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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리커버)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12월
평점 :
품절
하재영 작가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를 읽었다. 부제는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이다. 처음 몇 페이지를 읽었을 때에는 그동안 살아왔던 집의 기억을 토대로 우리나라의 건축문화의 변화나 거주 형태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는 내용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완전한 착각이었다. 저자의 책을 왜 이제서야 처음 접하게 된 것인지 억울함이 느껴질 정도로 좋았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에는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너무나도 아쉬웠고 찐득한 감동의 여운이 한동안 지속될 것 같다.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에게 이 책은 꼭 읽어야 한다고 그래서 이미 접혀진 지나온 시절을 추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살아온 집들에게 대한 섬세한 묘사와 그 집을 구성하고 있던 물건들의 배치와 주변 환경을 너무나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놀라웠고, 집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적확한 이름으로 마치 눈 앞에 이미 사라진 집들이 재구성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경제 발전의 호황을 이루던 시기를 지나 IMF와 같은 혹독한 계절에 보낸 이들이 겪은 부침은 우리나라 사람들 중 상당수를 쓰러뜨리고 아예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저자의 유년시절을 보낸 대구의 첫 번째 집은 어찌보면 우리나라의 아주 소수만이 누렸던 부를 상징한다. 하지만 시대의 거대의 전환은 수많은 이들을 되돌릴 수 없는 수렁의 늪으로 끌어들이듯이 몇 번의 이사를 통해 집은 점점 작아지고 서민 아파트와 같은 공간으로 치환된다. 지금의 아이들이 그러듯이 어느 아파트에 사느냐로 친구네 집의 경제적 상황을 미루어 짐작하고 또래를 형성하며 잊히지 않을 작은 못을 서로의 가슴에 박는다. 생각해보니 나도 그랬던 것 같다. 나의 유년 시절의 8할을 차지하는 성당은 그 당시 가장 부유한 아파트 근처에 있었기에 버스를 타고 그 성당을 다녀야 했던 나는 언제든 미사와 교리를 마치고 걸어서 집에 가는 친구들을 항상 부러워했었다. 심지어 엄마에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집에 저 아이들처럼 성당에서 가까우면 매일 등하교 길에 성당에 들러 기도를 할 거라고 말이다. 아무도 없는 성당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그때만은 나만의 특별한 공간이 생긴 것 같아 좋아서이기도 했지만, 아마도 부러웠던 친구들처럼 좋은 아파트에 살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저자도 30평이 넘는 친구네 집에 다녀와서는 불행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저자의 집에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몇 평 되지 않은 쪽방촌의 사람들이 행여나 그곳에서도 쫓겨날까 두려워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때 안도와 미안함을 든다고 말이다. 이런 양가적 감정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며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한 감정을 기억하고 언제든 내 안에서 되살려내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강뷰가 보이는 수십억에 달하는 집을 구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지만 쪽방촌에서 불안과 추위에 떨며 지내는 일은 언제든 나에게 닥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염려하고 기억하는 일은 행여나 나 자신에게도 닥칠지 모를 불행의 불을 지피게 될까 두렵기에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의 글은 읽는 이에게 용기를 가지라고 힘을 북돋워주는 것 같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의 유치함을 버리지 못하고 불행 배틀을 벌일 때가 있다. 내가 더 빡센 군대에서 군생활을 했다느니, 내가 학교 다닐때가 더 많이 맞았다느니, 내가 더 찢어지게 가난했다느니 하는 허세가 반이요 뻥이 반인 이야기들이다. 어느 정도는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진짜로 불행했던 과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일은 쉽지 않다. 왜냐햐면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때의 자신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고, 불현듯 분노가 치밀어 예기치 않은 행동을 해서 상대방을 놀라게 할 수도 있다. 웃자가 한 배틀이 죽자고 덤비는 다큐가 될 수도 있기에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뻥을 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한다. 하지만 저자가 고백하는 내용들을 읽고 있자니 특히나 동생과 함께 살다가 각자 살자는 내용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어쩌면 그 글을 쓰는 동안 꽤 많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가슴이 아려왔다. “나의 글은 가족을 착취한 결과였다.(84)”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누군가의 등을 밟고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큰 비참함을 안겨줄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고 작가로서는 고백하기 힘든 대필 작가로 생계를 이어가는 필사적인 노력까지 낱낱이 밝힌다. 나는 분명히 처음에 집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있었는데, 어느덧 작가의 용기있고 담대한 고백에 몰입하며 응원하게 된다. 부디 글쓰기를 놓지 말아달라고…
너무나 현실적이라 외면하고 싶을 정도의 민낯을 보여주는 이웃들과의 만남은 필터를 거치지 않고 마주한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가중시키지만, 그게 바로 내가 살아갈 세상이라고 어느 눈을 뜨라고 또 한 번의 용기와 힘을 북돋워준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할 용기까지 얻어낸 저자는 드디어 그들의 보금자리를 꾸미게 되고 그 집의 리모델링을 아버지에게 맡기게 된다. 동생의 경우처럼 아버지와 다툼이 발생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지만 아빠는 저자에게 착한 딸이라는 말로 안심을 시킨다. 하지만 우려했던 바는 현실이 되고 몇 번의 언쟁과 토라짐을 통해 아빠와 딸로 오랜시간 같이 살았음에도 서로를 잘 알지 못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큰 감동을 준 부분으로 사업에 실패하거나 가장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했을 때마다 입을 꾹 다물거나 사라지는 아빠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엄마를 보면 늘 마음이 아팠던 이유는 역할 때문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자존감과 독립심으로 무장해 있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늘 엄마가 가여웠다. 엄마는 자신의 불행이나 고통을 남에게 티 내지 않았고 동정받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도하고 부당하며 때로는 불가능하기까지 한 요구를 감내하는 엄마-아내-며느리의 역할을 맡은 사람을 나는 연민 없이 바라볼 수 없었다.
엄마와 달리 아빠에 대한 감정은 양가적이다. 아빠는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자 엄마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빠에게 연민을 가지게 된 것은 내가 마흔에 가까운 나이가 되고 그가 투병을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그리고 집을 고치면서 나는 아빠를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아빠가 아파서, 우리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서가 아니었다. 아빠의 나약함과 결핍감을 발견하면서 과거에 그가 부재하거나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강인한 해결사-을 할 수 없을 때, (사라지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사라져야만 했다. (침묵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침묵해야만 했다. 가부장제는 약함을 여성성으로, 강함을 남성성으로 환원하므로 아빠는 자신이 강하지 못할 때 보이지도, 말하지도 말아야 했다. 아빠 또한 남성의 감정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피해자가 아니었을까?(165-166)"
나이가 들수록 연로해지는 부모님을 뵐 때마다 나는 나의 엄마와 아빠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엄마와 아빠는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내셨을까? 내가 알지 못하는 시절에는 어떤 꿈을 갖고 계셨을까? 저자의 책을 읽고 나니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집을 떠올리며 그때의 이야기를 건네는 것이 어쩌면 엄마와 아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아닐까 싶다.
"열정적인 사랑이나 낭만적인 결혼이 아니라 온화한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지지하는 관계가 되고 싶었다. 그와 함께, 나의 삶을 살고 싶었다. 두 사람이 함께, 서로의 삶을 살고 싶었다. '여성의 삶을 방해하고 축소하는 가부장적 결혼이 아니라 여성이 자신을 창조해나가는 과정의 연장선상으로서의 결혼'(에이드리언 리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그것이 내가 바라는 삶이었다.(122)"
"쓰기는 삶의 특정한 순간을 다시 한 번 살아내기이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뭉뚱그리지 않기, 외면하고 싶었던 고통, 분노, 슬픔, 상실, 결핍을 다시 한 번 겪어내기. 그것은 나 자신의 이방인이 되는 일이다.(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