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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뎌진 감정이 말을 걸어올 때
김소영 지음 / 책발전소X테라코타 / 2022년 11월
평점 :
김소영 작가의 [무뎌진 감정이 말을 걸어올 때]를 읽었다. 벌써 5년 전이 되어가는 것 같은데, 저자의 첫 번째 책인 [진작 할 걸 그랬어]를 읽고 독후감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 이후 첫 번째 리뷰는 저자의 남편인 오상진 아나운서의 [당신과 함께라면 말이야]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연히 TV에 나온 두 분의 모습을 보면 괜히 반갑기도 하고 감사한 마음도 든다. 처음 독후감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아주 짧게 감상을 남겼었다. 매번 책을 읽고 나서도 얼마 후면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을 때가 많아서 뭔가 기록을 남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느새 하루 일과 중 아주 중요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독후감을 쓰지 않고는 다음 책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강박까지 생긴 것은 아닌지 부작용이 의심되지만, 어차피 한 평생 뭔가를 써야 하기에 독후감은 좋은 글쓰기 훈련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뭐 검사 받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 제출할 것도 아니니 맘편히 쓰기만 하면 되어서 좋다.
전작을 읽었을 때도 아나운서의 모습만 생각하고 있어서 깜짝 놀랐었는데, 그 당시 저자가 책방을 내는 준비를 하며 쓴 내용들이라 더욱 호기심을 유발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저자가 엄청난 독서가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다음 책을 기대했었는데 역시나 이번 에세이 또한 아주 훌륭한 책 길잡이 한편이 아닌가 싶다. 3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각 7권씩 책을 소개하고 있는데, 서점을 운영하면서 북클럽의 북큐레이터로 책을 권하는 편지를 모은 내용이다. 본격적으로 책을 많이 읽기 시작했던 때에 무분별하게 책을 구입한 적이 있었다. 책 읽는 속도가 책을 사들이는 속도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보니 읽지 못한 책들이 쌓이기 시작했고, 어느덧 책장의 저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한숨을 쉰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책에 대한 내용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보고 과연 내가 이 책을 읽을 것인지 아닌지 심사숙고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렇게 고르고 고르다보니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분야나 잘 알지 못하는 작가의 책들을 자꾸 외면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다독가들은 다 읽지 않아도 표지만 보아도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으니 책을 사는 것에 주저하지 말라고 하지만, 자주 이사를 다녀야 하는 형편에 무턱대도 책을 사들이는 것은 짐을 쌀 때마다 지옥불을 경험하게 해 준다. 솔직히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아카이브나 정재승 교수의 서재는 그야말로 꿈에 그리는 환경이기에 그냥 침흘리며 부러워만 해야할 것 같다.
그런면에서 이번 책은 나처럼 새로운 분야와 잘 모르는 작가의 책을 주저할 때 아주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준다. 한 챕터를 읽을 때마다 저자가 소개한 21권의 책을 모두 다 읽고 싶다는 욕구가 마구마구 뿜어져 나왔다. 소개된 책 들 중에 내가 읽은 책은 예전에 쓴 나의 리뷰를 다시 읽어보고 저자의 감상을 뒤따라 가게 되고, 대부분 제목조차 몰랐던 책들은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하나씩 검색해보게 되었다. 어차피 소개된 모든 책들을 다 읽겠다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이고 그 중에서 몇 권만 구입해서 읽어보고 싶다. 이번에 소개된 책들은 크리스티앙 보뱅 [그리움의 정원에서], 이슬아 남궁인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올리브 키터리지], 마르그리트 뒤라스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이장욱 [트로츠키와 야생란], 하재영 [친애하는 나의 집에서], 김겨울 [책의 말들], F. 스콧 피츠제럴드 [행복의 나락], 김혼비 [다정소감], 프레드 울만 [동급생], 김민철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스페인 여자의 딸], 클레어 챔버스 [스몰 플레저], 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 은희경 [장미의 이름은 장미], 에리카 산체스 [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 최희서 [기적일지도 몰라], 타라 웨스트오버 [배움의 발견], 강화길 [대불호텔의 유령], 미셸 자우너 [H마트에서 울다], 금정연 [그래서… 이런 말이 생겼습니다] 이다.
서점을 갈때마다 책장처럼 진열된 곳에는 오래된 책들이, 매대에 뉘어 있는 책들은 주로 신간이나 베스트셀러들이다. 당연히 매대에 놓여 있는 책들이 눈에 잘 띄이게 되고 책을 보러 온 사람들은 표지와 목차를 둘러보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신간코너에 놓여 있는 책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서관 나열 순번처럼 정해진 책장에 꽂히게 된다. 책장에 꽂히게 되면 책머리만 보이기 때문에 누군가 그 책을 꺼내보기 전까지 책표지와 그 안에 담긴 매력은 고스란히 감춰지게 된다. 마치 오래된 와인이 코르크 마개로 오랜시간 고유한 맛과 향을 응축하고 있는 것처럼 책 등에 쌓여가는 먼지는 도대체 언제쯤 이 책의 주인이 나타날까 고요히 내려앉는다. 그렇게 신간코너를 쓰윽 살펴보고 책장 숲을 지날 때면 무력함이 밀려오곤 한다. 아니 대체 누가 이렇게 책을 많이 내는 걸까? 어디에 사는 누군가가 이렇게 많은 글을 써대는 것일까?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다 하더라도 서점에 있는 책의 한 부분이라도 읽을 수 있을까란 무력함 말이다. 그렇게 책장 하나도 다 읽지 못하면서 사람들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자신있게 내 생각을 내뱉었다니 이런 만용이 또 있을까란 생각도 더불어서 말이다. 저자의 말처럼 책을 많이 읽는다고 나에게 엄청난 변화가 오지는 않을 것이다. 웬만하면 고착된 생각을 쉽사리 바꾸지 않으려 할 것이고 오히려 잡식이 늘어나서 아는 척을 더 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 한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을 겪고도 살아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억겁의 시간 동안 그리고 내가 가본적 없고 앞으로도 갈 일이 없는 미지의 곳에서 누군가는 나와 비슷한 모습으로 또 누군가는 나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명확한 사실을 책을 읽으며 나 자신에게 주지시킨다.
“문학을 통해 우리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을 머릿속에 그려 내고, 나와는 관계없는 희로애락을 헤아리며 한층 깊어지곤 합니다. 이 소설을 읽고도 우리가 현실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우리 삶에 놓인 선택지를 진실로 이해하고 깊이 감사하며 실해하는 사람이 되려면, 때로는 우리의 일상 너머에 있는 것들을 보아야 합니다.(128)”
“나는 오늘 왜 달릴까. 나는 지금 어디를 달리고 있을까. 배우로서, 사람으로서, 나는 나 자신을 오늘도 단련하고 있는가. 그 단련의 끝이 비록 실패더라도, 그 보잘것없는 내 모습을, 그 진실한 내 모습을, 나는 감당하고 있는가 -최희서 [기적일지도 몰라] (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