플랫폼기업이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배달노동자들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배달노동자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였다면 배달플랫폼기업이 일감이 없어 노동자를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할 경우 휴업수당을 지금해야 하고, 대기하라고 지시하려 해도 최저임금 이상을 지불해야 해서 매출 하락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이 때문에 배달플랫폼 기업도 인력 구조조정과 노무관리를 중요한 문제로 생각해야 한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기업들은 노사 갈등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배달플랫폼기업들은 해고로 인한 갈등도, 임금 삭감으로 인한 노사 갈등도 피할 수 있다. AI 알고리즘이 배달노동자들에게 일감을 주지 않고 ,배달료를 낮추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AI 알고리즘이 휘두르는 플랫폼기업식 구조 조정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이 구조조정의 결과는 언제 일을 시작할 수 없는 긴 대기 시간, 즉 초단기 실업시간의 확대와 장시간 노동이다. 하루 10시간 노동으로 하루 20만원을 벌었던 노동자는 이제 12-15시간씩 길바닥에서 대기하거나 일해야 한다. 실업과 취업의 끊임없는 반복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배달료가 올라가는 짧은 피크 시간대의 배달과 간간이 주어지는 미션 수행을 위해 무리한 운행을 감수해야 한다. AI 알고리즘은 배달을 빨리 배송하는 데는 최적화되어 있지만, 개별 노동자들의 안정적인 소득 보장과 안전 운행에는 관심이 없다.(186-187)"


"우리는 SPC 공장에 있는 소스 조리기가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큰 줄 몰랐고, 거기에 사람이 끼면 죽을 정도로 위험하지 몰랐다. 석탄발전소를 청소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사람이 혼자 일하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우리가 매일 보고 운전하는 도로 위도 마찬가지다. 내가 네 바퀴로 안전하게 지나가는 도로 위의 맨홀 뚜껑이 두 바퀴로 지나가는 어떤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세계를 다르게 바라보는 충격적인 일이다.(258-259)"


#플랫폼은안전을배달하지않는다 #박정훈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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