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걸
마이아로즈 크레이그 지음, 신혜빈 옮김, 최순규 감수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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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아로즈 크레이그의 [버드걸]을 읽었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다보면 매일 듣게 되는 새 울음 소리가 있다. 나무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옅은 청록색의 깃털이 꼬리까지 이어져 순간 파랑새인가 싶었지만, 또 그렇게 강렬한 파란색은 아니었다. 울음소리가 그다지 듣기 좋은 편이 아니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그 새 이름을 아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몰랐다. 그 새가 둥지를 틀고 나서부터는 비둘기도 까치도 더 이상 오지 않는다는 얘기만 들었다. 주변에 새를 잘 아는 사람을 만나기가 힘들다. 그저 흔하디 흔한 참새, 비둘기, 까치, 까마귀 정도만 구분할 정도로 무심하게 살아왔는데, 이번 책을 읽고 전세계에 1만 여종이 넘는 새가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 그런데 저자가 그 반에 해당되는 5천 종의 새를 직관했다니 그것도 스물 살도 안되는 나이에 말이다. 


탐조인이라는 말 또한 들어 본 적은 있으나 이렇게 생생하게 다가오기는 처음이다. 세상에 다양한 취미와 전문성을 가진 이들이 많겠지만 새를 보기 위해 전세계를 누빈다는 것은 좀처럼 실감이 나질 않는다. 그리고 책에도 나와 있듯이 희귀한 새들을 보기 위해서는 사람이 편히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길이 아닌 길을 뚫고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며 오랜 시간 기다림에 익숙해져야만 한다. 꽤 오래전 무슨 연유인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부엉이가 학교 기숙사 앞에 떨어져 있는 것을 학생들이 발견하고 신고해서 구조대가 오기를 기다린 적이 있다. 부엉이를 놓을 데가 없어서 우산꽂이에 임시로 놓아두었는데, 크기를 실제로 보고 너무 놀라서 부엉이가 이렇게 컸다니 순간 무슨 모형을 갖다 놓은 줄만 알았다. 어떤 종류의 부엉이인지, 아니 부엉이가 맞는지조차 모르겠지만 하늘에 나는 새가 실제로 가까이 보면 이렇게 거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던 기억이 난다. 


저자가 아주 어린시절부터 탐조를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마이아로즈의 아빠와 엄마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열렬한 탐조인이었기 때문이다. 크레이그 탐조대라고도 명명할 수 있는 탐조인 가족들은 새를 향한 어마어마한 사랑으로 전세계 7대륙 40개국을 누비게 된다. 이 가족의 이동 목적은 단 하나, 새로운 새를 탐조하기 위한 불편하고도 복잡한 여정을 멈추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열정적으로 몸을 불사르는 이들이 부럽고 신기하게 여겨졌다.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도 어느 정도의 단념과 포기가 수반되기 마련인데, 크레이그 가족 같은 이들은 그런 장애물을 보란듯이 거둬내고 무조건 앞으로 진격한다. 새로운 새를 보기 위한 미친듯한 열정에 존경심이 들 정도이지만, 저자의 책이 더욱 큰 감동과 놀라움을 선사하는 것은 이 책이 단지 새로운 새를 보고 난 이후의 보고서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주 어린시절부터 새를 탐조해온 마이아로즈는 자연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 자체가 아예 없는 사람처럼 인간과 공생해온 수많은 생물의 존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탐조를 다니며 멸종 위기에 처한 새를 확인하게 되고, 희귀종이 점차 늘어나는 이유는 새의 거처가 줄어들게 만드는 인간의 환경 파괴와 기후 위기 때문임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자연을 탐사한다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인데, 저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문적인 탐조인과 멸종 위기에 처한 새를 구조하고 보호하기 위한 활동을 하는 이들이 거의 대부분 백인 남성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다양한 종류의 새를 보호하기 위해서 더 먼저 확립되어야 할 것은 탐조인의 구성에서부터 가시적 소수 인종이 배제되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천명하게 된다. 새는 백인 남성의 거주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전세계 어느 곳에든 퍼져 있기에 새가 살아가는 모든 곳에 거주하는 소수 인종 또한 그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당한 창구가 개설되어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저자가 언급한 가시적 소수 인종이라는 말 속에 담긴 유색 인종에 대한 극심한 차별과 이슬람교도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성 또한 포함되어 있기에 마이아로즈의 탐조인으로서의 한 걸음 한 걸음은 단지 아직 보지 못한 새를 보고 기록하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경제적 지위와는 무관하게 지구상의 모든 이들이 자연에 대한 공통된 책임이 있음을 공표하고 있다. 


마이아로즈가 그레타 툰베리, 말랄라 유사프자이 등과 더불어 기후 위기에 대한 운동과 성명을 발표하는 운동가로서의 삶을 선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크레이그 부부의 무한한 응원과 지원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책을 읽는 내내 안쓰럽게만 다가오는 마이아로즈의 엄마인 헬레나의 양극성 장애는 가족이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는 위기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인 탐조 여행을 통해 가족의 끈끈한 사랑을 이어갈 수 있다는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조증과 우울증을 오가며 자살 충동을 느끼며 시도하려는 의도조차 마이아로즈와 아빠의 헌신적인 관심과 사랑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새에 대한 엄청난 열정을 가진 저자임에도 엄마가 완전히 병이 나을 수만 있다면 단숨에 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는 고백은 묵직한 감동과 더불어 크레이그 가족의 탐조 여행은 단지 새를 보는 과정이 아니라 정신분열증을 앓는 엄마를 포기하지 않고자 하는 열망이 담겨 있는 시간이었다. 얼마나 많은 갈등과 슬픔의 시간을 보낸 것인지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그들이 견뎌낸 고통의 시간은 기다리던 새를 마주했을 때의 희열로 충분히 보상되는 것 같았다. 


이제 겨우 20대 초반인 저자의 나이를 생각했을 때, 정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돌이켜보면 인생은 무척 짧은 것 같지만 저자가 새를 만나며 엄마를 돌본 시간을 따라가보니 우리 삶은 누군가를 변화시키고 감동받기에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충분한 시간을 충만한 시간으로 바꾸기 위해 때로는 침묵하고 기다리며 반가운 만남이 남길 여운을 고대해본다. 


"나는 여러 활동과 사회운동에 참여하면서 '가시적 소수 인종'이라는 용어를 쓰기로 했는데, 이 개념이 자연을 다루는 분야에서 특히나 유용한 지표이기 때문이다. 가시적 소수 인종은 간단히 말해 자기 자신을 비백인으로 간주하는 인종 집단을 일컫는다. 흑인, 아시아인, 소수민족을 아우르는 BAME라는 용어가 더 일반적이지만, 이 분야에서는 그다지 유용한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야외로 나가 자연을 즐기는 데 있어선, '소수민족'일지라도 백인일 경우 현실에 존재하는 장벽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피부색이 달라서, 다른 모든 이들과 다르게 생겨서 존재하는 장벽이다.(268)"


#마이아로즈크레이그 #버드걸 #문학동네 #MyaRoseGraig #Bird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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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파란, 나폴리 작가의 작업 여행 1
정대건 지음 / 안온북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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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건 작가의 [나의 파란, 나폴리]를 읽었다. 안온북스 작가의 작업 여행 01 이다. 제주도의 서쪽 끝에 사는 사람이 정반대에 있는 성산일출봉을 가 본 적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조금 과장된 얘기일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자기가 사는 곳을 제외하고 다른 지역을 가지 않고 일평생 살아간 사람들도 있다. 여행과 새로운 만남, 해보지 않은 것을 도전하는 경험이 필수적인 삶의 요소로 등장하는 시대이지만 그런걸 하지 않았다고 삶이 불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 저기 해외 여행을 많이 다녀온 사람들이 자랑이랍시고 떠벌이는 얘기를 들을 때가 있다. 그럴때마다 나도 모르게 속에서는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반발심이 솟구친다. 그리고 위선자처럼 '지금 하루 벌어 먹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여행 따위를 다녀왔다고 자랑을 하다니 한심하다 한심해'라는 비열한 사고를 작동시킨다. 아마도 나는 지금 어딘가 무척이나 가고 싶은가보다. 


포지타노의 레몬, 쏘렌토의 아기자기한 기념품 숍, 아말피 해안도로의 깍아지는 절벽도로, 폼페이의 흙색 유적들을 지나쳤음에도 나폴리는 인연이 없었다. 나폴리에서 출발한 유로스타를 수없이 탔음에도 언제나 돌아오는 종착지는 로마였다. 로마 밑으로는 가고 싶지도 않았고, 아는 사람도 없었으며, 가야 할 일도 없었다. 아마도 나에게 있어 제2의 고향같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은 북부의 베로나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저자의 나폴리 찬사를 읽다보니 나폴리를 다녀가지 않은게 무척이나 아쉽고 후회스러웠다. 그때는 왜 그렇게 편견을 가지고 남부 이탈리아를 바라봤을까, 사실 개똥과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건 이탈리아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노트북 하나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직업이 작가이지만, 작가라고 해서 아무 때나 쉴세없이 영감이 떠오르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작가들이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신청해서 낯선 곳에 머물며 스스로의 몸을 조금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 글쓰기의 예리한 감각을 되살리기 위한 시도이지 않을까란 나의 예상은 이번 책을 읽으며 완전히 빗나갔다. 작가에게 있어서 글감을 찾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리라. 나폴리에서 석달 간 지낸 저자는 마치 운명적인 피정의 시간을 보낸 것처럼 집돌이로 지내며 외부의 만남을 주저한 이유를 깨닫게 된다. 나폴리를 떠나기 전날 전망대에 올라 갑작스런 울음을 토해내며 응어리진 무언가가 풀어지는 경험을 전해준다. 어릴 때 친구로부터 외면당한 작은 상처 이후 거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저자의 마음을 오랜시간 지배해 왔기에, 나폴리에서 만난 사람들이 보여준 환대의 순간들은 나폴리가 언제나 그립고 정겨운 고향의 맛과 향기를 지니게 해주었다. 


안부가 궁금한 사람에게 잘 연락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에,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끝없이 외롭고 쓸쓸했다는 말에 뜻밖의 위로를 얻게 된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덜컥 나의 몸을 내어놓을 수 있다는 점에 박수를 보내드리게 된다. 그리고 그 용기로 인하여 어딘가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무상의 환대를 충만히 받고 왔음을 읽게 되어 기쁘다. 


"예전에는 이야기가 그저 도피처와 위안이 되어주는 정도만 되어도 훌륭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훌륭한 이야기는 단순한 도피 이상이다. 앞이 깜깜해 행복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행복에 대한 구체적인 상상력을 줄 수 있다. 그 상상력은 정말로 사람의 선택을 바꿀 수 있고 인생을 바꿀 수 있다. 내가 사랑한 이야기들은 내 인생이 긍정적인 쪽으로 헤엄치도록 경로를 바꿨다. 나는 이야기의 세계에 큰 빚을 졌다.(178)"


#정대건 #나의파란나폴리 #안온북스 #작가의작업여행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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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해로외전
박민정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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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정 작가의 [백년해로외전]을 읽었다. 80년대면 그렇게 오랜 옛날도 아닌 것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군부독재의 시절이라 검열을 당했으며, 같은 여자임에도 아들만 우선시하는 남아선호사상이 만연한 때였고, 버려진 아이들이 여전히 무수하게 입양되던 때였다. 불과 40여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일상을 살아온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있고, 급변하는 시대의 속도를 도저히 맞출 수 없는 터라 갈등은 봉합되지 못한 채 여생이 마무리되곤 한다. 차라리 일제강점기 이전이나 한국 전쟁 후 폐허가 된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면 조금은 나와는 무관한 일로 치부하며 양심의 가책을 덜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와 비슷한 시기의 유년기를 보낸 누군가는 가족들에게 버림받을까 전전긍긍하다 결국은 홀로 이탈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못내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도 당연하게 생각한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주현은 소설가로 대학교수로 임용되지만 비슷한 경력을 가진 남성 작가 교수와 학생들의 부정적인 평가에 휘말리며 우울증을 앓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주현의 큰아버지가 가족과 관련된 내용을 바탕으로 쓴 '백년해로' 단편 소설을 소설집에 싣지 않았음에도 사촌 동생 예리의 남편의 취미생활로 인해 가족들의 치부가 드러나 명예가 실추되었다며 갈등을 겪게 된다. 물론 소설 속의 가정이지만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작가의 개인적 체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완전한 창작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공상과학 소설을 쓴다 하더라도 그 소설 속에 등장한 인물들의 대화와 갈등은 어쩔 수 없이 과거를 지나 현재를 살아가는 나와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길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래서 그런지 만일 내가 나의 가족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잠깐 상상해보았다. 아마도 누군가는 깊은 상처를 받을 것이고 주현의 경우처럼 친척들이 벌때처럼 들고 일어나 가족의 치부를 드러낸 사실에 불같이 화를 내며 나를 공격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한 분노와 공격이 두렵기도 하지만 과연 소설을 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군가에게는 그리 떳떳할 수 없는 하지만 이제와서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드러내는 것은 분명 상처를 주는 것이기에 정당화될 수 있는지 의문을 품게 만든다. 


하지만 주현의 사촌 언니인 야엘(장선)의 경우 아버지의 재가를 위해 할머니가 입양을 주선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주현이 그 사실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비난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 작품에는 참 다양한 어른의 모습이 그려진다. 삼남매를 둔 아들이 이혼하자 재혼에 걸림돌이 될 것 같은 두 딸을 강제로 입양보내려는 할머니의 모습은 용서라는 결론과 연결될 수 있는지조차 연상하기 힘들다. 원래 인성에 문제가 있는 집안인지, 두 딸을 버리고 재혼하여 또 다시 두 딸을 갖게 된 큰아버지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큰아버지 댁에 얹혀 살게 된 어린 주현에게 큰어머니는 새큰어머니라는 그러니까 장훈과 예리, 예은은 이복형제라는 말할 필요 없는 사실을 알리며 쾌감을 맛보는 극도로 이기적인 어른의 모습이 그려진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다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어린 나이에 임신해서 싱글맘이 된 작은 어머니와 그녀의 딸 수진 언니는 큰아버지의 집에서 부엌옆에 붙은 식모방에서 더부살이를 하며 천덕구러기와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하지만, 수진의 굳은 심지를 기반으로 예리의 독사 같은 괴롭힘을 이겨내며 사회적 성공을 이루고 엄마와 함께 큰아버지집을 벗어나는 사이다를 안겨주기도 한다. 유명 로펌의 변호사가 된 수진 언니는 엄마의 고생스러운 삶을 보상하기 위해 결혼도 마다하고 엄마와 단 둘이 살아가는데, 자신이 누리려고 하는 모든 사치스러운 행동을 하려 할 때마다 엄마의 고생스러운 시간이 떠오른다는 묘사에서 마음이 많이 먹먹해졌다. 


피를 나눈 형제이기에 치고 받고 싸우더라도 화해해야 하는 거라고, 치를 떨 정도로 상처를 주고 받아도 다시 같이 밥상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가부장적 통념은 반대로 이 소설 속에 나온 사랑받을 기회조차 박탈당한 이들에게 제대로된 사과와 용서를 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핏줄을 강조하면서도 어째서 장선과 장희를 버리며 입양보냈는지, 2층에 남는 방이 있음에도 어째서 자신의 딸과 손녀 수진을 부엌대기처럼 대했는지 설명해야 하지 않을까? 


프랑스로 입양된 야엘은 정형외과 전문의가 되어 동생 장훈의 딸인 수아와 메시지를 주고 받다가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어찌보면 이 모든 문제의 원흉인 큰아버지는 야엘에게 있어서 아예 제외된 인물로 그려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큰아버지에게 중요한 아들이었던 장훈은 소심한 인물로 학교 친구들과 간 해외여행에서 물이 무서워 제대로 놀지도 못하는 유약한 모습을 보이다 그곳에서 만난 수아 엄마와 결혼을 하게 된다. 속물의 대명사라 할수 있는 큰아버지는 못난 아들에게서 자랑거리를 찾아내지 못하자, 아마도 분명 탐탁치 않았을 동남아 며느리가 좋은 집안의 자녀이고 공부도 많이 했다는 식으로 유세를 떤다. 주현이 바닷가 언니라 칭한 수아 엄마는 아마도 점점 늘어가는 이주민들을 위한 한국어 강사로 채용된 것을 계기로 만남을 갖게 되지만, 주현이 비열한 협잡에 지쳐 학교를 그만두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닷가 언니는 이사회의 반대로 교수임용이 취소되게 된다. 


주현이 처한 상황을 살펴보면 소수라 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읽고 감상을 나누며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무리에 속한 이들조차도 그들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조금이라도 더 인정받고자, 조금이라도 더 나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비열한 짓을 서슴치 않고 행하는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주현이 속한 글을 다루는 사람들의 공동체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한다고 인정받거나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추종하는 이들이 모인 종교 공동체도 비단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어째서 인간은 어딜가나 타인의 잘남을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삐져나오는 질투와 시기를 교묘한 방법으로 상처내기를 일삼는 것인지. 어떤 수학과 과학 공식으로 한 사람의 삐뚤어진 마음을 계산하여 명명백백한 잘못을 가려낼 수 있다면 우리 삶이 조금은 여유로워질 수 있을까? 저자는 주현과 야엘의 만남을 통해서 그리고 주현이 낸 단편 소설로 가족들이 혼란을 겪었던 두려움을 반복할 것 같은 야엘의 연재와 단행본에 대한 떳떳함을 계기로 이 모든 인간이 이기적인 나약함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용서 밖에 없음을 피력한다. 그리고 그 용서는 나를 힘들게 한, 나를 괴롭게 한, 나를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한 한 누구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용서를 선택한 나는 나를 버린 가족들을 재회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만나는 것임을 알려준다. 


"알아봐야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과거, 그저 누군가의 추문으로만 남은 기억을 큰고모는 왜 들추었을까.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애써 노력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할 때 눈을 빛내던 여자의 비열한 표정을 떠올리면서. 그저 그녀는 지독하고 무거운 이야기를 발설하는 게 재미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람을 이해할 필요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걸 나는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154-155)"


#박민정 #백년해로외전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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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그림자
최유안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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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안 작가의 [새벽의 그림자]를 읽었다.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 외신에는 전쟁위험국으로 분류될 수 있는 현 상황, 탈북자에 대한 무관심, 통일을 바라지 않는 젊은 세대 등등. 한 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함께 불렀던 시대를 지나 남과 북이 갈라져 있는 현실을 외면한 채, 안보의 위협은 단지 정권 탈취를 위한 수단으로 남용되는 것처럼 변질된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 이산가족 찾기 방송으로 전국민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당시만 해도 통일에 대한 의식은 꽤나 고취되어 있었고, 한민족이라는 핏줄에 대한 감성도 고무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북한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거나, 국방과 관련된 일을 하거나, 탈북자와 관련된 일을 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통일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모멘트]를 읽고 독일로 통일되기 이전의 삼엄했던 서독과 동독의 관계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비무장지대라는 몇 키로에 달하는 중립지대가 있어 남한이든 북한이든 그 누구도 원한다고 해서 건너갈 수 없는 상황이 수십년 째 지속중이지만, 서독과 동독의 경우 출입국관리소와 같은 사무실의 통제하에 필요시 서독에서 동독으로 반나절 정도 건너 갔다올 수 있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비밀경찰들의 활약은 대단했고 스파이로 오인되어 고문을 당하거나 죽음을 당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장면을 방송으로 보게 되는 날이 왔고, 막연하게 역시 우리나라의 분단상황과는 다르구나 라는 체념섞인 한탄을 내뱉지 않았나 싶다. 어찌보면 우리나라의 상황과 유사한 경험을 하고 통일된 유일한 나라이기에 롤모델로 삼고 그 뒤를 쫒아 우리도 통일을 염두한 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이 당연할텐데도, 우리는 독일의 통일과정에 대해서 심각할 정도로 잘 모른다. 


소설의 주인공 해주가 용준에게 그랬던 것처럼 "통일도 그런 거야. 그게 뭐 대수냐? 여기 지나가는 사람들 봐라. 하루가 힘든 사람들이다."는 일반적인 생각에 용준은 일침을 가한다. "그따위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 전 세계 인류가 되면 뭐 해."(176)


탈북자인 용준이 여동생 준휘가 중국에서 북한으로 강제북송되었다는 소식에 분노하며 통일부 앞에서 일인 시위를 하는 모습을 보고 어떤 남자가 내뱉는 몹쓸 말이 가상의 세계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님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강제 북송을 멈춰라. 탈북자들 다 죽는다.(194)"

"북한에 돈 퍼주는 짓을 막아라, 그딴 식으로 예산 낭비를 하지 말라!"

"너희 같은 애들이 대한민국에 기어들어와서 국민 혈세 다 갖다 쓰는 거야.(195)"


유럽의 리더와 같았던 독일마저 난민 수용에 있어서 회의적인 반응들이 나오고, 독일을 비롯한 서방 선진국의 극우정당들이 난민 수용 거부를 필두로 국민들의 호응을 얻고 정권을 쟁취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해주가 용준을 통해서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선한 선택은 점점 동력을 잃어가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해진다. 


경찰이었던 해주가 우연히 심폐소생술로 쓰러진 사람을 살리는 탈북자 용준을 만나면서 북한의 실상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북송된 여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망가져가는 용준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독일의 통일과정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해주는 독일의 통일과정에 대한 논문을 쓴 뵐러 박사를 통해 베르크라는 마을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윤송이라는 북한 청년의 사연을 헤집게 된다. 해주는 윤송이가 머물던 집과 그가 자살한 건물을 차례로 방문하며 영국 북한대사관의 자녀였던 윤송이가 부모와 함께 탈북을 시도하다가 부모만 붙잡혀 북송된 채 홀로 독일에 남게 된 사연을 알게 되고 그녀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이유가 없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윤송이에게는 이든이라는 갓난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로 윤송이를 지키려 했었던 파독 간호사 장춘자를 요양원에서 만나게 된다. 해주는 장춘자를 통해 베르크라는 마을 사람들이 윤송이의 죽음을 애도하며 진실을 밝히려 하지는 않는 이유를 알게 되고, 이 소설의 핵심을 가로지르는 그동안 용준의 죽음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며 자책해왔던 근원적인 이유를 깨닫게 된다. 


"슐레히테스 게비쎈 Schelchtes Gewissen

죄책감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는 마음(148)"


칸트의 선에 대한 용준의 해박한 지식을 기억하던 해주는 장춘자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독일에 머물며 베르크의 한인 공동체를 유지하고 탈북자들을 지켜주려 했던 단 하나의 이유가 바로 Schelchtes Gewissen 이었음을 알게 된다. 


"누가 나의 선한 행동에 박수쳐주지 않아도 나는 선하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양심이고, 죄책감이며, 선함이다.

인간은 선한 방식으로 진화한다. 책임지지 않는 나를 비난하는 것조차 결국 선함이다.(210)"


우리가 난민을 외면하고 통일에 대해서 무관심하며 탈북자의 생존에 대해서 세금 낭비라고 폭언을 퍼붓는 것은 선함을 포기하고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 인류가 되고, 먹을 것이 넘쳐나고, 백세 시대가 도래해 장수를 한다 하더라도, 인간이 선을 멀리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 자신을 인간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욕망은 행위를 위한 나침반 같아서, 인간은 대체로 이유 없이 그것에 휘둘린다. 욕망이 존재한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건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고, 그보다 더 참담한 건 그걸 인지한다고 해봐야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이다.(11)"


"보지 않으면 알 수 없고, 모르면 편하다. 해주는 그 말이 어떤 뜻인지 이미 안다. 용준이 했던 말이기 때문이다. 삶에서 갑자기 벌어지는 일들은 원치 않는 타이밍에 끼어드는 경우가 더 많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의지와는 별개로 어떤 사건이 나를 이미 점찍어 두었다는 듯이, 우아하고 갑작스러운 밀물처럼 나에게 몰려온다.(93)"


"우리는 많은 사실을 잘 모른다. 한 사람의 경험에는 한계가 있고 우리의 경험은 그 한계를 늘 뛰어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기록을 읽는다. 그것을 읽으면서 경계 바깥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추론할 수 있다. 인간의 유일한 무기는 다른 사람의 일을 내 일처럼 느낄 수 있는 공감성이 발달해 있다는 것. 그들의 슬픔의 둘레에 잠깐 닿아볼 수 있다는 것.(206)"


#최유안 #새벽의그림자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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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집 - 그러나 여전히 가끔은 울 것 같은 마음으로 아무튼 시리즈 62
김미리 지음 / 코난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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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리 작가의 [아무튼, 집]을 읽었다. 부제는 "그러나 여전히 가끔은 울 것 같은 마음으로"이다. 아무튼 시리즈 62번째 책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게 집이 아닐까 싶다. 내 집만 마련되면 다른 어떤 어려움은 뭐든지 다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무형의 교육을 받은 것 같다. 하지만 도시에 살고자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집 마련이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부동산 투기를 근절해야 한다는 얘기를 경제가 뭔지도 모를 나이때부터 들은 것 같은데 여전히 영끌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유효하다. 연예 기사의 가십거리에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모 연예인이 건물을 사고 팔아 수십억의 차익을 남겼다는 내용을 볼 때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딴 세상 얘기처럼 느껴진다. 


생각해보면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집도 화장실이 없었다. 아주 어릴때니까 밤 중에는 부엌의 작은 플라스틱 대야에 큰 것도 보았는데, 평소에 주인집 퍼세식 화장실을 이용할 때에는 항상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나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내가 화장실에 힘을 주고 있다는 걸 그렇게 노래로 표시했었나보다. 아마도 퍼세식 화장실의 각종 괴담으로 인해 무서워서 그랬을 것이다. 아니면 그때부터 화장실의 천연에코를 즐겨했을지도. 나도 꽤 오랜 시간 내 방이 없었다. 사춘기의 시작을 알리는 첫 장면으로 기억되는 게 엄마, 아빠 옆에서 나름대로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처럼 그때 처음 내것이 된 포터블카세트플레이어에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유행가를 듣는 것이었다.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서도 벌써부터 어른 흉내 낸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응근 신경을 썼던 기억이 난다. 


그 아파트에 살 때에는 성당에 걸어갈 수 없었다. 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가야 하는 거리였기에 걸어서 다니기에는 조금 멀었다. 내 유년 시절의 거의 모든 추억이 담긴 성당에 다니는 동년배의 친구들은 대부분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당시에는 꽤 괜찮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다른 애들은 다 걸어서 성당에 다니는데, 나와 몇몇 애들만 버스를 타고 다녀서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었고 버스를 타고 성당을 다니는 건 마치 가난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지금 초딩들도 아파트 이름을 보고 집안 형편을 파악한다고 하는데, 그건 오래전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신축 아파트로 이사오면서 난생 처음 내 방도 생기고 드디어 성당도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내 방이 생기고 침대와 책상도 있다는 게 너무나도 좋았는데 더 이상 친한 친구들을 만날 수 없었다. 삶의 낙이었던 성당 주일학교를 다니기 싫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살짝 우울감이 엄습해왔던 것 같다. 뭔가 환경적으로는 훨씬 윤택해졌는데 정서적으로는 견디기 힘들만큼 노잼 그 자체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본격적인 입시경쟁에 돌입하면서 그따위 고민으로 시간을 허비 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씩 이사를 가지 않고 오래전 그 성당에서 가장 가까웠던 친구들과 함께 어른이 되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공부는 분명 덜 했겠지만 더 많이 웃었을 것이고 더 많은 크리스마스의 추억이 생겼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니 저자가 살아왔던 과거의 집들에 대한 회상에서 자연스럽게 내가 살았던 집이 오버랩되며 정말로 인간에게 집 곧 거주지는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꼭대기집과 수풀집의 5도 2촌의 삶을 실행하는 저자의 결단력과 의지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며 몹시 부럽기도 하다. 번잡한 도시의 삶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는 태생적 도시인들에게는 어쩌면 더욱 더 간절히 고요한 집이 주는 안정감이 필요한 것 같다. 


할머니와 함께 안방을 쓰며 지냈던 저자의 유년시절에 대한 내용을 통해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뜨끈한 아랫목에 놓은 두툼한 담요와 같은 사랑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의 가장 감동적인 부분인 택배기사에 대한 내용의 고찰이 가능했던 것은 저자가 할머니에게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타인에게 나눠줄 수 있는 추억의 집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이제 그들을 선명하게 떠올린다. 나의 다정하고 안온한 세계를 소리 없이 지탱하는 사람들을. 나의 집을 집답게 해주는 사람들을.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사람들을. 그들 하나하나의 얼굴을.(129)"


"살다 보면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은 곳에 가게 될 때가 있다. 심지어 그곳에서 힘껏 버텨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실은 나를 원치 않았다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못 들은 척 어떤 연극을 해내야 하는 시절이 온다. 괜찮아질 거라고 마냥 낙관할 수도, 될 대로 돼라 체념할 수도 없는 때, 그때마다 나는 집을 떠올렸다. 여전한 표정으로 나를 품어주는 익숙한 공간을. 그 속에서 울고 웃으며 살아낸 시간을. 집에서 환대받았던 힘으로 오늘을 버티고 내일을 소망할 수 있었다. 집에 단단히 뿌리내릴수록 나는 삶의 더 멀리까지 안전히 갈 수 있었다. 내가 모르는 세계로 건너가서 가끔 타인의 안부를 물을 수도 있게 되었다.(149)"


#김미리 #아무튼집 #그러나여전히가끔은울것같은마음으로 #코난북스 #아무튼시리즈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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