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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평점 :
김애란 작가의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읽었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는 일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일이 매일 매일 반복된다. 친구를 선택하기 위해서,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서, 함께 일할 사람을 고르기 위해서 심지어 만날 가능성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좋아하는 연예인을 선택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사람을 평가한다. 그럴 자격이 감히 있느냐는 반격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한 사람의 내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짐작만 할 뿐 지적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는 너무나도 정당한 것처럼 사람을 평가한다. 그리고 그러한 평판은 당사자가 없는 가운데 공공연하게 도마 위에 올라간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게 된 이들과 함께 일을 해야 할 때가 갑작스럽게 다가온다. 그럴 때마다 함께 일하게 된 그 사람에 대한 내 안의 데이터를 조심스럽게 재생시킨다. 그리고 내가 확인한 데이터가 맞는지 그 사람을 알고 있는 또 다른 이에게 은연 중에 검증을 하게 된다. 비슷하거나 똑같은 견해가 나누어질 때 '역시 내가 잘못 본게 아니었어'라는 짐짓 우월감에 휩싸이다가도 '어째서 그 사람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일까'란 교만함의 늪에 빠지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뒷담화의 주인공인 그가 중대한 제재를 받게 될 경우 '사람 고쳐쓰는거 아니다'라는 혐오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그 사람은 정말 구제불능인 상태인 것일까? 변화될 수 있는 일말의 희망조차 없는 것일까?
예전과 다르게 '좀 아니다'라고 단정지었던 사람을 유심히 지켜보게 되었다. 철이 좀 덜 든 것 같은 나이 때의 행동과 습관으로 그 사람의 한 평생을 단정지을 수 없다는 유연한 마음이 든 것인지,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시간을 애쓰며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혹은 나의 이해의 폭이 좁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 사람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한다. 왜냐하면 나 또한 그 누군가에게는 이미 굳어진 모습으로 단정지어진 그 사람에 불과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 자신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기 위해 나 또한 그 사람에게 또 한 번의 기대를 품는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읽고 나니 우리가 의례히 생각해왔던 '시작-고통-찰나의 기쁨과 만족-성장'이라는 도식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 삶은 스토리가 아니라 실재이기 때문에 고통과 슬픔을 겪고도 반드시 성장하지는 않는다. 영화나 드라마의 극적 반전도 없고 어떤 미지의 절대적 힘에 의해 구원받는 기막힌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너무나 지지부진하고 무력해서 도대체 이 이야기의 끝이 있기나 한 건지 의심이 될 뿐 단 하나의 조력자조차 없이 알몸을 아스팔트 바닥에 짖이기는 것만 같을 때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지우에게 도마뱀 용식이 어떤 의미인지, 채운에게 반려견 뭉치가 어떤 존재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십대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는 지우와 소리와 채운은 부모의 죽음으로 연결된다. 이혼한 엄마가 뇌에 종양이 생겨 두통을 겪다가 실족사를 하고, 이른 나이에 중병에 걸려 수차례의 항암치료를 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사업 실패로 분노 조절이 불가한 아버지가 술에 취해 엄마와 아들을 흉기로 위협하다가 도리어 몸싸움 가운데 칼에 찔려 의식불명이 되었다가 죽음에 이르는 불행과 고통의 한 가운데에 세 명의 아이가 있다. 다행스럽게 지우에게는 이제는 아무 상관없는 관계이지만 함께 살게 된 것을 기뻐하는 엄마의 애인인 선호가, 소리에게는 모서리 공포증이 있지만 아내를 그리워하며 딸을 돌보는 호민이, 채운에게는 뭉치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믿을 건 가족뿐이라는 이모와 아들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감각자의 길을 가게 될지라도 엄마의 부탁을 잊지 말라며 죽은 남편의 의심이 사실이었음을 고백하는 엄마 태선이 있다.
이 세 아이는 인생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 앞에 혼란스럽고 고통스럽지만 결코 자기 자신을 망가트리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지우와 소리는 그림을 통해서 그리고 채운은 얼굴만 알고 있던 지우의 그림을 통해서 뜻밖의 위로를 얻게 된다. 지우가 보고 겪은 실제 사건을 소재로 연재한 만화는 비극적인 결말을 구상하지만 소리에게 맡긴 도마뱀 용식의 죽음으로 엄마의 애인 선호가 제안한 '이중 하나는 거짓말' 게임으로 인해 채운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이야기로 변화된다. 지우와 소리와 채운이 겪은 일은 일생에서 가장 큰 상처와 아픔이 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이후에 만화로 서로를 알게 된 세 아이의 내면적 변화는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하다. 어쩌면 겉으로 봤을 때는 아무로 알아채지 못할 미세한 움직임일지도. 하지만 극심한 고통을 안겨준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으로 인해 간절히 살고자 애쓰는 이들의 실제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깜짝 놀라며 반기는 커다란 변화는 아닐지언정 스토리가 아닌 우리 삶에서는 이보다 더 큰 기적과도 같은 변화는 없지 않을까.
"가난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작은 눈송이 하나에도 머리통이 깨지는 것.
작은 사건이 큰 재난이 되는 것. 복구가 잘 안 되는 것...(85)"
"하지만 삶은 이야기와 다를 테지. 언제고 성큼 다가와 우리의 뺨을 때릴 준비가 돼 있을 테지. 종이는 찢어지고 연필을 빼앗기는 일도 허다하겠지. 누군가 집을 떠나 변해서 돌아오는 이야기, 지우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알았다. 하지만 그 결말을 잘 믿지는 않았다. 누군가 빛나는 재능으로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 재능이 구원이 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에 몰입하고 주인공을 응원하면서도 그게 자신의 이야기 여기지는 않았다. 지우는 그보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 이야기, 그래도 괜찮음을 알려주는 이야기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떠나기, 변하기, 돌아오기, 그리고 그사이 벌어지는 여러 성장들. 하지만 실제의 우리는 그냥 돌아갈 뿐이라고, 그러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당시 자기 안의 무언가가 미세히 변했음을 깨닫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 삶의 나침반 속 바늘이 미지의 자성을 향해 약하게 떨릴 때가 있는 것 같다고. 그런데 그런 것도 성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이 무척 오래걸리는다 거의 표도 안 나는 그 정도의 변화도? 혹은 변화 없음도? 지우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다만 거기에는 조금 다른 이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고. 지우는 그 과정에서 겪을 실망과 모욕을 포함해 이 모든 걸 어딘가 남겨둬야겠다 생각했다. 그런 뒤 저쪽 세계에서 혼자 외롭고 두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엄마와 용식에게 보여줘야겠다고 다짐했다.(23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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