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
김화진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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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진 작가의 [동경]을 읽었다. 전작인 [나주에 대하여] 소설집에서 그랬듯이 김화진 작가는 사람의 감정을 읽는 데 타고난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아주 작고 스쳐지나가는 순간이라 그 감정을 느낀 자기 자신조차도 명확히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세밀함을 누구보다고 잘 캐치해서 등장인물들의 관계성을 이어가는 데 탁월한 묘사를 보여준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심각한 갈등을 읽으키는 사건이 발생되지 않아도 이야기는 이어지고 조금은 밋밋한 감이 없지 않지만 등장인물들이 심리묘사를 따라가다보면 언젠가 나 또한 그런 감정의 상태였을 때를 저자가 적절히 설명해주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아름, 민아, 해든 이렇게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이르는 연령대로 예상되며 나이 차이는 나지만 언니와 직장 선배라는 호칭에서 벗어나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직장 동료 이상의 관계를 꿈꾼다. 셋이 아니라 둘이었다면 다분히 퀴어적인 요소로 느껴질 수 있는 부분들이 있었지만 각자의 관점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일과 개인적 성향의 연관성과 성취감을 얻고자 하는 데에서 오는 세밀한 내적 묘사는 성적 관계와는 무관한 인정과 애정에 대한 간절함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여자들의 우정과 남자들의 우정은 표면적으로는 사뭇 다르게 진행되는 것 같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스킨십을 나누는 데 머뭇거림이 덜하고 특히나 상대가 극심한 슬픔과 고통에 처해 있을 때에는 기꺼이 어깨를 내어주고 손을 잡아주며 따뜻한 체온으로 위로해주고자 한다. 반면에 남자들은 그런 위로에 익숙하지 않다기보다는 과연 그런 위로가 도움이 될까 미리 부정적으로 단정짓는 것 같다. 막상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하면 따뜻한 위로를 받고 싶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다음 기회가 와도 선뜻 따뜻이 안아주지 못한다. 이건 생물학적 기질의 차이일까, 아니면 사회가 만들어낸 통념에 대한 무의식적인 학습의 결과일까.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아름과 민아와 해든의 관계처럼 남자들도 똑같이 직장 상사이자 선배인 누군가가 내게 일을 가르쳐 주었을 때때 그에게 인정받고 싶어하고 나와 비슷한 상황의 다른 누군가를 더 예뻐하면 질투가 난다. 아름처럼 매사에 불안감을 느끼며 자신의 능력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남자도, 민아처럼 사업을 잘 이끌어가며 믿을만한 직원인 아름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사무적으로 대하는 것에 익숙한 남자도, 해든처럼 아빠에 대한 상처로 부서지고 페허가 된 곳만을 찾아다니는 겉으로만 쿨녀 같은 남자도 있다. 결국 아름과 민아와 해든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는 특정한 성에 대한 우정의 묘사가 아니라 아주 약간의 차이가 있더라도 인간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름과 민아와 해든이 서로에 대한 감정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은 채 어쩌면 유년시절에 만난 게 아니라 성인이 되어 일로 만난 사이이기에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나이가 들어서도 누군가를 만나고 가까워지고 헤어지게 되기에 서로를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게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지 알려준다. 작가가 세 명의 주인공의 마음 속에 들어가 서로에 대한 생각을 독자들에게만 알려주듯이 어쩌면 우리 삶의 모습을 무던히 지켜봐주는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오해가 생기고 갈등이 커져 다시는 안 볼 사이가 된다 하더라도 절대 개입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봐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실패와 성공의 유무를 떠나 조금은 용기가 나지 않을까 싶다. 그 누군가에게 하소연도 하고 분노도 표출하고 뒷담화도 하며 나의 감정을 풀어놓으며 응원을 요청할 때 우리는 관계가 어그러저도 다시금 살 수 있는 힘이 나지 않을까 싶다.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셋은 일로서만 만날 수 없고 사는 곳도 다 떨어져 있기에 함께 달리기를 하기로 약속한다. 셋이 모여서 달릴 때도 있겠지만, 그럴 수 없을 때 같은 시간에 혼자라도 달리기를 멈추지 말 것. 전력질주를 30초 밖에 못하겠다는 아름의 메시지에 연속된 'ㅋㅋㅋㅋㅋ'와 '저질'이라는 짧은 답장이 아름에게는 혼자임에도 웃을 수 있고 달리기가 아닌 이유로 가슴벅찼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친구를 선배를 동료를 만나기를 꿈꾼다. 


"아무래도 슬픔은 고체다. 내가 제일 많이 떠올리는 형태는 어릴 적 봤던 바이올린 활에 바르는 송진덩어리다. 슬픔은 마음 한구석에 송진 같은 고체 형태로 존재하다가 어떤 녹는점에서 녹아 흐른다. 액체가 되어 온몸으로 퍼지기도 하고 자칫하면 눈물이 되어 쏟아지기도 한다. 슬픔의 녹는점은 누군가의 한마디나 체온, 혹은 해질녘의 버스 정류장이나 혼자 멍하니 보내는 주말의 긴긴 낮일 수도 있다.(66-67)"


"어른이 된다는 것은 불완전함과 불확실함, 배제되는 느낌을 견디는 일을 의미한다.(모아 사너, 어른 이후의 어른) 그것은 아름이 품어온 마음 그대로였다. 어른이 되는 시간은 그런 걸로 잔뜩 채워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다리는 시간. 견디는 마음. 참는 눈빛. 삼키는 말. 모르는 척하는 시선. 아는 척하지 않고, 상대가 준 것까지만 받고, 상대가 모르게 더 받았어도 고마움을 견디고, 다른 것을 내밀고, 마침내 주고받고, 또다른 우리가 된다. 또다시, 또다시 생각하며. 그렇게 이어져오는 관계의 시간이 있었다.(196)"


#김화진 #동경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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