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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
에리카 산체스 지음, 허진 옮김 / 오렌지디 / 2022년 1월
평점 :
에리카 산체스의 [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를 읽었다. 어릴 때에는 ‘단일 민족’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지 혼혈, 혼종 과도 같은 말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 있었던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알게 된 바, 우리나라 사람들은 결코 단일 민족이 아니며 우리의 피속에 저 멀리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어느 인종의 피도 섞여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러한 과학적 사실은 그동안 외향 중에 어느 한 부분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외국인의 외양을 보고 의아했던 기억들을 이제서야 납득하게 해 준다. 숨겨져 있던 유전자가 어느 대에 이르러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이렇게 우리는 전세계 다양한 인종들과 연결되어 있다. 완전한 순종과 순혈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앞으로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인종적 차별이 너무나도 만연하다. 우리나라 이민사의 대부분은 일제 강점기 시기에 이루어졌다. 도저히 우리나라에서 살 수 없다고 판단한 이들이 또는 독립 운동을 하다가 도망쳐야 하는 이들이 그리고 나라 잃을 슬픔을 잊고 새로운 땅에서 희망을 얻고자 한 이들이 배를 타고 미지의 땅으로 떠났다. 지금처럼 비행기를 타고도 힘든 여정이 많은데, 그 당시에야 한 번 떠나면 다시는 고향 땅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면서도 생고생을 하며 알지 못하는 언어의 땅에 도착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민사가 그렇듯이 미지의 땅에 도착한 이들의 거의 대다수가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폭력에 노출되었고 극심한 빈곤의 나날을 보냈다. 그들의 삶을 그린 소설 들은 차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을 만큼 비극적인 장면들이 많다.
몇 년 전 뉴스에서 멕시코의 불법 이민자들을 막기 위해 미국 남부의 광활한 영토에 엄청난 높이의 장벽을 쌓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미국과 멕시코의 크기가 우리나라 몇 십배에 해당되는데, 그 넓은 국경선을 어떻게 다 장벽으로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종종 우리나라의 치안 상황에 대해서 상당히 안전하다고 자부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바닷길 말고는 육로가 다 막혀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북한과 이렇게 대치하고 있지 않다면 엄청난 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로 남하할 가능성이 높다. 소설에 나온 훌리아의 아마와 아파의 경우처럼 우리나라의 경제력이 점점 부강해질수록 높은 인건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제3세계의 사람들을 고용하고 있다. 노동이 필요한 어느 곳에서든 동남아시아 사람들과 중국 동포들이 없다면 당장 문을 닫을 공장들이 수두룩하고 심지어 농촌에서도 그들의 수고가 없다면 수확 또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전에 독일에서 탄광 노동자와 간호사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건설 노동자로 일했던 아버지 세대가 벌어온 외화 덕분에 경제적 급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하지만 훌리아의 아마와 아파는 다시는 고향 멕시코로 돌아갈 수 없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브로커를 통해 국경선을 넘었고 불법체류자 신분이 드러날 경우 강제 추방당할 위험에 놓여 있다. 하지만 소설 속에 나온 것처럼 실제 미국 사회에서 거칠고 힘든 노동의 상당수를 그렇게 불법 이민한 이들의 수고로 뒷받침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척하고 이용만 한다. 훌리아의 아마는 부유한 이들의 집을 청소하고 아파는 캔디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한다. 훌리아는 문학을 사랑하고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지만, 어릴 때부터 유난스럽다는 핀잔을 듣고 아마가 원하는 대로 다소곳하지 않아서 번번히 아마와 부딪히게 된다. 소설의 시작은 훌리아와는 정반대로 아마의 말을 잘 듣고 집안에 머물려 아마의 일을 도와주는 훌리아의 언니 올가가 교통사고로 죽는 장면부터이다. 참척의 고통을 겪는 아마는 몇 주 동안 방에서 나오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하고 훌리아는 아마가 걱정되기 시작한다. 올가의 부재로 인해 훌리아의 일거수 일투족을 더욱 강박적으로 통제하려고 하는 아마는 훌리아와의 갈등이 더욱 커진다. 언니 올가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 순간 완벽한 딸로 여겨진 올가와는 반대로 사촌들과 이웃들에게도 말 안 듣는 딸인 자신이 더욱 답답하게 여겨진다. 훌리아는 올가의 죽음을 애도하다가 올가의 방에서 예상치 못한 물건을 발견하게 된다. 올가가 전혀 입을 것 같지 않은 야한 속옷과 피임도구 그리고 호텔키.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무척이나 궁금하지만 훌리아가 올가의 방에 들어간 것에 화가 난 아마는 올가의 방을 잠궈버린다.
숨겨진 올가의 비밀은 무엇일까? 훌리아의 방황과 아마와의 갈등은 사춘시 시기를 힘겹게 보내는 소녀의 모습으로 단정지을 수도 있지만, 아마가 일방적으로 훌리아를 통제하려고 하는 모습 또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급기야 훌리아가 말을 듣지 않자 아마는 그동안 자신의 모든 희생이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아느냐고 올가가 그렇게 된 것도 너 때문이 아니냐고 훌리아를 다그치며 서로의 갈등은 극단에 치닫게 된다. 외출 금지와 휴대폰을 빼앗기는 일의 반복으로 훌리아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고 다행히 병원에서 깨어나게 된다. 소설 속에서 나온 우울증과 공황 장애로 인해 위급한 상황에 처한 이들이 똑같은 선택을 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상담 시스템은 부러울 정도로 잘 되어 있는 듯하다. 특히나 저소득층에 대한 그들의 제도적 배려는 개인주의가 만연한 자본주의 사회가 지탱할 수 있는 또 다른 힘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쿡 선생님에게 주기적인 상당을 받는 훌리아는 아마의 제안으로 멕시코의 고향 땅에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마마 하신타와 아마의 티오, 티아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매순간 핀트가 어긋난 것처럼 아마와 대화가 되지 않고 언쟁만 불거졌던 것과는 반대로 훌리아는 고향에서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과 이모와 사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상처가 조금씩 아물게 된다. 그리고 아마의 언니를 통해서 아마가 왜 그렇게 훌리아를 단속해왔는지 이유를 듣게 된다. 훌리아를 사랑으로 감싸주던 고향도 나르코스와 같은 이들에 의해 다시 위기감이 고조되고 훌리아는 시카고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올가의 노트북을 통해서 언니가 죽기 전에 유부남과 무려 4년 동안이나 비밀리에 관계를 맺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올가는 죽기 전에 그 남자의 아기를 갖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 또한 알게 된다. 훌리아는 올가가 직장에서 만났던 나이 많은 유부남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 분노를 표출하며 왜 올가를 이용했냐고 따져 묻는다. 아마의 숨겨진 과거와 올가의 비밀을 아마와 아파에게 말해야 할지 말지 고민하는 훌리아. 훌리아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로레나와 후앙가와 같은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훌리아가 사랑하는 코너까지. 그들은 인내심을 갖고 훌리아를 지켜주고 훌리아가 상처를 딛고 일어날 수 있도록 곁에 있어준다. 이 시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찬사가 어울릴 정도로 훌리아의 내면적 변화와 성장은 독자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의 잣대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누가 알까? 보장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시 한 번 머리가 이상해지면 어떻게 하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계속 나아가는 것뿐이다.
언제쯤이면 내 잘못도 아닌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될까 궁금하다. 누가 알까? 어쩌면 영원할지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는 (아마가 이해를 하든 못 하든) 아마와 아파, 올가를 위해서 사는 것도 내가 이루려는 것의 일부가 아닐까 싶다. 엄밀히 말해서 내가 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세 사람이 갖지 못했던 수많은 선택의 기회가 있고, 나에게 주어진 것으로 정말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든다. 내가 지루하고 평범한 삶에 안주한다면 세 사람이 걸어온 길을 낭비하는 셈이다. 언젠가 세 사람도 이 사실을 깨달을지 모른다.(3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