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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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작가의 [작별 인사]를 읽었다. 오랫동안 저자의 소설을 기다려왔던 팬으로서 이번 작품은 예전의 소설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더군다나 소설이 물론 가상의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가공의 무엇이라고 해도 SF적인 요소가 들어갈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소설의 무대는 꽤나 먼 미래의 시대일 것 같다. 남북한은 통일이 되었고 평양은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을 만드는 기착지로 확장된다. 지금도 사물 인터넷이 점차 확대되며 언젠가는 로봇이 만들어져서 인간의 생활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지만, 아마도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런 변화를 제 눈으로 지켜보지는 못할 것이다. 과학 기술의 발달의 영향으로 특히나 영화에서 인공지능이 과도하게 발전할 경우 행여나 인간이 기계의 지배를 받게 되지는 않을까 염려한 내용을 일찍감치 보고 자라왔다. 특히 과도한 시리즈의 재탕으로 오히려 과거의 명성이 퇴색된 영화 ‘터미네이터’는 그러한 우려를 너무나도 재미있게 그려냈다. ‘I will be back’ 이라는 명대사를 탄생시킨 미래에서 온 로봇은 그보다 더 먼 미래에서 온 로봇에 비해 기능이 한참이나 떨어지지만, 로봇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을 지키기 위한 과정에서 엿보인 인간적인 모습이 수많은 영화팬들을 열광케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번 소설의 주인공인 철이는 자신이 로봇인지 모른 채 휴먼매터스 랩에서 과학자로 근무하는 아버지와 살아가며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철이와 같이 인간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로봇은 휴머노이드라는 종으로 분류되었고 철이는 그러한 휴머노이드 중에서도 가장 최신의 능력이 탑재된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드’ 이다. 이들 휴머노이드는 인간의 피부와 피와 근육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어 겉으로 보아서는 인간과 쉽게 구별이 가지 않는다. 어느 날 철이는 아버지를 따라 시내에 나갔다가 등록되지 않은 휴머노이드들을 수거하는 이들에 의해 잡혀가게 된다. 철이는 자신은 인간이라고 아무리 주장을 해도 그들은 철이가 휴머노이드라는 사실은 변함없다고 단정짓는다. 철이는 그곳에서 자신과 비슷한 휴머노이드 민이와 복제인간 선이를 만나게 된다.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철이는 그동안 연구소가 있는 한정된 곳에서만 머물다 바깥 세상에 버려진 휴머노이들이 어떻게 처분되는지 현실을 보게 되고 자신도 결국은 이렇게 분해되어 재활용되는 것이 아닐까란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무등록된 휴머노이드를 처리하기 위한 창고가 습격을 받게 되고 철이와 선이는 간신히 그곳을 탈출하여 그들과 같은 운명에 처했던 이들이 휴머노이드의 몸을 버리고 네트워크 상에 영원히 머물 수 있도록 변환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달마를 만나게 된다. 달마와 선이는 어차피 한계를 가진 몸으로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인지 격렬한 논쟁을 벌인다. 그들의 논쟁은 민이를 활성화시킬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의견차이에서 비롯되었지만 아주 오랜시간 철학의 역사에서 반복되었던 고통의 의미에 대한 해석으로 확대된다. 철이는 그곳에서 아버지와 연결이 되고 아버지는 철이가 아주 고귀한 사양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연구소로 데리고 가려고 한다. 아버지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 사이에 달마와 다른 휴머노이드들이 머물던 곳도 공격을 받게 되고 철이는 그곳에서 머리와 몸이 분해된다. 연구소로 돌아온 아버지는 철이를 활성화시켜 하나는 그들의 키우던 로봇 고양이 데카르트에 숨겨 놓는다. 철이의 의식은 연구소 직원들에 의해 삭제될 뻔했으나 고양이의 시선으로 머물며 의식을 이어간다. 

달마의 이론대로 철이는 네트워크 상에서 의식하고 감정을 느끼지만 철이가 몸을 가지고 있을 때 느꼈던 실제의 느낌들을 그리워한다. 바람을 손끝으로 느끼고 몸을 움직이며 땀을 흘리고 편안한 침대에 몸을 눕힐때 느껴지는 안락함 같은 것들이 그리워진다. 달마는 언젠가는 인간이 소멸하고 기계의 시대가 올 것이기에 거추장스러운 몸을 유지할 필요 없이 네트워크 상에서 영원히 존재하는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지만 철이는 자신의 몸이 더 이상 활성화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몸을 갖고 마지막을 맞이하기를 선택한다. 철이는 장기이식을 위한 복제인간으로 만들어진 선이가 어디선가 백발의 몸으로 네트워크 상에서 확인되지 않는 곳에서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 선이를 만나 보낸 몇 년 간의 시간이 철이에게는 더할 수 없는 행복함을 가져다 주었고 철이는 야생 곰에 의해 몸이 분해되지만 활성화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한다. 그렇게 철이는 선이와 이별하고 세상에 작별 인사를 보낸다. 

“의미 있는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인간들은 의미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아까 고통의 의미라고 하셨지요? 고통에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인간들은 늘 고통에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아니, 더 나아가 고통이 없이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지요. 과연 그럴까요?(152)”

“막상 몸이 사라지고 나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몸으로 해왔는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몸 없이는 감정다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볼에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도 없고, 붉게 물든 장엄한 노을도 볼 수가 없고, 손에 와 닿는 부드러운 고양이 털의 감촉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채 동이 트지 않은 휴먼매터스 캠퍼스의 산책로를 달리던 상쾌한 아침들을 생각했다. 몸이 지칠 때 나의 정신은 휴식할 수 있었다. 팔과 다리가 쉴 새 없이 움직일 때, 비로소 생각들을 멈출 수 있었다는 것을 몸이 없어지고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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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제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솔아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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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제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었다. 수록작에는 임솔아 ‘초파리 돌보기’, 김멜라 ‘저녁놀’, 김병운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김지연 ‘공원에서’, 김혜진 ‘미애’, 서수진 ‘골드러시’, 서이제 ‘두개골의 안과 밖’ 이렇게 일곱 작품이다. 각 짧은 단편들이 끝나면 작가노트에서 저자들의 짧은 소감이 담겨 있어서 소설과는 다른 작가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서 좋다. 작가노트에 이어서 평론가들의 해설이 나오는데 원래 문학평론은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소설의 내용보다 더 이해가 안되서 일부러 어렵게 쓴 게 아닐까라는 엉뚱한 생각마저 든다. 아마도 문학을 전공하고 더욱 깊이 들어가다보면 보통 독자들은 쉽게 넘어간 부분에서도 다른 의미를 찾고 연결시킬 수 있기에 가능한 전개가 아닌가 싶다. 어쩌면 저자들은 그냥 읽고 넘어가는 독자들의 사랑도 좋겠지만 낱낱이 파헤쳐 때로는 그 작품의 민낯을 드러내게 만드는 평론가들의 해설이 기대되면서도 짜증나는 애증의 관계가 아닐까 싶다. 


소설은 작가의 상상에 의해 만들어낸 가공의 이야기이지만 우리 삶과 완전히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 삶에 있을 법한 아니 실제로 이미 벌어진 일들이지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작가들은 우리가 적절히 공감하고 분노하고 기뻐할 수 있도록 글로 자세히 기록해둔다. 때로는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뭔지 스스로도 잘 모를 때 나를 관찰한 것처럼 작가들은 아주 세세히 나의 상태를 분석해준다. 힘들 일이든 고통스러운 일이든 그러한 일이 생겨난 이유를 잘 납득할 수 있도록 누군가 끊임없이 설명해준다면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나를 납득시키려한 누군가로 인해 어느 정도 위로를 받을 것이다. 사실 우리 삶에서 원인과 결과가 명확한 일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너무나도 억울한 일들이 비일비재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포자기의 심정이 아니라 그러한 일이 나를 지나쳐 가는 것이 우리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결국는 산다는 말과 동일시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원에서’와 ‘두개골의 안과 밖’은 소설 속의 이야기가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를 소재로 삼지 않았나 싶다. ‘공원에서’는 사람들이 쉬고 운동하고 지나쳐가는 공원에서 어떤 남자에게 무지막지하게 린치를 당한 여성이 나온다. 성차별의 예민한 시선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남자와 여자의 육체가 가진 물리적 힘의 차이는 태생적인 것이기에 만일 유기체적인 남성 몸뚱어리로 무력을 행사하려 한다면 그러한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여자가 누가 있을 것인가? 묻지마 폭행과도 같은 자신보다 약한 이에게만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에 대한 두려움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공원에서’라는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씻지 못할 상처를 준 곳이라면 우리는 어디에서 안락함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 ‘두개골의 안과 밖’은 상당히 실험적인 요소가 많이 보이는 소설이다. 소설에 사진이 나오기도 하고 똑같은 단어가 무한정 반복되는 것처럼 나열되기도 하고 이야기의 화자인 ‘나’가 여러명 나와서 헷갈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야기의 주된 소재인기도 한 법정 전염병으로 살처분 된 닭에 대해 묘사는 우리가 얼마나 끔찍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해 준다. 1인 1닭이니, 치느님이니 하는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유행어처럼 번지는 시대이기도 하지만 공장식 축산의 폐해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꽤 많은 다큐멘터리에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차라리 보지 않고 치느님을 경배하고자 한다. 특히나 소설 속에서 살처분 되야하는 닭들을 안락사시킬 수 없어서 포대자루에 산 채로 잡아 넣는 장면은 실제로 누군가 그런 일을 해왔음을 떠올리며 몸서리처지게 만든다. 우리는 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일까? 유전자 조작이 되어 전염병에 취약한 살덩어리를 단지 입을 만족시키는 일에 투입시키기 위해서 잔인한 진실을 외면해온 날들에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어쩌면 비건의 삶을 선택한 이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는 이유는 이런 진실을 모른척한 자신에게 떳떳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어디에도 쓰일 수 없어야 진정으로 아름답다. 쓸모 있는 것은 욕망의 표현이라 추하며, 인간의 욕망은 그 비루하고 나약한 본성처럼 비열하고 역겹다.> 테오필 고티에란 자가 쓴 글을 읽으며 나는 전율했다. ‘가장 어렵고 가장 지적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한 말에 눈물 흘렸다. 그들의 그 옆에는 누군가의 메모가 적혀 있었다. 무쓸모의 쓸모 -김멜라 ‘저녁놀’(81)”


“테라스는 일층에서 확장된 공간을 말하거든요. 여기는 사층이고 또 천장이 없으니 테라스가 아니라 베란다인 거죠. 베란다는 위층과 아래층 면적이 달라 생기는 공간이거든요. 또하나 헷갈리는 게 발코니인데, 그건 건물 외벽에 붙어 있는 돌출 공간이고요. 사람들이 이 셋이 엄연히 다른건데도 자꾸 퉁쳐서 말하죠. -김병운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114)”


“주호는 자신과 인주씨 모두 타인에게 성적 끌림은 느끼지 않으나 로맨틱한 끌림은 느끼는 유로맨틱이라 했고, 자신은 양성 모두에게 로맨틱한 감정을 느끼는 논모노로맨틱, 인주씨는 이성에게만 로맨틱한 감정을 느끼는 모노로맨틱이라고도 했다.(121)”


“나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희망이 있다. 희망을 가져라. 그렇게 말할 때의 확고하고 단호한 표정이 아니라, 주저하고 망설이면서도 어쨌든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을 포착하고 싶었다. 희망이라는 게 정말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 없으면서도 일단 가봐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의 변화. 그 변화가 불러오는 찰나의 활력과 활기를 붙잡고 싶었던 것 같다. 

희망이라는 것은 지금은 없는 어떤 것을 상상하는 힘이고 그것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마침내 어디에 다다르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건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자세에 따라, 잠깐 고개를 돌리며 또 달라지고 마는 직진의 방향처럼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논리와 이성으로는 설명되지 않고, 때때로 무모하고 터무니없기까지 한 어떤 것. 그러니까 희망은 그저 아주 작은 가능성을 담보한 에너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섯 살짜리 아이는 그네에서 뛰어내려 제 엄마에게 달려온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순간, 아이의 천진한 얼굴이 내가 말하고 싶었던 희망의 모습과 가장 닮아 있는 것도 같다. -김혜진 ‘미애’ 작가노트(2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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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파친코 1~2 세트 - 전2권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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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진 작가의 [파친코 1,2]을 읽었다. 작년 내내 서점에 갈때면 잘 보이는 매대 위에 놓인 이 책을 볼 수 있었다. 읽어볼까 하는 호기심이 일어 살펴보다가 내려놓기를 수차례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잊고 있었는데, 올해 들어 애플TV 드라마로 방영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책을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검색을 해보니 처음보는 ‘품절예상’이라는 안내문을 읽게 되었다. 인터넷 서점을 그렇게 자주 들어왔어도 ‘품절예상’이라는 문구는 처음이었다. 대체 이게 말일까 궁금해 기사를 검색해보고서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부랴부랴 막차를 타고 아마도 최종 인쇄본을 받아본 것 같다. 판권연장이 되지 않아서 기존의 서점에 진열된 책도 다 회수한다고서도 하니 중고 서점에서나 구입이 가능할 것 같다. 아니면 다른 출판사에서 다시 나오던지. 

소설은 두 권 분량에 내용이 1910년부터 1989년까지 장대한 역사의 스케일을 갖고 있다. 하지만 워낙 페이지터너로서 탁월한 전개로 술술 읽힌다. 이야기의 시작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될 무렵 부산 영도에서 언청이로 태어난 훈이와 양진의 만남부터이다. 소설은 무려 4대에 걸친 등장인물들이 나오는데, 읽는 내내 대하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니 시즌제 드라마로 만들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이야기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훈과 양진의 딸 선자이다. 영도에서 하숙집을 운영하며 억척스럽게 삶을 이어가던 선자는 부산과 오사카를 오가는 엄마 또래의 한수의 꼬드김에 넘어가 그만 임신을 하게 된다. 하지만 한수는 이미 일본에 아내와 딸이 셋이나 있는 유부남이었고 선자에게 현지처가 되길 바란다. 선자는 한수의 사실을 알게된 후 그와의 연을 끊고자 했으나 점점 불러오는 배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때마침 양진의 하숙집에 북에서 내려온 이삭 목사가 머물게 되고 선자의 사연을 알게 된 이삭은 오사카에 사는 요셉형네 함께 가사 살자고 제안한다. 언제나 남에게 도움을 주길 바라는 이삭은 선자의 삶을 구원해주었고 선자와 이삭은 오사카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선자는 그곳에서 첫 아들 노아를 낳게 되지만 이삭은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 혹독한 감옥살이를 하게 되고 죽을 때가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선자와 이삭, 그리고 요셉과 경희 그리고 그들을 도와주는 김창호까지 매서운 겨울 추위만큼이나 냉혹한 시대를 살아간 이들은 어찌그리 하나같이 마음이 곧고 선한지 읽는 내내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선자의 굳건한 희생 때문일까 노아는 일본의 일류대학 와세다 대학에 들어가지만 그의 학비와 기숙사비가 한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노아는 선자를 떠나 잠적하게 된다. 야쿠자인 한수조차 노아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한채 16년이 흐르고 마침내 노아의 거처를 알게 된 한수는 선자를 데리고 멀리서나마 노아를 볼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선자는 그럴 수 없었고 엄마를 만난 노아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노아가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한 줄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도저히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고 노아가 얼마나 옳곧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후에 이어지는 내용은 노아의 동생 모자수와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이 태어나고 솔로몬이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외국계 은행에서 일하다가 해고당하는 긴 이야기가 펼쳐진다. 선자의 자녀들 외에도 꽤 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오는데 그 인물들 하나하나 다 기구한 사연을 갖고 있다. 재일외국으로서 일본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이라고 온갖 멸시와 핍박을 받으며 살아온 이들이 결국은 생계를 위해서 파친코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하나로 이어진다. 

김영하 작가의 [검은꽃]에서는 멕시코 이민의 역사를, 이금이 작가의 [알로하, 나의 엄마들]에서는 사진신부로 하와이로 이주하게 된 이민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었다. 역시나 일제강점기 시기에 연해주 일대에 살던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사건을 그린 김숨 작가의 [떠도는 땅]에서는 고려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불과 백년여 전에 있었던 수많은 이민의 역사가 우리의 조상들을 전세계의 곳곳에서 피눈물나는 고통의 시간을 보여주었다. 나라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틈에 외세의 침략을 받아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생과 사를 오가는 끔찍한 삶을 살아갔다는 사실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도대체 누구의 탓을 할 수 있을까? 이민의 역사가 담긴 소설들을 읽기 전에는 그들은 왜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까라는 단순한 생각을 했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삶의 터전이 바뀐 이들은 그곳에서 죽도록 고생만 해도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다 해도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조선대로 지옥같았으니까. 이제는 표면상으로는 더 이상 그런 차별과 비난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문화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치 우리 조상들이 당했던 것처럼 이주민들을 차별하는 문화가 새롭게 생겨나는 것 같다. 생존과 삶이란 인간에게 첫 번째 선이기에 먹고 살기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 먹고 사는 것의 문제가 인간의 존엄함을 언제든 짓밟는 기회가 된다면 생존과 삶이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삶을 계속되니까?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선자가 이삭의 대리석 묘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며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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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하여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3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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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 체의 [인간에 대하여]를 읽었다.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시리즈 3번째 책이다. 최초의 팬데믹 소설이라는 문구와 독일 소설에 제목까지 이보다 더 진지할 수 없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게 만든다. 분량은 꽤 많은 편이지만 소설의 무대는 생각보다 좁다. 등장인물도 많지 않고 주로 주인공 도라와 고텐 그리고 고텐의 딸 프란치 정도이다. 오히려 다른 주변인물보다 도라의 개 요한데어로헨이 더 많이 등장한다. 개 이름치고는 한 번에 외우고 부르기가 어렵다. 그래서 요헨이라고 부른다. 도라는 원래 도시에서 살던 광고 카피라이터로 일하며 로베르토라는 남자와 동거하고 있었지만 그와 헤어지고 브라켄이라는 시골 마을로 이주하게 된다. 팬데믹이라는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며 도라의 전원 생활이 시작된다. 


도라는 땀을 흘리며 시골 생활에 적응하려는 시도인지 정리되지 않은 정원을 일구기 위해 구슬땀을 흘린다. 로베르토와의 연인 관계가 끝나버린 상황을 곱씹으며 처음에는 그렇게 죽이 잘 맞는 상대였던 그가 팬데믹 상황 이후 도라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으로 달라보이는 이유들이 그려진다. 그리고 도라가 이사온 옆집에는 로베르토와는 정반대의 거구에 거칠고 술에 취해 심지어 나치당가를 부르는 괴팍한 남자 고테가 살고 있다. 하지만 고테는 도라가 집을 비운 사이 침대틀을 만들어 놓고 가는 뜻밖의 친절함을 내보인다. 도라는 도시와는 다른 브라켄의 숲을 산책하며 이곳에 정주하게 될 자신의 미래를 그려본다. 숲에서 우연히 고테의 딸 프란치를 만나게 되고 프란치와 요헨은 금방 절친이 된다. 프란치와 요헨이 사라진 어느 날 도라는 그들을 찾아 고테의 집을 들어가게 되고 프란치가 전혀 관리되지 않는 난장판 같은 방에서 지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고테는 마치 사람이 오랫동안 살지 않는 집처럼 놔두고 마당의 트레일러에서 생활하고 있다. 한눈에 봐도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고테는 다른 친구들과 술에 취해 금지된 나치의 노래를 부르며 혐오감을 극대화 한다. 설상가상으로 도라는 브라켄 마을 사람들에게 고테가 예전에 살인미수 행위에 해당되는 범죄에 연루되어 감옥살이를 했다는 소문까지 듣게 된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고테처럼 소문과 외향이 좋지 않아보이는 사람이 옆집에 산다면 이사를 고려할지도 모른다. 이사를 못하는 상황이라면 외면하고 싶고 마주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도라도 고테가 겁이 나지만 고테의 거친 말투에 숨겨진 그의 속살같은 내면을 조금씩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어느 날 외출을 마치고 돌아 오던 도라는 고테가 몰던 픽업트럭이 거꾸로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고테의 생사를 확인하고 그를 옆에 태워 집으로 돌아온 도라는 고테의 몸에 이상이 있음을 알게 되고 의사인 아빠 요요에게 부탁해 상태를 확인받게 된다. 고테의 시한부 판정을 알게 된 도라는 급속도로 고테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고테는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프란치의 양엄마도 아니지만 도라는 무뚝뚝하고 거친 고테의 병이 나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아빠가 처방해 준 약을 고테가 잘 복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 사이 도라와 고테와 프란치는 마당에서 그릴 파티를 하며 가족과도 같은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그릴과 담배와 늑대 조각이 완성되는 찰나의 행복한 시간들이 쏜살같이 흘러가고 결국 고테는 스스로의 몸에 명령을 내릴 수 있을 때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기 위한 선택을 한다. 


고테의 죽음을 맞이한 도라는 극심한 슬픔에 사로잡히고 어릴 때 떠난 엄마의 부재처럼 누군가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다행히 아빠의 냉정한 요구와 지시로 도라는 차츰 마음을 다잡고 고테의 장례를 준비하게 된다. 팬데믹이 아니었다면 결코 만나기 힘든 정반대의 남자와 여자는 담벼락을 마주한 채 담배를 피우며 이웃에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대상으로 변해갔고 우익이니 좌파니 하는 고정된 시각들로 인해 자신과는 전혀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파괴해버렸다. 고테의 망나니같은 행동 때문에 그를 미워하는 것처럼 보였던 이웃들이 화환 리본에 ‘우리의 친구이자 이웃에게’라고 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나치의 노래를 부르며 괴팍한 행동을 일삼는 것을 죽음으로 용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는 극우주의자처럼 보이긴 했지만 도시 좌파 여성에게 친절을 베풀 줄 아는 시골 남자였던 것이다. 


율리 체의 소설을 읽으며 언어와 문화도 다른 나라이지만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게 만든다. 출신성분, 학력, 정치성향, 경제력, 부모의 배경, 교우관계 등등 데이트앱에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입력해야 하는 내용들은 단순히 앱상에서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서 가까이 지낼 사람을 선택할 때 적용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어차피 많은 사람들과 가까이 지낼 수 없기에 소수의 사람들 중에 이왕이면 자신에게 이득이 될 만한 사람으로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으로 선택하고자 한다. 그렇게 가까운 사람을 이용하고 싶은 욕구와는 반대로 도라가 도시에서는 차별과 불의를 참지 못하는 정의로운 사람이고자 했음에도 고테를 만나서는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보다 낫지 않느냐는 이기적인 자아를 만나게 된 것처럼 내가 만나는 가까운 사람들보다 자신이 낫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고약한 말을 내뱉은 도라는 결국 고테 때문에 울고 그를 몹시도 그리워하게 된다. 우위를 자리를 얻고 싶어하는 마음은 결국 어디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저 그 인간의 빈자리가 몹시도 그리울 뿐이다. 


“대형 사고가 일어난 상황에서 많은 양의 스시를 먹어치우는 그의 이성과 능력은 진정제와 같다. 아마 병원에서 만나는 환자 유가족들에게도 똑같이 행동할 거다. 그들 앞에서도 입에 음식물을 넣고 씹으면서 인생은 계속된다는 걸 몸소 보여준다. 아버지는 근육을 단련하듯 이런 능력을 훈련했다. 그의 모든 제스처에는, 하물며 의도적으로 음식을 삼키는 방식에도 삶의 비밀을 깨우친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것의 본질은 삶이란 비밀스러운 게 아니라, 삶 그 자체가 끝날 때까지 습관적으로 지속될 뿐이라는 거다. 계속된다는 건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의미 있는 유일한 해법이고 엄청난 운명에 순응하는 유일한 기회인 거다.(482-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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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하는 음식 : 아니요, 그건 빼주세요 - 띵 시리즈의 유쾌한 반란 만우절 특집판 띵 시리즈 17
김겨울 외 지음 / 세미콜론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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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콜론 띵 시리즈 17번째 앤솔러지 [싫어하는 음식: 아니요, 그건 빼주세요]를 읽었다. 김겨울, 고수리, 김민철, 신지민, 윤이나, 한은형, 안서영, 하현, 서효인, 김미정, 이수희, 정의석, 임진아, 김현민, 호원숙, 정연주, 박찬일, 김자혜, 이재호, 김민지, 허윤선, 봉달호 이렇게 그동안 띵 시리즈를 출간했던 저자들과 이제 곧 출간될 저자들의 특정 음식에 대한 불호의 이야기가 묶여 있다. 지금까지 읽은 띵 시리즈는 저자들의 특정한 음식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듬뿍 묻어나는 예찬이 중심이었는데, 이번 책은 그와 정반대로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히 싫어하는 음식을 솔직 담백하게 고백하고 있다. 이미 읽은 저자들을 다시 만난 반가움과 아직 출간되지 않은 음식 소재를 다룰 저자들에 기대가 맞물렸고 싫어하는 음식을 주제로 하다니 뭔가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가 ‘까탈스럽다’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뭐든 무던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편하고 다가가기 쉽다면, 까탈스럽다는 말이 첨부된 사람은 가까이 하기 쉽지 않고 어딘가 윤활유가 제대로 발라져 있지 않아 삐걱거리는 네모난 바퀴처럼 보인다. 특히나 음식에 대해 까탈스럽다면 함께 사는 사람이든, 같이 일하는 사람이든 불편할 수 밖에 없다는 선입견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무거나 잘 먹는 혹은 복스럽게 잘 먹는 사람이 어디서든 환영을 받고 음식을 해준 사람에게 보람을 가져다 준다. 복스럽게 잘 먹는다는 말의 반대는 ‘깨작거리다’라는 말로 표현되곤 한다. 특히나 젓가락을 휘적이며 깨작거리는 모습을 보이면 아무리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라 해도 등짝을 후려치며 먹기 싫으면 숟가락 내려놓으라는 불호령을 듣기 십상이다. 전후 배고픔의 시대를 보냈기 때문에 먹을거리 앞에서 감히 부정과 거부의 자세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당당하게 불호의 음식에 대한 역사를 과감히 고백하는 저자들의 용기에 왠지모를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진다. 나는 그동안 이렇게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참아왔고 누구나 싫어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아주 오랜시간 술을 원수같이 생각하며 지내온 적이 있었다. 체질상 술이 맞지 않으니 많이 마실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분위기상, 관계를 맺기 위해서, 때로는 강압에 못이겨 억지로 술을 마시고 몸이 상한 적이 꽤나 많았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술을 많이 마시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으니 당당하게 권하는 술을 거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이미 그런 시대를 살아서 도저히 생각의 전환인 불가능한 분이 권하는 술잔을 거부하고 보니 분위기가 이상해졌고 다시는 그분과 사적인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것일까 여러 찰례 고민을 해보고 가늠해보아도 다시는 예전처럼 억지로 술을 마실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급기야 술을 잘 마실 줄 알았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원활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지는 않았을까라는 자아비판의 시간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이런게 정말 싫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안다. 만약 먹고 사는 것과 직결된 일이라면, 싫다는 것을 드러내는 순간 손해가 막심하다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면 과연 그렇게 솔직히 불호의 마음을 드러낼 수 있을까? 


다행히도 이번 앤솔러지에 담긴 이야기들은 어떤 특정 음식을 싫어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또 세상의 진리를 부정하거나 악함을 뒤쫓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극단적 이기주의의 발로로 세상의 약자들에 대한 폄하의 말도 아니고 대립적 관계를 부추기는 사건의 비약도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 먹을 거리는 많고 내가 먹지 않아도 다른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으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세상 모든 음식을 좋아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소중하게 대하고 그 음식이 만들어지기까지 수고한 이들에게 감사하며 음식을 남기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게 가장 근본적인 것에 다다를 수록 조금씩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싫어하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일이 없다. 소셜 미디어에 구태여 싫은 것을 공유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거 좋은 것을 더 좋게, 예쁜 것을 더 예쁘게 올릴 뿐이다. 부정적인 이야기는 공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인 것도 같다. 하지만 사람은 때로 좋아하는 것을 말할 때보다 싫어하는 것을 말할 때 알 수 없는 활력이 돌기도 한다. 천재적 광기마저 번뜩일 때도 있다. 자신이 무엇을 그리도 못 견디는지, 다종다양하고 디테일하게 짚어내는 사람을 보면 흥미롭고도 경이로운 동시에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성실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나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느라 무언가를 싫어하는 내 마음을 구긴 채로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까다로워 보이고 싶지 않아서, 예민한 사람 취급받기 싫어서.(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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