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김진욱 옮김, 무라카미 요코 사진 / 문학사상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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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읽었다. 하루키의 소설은 거의 다 빠짐없이 읽고 소장하고 있는데, 간혹 이렇게 에세이는 아직도 읽어야 할 책들이 몇 권 남아 있었다. 어차피 원고의 내용은 같을 테지만 이렇게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개정판이 나오면 책을 팔기 위한 출판사의 노력이라는 생각과 더불어 겉표지나 디자인 같은 것들마저 유행과 감각이 적용된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옷을 입은 개정판은 마치 최신작처럼 산뜻하게 다가오고 이미 절판된 책의 표지는 왠지 모르게 구리다. ㅋㅋ


무라카미 하루키를 최애 작가 중의 한 명으로 생각하면서도 '소확행'이라는 줄임말의 유래였다는 사실을 몰랐다. 386세대에서 X세대로 그리고 지금의 MZ세대로 시간은 흘러가며 행복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가 생겨났다. 근래에 유행어처럼 번진 '소확행'이라는 말에는 기성 세대의 성공에 대한 무리한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어느 정도 반영된 것이라 치면, 하루키는 나이로 따지면 지금은 할아버지 연배이지만 이 책을 쓴 시기가 무려 30년 전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어쩌면 일본의 거품 경제가 사그러들기 시작하며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은연 중에 알려주고 싶은 하루키의 깨달음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어쨌거나 이번 에세이를 쓸 당시의 하루키는 꽤나 활력이 넘치는 젊은이 같은 느낌이 팍팍 다가온다. 그리고 간간히 전해주듯이 캠브리지에 머무는 동안 태엽 감는 새 장편의 초고를 끝내며 무엇을 했는지, 그때의 감정은 어떠했는지 담백하게 전해주어 더욱 좋았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독자라며 다 알고 있듯이 하루키는 굉장히 성실한 작가이다. 책에도 나와 있듯이 보통 사람들이 대작을 쓰는 작가라 하면 의례히 엄청나게 불규칙적인 생활 습관이나 밤낮이 바뀐 생활패턴 또는 헤비스모커나 알코릭 중의 하나일 것이라는 이상한 선입견이 있다. 인간의 내부를 깊이 있게 파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자기 학대는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빈정거림도 담겨 있는 듯 하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주 젊을 때가 아니고서는 그런 악습관을 가지고 하루키처럼 많은 책을 쓰기란 불가능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온 몸을 굴리는 육체 노동은 아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에너지가 소비된다. 무엇인가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체력이 바탕이 되어야 하고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장시간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당연히 허리가 튼튼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70대를 넘긴 하루키가 500페이지에 달하는 신작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건강 관리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인지 알 수 있는 지표이다. 


이번 책에서 보스톤 마라톤을 완주한 내용이 두 번이나 나오는데, 달리기라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지만 42,195km를 달린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가 아닐까 싶다. 마라톤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접하게 되면 그 긴 장거리를 달리다 보면 발이 부어서 런닝화는 평소보다 큰 사이즈를 신어야 한다거나 남자의 경우 맨 몸에 셔츠만 입고 달리게 되면 꼭지 부분이 헐게 되는 아픔도 겪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키는 어떤 중요한 예식을 치루는 것처럼 마라톤을 준비하고 즐긴다. 부서질 것 같은 극한의 육체적 소모를 겪은 후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처럼 행복한 게 없다는 저자의 말은 우리 삶에서 진짜 행복은 그 누가 억지로 가져다 줄 수 없는 영역임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여느 하루키의 에세이보다 아내와의 일화도 많이 등장해서 사생활에 대한 궁금증이 조금이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도 재미있었던 내용은 하루키의 자동차를 누가 훔쳐간 부분이었다. 그야 당연히 일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미국에서는 아마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되는데, 하루키가 머물렀던 마을에서는 좀처럼 없던 일이기에 이웃들도 많이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설상가상으로 도난된 차량은 바퀴가 다 빠진 채 휠도 망가진 상태이고, 보험사 직원은 중요한 서류를 잃어버리기도 당당하니 그야말로 빡치지 않을 재간이 있을까나 싶었다. 외국에 살다보면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신의 언어 실력을 한탄하게 된다. 그 어이없는 보험사 직원이 인종차별을 한 건지, 아니면 원래 그렇게 무능력한 건지, 하루키의 영어 실력이 확실히 따질 정도에서 조금 모자란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럴 때는 정말 모국어로 성질을 부리지 못하는 게 서럽기만 하다. 내가 잘하는 모국어로 대차게 쌍욕을 퍼부어야 속이 시원할텐데 말이다. 


마지막으로 여러번 등장하는 이웃집 고양이 고타로 또는 제임스에 대한 이야기는 하루키가 고양이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큰지 다시 한번 알 수 있는 계기였다. 그냥 길고양이인줄 알았던 제임스는 같은 집의 또 다른 세입자가 키우는 고양이었고 한 동안 고타로가 보이지 않아서 걱정되었던 하루키가 집 주인에게 물어보자 다른 세입자가 이사가면서 데리고 갔다는 말에 놀라는 장면 또한 소소한 재미를 주었다. 그리고 하루키가 아주 오래전에 결혼하기 전부터 키웠던 고양이에 대한 소회는 마치 한 편의 아주 짧은 소설 같았다. 그런 경험을 누구나 하기는 힘들 것 같다는, 정말 소설가로서의 삶이 하루키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것은 아닌지 생각되는 고양이와의 영험한 추억담이었다.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일상 속에서 내가 잘하는 것을 충실히 해내기 위해서 많고 긴 시간을 인내해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재미있고 유쾌한 에피소드로 엮어낸 저자의 탁월함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결국 구두쇠가 아니냐는 말을 들을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다. 생활 속에서 개인적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크든 작든 철저한 자기 규제 같은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꾹 참고 격렬하게 운동을 한 뒤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 같은 것이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하고 혼자 눈을 감고 자기도 모르는 새 중얼거리는 것 같은 즐거움, 그건 누가 뭐래도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참된 맛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없는 인생은 메마른 사막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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