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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그림자
최유안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6월
평점 :
최유안 작가의 [새벽의 그림자]를 읽었다.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 외신에는 전쟁위험국으로 분류될 수 있는 현 상황, 탈북자에 대한 무관심, 통일을 바라지 않는 젊은 세대 등등. 한 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함께 불렀던 시대를 지나 남과 북이 갈라져 있는 현실을 외면한 채, 안보의 위협은 단지 정권 탈취를 위한 수단으로 남용되는 것처럼 변질된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 이산가족 찾기 방송으로 전국민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당시만 해도 통일에 대한 의식은 꽤나 고취되어 있었고, 한민족이라는 핏줄에 대한 감성도 고무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북한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거나, 국방과 관련된 일을 하거나, 탈북자와 관련된 일을 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통일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모멘트]를 읽고 독일로 통일되기 이전의 삼엄했던 서독과 동독의 관계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비무장지대라는 몇 키로에 달하는 중립지대가 있어 남한이든 북한이든 그 누구도 원한다고 해서 건너갈 수 없는 상황이 수십년 째 지속중이지만, 서독과 동독의 경우 출입국관리소와 같은 사무실의 통제하에 필요시 서독에서 동독으로 반나절 정도 건너 갔다올 수 있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비밀경찰들의 활약은 대단했고 스파이로 오인되어 고문을 당하거나 죽음을 당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장면을 방송으로 보게 되는 날이 왔고, 막연하게 역시 우리나라의 분단상황과는 다르구나 라는 체념섞인 한탄을 내뱉지 않았나 싶다. 어찌보면 우리나라의 상황과 유사한 경험을 하고 통일된 유일한 나라이기에 롤모델로 삼고 그 뒤를 쫒아 우리도 통일을 염두한 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이 당연할텐데도, 우리는 독일의 통일과정에 대해서 심각할 정도로 잘 모른다.
소설의 주인공 해주가 용준에게 그랬던 것처럼 "통일도 그런 거야. 그게 뭐 대수냐? 여기 지나가는 사람들 봐라. 하루가 힘든 사람들이다."는 일반적인 생각에 용준은 일침을 가한다. "그따위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 전 세계 인류가 되면 뭐 해."(176)
탈북자인 용준이 여동생 준휘가 중국에서 북한으로 강제북송되었다는 소식에 분노하며 통일부 앞에서 일인 시위를 하는 모습을 보고 어떤 남자가 내뱉는 몹쓸 말이 가상의 세계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님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강제 북송을 멈춰라. 탈북자들 다 죽는다.(194)"
"북한에 돈 퍼주는 짓을 막아라, 그딴 식으로 예산 낭비를 하지 말라!"
"너희 같은 애들이 대한민국에 기어들어와서 국민 혈세 다 갖다 쓰는 거야.(195)"
유럽의 리더와 같았던 독일마저 난민 수용에 있어서 회의적인 반응들이 나오고, 독일을 비롯한 서방 선진국의 극우정당들이 난민 수용 거부를 필두로 국민들의 호응을 얻고 정권을 쟁취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해주가 용준을 통해서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선한 선택은 점점 동력을 잃어가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해진다.
경찰이었던 해주가 우연히 심폐소생술로 쓰러진 사람을 살리는 탈북자 용준을 만나면서 북한의 실상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북송된 여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망가져가는 용준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독일의 통일과정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해주는 독일의 통일과정에 대한 논문을 쓴 뵐러 박사를 통해 베르크라는 마을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윤송이라는 북한 청년의 사연을 헤집게 된다. 해주는 윤송이가 머물던 집과 그가 자살한 건물을 차례로 방문하며 영국 북한대사관의 자녀였던 윤송이가 부모와 함께 탈북을 시도하다가 부모만 붙잡혀 북송된 채 홀로 독일에 남게 된 사연을 알게 되고 그녀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이유가 없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윤송이에게는 이든이라는 갓난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로 윤송이를 지키려 했었던 파독 간호사 장춘자를 요양원에서 만나게 된다. 해주는 장춘자를 통해 베르크라는 마을 사람들이 윤송이의 죽음을 애도하며 진실을 밝히려 하지는 않는 이유를 알게 되고, 이 소설의 핵심을 가로지르는 그동안 용준의 죽음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며 자책해왔던 근원적인 이유를 깨닫게 된다.
"슐레히테스 게비쎈 Schelchtes Gewissen
죄책감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는 마음(148)"
칸트의 선에 대한 용준의 해박한 지식을 기억하던 해주는 장춘자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독일에 머물며 베르크의 한인 공동체를 유지하고 탈북자들을 지켜주려 했던 단 하나의 이유가 바로 Schelchtes Gewissen 이었음을 알게 된다.
"누가 나의 선한 행동에 박수쳐주지 않아도 나는 선하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양심이고, 죄책감이며, 선함이다.
인간은 선한 방식으로 진화한다. 책임지지 않는 나를 비난하는 것조차 결국 선함이다.(210)"
우리가 난민을 외면하고 통일에 대해서 무관심하며 탈북자의 생존에 대해서 세금 낭비라고 폭언을 퍼붓는 것은 선함을 포기하고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 인류가 되고, 먹을 것이 넘쳐나고, 백세 시대가 도래해 장수를 한다 하더라도, 인간이 선을 멀리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 자신을 인간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욕망은 행위를 위한 나침반 같아서, 인간은 대체로 이유 없이 그것에 휘둘린다. 욕망이 존재한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건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고, 그보다 더 참담한 건 그걸 인지한다고 해봐야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이다.(11)"
"보지 않으면 알 수 없고, 모르면 편하다. 해주는 그 말이 어떤 뜻인지 이미 안다. 용준이 했던 말이기 때문이다. 삶에서 갑자기 벌어지는 일들은 원치 않는 타이밍에 끼어드는 경우가 더 많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의지와는 별개로 어떤 사건이 나를 이미 점찍어 두었다는 듯이, 우아하고 갑작스러운 밀물처럼 나에게 몰려온다.(93)"
"우리는 많은 사실을 잘 모른다. 한 사람의 경험에는 한계가 있고 우리의 경험은 그 한계를 늘 뛰어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기록을 읽는다. 그것을 읽으면서 경계 바깥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추론할 수 있다. 인간의 유일한 무기는 다른 사람의 일을 내 일처럼 느낄 수 있는 공감성이 발달해 있다는 것. 그들의 슬픔의 둘레에 잠깐 닿아볼 수 있다는 것.(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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