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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평점 :
조해진 작가의 [빛과 멜로디]를 읽었다. 세계는 지금 전쟁 중이다. 어딘가에선 폭탄이 떨어질까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차가운 습기가 내뿜는 지하 방공호의 시멘트 위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세우고 있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연휴를 잘 보냈냐는 살가운 인사만이 오갈뿐이다. 최근 개봉한 넷플릭스 신작 [무도실무관]에서 주인공이 전자발찌를 제거하고 도주하여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막다 칼에 찔려 죽을 위기를 가까쓰로 넘기게 된다. 의당 아버지는 펄펄 뛰며 아들이 다시는 그럼 위험천만한 일에 가담하지 않기를 바라게 되고, 도망간 범죄자를 쫓으려는 아들을 막아선다.
그때 주인공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3달 전의 나는 전자발찌가 뭔지도 몰랐어. 근데 이제 다 알아. 너무 많이 알아. 내가 배운걸 잊을 수 없잖아. 내가 그날 구해 줬던 그 애는 사람이 무서워서 아직 밖에도 못 나온데. 걔 10살이야 겨우. 근데 그 어린애가 너무 큰 상처를 받아서 이미 마음을 닫아버렸어. 그리고 오늘 내가 뭘 알게 됐는지 알아. 그 악마 같은 새끼가 또 다른 애를 다치게 했다는 거야. 모르면 상관없는데, 그걸 이제 내가 다 아는데 어떻게 가만있어?"
우리는 지금 지구 저편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간간히 전해오는 뉴스를 통해서 심각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과는 다르게 알면서도 가만히 있게 된다. 이건 너무 먼 나라의 일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생업을 때려치고 그곳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내가 지금 그곳에 간다고 해도 도움될 만한 것이 없을테니까. 너무나도 자명하고 현실적인 비겁한 이유들을 백만개 정도 만들 수 있다. 소설을 읽으며 영화를 보며 약자를 보면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온전히 자신을 내던지는 이들을 생각하게 된다.
소설의 주인공인 권은과 승주는 다큐멘터리 인터뷰로 재회하게 된다. 권은은 한 눈에 승주를 알아보지만 승주는 권은을 기억하지 못한다. 학교에 며칠 째 결석한 권은을 찾아가보라는 선생님의 말에 반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마지못해 마주한 권은의 현실은 이불 속에서 스노볼 빛과 멜로디에 의지해 떨고 있는 작은 소녀의 애처로움이었다. 이후 승주는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권은에게 이것 저것 먹거리와 필요한 것들을 가져다 주고 종국에는 아버지가 외국에서 사와 장롱 속에 넣어둔 필름 카메라를 건네게 된다. 생의 의지를 서서히 소멸시키던 권은은 승주의 보살핌과 카메라로 인해 다시금 불을 붙일 수 있게 된다.
권은을 기억한 승주는 인터뷰를 하고 얼마 되지 않아 권은의 사고 소식을 접하게 되고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의 피해를 고스란히 견디고 있는 나스차를 취재하게 된다. 나스차와의 화상 인터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승주의 아내 민영은 어린 지유에게 행여나 불운이 끼칠까 두려운 마음에 남편 승주가 전쟁 지역의 여성과 인터뷰를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승주는 지유에게 좋은 것만을 보여주고 싶은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전쟁 중인 지역의 사람들을 외면하려고는 이기적인 민영에게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분쟁 지역을 활보하던 권은은 사고로 다리 한 쪽을 잃게 되고 사진가가 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게리 앤더슨의 여동생인 애나 앤더슨의 초대로 영국에서 잠시 머물게 된다. 애나는 권은에게 아버지 콜린 앤더슨의 일생이 담긴 영상 제작을 부탁하게 되고, 권은은 파키슨병과 치매를 앓는 콜린과의 마지막 인터뷰를 진행하며 게리와 콜린과의 불화의 이유를 알게 된다. 콜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드레스덴 지역에 폭탄을 투하하는 전투기 조종사였기에 아들 게리는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무고한 민간인을 죽게 만든 것인지 인정하지 못하는 것에 분노하며 죽을 때까지 용서하지 못한다. 하지만 게리와 콜린의 상처와 분노를 너무나도 잘 알았던 애나는 권은을 통해 시리아 난민인 살마를 딸처럼 보살펴 준다.
게리 앤더슨이 만든 다큐멘터리 <사람, 사람들>에는 노먼 마이어라는 사람이 분쟁 지역에 구호품을 나르다 폭격을 맞아 죽게 되는 장면이 담기게 된다. 노먼 마이어의 어머니 알마 마이어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도망가게 되는데, 알마의 연인이었던 장 베른은 목숨을 걸고 그녀의 이주를 도와주지만 알마가 자신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 채 각자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노먼이 사람을 살리는 일에 투신하게 된 것은 아버지 장 베른의 영향이었고, 노먼의 구호품 차량을 찍던 게리는 폐암 투병 중에도 분쟁 지역의 사진 촬형을 포기하지 않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분쟁 지역에 대한 관심과 염려가 아니었다면 결코 만날 일이 없었던 권은과 애나와 살마와 나스차의 만남은 우리 삶의 우연성에 대한 고찰을 불러일으킨다. 저자가 코멘터리북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번 작품을 마무리하기 위해 방문했던 런던을 떠나며 내 생에서 다시는 이곳에 올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순간, 15년 전 [로기완을 만났다]를 위해 왔던 영국을 떠나며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고 말한다. "생에서 장담이란 정말이지 쓸모가 없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은 순간이었다."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가지 지역은 아마도 절대로 갈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단정짓는다. 시리아의 난민들이 고국을 떠나 작은 보트에 수백명의 사람들이 몸을 실고 서유럽의 작은 섬에 무사히 도착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들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국민들을 선동하는 이들의 배타적인 마음은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우리가 절대로 만날 일이 없고, 절대로 엮일 일이 없다고 장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런 비극적인 일일 발생된 것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해도, 죽어가는 이들을 외면하는 것이 아무에게도 비난받지 않는다고 해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주려 한다.
결국 사람을 살리는 일은 사람의 몫이라는 것을 말이다. 승주의 작은 관심과 배려가 죽고 싶던 권은을 살리게 했고, 권은의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의 선택은 시리아 난민 살마와 애나를 연결시켜주고 살마는 우크라이나 여성 나스차를 같은 방식으로 구해준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 어쩌면 나와 무관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지 않을까.
"태엽이 멈추면 빛과 멜로디가 사라지고 눈도 그치겠죠.(45)"
"가령 미국의 폭격에 많은 국민을 잃은 이라크는 다른 곳에서는 쿠르드족을 죽였다. 삼백 년 넘게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를 받은 인도네시아는 약국의 슬픔을 어느 나라보다 잘 알 텐데도 동티모르를 공격했고 인구의 사분의 일 이상을 학살했다. 이십 세기 들어 가장 처절한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대인들은 테러리스트를 차단하고 솎아낸다는 명목을 내세워 그 위로 고압 전류가 흐르는 팔 미터 높이의 장벽을 세웠고 가자지구에 주기적으로 폭탄과 미사일, 로켓을 투하해왔다. 무기에는 테러리스트와 민간인을 식별할 능력이 없는데도,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을 한 명이라도 죽이는 게 꿈인, 고작 그런 것을 꿈이라고 믿는 소년과 소녀들을 키워낼 뿐인데도, 그들 중 일부는 몸에 폭탄을 두르고 이스라엘 군인 속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테러가 아니라 신앙이라고, 아니, 사랑의 경지라고, 자신의 몸이 신전이 되어 순교할 기회를 얻은 것뿐이라고,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176-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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