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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 1~2 - 전2권 ㅣ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11월
평점 :
이민진 작가의 [백만 장자를 위한 공짜음식 1-2]을 읽었다. 이미 소설 [파친코]가 드라마 시리즈로 제작된 후 유명 작가가 되었지만, 그보다 더 먼저 이 소설이 발표되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파친코]의 대박이 아니었다면 접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지 않았을까? 다행스럽게 새로운 출판사의 새로운 번역으로 만나게 되어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의 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저자의 출발점을 엿볼 수 있게 되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거의 1,000페이지에 육박하는 장대한 스토리는 마치 주인공 케이시 한을 비롯한 주변인물들을 주위에 투명망토를 뒤집어 쓰고 지켜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생동감있게 다가왔다. 1990년 대의 미국 이민1세대와 2세대의 삶을 그리고 있는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기에 동시대를 살아온 교포들의 삶을 그려볼 수 있었다.
지금은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막연한 열망이 어느 정도 사그러든 상태이긴 하지만(그럼에도 여전히 미국을 선망하는 이들이 많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 케이시 한의 아버지 조셉과 리아가 이민을 선택할 당시만 해도 미국은 그야말로 꿈의 땅이었다. 어느덧 한국에 사는 이주민 200만 명의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여전히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에 대한 어색한 시선이 남아 있는데, 전쟁 후 기아에 가까울 정도로 허덕이던 시대에는 미군 부대 인근을 제외하고는 외국인을 만나기가 힘들었다. 조셉과 리아도 그들의 정주를 위한 보증을 서 준 친척이 있었기에 이민이 가능했다고 하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땅에 정착하고 살겠다는 다짐은 좀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선택은 모국이라는 땅에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죽을 만큼 힘들 때나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더군다나 이민 2세대의 경우는 대부분 아주 어린 나이때 이주를 하기 때문에 쉽사리 그 나라의 언어를 익히고 문화에 젖어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부모인 이민 1세대는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렵기만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선택을 뒤집을 수 없기에 악착같이 일하며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고 조금씩 자리를 잡아나아갔으리라. 케이시 한의 집도 비슷한 유형이다. 이런 이민 1세대와 2세대의 경우에 자녀들이 하루빨리 영어를 익힐 수 있도록 집에서도 한국어를 쓰지 못한게 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어린 자녀들이 모국어를 금방 잊게 되고, 직업적 소통 외의 영어를 배우지 못한 부모 세대와 갈등을 겪게 될 때에 미묘한 감정 표현을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이민 세대의 경우 2중 언어를 하는 것이 오히려 사회적 진출의 다양한 길을 모색할 수 있기에 가급적이면 집에서는 한국어를 가르치려고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외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이들은 누구나 비슷한 감정의 파고를 겪게 된다. 기분이 좋고 일이 잘 풀릴 때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데, 억울한 일을 겪거나 감정이 요동칠 때 모국어가 아닌 뒤늦게 배운 외국어로 상세한 상황을 설명하는 것에 갑작스런 분노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행여나 나의 피부색으로 인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느낌이 들때면 한없이 무력해지는 자신을 마주하게 되고, 그동안 켜켜이 쌓아온 타지에 대한 불만이 한 번에 올라와 당장 이 곳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비단 이런 감정을 외국에서만 겪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게 다가오는 것은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소설 속에서 케이시 한의 가족은 세탁소를 위탁받아 일하며 퀸스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아간다. 케이시 한은 부모님의 뒷받침과 성실함으로 프린스턴이라는 아이비리그의 대학에 들어가 미국 주류 사회의 다양한 클럽을 경험하게 되지만, 로스쿨 진학을 뒤로 미루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소설의 초반부에 나오는 아버지 조셉과 케이시의 격렬한 다툼과 폭행은 단순히 말 안듣는 딸과 고지식한 아버지의 논쟁이 아니라 타지에서 온갖 수모를 견디며 지켜온 아버지의 노동이 케이시의 주류 사회 진출로 해소되기를 바란 꿈이 무너져버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조셉은 케이시에게 다정하게 설명할 수 없다. 조셉이 겪은 부당함과 모멸과 차별은 단지 그가 이민자이고 세탁소를 운영하고 피부색이 다른 아시아인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셉이 이민을 선택한 것은 그리고 당시에 조셉과 비슷한 선택을 한 이들은 한국에 남아 있는 것이 오히려 자식들에게 가난과 비참함을 되물림해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미국에서 흑인 노예제가 사라졌듯이 우리나라도 양반과 천민이라는 계급이 사라졌지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미국 사회를 본따오기라도 하듯이 많은 부분을 선망해왔기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서도 부와 권력을 쥔 이들이 과거의 양반들 못지 않게 높은 지위의 계급을 형성하고 있다. 가령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고를 때 어떤 옷을 입고, 어떤 가방을 들고, 어떤 구두를 신었느냐에 따라 판매원의 친절도가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요즘은 그 어떤 명품으로도 구별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낯빛이다. 피부는 갑자기 돈이 많이 생겼다고 해서 좋아질 수 없다. 아주 오랜시간 공을 들여 관리를 받아야 하고 또 과로나 스트레스에 먼 여유 있는 지위를 누리고 있어야만 좋은 광채를 내뿜을 수 있다. 그래서 강남의 가게 점원들은 고객들의 얼굴빛을 보고 판매여부를 짐작한다고 하니, 이제는 도저히 감출 수 없는 낯빛의 계급이 생겨난 것은 아니가 싶다.
[파친코]에서는 어린 소녀가 할머니가 되는 시간 속에서 등장하는 여러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드라마처럼 펼쳐졌다면, 이번 작품은 대학을 졸업한 케이시가 사회에 적응하고자 분투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몇 년 동안의 일들을 그리고 있다. 특히 이번 작품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던 저자의 탁월함은 가족들의 서사를 너무나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집에나 하나 쯤은 있을 법한 사건과 갈등을 진부하지 않게 섞어내어 케이시가 마주한 인생 경로에 함께 울기도 웃기도 하며 위로를 받게 된다. 케이시와 엘라 그리고 케시이의 엄마 리아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헤어지기도 상처받기도 하며 그들은 조금씩 세상을 알아가고 자기 자신을 제대로 마주하게 된다. 주인공 케이시가 좌충우돌 자존심을 세우다가 출세가도를 달리는 이야기로 귀결되었다면 이 소설은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의 중후반부에 아버지 조셉과 이름이 같은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노인과의 만남이 조금은 작위적으로 다가오기는 하지만 서점 주인 조셉의 갑작스런 부고로 인해 조셉의 아내 헤이즐의 모자를 받게 된 케이시는 조셉의 추도식에 참석하는 결심을 통해 그녀의 선택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방학 동안의 고된 인턴 시간을 통해 성실함과 능력을 인정받아 월스트리트의 직원으로 채용되어 승승장구 할 수 있는 기회를 고민해보겠다는 케이시의 대답은 그녀의 방황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음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