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 - 제18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고요한 지음 / 나무옆의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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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작가의 [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을 읽었다. 제18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이다. 장례식장을 그 누구보다 많이 가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많이 조문을 하며 고인을 향해 절을 하고 기도를 드려도 상주를 마주했을 때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여전하다. 어쩔 때는 그 순간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조문을 가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다. 조문을 마치면 바닥에 놓인 네모진 상 앞에 앉자마자(요즘은 식탁으로 많이 바뀌고 있지만) 일하시는 분들이 음식을 일회용 접시에 담아 내어준다. 식사를 하겠다면 육개장에 밥 그리고 편육, 김치, 오징어, 견과류나 멸치 볶음, 떡 등이 올라온다. 식탁에는 일회용 숟가락과 젓가락, 종이컵과 티슈가 놓여 있고, 음료수와 물도 놓여 있곤 한다. 에너지 드링크가 놓여 있기도 하고 간혹 술도 미리 가져다 주기도 한다. 


몇년 전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불과 20여년 전에 각자 살던 집에서 상을 치뤘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노란색 근조 등을 달아놓고 아파트에서도 집 앞에 천막을 치고 밤을 세워가며 장례를 치뤘다는 이야기에 학생들은 놀람도 거부도 아닌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대부분은 아예 관심도 없어보였다. 그런데 그런 때가 진짜 바로 얼마 전이었다. 밤을 세워가며 사람들이 떠들고 술을 마시고 고스톱을 치며 소란을 피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란 근조등을 보며 다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누군가가 죽었다는 것은 그 어떤 힘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에 생면부지의 누구의 가족이라도 나의 귀중한 이틀 정도는 견딜 수 있는 내공이 있었다. 그렇게 아파트 앞에서 천막을 치고 누군가의 장례를 도와줄 때 음식을 날라주는 일도 했었던 기억이 난다. 


소설의 주인공이 재희와 마리는 장례식장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 장례식장 알바는 일하는 시간이 고정되어 있다거나 예고할 수 없다. 사람이 죽는 일은 언제 일어날지 알 수 없기에. 마리는 알바를 마치고 나면 동인천까지 가는 전철이 끊겨서 택시비를 아끼기 위해 맥도날드에서 밤을 지세곤 한다. 화자인 ‘나’ 재희는 마리와 가까워지며 마리가 혼자 밤을 세지 않도록 함께 있어준다. 오래된 스쿠터를 타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정규직이 되지 못하고 장례식장을 알바를 지속하는 그들의 삶을 위로받는다. 얼핏보면 아무런 미래에 대한 계획없이 무작정 시간을 보내는 10대도 아닌 20대 청년들의 방황기 같지만, 실제로 그들은 삶을 놓지 않으려고 부단히 분투하고 있는 중이다. 소설은 지금 청년들의 실업과 정규직이 되지 못하고 알바를 전전하는 심각한 상황을 등장인물들의 모습에 녹아내며 또한 재희와 마리의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담고 있다. 


아마도 분명히 자기 주변의 멀쩡한 청년 두 명이 부정기적인 장례식장 알바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니 젊은 사람이 왜 그런 일을 해? 혹은 제대로된 직장을 잡아야지.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면 안되지. 라는 부정적인 말을 들을지 모른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고 수없이 갈 수 밖에 없는 장례식장에서 누군가 도움을 주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음을 슬퍼할 기운을 얻지도 못할 것이다. 그 누군가가 묵묵히 음식을 날라주고 치워주기에 우리는 우아하게 조문도 하고 눈물도 흘릴 수 있는 것이다. 슬픔에 휩싸인 상주가 음료수나 밥을 챙기는 상황은 얼마나 안타깝고 어이없는 일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가족은 마음껏 슬퍼할 수 있도록 격렬히 응원해주는 것이 가까운 사람들의 몫이다. 장례때 일어하는 주변 일을 직접적으로 도와주지 못하다면 약소한 부의금으로나마 상주의 슬픔을 덜어주는 것이다. 


재희가 장례식장을 떠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자신과 목조르는 장난을 하다가 실수로 누나를 죽인 것은 아닐까란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하얀 뱀을 보며 자신에게 스스로 벌을 내린 삶을 살던 재희는 마리와와 만남을 통해 누나의 사인을 직접 확인할 용기를 얻게 되고 누나는 소아암으로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재희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마리와 함께 상조회사에 입사 지원을 하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쉼의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모두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알려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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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서울 지망생입니다 - ‘나만의 온탕’ 같은 안락한 소도시를 선택한 새내기 지방러 14명의 조언
김미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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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향 님의 [탈서울 지망생입니다]를 읽었다. 부제는 “‘나만의 온탕’ 같은 안락한 소도시를 선택한 새내기 지방러 14명의 조언”이다. 따뜻한 남쪽 섬 제주가 없었다면 끔찍하도록 지속되는 코로나 시국을 어떻게 버텼을까 싶다. 굳은 맘 먹고 1시간만 마스크 쓰고 참으면 신록이 부르짖는 땅에서 마음껏 심호흡을 할 수 있다는 점이 팍팍한 도시 생활을 견디게 해 준다. 제주에서 몇 달간 머물때 그것도 중산간지대라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제주의 중산간지대는 따뜻한 남쪽 나라가 아니었다. 수도권 지역과 비슷한 기온대가 유지되고 서울처럼 열섬 현상이 없어서 그런지 비가 오거나 찬 바람이 불면 기온이 수시로 변화했던 기억이 난다. 알고보니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중산간지대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한다. 학살을 피해 산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정착하게 되어 지금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렇다보니 당연히 제주시나 서귀포 같은 도시 같은 마을은 찾아보기 힘들다. 학살을 피해 동굴에 숨거나 높은 지대로 몸을 숨긴 시대의 사람들에 비하면 호강하고 있다는 말이 당연하고 어디 감히 불편하고 힘들다는 말을 내뱉을 수 있겠는가? 


‘3년이라는 시간동안 그댄 나를 잊을까’라는 노랫말의 ‘입영열차 안에서’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에는 군 복무 기간이 3년이었지만 지금은 그에 반에 해당되는 18개월을 복무한다. 하지만 3년 군생활을 할때의 청년과 18개월 군복무 하는 청년이 느끼는 고통과 답답함은 비슷해보인다. 왜냐하면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픔에 시달리던 세대의 어르신들은 지금의 풍요로운 시대의 젊은이들의 불평과 불만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배만 곯지 않아도 좋겠다는 시대를 살아오신 분들은 고기 반찬이 놓인 밥을 먹을 때 엄청난 행복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고기 반찬이 놓인 밥을 먹는다고 엄청난 행복함을 느끼지는 않는다. 행복과 만족이라는 게 너무나도 상대적이라 부의 척도만으로는 행복의 크기를 젤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전후 시대도 민주화 투쟁을 하는 독재시가 아님에도 지금은 지금대로의 청년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무게가 있다. 그 중에 가장 큰 화두가 아마도 거주지에 대한 막연함과 두려움이 아닐까 싶다. 내 집 마련은 과거 부모님 시대에도 중요한 목표였지만 당시에는 알뜰살뜰 아끼고 모으면 얼추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주 소수의 고소득 직업을 갖고 있지 않고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직장 생활의 수입을 원천으로 한 저축으로는 절대로 수도권의 괜찮은 곳에 자가를 마련할 수 없는 구조이다. 


얼마 전 읽은 한은형 작가의 [레이디 맥도날드]에서 청년들이 대체 왜 집을 나와 스타벅스와 같은 대형 프렌차이즈에서 죽때리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한 부분이 생각난다. 꼰대 같은 아니 대체로 이미 사회적 기반을 갖고 안정적으로 사는 세대의 어른들은 별 생각없이 카페에서 공부하거나 웹서핑을 하거나 영화를 보는 청년들을 보며 쯧쯧 혀를 차기도 한다. 대체 왜 그들은 특히나 요즘처럼 코로나에 감염될지도 모르는 시기에 답답하게 마스크를 쓰면서까지 카페에 머무는 것일까? 어쩌면 그 자리에 있는 상당수의 청년들이 고시원에 머물거나 원룸 생활을 하거나 문화적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낙후된 지역에서 살거나 도저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없는 공간에 살거나 할지 모른다. 그들은 대형화된 익명의 존재로 편안함을 누리며 어느 정도의 안락함도 보장된 나만의 공간과 반나절 정도의 시간을 약 5천원의 돈으로 구매할 수 있다면 하나도 아깝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라도 자신에게 인간다운 삶을 선사할 수 없다면 도저히 이 도시에서의 삶을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 때문일 수도 있다.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다. 위기의 상황 속에서 서로가 어찌하지 못할 때에는 유의미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역사 중에 가장 부유한 지위에 오른 작금의 현실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며, 그래서는 안되는 말이다.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섰지만 빈부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신종 계급이 생겨났으며 수저론이 대두된지는 벌써 오래되었고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은 선사시대의 말처럼 진부하고 불가능한 속담이 되어버렸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교육을 받고 서울에서 취직하여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집을 마련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서울에는 꽤나 많겠지만 우리나라에는 서울 사람만 사는 것이 아니니까 그 외 다른 지역에 사는 청년들이 시작부터 밑지고 들어가는 억울함은 대체 누가 해소해 줄 것인가? 탈서울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은 불균형적인 지역발전과 서울을 제외한 다른 모든 지역을 지방이라는 말로 격하시키온 수십년의 세월이 만들어낸 격차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서울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이 시대의 처절함을 대변한 저자와 지방러들의 조언은 현 시대의 모습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민낯을 드러낸 것 같아 슬프면서도 다행스러웠다. 언젠가는 탈서울 지망생들이 점점 늘어나 지역의 어느 도시에서든 우리가 맘편히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며…


“그 많은 예쁜 로컬 카페를 놔두고 스타벅스에 발길이 닿는 건 무슨 이유에서인가. 익숙함을 버리지 못해서, 사람 구경이 하고 싶어서, 그냥 습관적으로. 실패하지 않을 음료의 퀄리티와 노트북 하기 편한 인터넷 환경, 가사 없는 편안한 음악 소리와 직원의 기분 좋은 무관심, 적당히 유행에서 뒤처지지 않았다는 느낌까지 주는 스타벅스. 그곳만이 주는 매력이 있었다.(67)”


“어느날, MBC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를 별생각 없이 보고 있었다. 하루는 배우 한 명이 출연해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한 오피스텔에서의 일상을 보여주었다. 출연자들은 성수동 근처에 무슨 식당이 맛이 있고, 어디 카페가 분위기가 좋다, 어디 가면 무엇을 즐길 수 있다, 이런 말들을 하면서 ‘동네 수다’를 질펀하게 늘어놓았다. 

솔직히 성수동 주민이 아니면 잘 모를 그런 식의 대화인데, 이걸 보는 전국의 젊은 1인 가구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이런 대화가 재미있을까? 힙하다는 연예인들이 나와 힙한 생활 방식에 대해 수다를 떠는 공중파 프로그램을 볼 때 서울에 살지 않는다면 분명히 이질감을 느낄 것이다. 우리나라 인구 절반이 비수도권에 사는데, 수도권이라도 성수동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모를 수 있는데… 

서울의 한 동네에 대해 구체적으로 떠들고 있는 TV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려니 어쩌면 누군가는 매번 TV를 틀때마다 이방인처럼 느끼겠구나, ‘문화 소외’를 느끼겠구나 싶었다.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은 주변부가 되어버리고 마는 이런 거대한 사회 구조 속에서 사람들이 쉽게 서울이 아닌 곳을 자기 삶의 근거지로 마음 편히 삼을 수 있을까.(26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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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괜찮은 해피엔딩
이지선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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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선 님의 [꽤 괜찮은 해피엔딩]을 읽었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어느 순간 눈물이 맺히고, 놀람의 연속이기도 하고, 저자와 함께 아픈 다리를 이끌고 마라톤을 완주하고, 종국에 가서는 따뜻한 손길로 마음의 위로를 받은 느낌이다. 오래전 뉴스 기사를 통해서 그리고 저자의 첫 책 소식을 통해서 사고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은 첫 느낌은 ‘안타깝다, 얼마나 아팠을까, 그리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나 또한 그랬다. 엄청난 사고를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들으면 사고가 정지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섣불리 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 안다고, 공감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타까운 마음을 간직한 채 저마다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몇 년 전에 외상 후 스트레스에 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흔히 트라우마라고 말하는 상처가 큰 사건을 겪은 이후에 보이지 않게 마음 속에 남아 지속적으로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트라우마는 크던 작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기에 어떤 경우에는 살아가는데 심각한 장애를 일으키기도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한다. 운전을 하다가 자동차 접촉 사고만 나도 며칠 동안은 운전을 할 때마다 트라우마처럼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지 않을까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한다. 사실 이런 스트레스에 대한 접근과 해석이 일반화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분명 예전에도 트라우마로 인해 괴로워하던 사람들이 많았을텐데, 마음과 정신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이들을 사회에서 받아들이지 못해 불행한 삶을 살다가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 사람들이 마음 돌보기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저자의 글을 통해서 외상 후 스트레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외상 후 성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상 후 성장’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우연적인 수많은 사건들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데에 커다란 희망을 주는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지난 시간을 떠올릴수록 후회가 되고 다시 돌이키고 싶은 일들이 자꾸 생각난다. 그때 내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A라는 선택이 아니라, B라는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처럼 힘들어하지 않을 수 있을텐데 라는 하나마나 한 후회를 반복하고 있다. 그러한 후회의 시간이 지속되면 무력함에 빠져들고 세상만사가 무미건조해진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나는 그때가 아니더라도 나중에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든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반성하고 후회하는 것은 이미 그 일을 경험하고 뼈저리게 아팠기 때문이다. 나의 잘못된 선택에 대하여 이유를 찾아내고 다른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던 과거의 나에게서 벗어나 우리 삶의 굴곡진 여정에서 언제든 비슷한 일이 생겨날 수 있고 그러한 일들을 통해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은 나를 성장시킨 것 같다. 


새 책이 나오기까지 공부하며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된 저자의 시간은 타인의 일이라고 잊고 지내왔던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란듯이 커다란 선물을 전해준 것 같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저자가 학위를 받기 위해 보낸 12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기에, 저자가 준비한 선물을 기꺼이 기쁘게 받을 수 있고 또 저자의 선물에 감동받은 우리들은 격렬한 박수를 보내며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다. 앞으로도 더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해주길 바라며 또 다른 책을 기대해 본다. 


“나는 사고를 당한 사람인가. 아니면 사고를 만났지만 헤어진 사람인가. 사고와 헤어지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고 그 과정은 더뎠으며 몸이 아픈 만큼이나 마음도 많이 아팠지만 조금씩 조금씩 흘려보내듯 헤어졌다. 나는 음주운전 교통사고의 피해자로 살지 않았고, 그때 그 자리에 마음을 두고 머무르지 않고 매일 오늘을 살았다. 한참 시간이 더 흐르니 그날 밤의 사고는 길을 가다 모르는 사람과 어깨를 부딪힌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예상치 못해서 피할 수 없었고 반갑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일이지만 내 어깨를 치고 간 사람의 뒤통수를 잠시 째려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툭툭 털고 가던 길을 다시 가는 것처럼, 사고와 나 역시 그렇게 부딪혀 만났지만 툭툭 털고 헤어져 나는 그 다음의 내 시간을 살았다. 나는 사고와 잘 헤어진 사람이다.(21)”


“어려움이 닥치면 우리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저항도 하고, 한 번 넘어졌더라도 또다시 일어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일은 우리 자신을 그 일이 일어나기 전과는 다른 사람, 다른 인생으로 변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달라진 사람들이 회복하는 과정에서 이전보다 훨씬 성장했다고 느끼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고, 이전에 못 했던 일을 할 수 있다고 느끼는 자기효능감이 높아지기도 합니다.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누가 진정한 친구인지도 알게 되고, 가까운 사람에게도 더 고마워하고, 괴로움을 겪는 타인에게 더 잘 공감하게 되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많은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삶에 감사하며, 인생의 우선순위가 변하기도 합니다. 학자들은 이를 ‘외상 후 성장’이라고 합니다.(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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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삶이 될 때 - 낯선 세계를 용기 있게 여행하는 법
김미소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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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소 님의 [언어가 삶이 될 때]를 읽었다. 부제는 “낯선 세계를 용기 있게 여행하는 법”이다. 제대를 하고 복학하기 전까지 시간이 꽤 남아 뭔 기운이 뻗쳤는지 영어 회화 새벽 반에 등록했었다. 첫째 달은 왕초보 반이라 그런지 우리말로 수업을 진행하는 편안한 시간이었다. 비가 오는 어느 날 수업을 진행하던 선생님은 오늘은 노래 하나 듣자고 하더니 당시 영화 주제가로 유행했던 제시카의 Goodbye 를 틀어주며 가사를 적어보라고 했다. 그날 그 시간이 어찌나 운치가 있었던지 시간이 아주 많이 흘렀음에도 우연히 그 노래를 듣게 되면 자동적으로 그날의 수업 시간이 떠오른다. 둘째 달은 아마도 한국계 미국인이나 교포 2세 쯤 되었을 법한 선생님이 수업을 무조건 영어로 진행했다. 말하기 시간에 내가 가고 싶은 길을 얘기하자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차별적인 언어를 사용하며 나를 조롱했다. 어찌나 화가 나던지 책을 그 선생 얼굴에 집어 던지고 나가고 싶었지만 학원비가 아까워 꾹 참았다. 이런 나의 심정을 학원에서 눈치챈건지 일주일만에 다른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이번에는 외국인 선생이었는데, 나에게 아주 호의적이라 세례명으로 장난을 치고(미국에서 개 이름으로 많이 부른다며) 창 밖에서 나의 영어식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곤 했다. 이래 저래 석 달을 참고 다녔지만 좀처럼 영어 회화 시간 외에는 영어를 사용할 일이 없고 때마침 다른 알바를 시작하면서 영어 회화 공부는 Addio 했다. 


외국어를 하나쯤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나 하고 있었지만 그런 포부와 야망을 자발적인 선택으로 현실화시키려고 했던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다. 유학 생활을 시작하면서 외국어는 그냥 폼내고 싶거나 여행용이거나 외국인 친구를 만나거나 하는 용도가 아니라 정말 생존 그 자체였다. 몇 개월 안에 문법을 마스터 하지 않으면 학교 등록이 불가하고 또 어찌어찌해서 등록이 된다 하더라도 대체 처음 접한 언어로 어떻게 대학원 수업을 들을 것인지에 대한 해결책은 아무리 생각해도 노답이었다. 생존 외국어는 어학원을 다닐때 정말 별의별 짓을 다 시도하게 만든다. 어디선가 받은 자료에 회화 테이프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줄줄 외워서 쓸 수 있을 정도로 반복해서 들으면 귀가 열리고 입도 트인다고 해서 1시간 짜리 테이프를 꽤나 오래동안 들었다. 행여나 단어와 실생활에 도움이 될까해서 꽤나 비싼 올컬러 그림이 들어간 책을 사서 보기도 했다. 이런 저런 시도를 해도 늪에 빠진 것처럼 실력이 늘지 않는 긴 시간이 흘러갔다. 무엇보다도 외국어를 공부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내가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우물쭈물 버벅거리며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접하는 외국어이니 당연한 사실인데도 유아기의 말 밖에 못하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죽도록 싫었다. 그 이유를 저자가 너무나도 명확하게 설명해준다. 


“모국어로 쌓아 올린 자아는 이미 편안하게 안정되어 있다. 모국어 세계에서 이뤄놓은 성취도 많고 친척, 친구, 동료와의 관계도 탄탄하다. 그렇지만 제2언어로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갈 때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때로는 부당함과 무시도 감수해야 한다. 세상은 성인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으며, 제2언어를 통해 성인 대 성인으로 맺는 관계는 꼭 평등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아, 외국어를 배우는 건 숨 쉬듯 편안했던 자신의 자아를 다 무너뜨리는 과정이구나. 너무 당연해서 자아라고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들을 다 부수고 새로 만들어가야 하는구나.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부끄러워질 기회를 일부러 더 만들고, 자존심을 굽히고, ‘내가 한국에서는~~’ 같은 생각을 전부 내려놓고,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는구나. 이 관계에서는 수도 없이 불편한 일이 일어나고, 원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권력관계 안에 들어가야 하며, 상대에게 친절함을 기대하기 어렵다. 모호함을 견뎌야 하고, 지나가는 여섯 살 아이에게도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모국어 세계에 편안히 머무르면서 제2언어 자아를 만들어나갈 수는 없다.(35)”


이 내용을 먼저 읽었더라면 유학 생활이 덜 힘들었을까? 아마도 그 전에 읽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내가 한국에서는~~’ 과 같은 생각은 새로운 언어 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 환경 등 기존의 자신을 완전히 초기화시키는 상황에서 언제나 발동되는 것 같다. 그렇게나마 실추된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이해되지만 그 완고한 마음이 새로운 세계에 동화되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은 좀처럼 인정하기 힘든 것 같다. 이런 내 마음을 저자가 아주 시원하게 긁어준다. 


“이 모든 걸 전부 아는데도, 다 큰 성인이 하찮음을 견디기란 보통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자아가 이미 자기 키만큼 성장해 버린 성인에게, 겨우 한 뼘 되는 외국어 자아로 살아가라고 하면 절망스러운 게 당연하다. 어제도 하찮음, 오늘도 하찮음, 아마 내일도 하찮음. 이걸 어떻게 견디라는 말이야.(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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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줄래요? - 청각을 잃자 비로소 들리기 시작한 차별의 소리들
황승택 지음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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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택 기자의 [다시 말해 줄래요?]를 읽었다. 부제는 “청각을 잃자 비로소 들리기 시작한 차별의 소리들”이다. 제작년에 저자의 백혈병 투병기를 읽으며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었는데, 이번에는 급성중이염으로 청각장애를 앓게 되었다는 소식을 저자의 신간으로 접하니 몹시 안타깝고 염려가 되면서도 저자의 아픔의 시간으로 인해 이렇게 귀중한 글을 접하게 되었으니 감사드린다는 말을 전해야 할지… 


어린이날을 맞아 오전 뉴스에 얼마전 갑작스럽게 뇌사 상태에 빠져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전해주고 간 어린이의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그 어린이와 마찬가지로 작년에도 비슷한 상태로 하늘나라에 가며 7명의 누군가에게 새 생명을 전해준 소식도 이어졌다. 보물같은 어린 자녀를 황망하게 떠나보낸 부모의 심정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겠지만, 떠나간 아들의 납골묘 앞에 생전에 좋아하던 간식을 놓으며 눈물을 흘리는 아비의 모습을 보니 그저 건강히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아이의 심정을 누군가가 받아서 건강해진 몸으로 뛰는 심장 박동 그래프를 선물 받았을 때 너무나도 기뻤다고 말한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그렇게 숭고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놀라운 기적같은 일이고 그렇게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이들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새로운 삶을 전해주지 않을까 한다. 


저자가 급성 중이염으로 청각을 잃게 된 상황은 목숨을 오가는 위중한 상태는 아니더라도, 만약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저자처럼 의연하게 그리고 강한 의지로 이겨낼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이미 몇 년 전에 백혈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간신히 복직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제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상태라니, 저자가 순간적으로 수술을 받을 때마다 느꼈을 좌절감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굴의 의지와 용기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천상 기자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이 청각 장애를 앓게 되고 인공와우를 이식받는 수술을 받는 과정을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전해주니 이렇게 리뷰에서나마 격렬한 박수와 응원을 보내드리고 싶다. 


특히나 저자의 수술과 회복 과정에서 청각 장애인에 대한 시선의 변화와 사회적 문제 등을 제시한 내용들은 많은 생각과 후회와 부끄러움이 들게 해 주었다. 웹툰 작가가 대학 강의실에서 겪었던 경험담은 그동안 내가 얼마나 고정관념과 편견에 사로잡혀 살아왔는지 반성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있고 당당하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전해준 교수님의 말이 구구절절 다 옳아서 세상 사람들이 다 들었으면 좋겠다.


“나라마다 나라 특유의 정신병이 있다고 하거든? 근데 내가 볼 때 우리나라 특유의 정신병은 ‘눈칫병’이야. 누가 혼자 밥을 먹거나, 옷을 특이하게 입으며 안 지나가고 꼭 다시 봐. 그렇게 쳐다보는 것이 다름을 인정 안 한다는 시선이야. 이번 학기에 여기 청각 장애인 학생이 있는데 이 학생의 장애를 그대로 인정해야 해. 안 들린다고 이거에 대해 자네들이 ‘어이구’ 이러면 곤란해. 누가 다리가 없다 이러면 신경 써서 그 사람이 불편하지 않게 하면 돼.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번 더 그 장애인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야. 그런 일이 계속되다 보니까 우리나라 장애인들이 ‘내가 정말로 이상한 존재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아.(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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