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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슬픔의 거울 ㅣ 오르부아르 3부작 3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4월
평점 :
피에르 르메트르의 [우리 슬픔의 거울]을 읽었다. 3년 전 어떤 책을 통해서 피에르 르메트르의 [사흘, 그리고 한 인생]을 알게 되었다. 놀라운 흡입력과 인간의 내면에 대한 깊은 통찰이 느껴져, 바로 저자의 다른 소설을 탐닉하게 되었다. 이어서 [오르부아르]와 [화재의 색]을 연달아 읽고 나자 오히려 너무 빨리 읽어버린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 정도로 아쉬웠다. 언제쯤 저자의 신간이 나올까 오매불망 기다리던 차에 드디어 <참화의 아이들>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우리 슬픔의 거울] 출간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전작을 읽었을 때도 느꼈던 부분이지만, 대체 이렇게 장대한 스케일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공들여 치밀히 준비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세계사를 공부했다고 해도 또한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이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쳤음에도 단순히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지나온 역사로만 여겨왔었다. 설마 21세기에 이토록 문명화된 사회에서 끔찍한 전쟁이 다시 벌어지지는 않겠지라는 안일에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가, 뒷통수를 제대로 맞은 것처럼 벌써 1년 째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속되고 있다. 전쟁의 초반기에는 뉴스에서 우크라이나의 피해 상황을 어느 정도 실시간으로 보도해주곤 했는데, 요즘은 일부러 인터넷을 통해 업뎃되는 내용을 찾아보지 않는 이상은 자세한 진행 상황을 알기 어려울 정도로 새로운 뉴스를 접하기 힘들어졌다. 어차피 저 먼 나라 이야기니까 라는 식의 피부에 와닿지 않는 거리감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겪고 있는 전쟁의 참상을 외면하게 만들고, 그러거나 말거나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한국전쟁을 겪었고 비극의 틈바구니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생이별을 했으며, 그 참극의 사연을 가진 주인공들이 현재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먼 타국의 이야기라 해서 전쟁에 무심하다면 우리는 한국전쟁이 가져온 고통에 슬퍼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이번 작품의 시작에는 초등학교 교사이면서 주말에 카페에서 일하는 루이즈, 전쟁의 포화 속에서 두려움에 떨지만 군의관의 천식 진단으로 죽음과 폭력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음에도 고집스레 주어진 군인의 책무를 다하려는 하사 가브리엘과 권모술수로 위장하여 온갖 교묘한 방법으로 이득을 취하는 깡패같은 병사 라울 랑그라드, 그리고 마치 디카프리오가 주연이었던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주인공처럼 아무런 자격도 없지만 현하지변의 말솜씨로 변호사, 선생님, 파일럿, 대변인 그리고 가톨릭 사제에 이르기까지 변신을 감행하며 사기를 치는 데지레, 마지막으로 소설의 중간에 등장하는 헌병대원 페르낭 상사의 이야기가 순차적으로 반복되며 진행된다. 처음 루이즈와 가브리엘, 라울과 데지레의 이야기가 펼쳐질 때만 해도 전쟁의 참상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루이즈는 고약한 심보를 가진 카페 주인 쥘 씨의 가게에서 서빙을 하다가 수년 간 같은 자리에 앉아 머물다 가는 나이든 의사에게 기이한 부탁을 받게 된다. 혹시나 매춘을 시도하는 것이 아닐까 우려되는 의사의 제안은 단지 루이즈에게 옷을 벗어달라는 것이다. 루이즈는 내키지 않지만 무엇에 홀린 듯 의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한 호텔 방에서 옷을 벗게 되고 그 순간 의사는 준비해 온 총으로 자살한다. 극도의 충격에 혼비백산된 루이즈는 피갑철한 알몸으로 거리에 뛰쳐나와 사람들의 주목을 받다 실신하여 병원에 실려간다. 경찰의 조사를 받으며 루이즈는 의사의 아내를 만나게 되고 소식을 듣게 된 쥘 씨를 통해서 숨겨진 기구한 사연의 실마리를 잡게 된다. 루이즈가 기억하는 엄마 벨몽 부인은 극심한 우울증을 앓아 무기력하게 삶을 마감했는데, 초등 교사가 될 수 있었던 엄마가 자살한 의사의 하녀로 자원하게 된 것은 벨몽 부인과 의사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기 때문이었고 그로 인해 아내가 있던 의사의 집에서 아이를 갖게 되고 그 아이를 빼앗기며 삶의 의지를 소멸시켜 버린 것이 원인이었다.
쥘 씨를 통해 기막힌 사연을 듣게 된 루이즈는 자신에게 이복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복 동생의 흔적을 찾아 헤매다 그의 이름이 라울이라는 것에 다다르게 된다. 루이즈의 이복 동생이 라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에 진행된 이야기는 소심하고 유약하지만 고난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가브리엘을 괴롭히는 라울의 모습이 그려진다. 전시상황이라는 특수한 정황을 차치하더라도 양아치같은 라울의 행동은 비난받기에 충분했지만, 생존을 위한 피치못할 적응의 한 단면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브리엘과 라울이 독일군의 공격을 받아 후퇴하던 와중에 가브리엘의 용맹한 모습에 탄복한 라울이 전과 다르게 가브리엘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아직은 얄팍한 라울의 꼬드김으로 전열에서 이탈한 그들은 곧바로 다른 부대에 발각되어 탈취범으로 수감되고 만다. 이후 독일군이 파리 가까이에 진군한다는 소식으로 인해 가브리엘과 라울을 비롯한 각종 범죄로 수감된 이들은 남쪽으로 이감 명령을 받게 된다. 전시에 형편없는 감시 인력으로 천 명이나 되는 수용자들을 탈주나 폭동 없이 이동시킨다는 것이 가능할까? 수용자들이 이감될 장소에 도착하자 그곳에서는 도저히 그들을 수용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고 그 수많은 수용자들을 먹이고 재우고 용변을 해결할 곳이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게 된다.
가브리엘과 라울이 페르낭이 속한 부대원들의 통솔하에 남쪽으로 이감되는 동안, 루이즈는 쥘 씨와 함께 이복동생을 찾아 나서게 된다. 1940년이 배경이기에 피난길에 오른 수많은 파리 시민들은 자동차, 마차, 수레, 자전거가 뒤엉킨 채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여 걷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어쩌면 이 소설의 가장 특징적이고 독보적인 부분이 기나긴 피난민들의 행렬을 묘사한 내용이 아닐까 싶다. 전쟁이란 살생 무기로 서로를 죽이고 원하는 것을 얻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 사람들이 쌓아놓은 삶의 현장을 처참하게 무너뜨리는 것이다. 루이즈가 쥘 씨와 만난 수많은 피난민들의 행렬에서, 그리고 독일군의 폭격으로 사람들이 숨지고 가족에게서 떨어져 나간 쌍둥이와 어린 아기(나중에 루이즈가 마들렌이라고 이름을 붙이는)를 돌보게 될 때 순식간에 걸인으로 전락되는 루이즈의 상황을 통해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다는 후회와 자책이 밀려왔다.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고향을 떠난 수많은 이들이 폴란드의 국경을 넘어서는 장면들이 많이 보도되었는데, 시간이 이렇게 흘러 소설 속에 묘사된 일이 또 다시 반복되고 있다니 정말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무너지고 부서진 삶의 자리는 가장 1차원적인 인간의 행위들을 불능케 만들고 그로 인해 제대로 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하는 인간은 또 다시 쉽게 병에 노출된다. ‘vulnerable’ 이라는 단어가 그야말로 인간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루이즈와 라울의 여정이 진행되는 중간에 데지레의 기막힌 변장술은 소설의 감초와도 같은 역할을 맡는다.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독일군의 진격으로 공포에 휩싸인 파리 시민들은 연합군이 얼마나 적절히 대응하고 있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데지레는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갑자기 연합군의 전시 상황을 시시각각 공표하는 독보적인 공보관의 위치에 오르고 엄청난 말빨로 청중을 휘어잡는다. 사실 데지레는 이미 연합군이 독일군을 대항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고 얼마 후 파리마저 점령당하게 될 것을 짐작하면서도 불안에 떠는 기자와 시민들에게 연합군이 독일군을 잘 상대하고 있기에 걱정하지 말라는 호언장담을 하게 된다. 그가 얼마나 유려한 언변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지, 그리고 데지레의 말이 사실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의 발표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하지만 데지레의 가짜 역할은 언제든 빈틈이 있기 마련이고 그의 이력에 의아함을 느낀 이들이 의심어린 눈초리를 기울이자 순식간에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데지레는 신출귀몰하는 모습으로 갑자기 사제 복장인 수단을 입고 베로 예배당에서 프랑스 사람만이 아닌 다국적의 피난민들을 돌보며 가장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엉뚱하면서도 그야말로 기막힌 재능을 타고난 데지레의 베로 예배당은 이 소설의 주인공을 한데로 모으는 최종착역이 되고, 그들이 죽음과의 사투를 벌이며 천신만고 끝에 베로 예배당에서 마주하게 될 때 모든 갈등은 한 순간에 해소되는 듯한 클라이막스에 도달하게 된다. 전쟁은 순식간에 너무나도 많은 이들을 굶주림에 빠지게 만들고 생존의 위협을 느낀 이들이 서로를 배려하기 보다는 약탈과 폭력이 난무하는 원시시대로의 회귀를 가져오지만, 청소부와의 협력으로 소각될 뻔한 엄청난 돈을 빼돌린 페르낭이 기지를 발휘하여 수용자 천여명이 아사하지 않도록 먹거리를 사들인 일이나 데지레와 같은 사기꾼이 위급한 상황에서 자기 것을 내놓지 못하는 이들을 설복하도록 만들었기에 피난민들의 공동체가 형성되는 기적같은 일들도 생겨나게 된다. 어찌보면 전쟁과 같은 재난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극도의 이기주의자로 만들지만, 단 한 명의 헌신적인 사람으로 인해 상황은 완전히 전복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계기와 이유가 어떻든 같에 루이즈, 가브리엘, 라울, 페르낭, 데지레는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서로를 지키기 위해 연대했기에 후대의 사람들에게 지난 시간을 돌아볼 수 있는 위대한 거울을 선물로 남겨준 것이다. 지난 역사의 거울로 자신의 민낯을 돌아보지 않는 이에게는 희망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