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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23년 11월
평점 :
이혁진 작가의 [광인]을 읽었다. 몇 달 전 구입해 놓고 첫 장을 읽다가 위스키 얘기가 나와서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두깨도 만만치 않고 다른 책을 먼저 읽다보니 책장에 꽂힌채 검은색의 책머리가 두드러지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작가님의 짧은 단편 시리즈를 읽고 나니 다시 한 번 광인에 도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난 번에 읽었던 첫 장을 집중해서 넘기고 나니 그야말로 진짜 소설이 뭔지 보여주겠다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읽는 것을 멈출수가 없었다. 근래에 꽤 많은 책을 읽었지만 이렇게 한 인간의 내면에 대한 묘사와 설명이 자세하고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작품이 있었던가, 이렇게 사랑에 대해서 낱낱이 해부한 것처럼 심연을 바라보게 해 준 작품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였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니 책이 주는 묵직한 무게 만큼이나 해원, 하진, 준연의 마음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저자의 전작인 [사랑의 이해]에서도 그랬지만 이혁진 작가님은 딱히 러브스토리를 소재로 삼은 것 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사랑이 어떠했는지, 우리가 옳다고 사랑하는 사랑의 관념적인 요소들이 과연 정말로 사랑함에 있어 적절히 녹아들어갈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혼자만의 착각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을 상대에게 덧씌우며 자기만족에 도취한 채 정의롭지 못한 가짜 인생을 살아온 것인지 철저한 통찰의 시간을 요구하는 것만 같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진짜 제대로 된 사랑을 하기 위해서 포기하며 희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심도 있게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세상을 향해 호소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 그런지 해원의 비극적인 마지막 모습이 그동안 사랑을 예사롭게 대한 우리 모두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만 같다.
소설의 화자인 나로 등장하는 주인공 정해원은 마흔 한 살의 성공한 직장인이다. 아주 오랜시간 주식시장 관련된 재무 일을 통해 적지 않은 부를 쌓게 되었고 성공한 건설업 오너인 아버지의 뒷배경 덕분에 선자리에 들어온 여자의 적나라한 몸매 사진까지 첨부된 파일을 건넬 정도로 누구나 탐내는 신랑감이었다. 하지만 해원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밖에서는 그저 사람좋은 웃음을 건네는 위선적인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뿐 아버지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엮인 삶을 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혼을 종용하는 어머니와 벌써 6개월 간 연락을 끊은 채 지내고 있던 차에 허름한 상가 건물의 교습소에서 준연에게 플룻 레슨을 받으며 그와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된다. 나이가 들어 누군가와 친구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해원은 준연의 사랑과 일에 대한 명쾌하고도 분명한 말솜씨를 맘에 들어하며 그와 하는 레슨이 큰 활력소가 됨을 느끼게 된다. 더군다나 둘 다 위스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으니 해원의 고뇌와 외로움은 준연을 통해서 적절히 위로받게 된다.
어찌보며 해원과는 정반대의 사회적, 경제적 위치에 있는 준연은 몹시 가난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위해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을 만큼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이치와 흐름에 따라 적절히 꿈이나 희망과는 멀어진 선택을 하게 되고, 무릇 어른이라면 그런 것들을 내려놓고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것이 책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준연은 그런 세상의 잣대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다. 음악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며 지내온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어머니와 벌써 6년 째 연락없이 지내고 있지만, 준연은 작곡을 통해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일념하에 경제적 어려움이 가져온 고통도 기꺼이 맞서고 있다. 하지만 준연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연락이 오고 어머니가 말기암에 걸렸다는 사실 때문에, 어머니가 치료를 거부한다는 사실 때문에 지난 6년이란 시간의 무게만큼 괴로워한다. 해원은 준연을 알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준연의 사연을 듣고 무작정 그에게 도움을 줄 정도로 준연을 응원하게 된다. 교습소에서 준연과 마신 이름없는 위스키가 더할 나위없을 만큼 좋았고 그 위스키를 만든 이가 준연과 가끔씩 연락하는 친구 하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슨을 받으러 교습소에 들른 해원은 하진과 준연의 합주를 듣게 되고 지난 번에 마셨던 위스키를 만든 이가 바로 하진임을 알아보며 그녀와의 사랑을 예감하게 된다. 해원은 하진과 준연은 어떤 관계일까 궁금해하며 행여나 오랜만에 마음을 여는 친구인 준연을 잃지 않기 위해 하진에게 점점 끌려가는 마음을 잡으려 한다. 해원의 짝사랑이 시작되고 이유없이 불쑥불쑥 올라는 준원에 대한 질투와 시기는 말랑말랑한 연애소설처럼 소소한 재미를 선사하지만 직업과 일에 있어 철두철미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해원은 풋내기 같은 20대의 사랑을 반복하지 않으려 이성의 끈을 되잡기만 한다.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깨닫게 되는 것이지만 비가 많이 오는 날 허름한 상가의 교습실에서 셋이 함께 술을 마시다 갑자기 꺼져버린 형광등의 불빛은 앞으로 이어질 세 사람의 인생이 어떤 파국을 맞이할 것인지 엿보인 복선이 아니었나 싶다.
준연의 오랜 친구이자 한때는 기타 연주가를 꿈꾸며 유학까지 갔었던 하진은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서 위스키를 만드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가업인 증류소를 맡게 된다. 하진 가족의 비극적인 인생사는 하진이 증류소에 집착하며 토종 위스키가 전무하다시피한 우리나라 시장에서 인정받고 널리 보편화될 수 있는 위스키를 제조하는 증류소를 만들겠다는 엄청난 포부를 가진 인물이다. 해원이 첫눈에 반한 하진은 단지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추진력이 강한 일 잘하는 여성이 아니라 아버지의 비극적인 사고를 경험했음에도 그 상처에 짓눌리지 않고 그동안 오랜시간 준비해왔던 연주가로서의 삶을 과감히 던져버리고 자신에게 진짜 만족감을 선사할 수 있는 일에 하나도 허투루 대하지 않는 진심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하진이라면 결혼과 가정에 냉소적인 해원의 마음에 진짜 사랑이라는 감정이 뿌리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엿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진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해원은 준연의 자리가 신경쓰이지 시작한다. 셋이 만나서 즐겁고 유쾌하게 대화하며 위스키를 나누는 시간도 좋지만 해원은 하진과의 오붓한 시간이 되기를 바라게 되고, 준연과의 우정은 위기를 맞게 된다. 해원과 하진의 연애에 속도감이 붙을 때면 마치 그때를 기다렸다는듯이 준연의 사건이 터지고 해원의 사랑은 급브레이크를 밟게 된다. 해원의 감정은 하진을 만나기 전, 준연과 대화를 나눌 때에는 몹시도 이성적인 폭군인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선택과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처럼 그려지지만, 하진과의 만남 이후 준연에 대한 질투는 그의 광기어린 사랑에 폭주기관차를 달게 한다.
준연이 자신의 이기적인 선택으로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한 이후 삶의 의지를 잃게 된 후 하진의 권유에 따라 증류소가 있는 곳으로 가게 되는 장면과 그 이전에 교습실에서 어머니를 죽게 만든 자신에게 화를 내며 유리컵을 깨뜨려 상처난 후 하진의 간호를 받게 되는 장면은 독자로 하여금 해원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분노를 자아내게 된다. 대체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아무리 친구 사이라 해도 선선히 다른 남자를 간호하도록, 그와 24시간을 같이 일하도록 허락할 사람이 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해원의 분노와 설득에 동의하지 않는 하진의 대답은 우리가 왜 그토록 자주 사랑에 실패하고 상처받았는지를 알려준다.
“나를 믿어 주지 못하는 사람을 나는 사랑할 수 없으니까. 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믿지 못하면 그건 사랑이 아니니까.(321)”
하진의 사랑과 믿음에 대한 확고한 대답은 해원에게 혼란스러움을 가중시키고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하진과 준연의 공존에 해원의 속은 타들어만 간다. 급기야 남녀 사이는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의심이 잔디풀처럼 자라나 하진을 온전히 자신의 아내로 만들기 위해 증류소를 불태울 계획을 세우게 된다. 망상에 휩싸인 해원의 방화 계획을 읽을 때만 해도 설마 그가 이렇게 미친 짓을 할까란 의심과 더불어 차라리 하진과 헤어지는 것이 낫지 않을까란 답답함이 밀려왔다. 제목처럼 해원은 하진을 소유하기 위해 조금씩 조금씩 광인이 되어갔다. 증류소에 불을 내고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엄청난 희열과 만족감을 맛본 해원은 그 이후에 벌어질 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다.
해원의 방화 이후 이어지는 하진과 준연의 충격적인 상태의 연속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올곧이 누군가를 소유하려고 하는 욕구 그 자체가 얼마나 엄청난 재앙을 가져올 수 있는지 너무나도 드라마틱하게 그려지고 있다. 점차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해원과 하진을 위해 해원을 용서한 준연의 비극적인 선택, 그리고 증류소가 불탄 후 생의 의지를 잃어버린 하진의 낙담한 하루는 해원의 선택이 어떤 지옥문을 열었는지, 열정과 의욕이 남들보다 몇 배나 넘치던 사람도 그의 심연을 건드리는 사건이 발생하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지 너무나도 리얼하게 보여준다. 해원은 조금 어처구니없게도 방화범으로 발각되지 않고 하진과 결혼하게 되지만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하진을 바라보며 죄값을 치루지 않은 대가를 이렇게 자신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이 받게 된 현실의 괴로움에 몸부림치게 된다.
“이제서야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진의 말들, 행동들, 하진이 내게 했던 사랑을, 그리고 내가 하진에게 했던 사랑이 되지 못한 채 욕망에 불과했던 그 모든 짓들을. 사랑은 기꺼이 두 번째가 되어 주는 것이고 서로에게 최악이 되지 않는, 다만 최악을 지워 주는 사람이 되는 것, 그 시도와 노력이고 행위였다. 사랑이 그런 것이기 때문에 사랑은 누가 시키거나 돈을 준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 중심적인 마음만 따른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사랑은 누가 하지 말라고 해도, 아무리 가진 게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이고 비좁은 마음에서, 작고 유약한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었다.(658)”
“이해할 수 없던 걸 이해하는 것이 이해였다. 믿을 수 없던 걸 믿는 게 믿음이었다. 사랑이 어려운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사랑을 시작하는데는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만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끝까지 이어 가기 위해서는 이해하지 못하고 믿을 수 없던 것까지 이해하고 믿어야 하니까, 그래서 결국엔 사랑하지 못했던 것까지 사랑해야 하니까. 사랑은 지독히 어렵고 힘든 것일 수밖에 없었다. 어떤 재능과도 무관한, 의지와 노력, 헌신과 희생, 용기와 노력을 요구하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이해할 수 없던 것을 이해하고 믿을 수 없던 것을 믿게 해 주고 우리가 할 수 없던 것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던 것을 해내게 해 주는 것이었다. 설령 사랑이 끝나더라도 그 경험과 능력은 우리가 새롭게 사랑할 것을 더욱 힘껏 사랑할 수 있게, 그래서 더욱 힘껏 살아있게 해 줄 수밖에 없었다.(659-660)”
해원의 마지막 선택에 앞서 몇 페이지에 걸친 뒤늦게 깨달은 사랑에 대한 담론은 비극적인 결론이 예상되기에 더욱 더 가슴저미게 다가왔다. 사랑은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것이 아닌 지금 현재 나에게 없는 것을 깨닫고 앞으로 만들어가야만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조금만 더 일찍 알 수 있다면 그 많은 상흔을 짓무르지 않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이혁진 #광인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