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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제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솔아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4월
평점 :
[2022 제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었다. 수록작에는 임솔아 ‘초파리 돌보기’, 김멜라 ‘저녁놀’, 김병운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김지연 ‘공원에서’, 김혜진 ‘미애’, 서수진 ‘골드러시’, 서이제 ‘두개골의 안과 밖’ 이렇게 일곱 작품이다. 각 짧은 단편들이 끝나면 작가노트에서 저자들의 짧은 소감이 담겨 있어서 소설과는 다른 작가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서 좋다. 작가노트에 이어서 평론가들의 해설이 나오는데 원래 문학평론은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소설의 내용보다 더 이해가 안되서 일부러 어렵게 쓴 게 아닐까라는 엉뚱한 생각마저 든다. 아마도 문학을 전공하고 더욱 깊이 들어가다보면 보통 독자들은 쉽게 넘어간 부분에서도 다른 의미를 찾고 연결시킬 수 있기에 가능한 전개가 아닌가 싶다. 어쩌면 저자들은 그냥 읽고 넘어가는 독자들의 사랑도 좋겠지만 낱낱이 파헤쳐 때로는 그 작품의 민낯을 드러내게 만드는 평론가들의 해설이 기대되면서도 짜증나는 애증의 관계가 아닐까 싶다.
소설은 작가의 상상에 의해 만들어낸 가공의 이야기이지만 우리 삶과 완전히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 삶에 있을 법한 아니 실제로 이미 벌어진 일들이지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작가들은 우리가 적절히 공감하고 분노하고 기뻐할 수 있도록 글로 자세히 기록해둔다. 때로는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뭔지 스스로도 잘 모를 때 나를 관찰한 것처럼 작가들은 아주 세세히 나의 상태를 분석해준다. 힘들 일이든 고통스러운 일이든 그러한 일이 생겨난 이유를 잘 납득할 수 있도록 누군가 끊임없이 설명해준다면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나를 납득시키려한 누군가로 인해 어느 정도 위로를 받을 것이다. 사실 우리 삶에서 원인과 결과가 명확한 일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너무나도 억울한 일들이 비일비재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포자기의 심정이 아니라 그러한 일이 나를 지나쳐 가는 것이 우리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결국는 산다는 말과 동일시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원에서’와 ‘두개골의 안과 밖’은 소설 속의 이야기가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를 소재로 삼지 않았나 싶다. ‘공원에서’는 사람들이 쉬고 운동하고 지나쳐가는 공원에서 어떤 남자에게 무지막지하게 린치를 당한 여성이 나온다. 성차별의 예민한 시선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남자와 여자의 육체가 가진 물리적 힘의 차이는 태생적인 것이기에 만일 유기체적인 남성 몸뚱어리로 무력을 행사하려 한다면 그러한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여자가 누가 있을 것인가? 묻지마 폭행과도 같은 자신보다 약한 이에게만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에 대한 두려움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공원에서’라는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씻지 못할 상처를 준 곳이라면 우리는 어디에서 안락함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 ‘두개골의 안과 밖’은 상당히 실험적인 요소가 많이 보이는 소설이다. 소설에 사진이 나오기도 하고 똑같은 단어가 무한정 반복되는 것처럼 나열되기도 하고 이야기의 화자인 ‘나’가 여러명 나와서 헷갈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야기의 주된 소재인기도 한 법정 전염병으로 살처분 된 닭에 대해 묘사는 우리가 얼마나 끔찍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해 준다. 1인 1닭이니, 치느님이니 하는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유행어처럼 번지는 시대이기도 하지만 공장식 축산의 폐해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꽤 많은 다큐멘터리에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차라리 보지 않고 치느님을 경배하고자 한다. 특히나 소설 속에서 살처분 되야하는 닭들을 안락사시킬 수 없어서 포대자루에 산 채로 잡아 넣는 장면은 실제로 누군가 그런 일을 해왔음을 떠올리며 몸서리처지게 만든다. 우리는 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일까? 유전자 조작이 되어 전염병에 취약한 살덩어리를 단지 입을 만족시키는 일에 투입시키기 위해서 잔인한 진실을 외면해온 날들에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어쩌면 비건의 삶을 선택한 이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는 이유는 이런 진실을 모른척한 자신에게 떳떳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어디에도 쓰일 수 없어야 진정으로 아름답다. 쓸모 있는 것은 욕망의 표현이라 추하며, 인간의 욕망은 그 비루하고 나약한 본성처럼 비열하고 역겹다.> 테오필 고티에란 자가 쓴 글을 읽으며 나는 전율했다. ‘가장 어렵고 가장 지적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한 말에 눈물 흘렸다. 그들의 그 옆에는 누군가의 메모가 적혀 있었다. 무쓸모의 쓸모 -김멜라 ‘저녁놀’(81)”
“테라스는 일층에서 확장된 공간을 말하거든요. 여기는 사층이고 또 천장이 없으니 테라스가 아니라 베란다인 거죠. 베란다는 위층과 아래층 면적이 달라 생기는 공간이거든요. 또하나 헷갈리는 게 발코니인데, 그건 건물 외벽에 붙어 있는 돌출 공간이고요. 사람들이 이 셋이 엄연히 다른건데도 자꾸 퉁쳐서 말하죠. -김병운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114)”
“주호는 자신과 인주씨 모두 타인에게 성적 끌림은 느끼지 않으나 로맨틱한 끌림은 느끼는 유로맨틱이라 했고, 자신은 양성 모두에게 로맨틱한 감정을 느끼는 논모노로맨틱, 인주씨는 이성에게만 로맨틱한 감정을 느끼는 모노로맨틱이라고도 했다.(121)”
“나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희망이 있다. 희망을 가져라. 그렇게 말할 때의 확고하고 단호한 표정이 아니라, 주저하고 망설이면서도 어쨌든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을 포착하고 싶었다. 희망이라는 게 정말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 없으면서도 일단 가봐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의 변화. 그 변화가 불러오는 찰나의 활력과 활기를 붙잡고 싶었던 것 같다.
희망이라는 것은 지금은 없는 어떤 것을 상상하는 힘이고 그것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마침내 어디에 다다르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건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자세에 따라, 잠깐 고개를 돌리며 또 달라지고 마는 직진의 방향처럼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논리와 이성으로는 설명되지 않고, 때때로 무모하고 터무니없기까지 한 어떤 것. 그러니까 희망은 그저 아주 작은 가능성을 담보한 에너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섯 살짜리 아이는 그네에서 뛰어내려 제 엄마에게 달려온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순간, 아이의 천진한 얼굴이 내가 말하고 싶었던 희망의 모습과 가장 닮아 있는 것도 같다. -김혜진 ‘미애’ 작가노트(22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