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해로외전
박민정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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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정 작가의 [백년해로외전]을 읽었다. 80년대면 그렇게 오랜 옛날도 아닌 것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군부독재의 시절이라 검열을 당했으며, 같은 여자임에도 아들만 우선시하는 남아선호사상이 만연한 때였고, 버려진 아이들이 여전히 무수하게 입양되던 때였다. 불과 40여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일상을 살아온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있고, 급변하는 시대의 속도를 도저히 맞출 수 없는 터라 갈등은 봉합되지 못한 채 여생이 마무리되곤 한다. 차라리 일제강점기 이전이나 한국 전쟁 후 폐허가 된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면 조금은 나와는 무관한 일로 치부하며 양심의 가책을 덜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와 비슷한 시기의 유년기를 보낸 누군가는 가족들에게 버림받을까 전전긍긍하다 결국은 홀로 이탈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못내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도 당연하게 생각한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주현은 소설가로 대학교수로 임용되지만 비슷한 경력을 가진 남성 작가 교수와 학생들의 부정적인 평가에 휘말리며 우울증을 앓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주현의 큰아버지가 가족과 관련된 내용을 바탕으로 쓴 '백년해로' 단편 소설을 소설집에 싣지 않았음에도 사촌 동생 예리의 남편의 취미생활로 인해 가족들의 치부가 드러나 명예가 실추되었다며 갈등을 겪게 된다. 물론 소설 속의 가정이지만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작가의 개인적 체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완전한 창작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공상과학 소설을 쓴다 하더라도 그 소설 속에 등장한 인물들의 대화와 갈등은 어쩔 수 없이 과거를 지나 현재를 살아가는 나와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길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래서 그런지 만일 내가 나의 가족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잠깐 상상해보았다. 아마도 누군가는 깊은 상처를 받을 것이고 주현의 경우처럼 친척들이 벌때처럼 들고 일어나 가족의 치부를 드러낸 사실에 불같이 화를 내며 나를 공격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한 분노와 공격이 두렵기도 하지만 과연 소설을 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군가에게는 그리 떳떳할 수 없는 하지만 이제와서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드러내는 것은 분명 상처를 주는 것이기에 정당화될 수 있는지 의문을 품게 만든다. 


하지만 주현의 사촌 언니인 야엘(장선)의 경우 아버지의 재가를 위해 할머니가 입양을 주선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주현이 그 사실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비난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 작품에는 참 다양한 어른의 모습이 그려진다. 삼남매를 둔 아들이 이혼하자 재혼에 걸림돌이 될 것 같은 두 딸을 강제로 입양보내려는 할머니의 모습은 용서라는 결론과 연결될 수 있는지조차 연상하기 힘들다. 원래 인성에 문제가 있는 집안인지, 두 딸을 버리고 재혼하여 또 다시 두 딸을 갖게 된 큰아버지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큰아버지 댁에 얹혀 살게 된 어린 주현에게 큰어머니는 새큰어머니라는 그러니까 장훈과 예리, 예은은 이복형제라는 말할 필요 없는 사실을 알리며 쾌감을 맛보는 극도로 이기적인 어른의 모습이 그려진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다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어린 나이에 임신해서 싱글맘이 된 작은 어머니와 그녀의 딸 수진 언니는 큰아버지의 집에서 부엌옆에 붙은 식모방에서 더부살이를 하며 천덕구러기와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하지만, 수진의 굳은 심지를 기반으로 예리의 독사 같은 괴롭힘을 이겨내며 사회적 성공을 이루고 엄마와 함께 큰아버지집을 벗어나는 사이다를 안겨주기도 한다. 유명 로펌의 변호사가 된 수진 언니는 엄마의 고생스러운 삶을 보상하기 위해 결혼도 마다하고 엄마와 단 둘이 살아가는데, 자신이 누리려고 하는 모든 사치스러운 행동을 하려 할 때마다 엄마의 고생스러운 시간이 떠오른다는 묘사에서 마음이 많이 먹먹해졌다. 


피를 나눈 형제이기에 치고 받고 싸우더라도 화해해야 하는 거라고, 치를 떨 정도로 상처를 주고 받아도 다시 같이 밥상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가부장적 통념은 반대로 이 소설 속에 나온 사랑받을 기회조차 박탈당한 이들에게 제대로된 사과와 용서를 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핏줄을 강조하면서도 어째서 장선과 장희를 버리며 입양보냈는지, 2층에 남는 방이 있음에도 어째서 자신의 딸과 손녀 수진을 부엌대기처럼 대했는지 설명해야 하지 않을까? 


프랑스로 입양된 야엘은 정형외과 전문의가 되어 동생 장훈의 딸인 수아와 메시지를 주고 받다가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어찌보면 이 모든 문제의 원흉인 큰아버지는 야엘에게 있어서 아예 제외된 인물로 그려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큰아버지에게 중요한 아들이었던 장훈은 소심한 인물로 학교 친구들과 간 해외여행에서 물이 무서워 제대로 놀지도 못하는 유약한 모습을 보이다 그곳에서 만난 수아 엄마와 결혼을 하게 된다. 속물의 대명사라 할수 있는 큰아버지는 못난 아들에게서 자랑거리를 찾아내지 못하자, 아마도 분명 탐탁치 않았을 동남아 며느리가 좋은 집안의 자녀이고 공부도 많이 했다는 식으로 유세를 떤다. 주현이 바닷가 언니라 칭한 수아 엄마는 아마도 점점 늘어가는 이주민들을 위한 한국어 강사로 채용된 것을 계기로 만남을 갖게 되지만, 주현이 비열한 협잡에 지쳐 학교를 그만두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닷가 언니는 이사회의 반대로 교수임용이 취소되게 된다. 


주현이 처한 상황을 살펴보면 소수라 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읽고 감상을 나누며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무리에 속한 이들조차도 그들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조금이라도 더 인정받고자, 조금이라도 더 나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비열한 짓을 서슴치 않고 행하는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주현이 속한 글을 다루는 사람들의 공동체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한다고 인정받거나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추종하는 이들이 모인 종교 공동체도 비단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어째서 인간은 어딜가나 타인의 잘남을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삐져나오는 질투와 시기를 교묘한 방법으로 상처내기를 일삼는 것인지. 어떤 수학과 과학 공식으로 한 사람의 삐뚤어진 마음을 계산하여 명명백백한 잘못을 가려낼 수 있다면 우리 삶이 조금은 여유로워질 수 있을까? 저자는 주현과 야엘의 만남을 통해서 그리고 주현이 낸 단편 소설로 가족들이 혼란을 겪었던 두려움을 반복할 것 같은 야엘의 연재와 단행본에 대한 떳떳함을 계기로 이 모든 인간이 이기적인 나약함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용서 밖에 없음을 피력한다. 그리고 그 용서는 나를 힘들게 한, 나를 괴롭게 한, 나를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한 한 누구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용서를 선택한 나는 나를 버린 가족들을 재회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만나는 것임을 알려준다. 


"알아봐야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과거, 그저 누군가의 추문으로만 남은 기억을 큰고모는 왜 들추었을까.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애써 노력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할 때 눈을 빛내던 여자의 비열한 표정을 떠올리면서. 그저 그녀는 지독하고 무거운 이야기를 발설하는 게 재미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람을 이해할 필요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걸 나는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15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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