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영혼 오로라 - 천체사진가 권오철이 기록한 오로라의 모든 것
권오철 글.사진, 이태형 감수 / 씨네21북스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권오철 사진작가의 [신의 영혼 오로라]를 읽었다. 부제는 "천체사진가 권오철이 기록한 오로라의 모든 것"이다. 책의 표지부터 이목을 확 끌어당기는 오로라의 사진은 첫 장을 넘기기 전부터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오로라'라니~~ 많이 들어보기는 했지만, 주변에서 오로라를 봤다거나 오로라를 보러 여행을 다녀왔다는 얘기는 듣기 힘들었다. 이제는 해외여행을 떠나는 것이 보편적이 일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많은 시간과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야 하기에, 유명한 관광지나 휴양지를 선택하게 된다. 반면에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는 10시간 이상의 비행을 해야 하고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드니 선뜻 오로라 만을 위한 여행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한 페이지씩 넘어갈수록 다양한 오로라의 사진을 보면서 또한 극대기가 다가온다는 설명을 읽으며 오로라 여행에 대한 꿈이 서서히 커져감을 느낀다. 


4계절이 뚜렷하고(이제는 봄과 가을이 너무 짧아지기는 했지만), 낮과 밤의 길이도 적당한 우리나라는 사람이 살기에 꽤 좋은 기후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만 살 때는 몰랐지만 타국에서 머물다보면 면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는 점 중의 하나이다. 유럽에 대한 로망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많지만 막상 겨울에 여행을 가게 되면 하루 걸러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음습한 기운과 더불어 오후 5시도 안되서 밤처럼 어두워지는 일정에 당혹스러움과 불안감이 엄습해오곤 한다. 서유럽에서 위도가 높은 아일랜드과 영국의 경우 펍 문화가 발달한 이유 중의 하나가 겨울철에 밤이 너무 길어 아이부터 어른까지 놀이문화로 우울함을 달랬다고 하니, 맹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겨울철을 보내지만 일조량이 좋은 곳에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마음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살기에는 척박할 것이라 여기는 위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우리가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는 백야와 극야 현상이 반복되고, 그곳에서 힘겹게 자연을 극복하고 사는 이들에게 신이 고생이 많다며 이걸 보고 위안을 삼으라는 듯 '오로라'라는 천체쇼를 보여준다. 지금이야 수많은 여행객들이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 그곳을 방문하고 사진과 영상을 통해서 오로라의 놀라운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교통수단과 통신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오로지 그곳에 사는 이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었을까 싶다. 




저자는 1장에서 '오로라의 모든 것'이라는 제목으로 오로라에 대한 과학적 정의와 설명을 간략하게 전해준다. 아주 오래전에 과학잡지에서 보았던 지구의 내부 구조와 같은 사진들을 곁들여 오로라가 극지방 주위에서 생겨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알려준다. 간혹 뉴스를 통해서 태양의 흑점이 폭발 빈도가 높아졌다는 소식을 전하며 통신장애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했었는데, 그렇게 흑점이 많아지며 태양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지구에 전달될 때에 대기와 만나며 오로라의 극대기가 형성된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흑점의 폭발로 일상의 불편함이 가중될지도 모르지만 오로라를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미 10년 전에 출간된 책이 개정되어 새롭게 나오게 된 이유가 바로 극대기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오로라를 더 많은 이들이 보기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음은 오로라에 대한 저자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오로라의 극대기가 2024-2025년이라고 하니 다음 여행지는 캐나다의 엘로나이프로 삼고 일상이 노곤해질 때마다 엘로나이프 오로라 여행지 사이트를 통해 오로라 여행을 꿈꾸는 것이 새로운 에너지가 되지 않을까 한다. 


1장에서 오로라에 대한 개괄적 지식을 알게 되었다면, 2장에서는 오로라를 본격적으로 볼 수 있는 여행을 소개하고 있다. 갑자기 여행책자로 변신을 한 듯이 오로라를 볼 수 있는 지역과 여행 방법 등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올컬러로 된 책자이기에 지루하지 않게 오로라의 수많은 사진을 감상할 수 있어서 어서 빨리 오로라 여행을 계획하라는 유혹의 손짓이 멈추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겨울에 며칠 정도 영하 20도의 추위가 맹위를 떨칠때가 있기는 하지만, 오로라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지역으로 소개된 캐나다의 엘로나이프는 겨울에 영하 20도에서 40도까지 육박한다고 하니 그 추위는 얼마나 대단할지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는 오랜시간 밖에서 머물러야 할텐데 그 추위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우려가 되지만, 저자의 자세한 소개를 보니 여행지에서 제공되는 방한복과 인디언 전통 가옥인 티피에서 몸을 녹이며 오로라를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진에 가장 많이 등장한 오로라 빌리지 외에도 엘로나이프에서 오로라를 볼 수 있는 다양한 코스를 소개하고 있는데, 문제는 어떤 코스를 선택하느냐게 아니라 내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 오로라가 펼쳐지느냐이다. 




책에서 소개한 일반적인 일정은 6일 정도로 3일이나 4일밤을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 대기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그 기간에 오로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무척 속상할 것만 같다. 그리고 저자가 너무 큰 감동에 저절로 눈물이 나오게 된다면 오로라 폭풍은 어쩌면 신의 선택을 받아 선물을 받기에 마땅한 이들에게만 펼쳐지는 황홀한 광경이 아닐까 싶어 부러운 마음만 커져간다. 책에서 언급된 '오로라 헌터'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니, 마지막 날에 기적적으로 오로라 폭풍을 본 이들이 환호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모습은 마치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진 선물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영상 중에 나온 어느 출연자는 오로라 폭풍을 보고 너무 감격한 나머지 "오로라 폭풍을 보고 나니 한국에 돌아가서는 못 할 일이 없을 것 같다"고 말한다. 대체 오로라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일까?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오로라를 보고 인생이 바뀌었다는 고백을 전한다. 직장생활 중 오로라를 보러 간 여행에서 큰 감동을 받고 사표를 과감히 던지고 전업 사진작가로 탈바꿈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 것 또한 오로라를 통해서라고 말한다. 아마도 주변에서는 두 팔 들고 만류했을 그 용기 있는 선택으로 인해 저자가 찍은 오로라의 수많은 사진과 영상이 그곳을 방문하지 못할 많은 이들에게 대체재가 되어주니 이 또한 기적이자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신의영혼오로라 #권오철 #씨네21북스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6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
에리카 산체스 지음, 허진 옮김 / 오렌지디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리카 산체스의 [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를 읽었다. 어릴 때에는 ‘단일 민족’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지 혼혈, 혼종 과도 같은 말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 있었던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알게 된 바, 우리나라 사람들은 결코 단일 민족이 아니며 우리의 피속에 저 멀리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어느 인종의 피도 섞여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러한 과학적 사실은 그동안 외향 중에 어느 한 부분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외국인의 외양을 보고 의아했던 기억들을 이제서야 납득하게 해 준다. 숨겨져 있던 유전자가 어느 대에 이르러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이렇게 우리는 전세계 다양한 인종들과 연결되어 있다. 완전한 순종과 순혈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앞으로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인종적 차별이 너무나도 만연하다. 우리나라 이민사의 대부분은 일제 강점기 시기에 이루어졌다. 도저히 우리나라에서 살 수 없다고 판단한 이들이 또는 독립 운동을 하다가 도망쳐야 하는 이들이 그리고 나라 잃을 슬픔을 잊고 새로운 땅에서 희망을 얻고자 한 이들이 배를 타고 미지의 땅으로 떠났다. 지금처럼 비행기를 타고도 힘든 여정이 많은데, 그 당시에야 한 번 떠나면 다시는 고향 땅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면서도 생고생을 하며 알지 못하는 언어의 땅에 도착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민사가 그렇듯이 미지의 땅에 도착한 이들의 거의 대다수가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폭력에 노출되었고 극심한 빈곤의 나날을 보냈다. 그들의 삶을 그린 소설 들은 차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을 만큼 비극적인 장면들이 많다. 


몇 년 전 뉴스에서 멕시코의 불법 이민자들을 막기 위해 미국 남부의 광활한 영토에 엄청난 높이의 장벽을 쌓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미국과 멕시코의 크기가 우리나라 몇 십배에 해당되는데, 그 넓은 국경선을 어떻게 다 장벽으로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종종 우리나라의 치안 상황에 대해서 상당히 안전하다고 자부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바닷길  말고는 육로가 다 막혀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북한과 이렇게 대치하고 있지 않다면 엄청난 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로 남하할 가능성이 높다. 소설에 나온 훌리아의 아마와 아파의 경우처럼 우리나라의 경제력이 점점 부강해질수록 높은 인건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제3세계의 사람들을 고용하고 있다. 노동이 필요한 어느 곳에서든 동남아시아 사람들과 중국 동포들이 없다면 당장 문을 닫을 공장들이 수두룩하고 심지어 농촌에서도 그들의 수고가 없다면 수확 또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전에 독일에서 탄광 노동자와 간호사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건설 노동자로 일했던 아버지 세대가 벌어온 외화 덕분에 경제적 급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하지만 훌리아의 아마와 아파는 다시는 고향 멕시코로 돌아갈 수 없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브로커를 통해 국경선을 넘었고 불법체류자 신분이 드러날 경우 강제 추방당할 위험에 놓여 있다. 하지만 소설 속에 나온 것처럼 실제 미국 사회에서 거칠고 힘든 노동의 상당수를 그렇게 불법 이민한 이들의 수고로 뒷받침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척하고 이용만 한다. 훌리아의 아마는 부유한 이들의 집을 청소하고 아파는 캔디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한다. 훌리아는 문학을 사랑하고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지만, 어릴 때부터 유난스럽다는 핀잔을 듣고 아마가 원하는 대로 다소곳하지 않아서 번번히 아마와 부딪히게 된다. 소설의 시작은 훌리아와는 정반대로 아마의 말을 잘 듣고 집안에 머물려 아마의 일을 도와주는 훌리아의 언니 올가가 교통사고로 죽는 장면부터이다. 참척의 고통을 겪는 아마는 몇 주 동안 방에서 나오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하고 훌리아는 아마가 걱정되기 시작한다. 올가의 부재로 인해 훌리아의 일거수 일투족을 더욱 강박적으로 통제하려고 하는 아마는 훌리아와의 갈등이 더욱 커진다. 언니 올가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 순간 완벽한 딸로 여겨진 올가와는 반대로 사촌들과 이웃들에게도 말 안 듣는 딸인 자신이 더욱 답답하게 여겨진다. 훌리아는 올가의 죽음을 애도하다가 올가의 방에서 예상치 못한 물건을 발견하게 된다. 올가가 전혀 입을 것 같지 않은 야한 속옷과 피임도구 그리고 호텔키.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무척이나 궁금하지만 훌리아가 올가의 방에 들어간 것에 화가 난 아마는 올가의 방을 잠궈버린다. 


숨겨진 올가의 비밀은 무엇일까? 훌리아의 방황과 아마와의 갈등은 사춘시 시기를 힘겹게 보내는 소녀의 모습으로 단정지을 수도 있지만, 아마가 일방적으로 훌리아를 통제하려고 하는 모습 또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급기야 훌리아가 말을 듣지 않자 아마는 그동안 자신의 모든 희생이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아느냐고 올가가 그렇게 된 것도 너 때문이 아니냐고 훌리아를 다그치며 서로의 갈등은 극단에 치닫게 된다. 외출 금지와 휴대폰을 빼앗기는 일의 반복으로 훌리아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고 다행히 병원에서 깨어나게 된다. 소설 속에서 나온 우울증과 공황 장애로 인해 위급한 상황에 처한 이들이 똑같은 선택을 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상담 시스템은 부러울 정도로 잘 되어 있는 듯하다. 특히나 저소득층에 대한 그들의 제도적 배려는 개인주의가 만연한 자본주의 사회가 지탱할 수 있는 또 다른 힘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쿡 선생님에게 주기적인 상당을 받는 훌리아는 아마의 제안으로 멕시코의 고향 땅에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마마 하신타와 아마의 티오, 티아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매순간 핀트가 어긋난 것처럼 아마와 대화가 되지 않고 언쟁만 불거졌던 것과는 반대로 훌리아는 고향에서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과 이모와 사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상처가 조금씩 아물게 된다. 그리고 아마의 언니를 통해서 아마가 왜 그렇게 훌리아를 단속해왔는지 이유를 듣게 된다. 훌리아를 사랑으로 감싸주던 고향도 나르코스와 같은 이들에 의해 다시 위기감이 고조되고 훌리아는 시카고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올가의 노트북을 통해서 언니가 죽기 전에 유부남과 무려 4년 동안이나 비밀리에 관계를 맺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올가는 죽기 전에 그 남자의 아기를 갖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 또한 알게 된다. 훌리아는 올가가 직장에서 만났던 나이 많은 유부남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 분노를 표출하며 왜 올가를 이용했냐고 따져 묻는다. 아마의 숨겨진 과거와 올가의 비밀을 아마와 아파에게 말해야 할지 말지 고민하는 훌리아. 훌리아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로레나와 후앙가와 같은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훌리아가 사랑하는 코너까지. 그들은 인내심을 갖고 훌리아를 지켜주고 훌리아가 상처를 딛고 일어날 수 있도록 곁에 있어준다. 이 시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찬사가 어울릴 정도로 훌리아의 내면적 변화와 성장은 독자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의 잣대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누가 알까? 보장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시 한 번 머리가 이상해지면 어떻게 하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계속 나아가는 것뿐이다. 

언제쯤이면 내 잘못도 아닌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될까 궁금하다. 누가 알까? 어쩌면 영원할지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는 (아마가 이해를 하든 못 하든) 아마와 아파, 올가를 위해서 사는 것도 내가 이루려는 것의 일부가 아닐까 싶다. 엄밀히 말해서 내가 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세 사람이 갖지 못했던 수많은 선택의 기회가 있고, 나에게 주어진 것으로 정말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든다. 내가 지루하고 평범한 삶에 안주한다면 세 사람이 걸어온 길을 낭비하는 셈이다. 언젠가 세 사람도 이 사실을 깨달을지 모른다.(37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리커버)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12월
평점 :
품절


하재영 작가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를 읽었다. 부제는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이다. 처음 몇 페이지를 읽었을 때에는 그동안 살아왔던 집의 기억을 토대로 우리나라의 건축문화의 변화나 거주 형태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는 내용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완전한 착각이었다. 저자의 책을 왜 이제서야 처음 접하게 된 것인지 억울함이 느껴질 정도로 좋았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에는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너무나도 아쉬웠고 찐득한 감동의 여운이 한동안 지속될 것 같다.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에게 이 책은 꼭 읽어야 한다고 그래서 이미 접혀진 지나온 시절을 추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살아온 집들에게 대한 섬세한 묘사와 그 집을 구성하고 있던 물건들의 배치와 주변 환경을 너무나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놀라웠고, 집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적확한 이름으로 마치 눈 앞에 이미 사라진 집들이 재구성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경제 발전의 호황을 이루던 시기를 지나 IMF와 같은 혹독한 계절에 보낸 이들이 겪은 부침은 우리나라 사람들 중 상당수를 쓰러뜨리고 아예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저자의 유년시절을 보낸 대구의 첫 번째 집은 어찌보면 우리나라의 아주 소수만이 누렸던 부를 상징한다. 하지만 시대의 거대의 전환은 수많은 이들을 되돌릴 수 없는 수렁의 늪으로 끌어들이듯이 몇 번의 이사를 통해 집은 점점 작아지고 서민 아파트와 같은 공간으로 치환된다. 지금의 아이들이 그러듯이 어느 아파트에 사느냐로 친구네 집의 경제적 상황을 미루어 짐작하고 또래를 형성하며 잊히지 않을 작은 못을 서로의 가슴에 박는다. 생각해보니 나도 그랬던 것 같다. 나의 유년 시절의 8할을 차지하는 성당은 그 당시 가장 부유한 아파트 근처에 있었기에 버스를 타고 그 성당을 다녀야 했던 나는 언제든 미사와 교리를 마치고 걸어서 집에 가는 친구들을 항상 부러워했었다. 심지어 엄마에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집에 저 아이들처럼 성당에서 가까우면 매일 등하교 길에 성당에 들러 기도를 할 거라고 말이다. 아무도 없는 성당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그때만은 나만의 특별한 공간이 생긴 것 같아 좋아서이기도 했지만, 아마도 부러웠던 친구들처럼 좋은 아파트에 살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저자도 30평이 넘는 친구네 집에 다녀와서는 불행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저자의 집에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몇 평 되지 않은 쪽방촌의 사람들이 행여나 그곳에서도 쫓겨날까 두려워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때 안도와 미안함을 든다고 말이다. 이런 양가적 감정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며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한 감정을 기억하고 언제든 내 안에서 되살려내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강뷰가 보이는 수십억에 달하는 집을 구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지만 쪽방촌에서 불안과 추위에 떨며 지내는 일은 언제든 나에게 닥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염려하고 기억하는 일은 행여나 나 자신에게도 닥칠지 모를 불행의 불을 지피게 될까 두렵기에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의 글은 읽는 이에게 용기를 가지라고 힘을 북돋워주는 것 같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의 유치함을 버리지 못하고 불행 배틀을 벌일 때가 있다. 내가 더 빡센 군대에서 군생활을 했다느니, 내가 학교 다닐때가 더 많이 맞았다느니, 내가 더 찢어지게 가난했다느니 하는 허세가 반이요 뻥이 반인 이야기들이다. 어느 정도는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진짜로 불행했던 과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일은 쉽지 않다. 왜냐햐면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때의 자신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고, 불현듯 분노가 치밀어 예기치 않은 행동을 해서 상대방을 놀라게 할 수도 있다. 웃자가 한 배틀이 죽자고 덤비는 다큐가 될 수도 있기에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뻥을 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한다. 하지만 저자가 고백하는 내용들을 읽고 있자니 특히나 동생과 함께 살다가 각자 살자는 내용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어쩌면 그 글을 쓰는 동안 꽤 많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가슴이 아려왔다. “나의 글은 가족을 착취한 결과였다.(84)”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누군가의 등을 밟고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큰 비참함을 안겨줄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고 작가로서는 고백하기 힘든 대필 작가로 생계를 이어가는 필사적인 노력까지 낱낱이 밝힌다. 나는 분명히 처음에 집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있었는데, 어느덧 작가의 용기있고 담대한 고백에 몰입하며 응원하게 된다. 부디 글쓰기를 놓지 말아달라고… 


너무나 현실적이라 외면하고 싶을 정도의 민낯을 보여주는 이웃들과의 만남은 필터를 거치지 않고 마주한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가중시키지만, 그게 바로 내가 살아갈 세상이라고 어느 눈을 뜨라고 또 한 번의 용기와 힘을 북돋워준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할 용기까지 얻어낸 저자는 드디어 그들의 보금자리를 꾸미게 되고 그 집의 리모델링을 아버지에게 맡기게 된다. 동생의 경우처럼 아버지와 다툼이 발생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지만 아빠는 저자에게 착한 딸이라는 말로 안심을 시킨다. 하지만 우려했던 바는 현실이 되고 몇 번의 언쟁과 토라짐을 통해 아빠와 딸로 오랜시간 같이 살았음에도 서로를 잘 알지 못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큰 감동을 준 부분으로 사업에 실패하거나 가장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했을 때마다 입을 꾹 다물거나 사라지는 아빠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엄마를 보면 늘 마음이 아팠던 이유는 역할 때문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자존감과 독립심으로 무장해 있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늘 엄마가 가여웠다. 엄마는 자신의 불행이나 고통을 남에게 티 내지 않았고 동정받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도하고 부당하며 때로는 불가능하기까지 한 요구를 감내하는 엄마-아내-며느리의 역할을 맡은 사람을 나는 연민 없이 바라볼 수 없었다. 

엄마와 달리 아빠에 대한 감정은 양가적이다. 아빠는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자 엄마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빠에게 연민을 가지게 된 것은 내가 마흔에 가까운 나이가 되고 그가 투병을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그리고 집을 고치면서 나는 아빠를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아빠가 아파서, 우리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서가 아니었다. 아빠의 나약함과 결핍감을 발견하면서 과거에 그가 부재하거나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강인한 해결사-을 할 수 없을 때, (사라지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사라져야만 했다. (침묵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침묵해야만 했다. 가부장제는 약함을 여성성으로, 강함을 남성성으로 환원하므로 아빠는 자신이 강하지 못할 때 보이지도, 말하지도 말아야 했다. 아빠 또한 남성의 감정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피해자가 아니었을까?(165-166)"


나이가 들수록 연로해지는 부모님을 뵐 때마다 나는 나의 엄마와 아빠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엄마와 아빠는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내셨을까? 내가 알지 못하는 시절에는 어떤 꿈을 갖고 계셨을까? 저자의 책을 읽고 나니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집을 떠올리며 그때의 이야기를 건네는 것이 어쩌면 엄마와 아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아닐까 싶다. 


"열정적인 사랑이나 낭만적인 결혼이 아니라 온화한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지지하는 관계가 되고 싶었다. 그와 함께, 나의 삶을 살고 싶었다. 두 사람이 함께, 서로의 삶을 살고 싶었다. '여성의 삶을 방해하고 축소하는 가부장적 결혼이 아니라 여성이 자신을 창조해나가는 과정의 연장선상으로서의 결혼'(에이드리언 리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그것이 내가 바라는 삶이었다.(122)"


"쓰기는 삶의 특정한 순간을 다시 한 번 살아내기이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뭉뚱그리지 않기, 외면하고 싶었던 고통, 분노, 슬픔, 상실, 결핍을 다시 한 번 겪어내기. 그것은 나 자신의 이방인이 되는 일이다.(13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올리앤더
서수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수진 작가의 [올리앤더]를 읽었다. 올리앤더를 검색해보니 우리말로 '협죽도'라는 이름의 관목 또는 교목이라고 나온다. 왜 제목을 올리앤더로 정했을까 생각해본다. 주인공들의 전쟁터와 같은 마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심지어 지속된 산불로 재가 날리고 심각한 가뭄으로 정원가꾸기가 제한된 상황 속에서도 황폐해진 잔디밭에서 올곧이 꽃을 피우는 굳건함 때문일까? 아니면 해솔, 클로이, 엘리와는 상관없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된 엄마의 목표를 비유한 것일까? 호주라는 남반구의 계절이 정반대의 땅에서 가장 예민한 고등학교 시기를 보내는 세 소녀의 이야기는 타국의 한인 이민 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 DNA에 새겨진 것일지도 모를 고학력에 대한 맹목적인 욕구는 어딜가서 사나 동일하다는 생각이 들게끔 만든다. 


전세계에서 업무상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가 영어이기 때문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의 영어를 주언어로 사용하는 나라에 대한 동경은 대단하다. 유학을 간다고 하면 대부분 영어권의 나라가 대부분이고 이민 또한 비슷하다. 특히나 자녀교육을 위해서 이민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꽤나 많다.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좋은 대학을 가야 하고, 이제는 개천에서 용나는 시대는 저 먼 과거의 얘기가 되어버렸기에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일타 강사가 있는 비싼 학원을 다녀야만 한다. 경제적 지원이 넉넉치 않다면 좋은 대학을 가기는 점점 힘들어지고 좋은 대학을 들어가지 못하면 직장을 구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사실 공부는 모두가 잘할 수 없고, 모두가 잘 할 필요도 없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재능과 개성을 갖고 태어났기에 각자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다양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자기 자식만큼은 공부를 잘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공부를 잘해야 성공할 수 있고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는 우리사회의 현실 때문이다. 소설에서 언급했듯이 학교 경비를 하던, 변호사를 하던, 다른 청소를 하던 비슷한 경제적 지위를 누리고 딱히 차별을 받지 않는다면 애써 공부를 잘하려고 노력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그런 말을 대놓고 하는 부모는 거의 없겠지만, 어쩌면 자녀의 귀에 대고 '너 공부 안하면 저 사람처럼 된다'는 말을 여전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설의 주인공은 해솔, 클로이, 엘리 이렇게 세 명의 고등학생 십대 소녀이다. 해솔은 한국에서 공부를 꽤나 잘하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엄마의 재혼으로 인해 시드니로 유학을 가게 된다. 해솔은 클로이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며 동급생 클로이를 만나게 된다. 클로이는 한국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어릴 때 부모와 함께 호주로 이민을 온 1.5세대이다. 클로이의 부모는 다른 집 청소일을 하며 클로이가 의대에 들어갈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해 뒷받침해준다. 문제아 엘리는 부모님이 유학생 비자로 머물며 호주에서 태어났고 한국말을 하지 못하는 불법체류자 신분이다. 이렇게 호주에서 만난 세 명의 소녀는 어찌보면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호주에서 살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각 루트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다. 유학생, 이민 2세대, 1.5세대. 


해마다 뉴스에서 전세계적으로 발생되는 인종차별에 대한 내용들이 보도되고 있다. 팬데믹 사태로 인해 아시안에 대한 증오범죄도 증가하고 묻지마 폭려과도 같은 사태들이 반복되지만 마땅한 대비책은 준비되지 못한 현실이다. 백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아마 반드시 겪게 되는 미묘하게 기분 나쁜 그들의 표정과 행동은 타국살이의 설움을 가중시키곤 한다. 그럼에도 한 번 자리잡게 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각 나라별로 그룹을 만드는 것이나 같은 한국 사람이라고 해도 유학생과 이민 세대로 또 다시 분화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숨겨지지 않는 차별과 배타적인 경계로부터 안위와 자유를 보장받기 싶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의 엄마들 또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소녀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데, 해솔의 경우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는 전형적인 한국 엄마의 모습이 아닌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재혼을 선택하고 해솔을 저 멀리 타국으로 보낸 이기적인 엄마로 그려진다. 클로이의 엄마는 클로이를 의대에 보내는 것을 인생의 최대 목표로 삼고 경주마처럼 달린다. 클로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의대를 가는 것을 목표로 공부했기에 자신이 정말로 의사가 되기를 원하는지 아닌지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왜 의사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말문이 막힌 클로이는 해솔의 등장으로 등수가 떨어지자 불안감을 느끼며 각성제를 복용하게 된다. 엘리의 엄마는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주인집이 차고를 개조한 공간에 세들어 살며 엘리가 대학에 들어가 합법적인 비자를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엘리의 학비와 호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엘리를 아주 어릴 시절부터 혼자 둘 수 밖에 없었던 엘리의 부모는 엘리가 어떻게 망가져갔는지 알지 못한다. 극심한 외로움에 혼자인 엘리는 부유한 백인 아이들을 따르며 마약과 흡연과 음주를 일삼게 된다. 그리고 급기야 학교에서 마약을 파는 셀러가 된다. 


이 세 소녀의 앞으로의 운명은 어떻게 펼쳐질까? 부모는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그리고 타국에 와서 고생을 하며 자식의 성공만을 위해서 힘든 일을 가리지 않고 뒷바라지를 하며 자식에게 성공이라는 부담을 지우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빈번한 이러한 클리셰는 호주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다시 한 번 조명되며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마약도 쉽게 구입이 가능한 곳에서 극도로 고조된 긴장을 탈피하기 위한 일탈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준다. 해솔과 클로이처럼 누가 입에 넣어줘도 절대로 마약을 할 수 없다고 거부할 것 같은 이들도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처럼 한계에 이르렀을 때 결국은 스스로를 파괴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니었는지, 해솔과 클로이와 엘리는 저 먼 나라에 머무는 한정된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종차별을 혐오하면서도 극심한 직업차별을 일삼는 우리의 현실을 꼬집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래서... 이런 말이 생겼습니다 - 만들어지고, 유행하고, 사라질 말들의 이야기
금정연 지음 / 북트리거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금정연 작가의 [그래서... 이런 말이 생겼습니다]를 읽었다. 부제는 "만들어지고, 유행하고, 사라질 말들의 이야기"이다. 이 책의 첫머리를 읽을 때만 해도 요즘 많이 사용되는 신조어와 유행어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이 많겠구나라는 기대와 더불어 나도 줄임말을 많이 알게되어서 시대에 뒤떨어지지 말아야지라는 단순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유행어와 신조어가 생겨난 배경과 이런 말들을 사용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내용을 보니 점점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대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인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에는 존버, 금수저 흙수저, 플렉스, 취준생, 홧김비용, 가성비와 가심비, 비혼, 국룰, 뉴트로, 스불재, 밈, 워라밸, 인싸와 아싸, 사회적 거리두기, 손절, 많관부, 가짜뉴스, 뇌피셜, 틀딱, 맘충, 노키즈존, 휴거 엘사 빌거, 민식이법 놀이, 한남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미 알고 있는 단어들도 많았지만 어설프게 알고 있는 말의 뜻을 알게 되었고, 전혀 알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처음 보는 말들도 있어서 신기하기도 하고 이내 뜻을 알고 나니 씁쓸함이 밀려왔다. 유행어와 신조어는 어쩌면 생존기간이 짧은 한 시대를 풍미하는 사라 없어질 말이기도 하다. 지금 젊은 세대를 칭하는 MZ가 사용하는 말도 얼마 되지 않아서 사라지거나 촌스러운 말이 될 것이다. 지금의 기성세대가 어릴 때 썼던 말이 그랬듯이 말이다. 한때는 아재개그가 잘 통하던 시기도 있었다. 그때라고 아재개그가 엄청난 반전을 숨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에 그런 식의 개그가 없었다면 그것 또한 신선함을 주었기 때문에 유행한 것이다. 책에는 없지만 지금은 소위 뭔가 놀랄만한 일을 듣거나 접했을 때 '대박'이라는 말을 너무나도 많이 사용한다. 그래서 대박이라는 말을 대체할 단어, 지금의 나의 놀란 감정을 대신할 말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대박을 연신 반복해도 질리지 않는 듯 애 어린 할 것 없이 모두가 대박을 외친다. 이렇게 단어와 말의 다양성을 감퇴시키는 유행어는 그렇다 하더라도 책에 나온 유행어와 신조어들 중에 우리사회의 심각함을 드러내는 말들이 꽤나 많았다. 


존버, 금수저 흙수저, 플렉스, 홧김비용은 쳅터의 제목에 나온 것처럼 자본주의 시대의 자화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돈이 전부인 세상이 되어가는 우리의 현실은 기존의 가치들을 붕괴시키고 모든 가치 척도의 기준을 돈으로 환원시키며, 경제적 지위가 낮은 이들을 실패자로 내몰고 있다. 특히나 인터넷의 발달로 유명인들의 삶을 손쉽게 엿볼 수 있는 SNS가 있기에, 그들이 누리는 여유와 낭만을 맹목적으로 쫓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최선의 목표가 되어버린 현실이다. 휴거, 엘사, 빌거에 담긴 뜻이 초등학생 때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유명 메이커의 아파트인지, 아니면 임대 주택인지를 구별하며 원색적인 차별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의 폭력은 우리사회가 심각한 병에 걸렸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책에서 예로 든 유행어와 신조어 가운데 공통적인 문제점이자 이 시대의 큰 화두로 떠오른 주제가 있으니 바로 '차별'이다. 저자도 가장 마음 아파하며 심각함을 제시한 단어들은 틀딱, 맘충, 노키즈존 같은 말이다. 노인과 여성과 아이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이 말들은 한 마디로 약자에 대한 군림의 뜻을 담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비하의 뜻이 담긴 말들의 강도가 세지는 것 같다. 틀니가 딱딱거리는 소리를 담거나 '벌레 충'자를 덧붙이는 것은 새롭게 생겨난 신조어에 강렬함을 부과함과 동시에 한 번 들으면 쉽사리 잊혀지지 않을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선사한다. 근래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말을 내뱉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의 비상식적인 생각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의문을 갖지만 결론은 슬프게도 그들이 그런 말을 서슴치 않고 내뱉는 것은 자신에게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공감의 생겨날 가능성을 아예 지워버린다.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특정 인물들의 유형을 아웃사이더라는 하나의 범주로 명명하며 '아웃사이더 열풍'을 불러온 영국의 소설가 콜린 윌슨은 [아웃사이더]에서 아웃사이더를 이렇게 정의한다. 아무도 병에 걸린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문명사회에서 자기가 환자임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간. '아웃사이더'의 근본 문제는 일상의 세계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이며, 그 일상의 세계가 무언가 지루하고 불만족스럽다고 느끼는 데 있다. 마치 최면술에 걸린 사람이 톱밥을 계란이나 베이컨이라고 믿으면서 먹고 있는 것처럼(1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