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견자들
김초엽 지음 / 퍼블리온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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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 작가의 [파견자들]을 읽었다. 이번 작품은 어느덧 장르문학의 대표 주자가 된 저자의 SF 장편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심오한 철학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에 흥미 위주의 시선으로 따라가다보면 길을 잃고 표류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미래의 언젠가 꼭 일어날 것 같은 단골 소재인 미지의 대상이 지구를 침공하여 살아남은 소수의 인류가 지하와 같은 고립된 장소에서 간신히 연명해가며 전복을 꿈꾸는 플롯이 이 소설의 얼개를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소재는 엇비슷한 내용을 다루었다 하더라도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 안에서 주인공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은 과히 범상치 않았고 무척이나 인식론적 방법론을 택한 것처럼 조금은 난해했다. 그래서 그런지 소설의 재미를 쫓다가 어느덧 심각한 철학적 논제를 서술한 듯한 문장들을 접할 때면 가만히 그 문장을 몇 번이나 곱씹어 보게 되는 경험을 하게 만든다. 


이번 작품은 범람체라는 외계의 세계에서 지구로 유입된 세력이 지상의 땅을 점령하게 되고 범람체를 접하고 범람화된 사람들은 광증이라는 증세를 보이며 지하에 고립된 사람들의 세상에서 격리된다. 지상의 땅과 하늘과 물과 바람을 기억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언젠가 범람체를 다 제거하여 다시금 인간이 지상의 주인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서서히 비밀스러운 작전을 수행해 나간다. 소설의 주인공인 정태린과 자매이자 친구로 나오는 선오를 제외하고는 다른 인물들의 이름이 모두 외국인 이름으로 나와 이 소설 속의 배경은 단지 한 국가를 지칭하지 않고 전세계를 총망라하는 전지구적인 인류를 대표하고 있다는 설정으로 다가온다. 주인공인 태린과 그를 오랜시간 지켜오며 태린과의 친밀한 유대감을 형성해 온 이제프 파로딘은 파견자들 중의 뛰어난 교관으로 과거에 태린이 실험체로서 제거될 위기에서 구해낸 사실을 숨긴 채 태린이 파견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로 나온다. 태린은 실험대상으로의 기억을 잃은 채 자신의 몸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쏠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태린은 기억력을 확장시키는 수단으로 장착되는 뉴로브릭의 부작용으로 자신에게 그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소설의 후반부에 드러나는 것처럼 태린의 몸 안에서 함께 공생하는 쏠은 범람체의 한 형태로 이미 범람화가 된 태린은 광증을 보이지 않고 쏠과 함께 공존하는 기이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태린은 자신이 연모하는 이제프처럼 파견자가 되어 이제프와 함께 지상으로 올라가 땅과 하늘을 함께 바라보며 바람을 맞고 싶다는 바람으로 파견자 시험에 응시하지만, 쏠의 도움을 받아 최종 관문까지 무사히 통과하자 마자 쏠에게 자기 몸의 주도권을 빼았겨 광증을 유발하는 물질을 지하도시에 유포하게 된다. 이제프는 범람화된 태린을 제거하려는 다른 이들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새로운 지역 탐사를 위한 파견자로 추천하게 되고 태린은 그곳에서 범람체와 완전히 연결된 늪인들을 만나게 된다. 늪인들에게 붙잡힌 태린과 그의 동료들은 더 이상 인간의 외형을 갖지 않고 있는 늪인들과의 새로운 형식의 대화를 통해 범람체가 무작정 지구를 정복하여 인간을 말살시키려는 의도가 없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범람체의 인간과의 결합은 그동안 인간이 한 개체로서의 자신을 의식할 때만이 인간의 존재 자체를 인정해왔던 모습에서 유기적 연결망으로 인해 한 개체로서의 인식을 뛰어넘는 존재로서의 새로운 형태의 존재를 인정하는 모습으로 변화된 것이었다. 


마치 태린이라는 하나의 몸 안에 원래 인간 존재로 자신의 자아를 인식해온 태린이라는 한 인간 개체와 범람체의 유입으로 쏠이라는 새로운 자아가 함께 살아가는 모습처럼 말이다. 늪인들은 태린의 형태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더 이상 인간의 외형을 유지하지 않게 되고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진동과 냄새와 같은 원초적인 느낌으로 서로의 생각과 의사를 교환할 수 있는 형태로 변이된 것이다. 늪인들은 더 이상 인간의 음식으로 생존하지 않고 이미 황폐화되고 오염된 땅과 물 속에서 생존하며 과거의 인간과는 다른 형태의 음식을 섭취하며 살아갈 수 있게 변화된 것이다. 그럼에도 태린이 늪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소통이 가능한 존재로 인식했기에 늪인들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변이된 지구에서 새로운 행태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형식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의 시작은 우리 몸을 구성하는 아주 미세한 부분에 해당되는 세포와 단백질, 분자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의식을 갖고 있는 존재이고, 내가 나를 의식하는 상태가 무너져 버려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없을 때 흔히 죽음에 이르는 소멸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된 것처럼 의식적인 존재인 인간은 자신의 몸 안에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작은 세포 조직 하나조차도 마음대로 조종 할 수 없다. 마치 나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내 몸 안의 세포들은 내가 먹고 움직이고 쉬는 것에 영향을 받으며 스스로 생과 사를 오가는 개별적인 존재들처럼 영위한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소설 속에서 제기한 의문은 어찌보면 참으로 타당한 과학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너희는 이미 수많은 개체의 총합. 하나의 개체로는 너희를 설명할 수 없어. 네 안에는 다른 생물들이 잔뜩 살고 았어. 그 존재들은 너와 같이 살 뿐만 아니라, 너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어. 의식이야말로 주관적 감각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야. 

혼란스러웠다. 그들의 규정하는 의식과 태린이 규정하는 의식은 너무 달랐다. 태린의 생애에서 ‘자아’란 흔들린 적 없는 굳건한 개념이었다. 미생물이나 기생충 같은 것들이 인간에게 붙어 산다고 해도 그것들이 의식을 갖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것들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 태린에게 붙어 있고, 때로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영혼과는 구분되는 외부의 존재일 뿐이다.(183)” 


“여전히 자신이 변이되었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벽에 머리를 찧고, 모든 음식과 물을 거부하며 죽어갔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발현자들은 받아들였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인정의 문제였다. 변이는 죽음이 아니라는 것, 그들은 망가쳐 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형태의 삶으로 진입했다는 것. 그들은 이전의 것을 차차 내려놓고 낯선 방식을 다시 배워나갔다.(360)”


“그렇다면 이 불균형하고 불완전한 삶의 형태는 어떻게 지속될 수 있을까. 태린은 경계 지역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그 답을 찾아내주기를 바랐지만, 어쩌면 아이들도 명확한 답에는 다다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단지 불균형과 불완전함이 삶의 원리임을 받아들이는 것, 그럼에도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하는 것,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것만이 가능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태린은 그것이 계속해서 다음 세대로 어이질 질문이라고 생각했다.(419)”


#김초엽 #파견자들 #퍼블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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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1-26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책 한 권 읽은 기분입니다.
 
두 번은 경험하고 싶지 않은 나라 - 윤석열 정부 600일, 각자도생 대한민국
신장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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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식 변호사의 [두 번은 경험하고 싶지 않은 나라]를 읽었다. 부제는 “윤석열 정부 600일, 각자도생 대한민국”이다. 정치적 신념이 다를 수 있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정책 방향이 보편 납득할 수 있다면 서로의 다른 생각들은 분명 함께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한 개인의 기득권을 연장하고자 하는 바람에서, 그리고 그 부적절한 기득권에 기생하는 이들의 거짓된 말과 행동이 더해진다면 이것은 더 이상 이상적인 정치적 논쟁이 아니라 더러운 몸싸움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힘없고 약한 이들은 그 더러운 싸움의 마지막 희생양이 되어 버린다. 어려서부터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선거 때마다 정신없이 공약만 남발하는 헛된 선전도 듣기 싫었고, 청문회 때마다 거짓말을 일삼는 후보자들의 철면피와 같은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외면하기만 하면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이 될 줄 알았다. 


비겁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쩌다 작금의 행태를 비판하는 대화가 오고 갈 때면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정치적 신념에 대한 확신이 없이도 분명 오랜시간 분노해왔고 염려해왔다. 일제 강점기를 다룬 드라마를 볼 때마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안타까워했고, 아직도 뻔뻔하게 강제 징용 및 위안부에 대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는 일본의 작태를 보면 미움의 마음이 한 동안 사그러들지 않았다. 원래 이런 마음이 드는게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다.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체 그런 굴욕적인 생각과 판단을 내리면서 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언젠가 후배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이가 들수록 지키기 힘든게 염치라는 생각이 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뻔뻔해진다는 얘기는 속물이 되어간다는 뜻도 담겨 있고 세상의 때가 많이 묻었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한 마디로 어릴 때의 순수, 순진함은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교활하고 얄팍한 눈매에 도통 의중을 알 수 없는 굳은 얼굴만 남아 있다는 부정적인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먹고 살기가 힘들다보니까,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렇게 강인해져야 한다는 의무감을 부과한다. 하지만 그렇게 세상의 때가 많이 묻어 있다 하더라도 염치가 있고 없고는 다른 문제이다. 


염치는 양심의 문제이고 어떤 경우에도 넘치 말아야 할 선을 인식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어쩌다 운이 좋아서, 능력을 인정 받아서 일생에 한 번 올까 말까한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염치없는 선택을 하지 않으면 윗사람에게 밑보여 내일이라도 당장 좌천될 위기에 처할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부와 권력이 가까워질수록 야비한 선택을 종용하며 염치를 내려놓기를 바라는 유혹은 더욱 커지게 된다. 이는 비단 지금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 인간의 역사에서 무한반복되어 온 사실이다. 역사적 진실이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어떤 최후와 결론을 맞게 되는지 잘 알려주고 있지만, 어리석게도 인간은 자기만은 예외일 것이라는 오만에 빠져 똑같은 악행을 일삼게 된다. 


어쩌면 이 책을 접한 어떤 누군가는 편협한 생각에 사로잡힌 이가 허황된 소리를 짓거린다고 욕지거리를 할지도 모른다. 읽는 내내 차라리 이 책에 나온 내용이 다 그냥 아주 오래전에 있었거나, 그냥 지어낸 이야기거나, 상상 속에서만 일어난 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불과 2년도 안 된 사이에 아니 어떻게 이렇게 많은 말도 안되는 일이 지속적으로 발생되고 있는 것인지? 요즘처럼 인터넷과 영상으로 모든 지난 말과 행동을 낱낱이 확인해 볼 수 있는 세상에 공인이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저렇게 뻔뻔하게 다른 말을 할 수 있을까? 기억이 안 난다거나, 모르쇠로 일관하는 이들에게 질문하는 이가 과거의 사건과 대답을 명확히 재생시켜 주어도 마치 자신의 복제 인간이 그런 말과 행동을 한 것처럼 대응하는 법은 누가 가르쳐 주는 것일까?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어이없고 맞장구를 치게 되고 큰일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되는 내용이 거의 대부분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열받게 만드는 내용은 일제 강점기 때에 강제 징용된 분들의 배상 문제에 대한 천인공노할 대응과 걸핏하면 종북 주사파나 빨갱이 프레임을 씌우며 5.18 광주 민주항쟁과 4.3 제주 사건의 공산당 개입을 주장하는 이들의 작태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구한말 일제에 강제합병되는 과정에서 나라를 팔아먹도록 주도한 이들과 기생한 이들과 그들에 대한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미루며 없던 일처럼 방관한 우리 모두의 비겁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직도 나치의 부역자들을 찾아내어 처벌하는 독일처럼 철저한 자기 반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제2, 제3의 MB 시대가 반복되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까지 하다. 언제 어디서든 이렇게 자신의 양심을 속이며 영달과 탐욕에 눈이 먼 이들이 득세한다 하더라도, 부디 여전히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촛불을 들 수 있는 많은 이들이 있기를 바라며 좀 더 면밀히 앞으로 정세에 관심을 갖고자 결심해본다. 


#신장식 #두번은경험하고싶지않은나라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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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치새가 사는 숲 오늘의 젊은 작가 43
장진영 지음 / 민음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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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영 작가의 [치치새가 사는 숲]을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43번째 작품이다. ‘파란 나라를 보았니 꿈과 사랑이 가득한’ 이라고 혜은이 님이 노래하면 이어서 어린이가 ‘난 찌루찌루의 파랑새를 알아요’라고 응답하는 노래가 생각난다. 동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파랑새’에 대한 이야기가 동요와 같은 가요 속 가사에도 등장해 지금은 찾을 수 없지만 반드시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 만 같은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런지 스스로를 치치새가 사는 숲의 줄임말인 치치림으로 명명한 주인공의 지난 날에 대한 회상은 꿈과 사랑이 가득한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처절한 애정에 대한 갈급으로 다가와 읽는 내내 몹시도 가슴이 아려왔다. 인간은 왜 이토록 타인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더럽고 치사하게 나를 왕따시키는 이들에게 번듯하게 복수의 칼날을 갈며 차갑게 쌩까면 좋을텐데, 오늘도 그 더러운 시선에 목을 멘다. 


30대 초반의 성인이 된 주인공은 가장 가고 싶지 않았던 3지망의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벌어진 일들을 회상한다. 평준화라는 미명하에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의 감정까지도 모두 평준화 될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히지 않고서야 이토록 무심했던 교육 제도가 있었을까 싶었던 때가 꽤나 오래 지속되었다. 화자에게는 여상을 졸업하고 경리에 취업하여 깡촌으로 떠난 언니가 있다. 그리고 집이자 동시에 불법 눈썹 문신 업장이 곳에서 엄마는 파란 눈썹을 갖게 된 아줌마들을 상대로 일하고 무능력한 아빠는 엄마의 시다바리이자 자식에게 무심한 사람이다. 중학생이 된 어린 딸에게 용돈을 스스로 벌어서 쓰라는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는 부모의 모습은 문을 닫아 걸고 몰래 소고기를 구워먹었을 것이라 짐작하는 주인공의 회상에서 절정에 달한다. 


만약 깡촌에서 경리로 일하는 언니가 없었다면 그나마 남아있던 애정마저도 완전히 말라버려 더 일찍 스스로를 포기해버리지 않았을지 모를 화자는 그래서 그런지 일진이었던 달미와의 친분을 유지하기 위해 사물함 위에 올라가 양반다리를 하며 살며시 속옷을 보여주는 행동을 일삼는다. 사춘기가 시작되는 나이때의 소녀가 생리대 날개까지 드러내며 관심을 갈구한다는 것은 걸레 같은 년이라는 소문이 돈는 댓가를 치루더라도 먼지와 같은 존재로 전락해버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의 존엄함을 쓰레기통에 내던저 버리면서까지 놓칠 수 없는 것이 타인의 애정이라면 부모의 사랑과 관심이 전무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미지의 어딘가에 파랑새와 같은 희망이 있다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사춘기에 이르러 제2차 성징이 시작된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성과 몸이 위태로운 줄타기에 놓여 있음을 저절로 알게 되는 것 같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흥분을 고조시켜 쌓여온 분노와 좌절감을 한 번에 날려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어서 빨리 그 선을 넘어보라고 손짓한다. 주의깊게 듣지 않아도 그 선을 넘어버리면 왠지 모르게 어른이 될 것만 같고, 제 또래의 아이들이 감히 넘어보지 못한 것을 나만 넘은 것 같아 으쓱한 기분이 들기도 하기에 애정이 소진된 주인공은 누구보다 빨리 그리고 과감하게 그 선을 넘어버리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어한다. 사랑이라는 이름만 붙이면 자신의 모든 행동이 정당화 될 것이고 왕따에 대한 불안감에서 완전히 벗어날 것이며 더 이상 둘이서만 몰래 소고기를 먹은 엄마와 아빠를 원망하지 않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리라. 


소설의 중반부에 이르러 언니가 경리로 일하는 회사에 어느 날 장학사처럼 머물게 된 차장님의 차에 오르게 된 주인공은 변태성욕자의 피해자가 된다. 차장에게 따귀를 맞고 성적 노리개로 전락되는 폭력을 당하고도 주인공은 차장님의 차를 기다리게 된다. 차라리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한 차장님의 집에서 동오와 함께 살기를 바라는 화자의 바람은  무관심과 폭력에 노출된 예민한 나이 때의 소녀가 얼마나 쉽게 부서질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왜냐하면 화자는 달미와 급우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 자폐아의 속옷을 벗기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어린 시절 성폭력을 받는 상황 속에서도 아무도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좌절감은 자신이 타인에게 유사한 폭력을 행사함에도 주저함이 없어지는 이미 위태로운 선 자체가 없어진 혼돈이 지속되어 온 것이다. 


극심한 고통과 외로움에 오랜 시간 노출되어 살다보면 자신의 삶이 그렇게 된 인과 관계의 이유를 찾을 길이 없다보면 어느 순간 거짓된 기쁨과 행복을 만들어 내게 된다. 어차피 세상에는 원인과 결과가 항상 들어맞지 않기에, 차라리 게처럼 뼈가 피부가 되면 지독한 가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을 갖게 만든 이유 조차 명확하지 않을 거라면 러브장에 기입될 이름을 괄호로 만들고 그에 걸맞은 상대를 맹목적으로 만들어내면 되지 않을까. 그 상대가 나를 더 망가뜨리거나 심지어 죽인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파격적이다 못해 충격적인 행동의 결말에 이른 주인공은 다행히 주변 어른들의 세심한 관심의 도움으로 지옥에서 서서히 벗어나게 된다. 때로는 방관자가 구원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조력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 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화자와 같은 시기를 보냈던 이들이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애정에 목말라 숨이 막히더라도 자기 자신을 놓아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주변에 선을 긋고 그 선을 넘지 않기 위해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평범한 사람들이 그어 둔 경험의 한계선에는 언제나 성과 폭력이 걸려 있고, 그것을 대하는 가장 ‘어른스러운’ 모습은 선을 보지 않고도 침범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직 어른이 되지 않는 자들은 종종 그 선을 당겨 보고 밀어 보며 선의 장력을 시험하고, 이미 어른이 된 자들은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그 모습을 지켜본다. - 이소 문학평론가 추천의 글 중에서(176)” 


#장진영 #치치새가사는숲 #오늘의젊은작가43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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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 설자은 시리즈 1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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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작가의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를 읽었다. 설자은 시리즈 1 권이다. 학생 때 배운 아주 기초적인 국사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삼국시대의 막을 내리고 통일신라라는 어찌보면 첫 번째 통일 국가의 기틀을 다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라니, 그것도 설자은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미스테리한 사건들이 해결되는 추리물이라니 충분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지금 중국의 어딘가쯤으로 예상되는 곳에 유학을 가서 공부를 하고 혹은 당나라의 인재로 등용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어디론가 계속 흘러가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전세계 어느 나라든 사투리라 불리는 방언이 없는 지역이 없다. 땅덩리가 꽤나 크다면 아예 쓰는 언어 자체가 다를 확률도 높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작은 면적을 갖고 있기에 방언의 차이가 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지금은 우리나라 어느 지역을 가도 서로가 의사소통을 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지만, 얼마 전 한국 전쟁 당시 흥남부두 철수 작전을 통해 살아남은 이들의 소회를 담은 다큐를 보고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가까스로 탈출한 이들이 며칠에 걸쳐 도착한 거제도에서 머물 곳이 없자 거제도의 주민들에게 며칠 묶을 수 있기를 청하며 말을 걸었는데, 방송에 등장한 분이 말하기를 거제도 주민의 말을 하나도 알아들 수 없었다고 한다. 흥남 지역의 사투리와 거제도의 부근의 사투리가 심하게 다르기는 하겠지만 말을 알아듣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니 제주도의 방언은 아예 외국어처럼 들리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보다 면적이 넓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삼국 시대 이전의 구려 사람들과 남쪽의 신라, 삼한, 탐라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생김새부터 다르게 보이고, 먹는 음식과 생활 풍습에서도 차이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에서 언급된 것처럼 통일신라 이후에 구려 사람과 당나라 사람들도 신라에 와서 머물지만 외모로 그들을 구별할 수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망한 백제 사람들은 신라 사람들과 유사하여 티를 내지 않는다면 그대로 젖어들 수 있었던 시대상이 몹시 궁금하기도 하다. 어찌보면 조선시대만큼 충분한 사료가 없기에 신라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고 왕위 계승 과정에 있어서의 암투와 정치적인 사건들이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에 의해 더욱 생동감있게 그려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설자은은 부모를 여의고 형제들이 병고로 죽게 되자, 셋째였다가 첫째가 된 호은의 명으로 유학을 가려고 준비중이던 자은 오라비를 대신해서 남장을 하고 떠나게 된다. 미은이라는 자신의 삶을 죽게 하고, 자은이 된 주인공은 오랜 시간이 지나 고향인 금성으로 돌아가는 배에서 목인곤이라는 백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인곤은 한 눈에 자은이 여자임을 알아채고 배에서 발생된 의문의 살인 사건을 함께 조사하며 가까워지게 된다. 신라의 역사를 말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골품 제도는 철저한 신분 계급 사회의 밑낯을 보여주고 화랑이라 불렸던 낭도는 당시의 어린 남자들이 추구했던 명예로운 삶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주인공인 설자은은 진골 계급이 아니었으나 육두품의 서열 안에 드는, 그래서 왕의 연회에 참석할 수 있는 지배계급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라비가 연정을 품었던 산아의 남편인 진오룡이 자은을 업신여기며 마지막에 매잡이의 죽음을 해결하지 못한 분노를 자은의 말에 채찍질하여 자은이 말에 밟혀 죽게 만들수도 있다는 것을 미루어보아, 진골과 육두품의 차이는 실로 어마어마했다는 것을 짐작해 볼 뿐이다. 


마치 설록 홈즈가 신라시대에 먼저 등장한 것처럼 설자은은 인곤이라는 짖굿은 듯 하면서도 속내가 깊은 조력자를 옆에 두고 난해한 사건과 문제들을 척척 해결해 나간다. 지금도 그런 일이 있지만, 정당한 재판과 같은 과정이 이루어지기 힘들었더 상황 속에서 때로는 힘을 가진 이들의 막연한 주장으로 인해 엉뚱한 결론이 내려지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지 않았을까 싶다. 과거에도 지금도 권력을 가진 이들의 잘못을 비호하기 위해 비겁한 말과 행동을 서슴치 않고 행하는 이들은 약자들의 정당함을 알면서도 그들의 희생을 시대의 잘못으로 치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시리즈1 이라고 저자의 말에서도 몇 편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설자은의 이어지는 활약이 기대된다. 첫 번째 시리즈에는 4편의 사건이 담겨 있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이야기에 해당되는 ‘월지에 엎드린 죽음’은 귀하디 귀한 흰매를 길들이고 사냥을 담당한 매잡이이의 의문스로운 죽음을 파해치는 내용이다. 표지에 그려진 그림의 정중앙에 흰매의 그림이 놓여 있는 이유를 다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매와 같은 거대한 새를 직접 보기란 쉽지 않다. 더군다나 매가 사냥하는 장면을 연회의 한 코너로 만들어서 청중들에게 선보일 수 있다니,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다 하더라도 과거에 행했던 기이한 능력들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소설에 묘사된 흰매는 20년도 더 살 수 있다고 하지만, 가둬놓고 잘못 길들이려고 하다보면 채 1년도 못 되어서 죽는다고 하니, 매잡이의 특출한 능력이 더욱 돋보일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더군다나 선대왕때부터 이어져온 흰매의 영특한 사냥 장면은 왕권의 영속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역할까지 맡았으니 그야말로 영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특별한 재능을 가진 매잡이가 음식이 탐닉하고 다른 새를 돌보는 이들에게 배분되는 양식까지 탐내어 몰래 빼돌리는 탐욕스러운 인물로 그려져서 그런지 그가 떡을 먹다가 목에 걸려 호흡곤란에 호소하다 도움을 받지 못하고 얕은 월지에 빠져 죽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연회에 참석한 이들의 연민을 자아내지 못하고 만다. 나중에 매잡이가 몹시 미워 목에 뭔가 걸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외면한 이가 매를 다시 불러들이는 장면을 그려보니, 실제로 매 사냥을 목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신비로울까 싶다. 


#정세랑 #설자은금성으로돌아오다 #설자은시리즈1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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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2명이 퇴근하지 못했다 - 일터의 죽음을 사회적 기억으로 만드는 법
신다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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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다은 기자의 [오늘도 2명이 퇴근하지 못했다]를 읽었다. 부제는 “일터의 죽음을 사회적 기억으로 만드는 법”이다. 책을 장바구니에 넣어 놓고 한동안 망설였다. 다른 책을 주문할 때도 마치 매직아이처럼 눈에 띄게 다가와도 일단 유보하려고 했다. 미루고 미루다 마치 더 이상 미루는 것은 직무유기를 하는 것처럼 여겨져 책을 주문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책머리의 내용을 눈대중으로 살펴보지 않아도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나도 의미심장했기에 차라리 그냥 몰랐으면 어땠을까라는 마음까지 들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아주 미약한 것은 책을 읽고 고요히 분노하고 슬퍼하며 연대의 마음을 가지는 것 뿐이었기에 용기를 내어 마주하기로 결심했다. 


역시나 산재 사고의 첫 장면을 그리는 내용은 페이지를 넘기기가 힘들었다. 이건 그냥 재난 영화나 소설을 위해서 작가가 상상으로 그려낸 얘기에 불과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이미 뉴스를 통해서 들어봤던 재해자 분의 이름이지만, 책을 읽어나갈수록 처음의 강렬하고 충격적이었던 사고에 등장하는 이름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내가 주의깊게 읽지 않아서 그런것인가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 무렵 이유를 알게 되었다. 책에 등장하는 재해자 분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아니 불과 몇년 사이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산재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고, 뉴스보도를 통해서 짧은 단신으로 보도되었던 내용들을 무심코 지나쳤던 날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 세상은 몸을 움직이지 않고서는 돌아가지 않는다. 내가 오늘 하루를 보내는 가운데 편안한 서비스를 누렸다면 그건 나의 몸을 대신해 누군가가 열심히 땀을 흘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를 대신하는 수많은 노동 덕분에 삶의 윤택함을 체험하게 된다. 책에도 언급된 사건인 제빵 관련 내용물을 섞는 과정에서 노동자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적이 있었다. 그때 뉴스 보도를 보고 주위 사람들과 아니 빵을 만들다가 사람이 죽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라는 대화를 나눈 기억이 난다. 우리가 너무나도 손쉽게 프랜차이즈 빵집에 들러 별 생각없이 간식거리로 산 빵에 넣을 부속물을 새벽부터 만들다가 사람이 죽다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책에 나온 산재 사건들을 발생된 과정을 살펴보니 빵을 만드는 과정도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아니 노동자들이 하는 모든 작업에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건설노동자에 대한 책을 읽었을 때에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불법 하도급이 만연된 하청 구조였다. 역시나 이번 책에 언급된 내용에서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원청의 하청을 받은 회사에 소속된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따라 이윤 추구를 최대 목표로 삼는 대부분의 회사들은 안전관리에 들어가는 비용을 최소화하려고 하고 하청을 받은 작은 기업들은 행여나 밑보여 일감을 뺏기게 될까 두려워 위험요소가 발견되어도 원청에 개선을 요구하기 힘들다고 한다. 엄청난 무게를 가진 물건들과 날카로운 속성을 지닌 도구들을 빈번하게 사용되는 노동 현장에서 최소한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채 상처받기 쉬운 몸을 그대로 노출한 채 일할 수 밖에 없는 열악한 상황을 견딘 이들 덕분에 나는 오늘도 편안한 저녁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산재가 발생되고 나면 책임 회피를 위한 갖가지 비겁한 행동을 일삼는 사측의 방어를 보면 대체 이 나라의 정의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생계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사건의 진상 규명과 희생된 분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 분투하는 동료 노동자들의 용기와 희생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해자 분들의 가족들이 재판장에서 마지막으로 읍소한 내용을 읽으며 산재 사고가 발생된다는 것은 어느 노동자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많은 이들의 삶이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결국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로 병들어 있는지 드러내는 표징임을 알게 되었다. 


책의 표지를 덮으며 가만히 눈을 감고 재해자 분들을 떠올려 보았다. 가족들에게 전해진 비보의 전화 한통이 가진 무게가 얼마나 클지 나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리고 하루를 어떻게 숨쉬고 살아가야 하는지의 방법을 모두 잃어버린 것처럼 상심의 늪에 빠진 분들의 비통에 찬 삶을 기억하며 기도드리게 된다. 부디 하루 하루가 지날수록 아픔의 상처가 1센티씩 만큼이라도 치유되기를, 어디선가 이렇게 기억하고 연대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이들이 분명히 있음을 겸손되어 청해본다. 


“다만 그 시도가 지나쳐 특정인의 ‘잘못’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면 앞서 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이 했던 실수를 언론도 똑같이 되풀이하게 된다. 즉 ‘사고가 어떻게 났느냐’보다 ‘누가,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느냐’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다. 재해를 이해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첫걸음은 어떤 위험이 왜 사고로 이어졌는가를 자세히 분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안전관리자나 사업주 등의 특정인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데만 치중하면 더 중요한 과제가 뒤로 밀리게 된다.(221)”


#신다은 #오늘도2명이퇴근하지못했다 #일터의죽음을사회적기억으로만드는법 #한겨례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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