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치새가 사는 숲 오늘의 젊은 작가 43
장진영 지음 / 민음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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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영 작가의 [치치새가 사는 숲]을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43번째 작품이다. ‘파란 나라를 보았니 꿈과 사랑이 가득한’ 이라고 혜은이 님이 노래하면 이어서 어린이가 ‘난 찌루찌루의 파랑새를 알아요’라고 응답하는 노래가 생각난다. 동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파랑새’에 대한 이야기가 동요와 같은 가요 속 가사에도 등장해 지금은 찾을 수 없지만 반드시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 만 같은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런지 스스로를 치치새가 사는 숲의 줄임말인 치치림으로 명명한 주인공의 지난 날에 대한 회상은 꿈과 사랑이 가득한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처절한 애정에 대한 갈급으로 다가와 읽는 내내 몹시도 가슴이 아려왔다. 인간은 왜 이토록 타인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더럽고 치사하게 나를 왕따시키는 이들에게 번듯하게 복수의 칼날을 갈며 차갑게 쌩까면 좋을텐데, 오늘도 그 더러운 시선에 목을 멘다. 


30대 초반의 성인이 된 주인공은 가장 가고 싶지 않았던 3지망의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벌어진 일들을 회상한다. 평준화라는 미명하에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의 감정까지도 모두 평준화 될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히지 않고서야 이토록 무심했던 교육 제도가 있었을까 싶었던 때가 꽤나 오래 지속되었다. 화자에게는 여상을 졸업하고 경리에 취업하여 깡촌으로 떠난 언니가 있다. 그리고 집이자 동시에 불법 눈썹 문신 업장이 곳에서 엄마는 파란 눈썹을 갖게 된 아줌마들을 상대로 일하고 무능력한 아빠는 엄마의 시다바리이자 자식에게 무심한 사람이다. 중학생이 된 어린 딸에게 용돈을 스스로 벌어서 쓰라는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는 부모의 모습은 문을 닫아 걸고 몰래 소고기를 구워먹었을 것이라 짐작하는 주인공의 회상에서 절정에 달한다. 


만약 깡촌에서 경리로 일하는 언니가 없었다면 그나마 남아있던 애정마저도 완전히 말라버려 더 일찍 스스로를 포기해버리지 않았을지 모를 화자는 그래서 그런지 일진이었던 달미와의 친분을 유지하기 위해 사물함 위에 올라가 양반다리를 하며 살며시 속옷을 보여주는 행동을 일삼는다. 사춘기가 시작되는 나이때의 소녀가 생리대 날개까지 드러내며 관심을 갈구한다는 것은 걸레 같은 년이라는 소문이 돈는 댓가를 치루더라도 먼지와 같은 존재로 전락해버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의 존엄함을 쓰레기통에 내던저 버리면서까지 놓칠 수 없는 것이 타인의 애정이라면 부모의 사랑과 관심이 전무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미지의 어딘가에 파랑새와 같은 희망이 있다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사춘기에 이르러 제2차 성징이 시작된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성과 몸이 위태로운 줄타기에 놓여 있음을 저절로 알게 되는 것 같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흥분을 고조시켜 쌓여온 분노와 좌절감을 한 번에 날려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어서 빨리 그 선을 넘어보라고 손짓한다. 주의깊게 듣지 않아도 그 선을 넘어버리면 왠지 모르게 어른이 될 것만 같고, 제 또래의 아이들이 감히 넘어보지 못한 것을 나만 넘은 것 같아 으쓱한 기분이 들기도 하기에 애정이 소진된 주인공은 누구보다 빨리 그리고 과감하게 그 선을 넘어버리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어한다. 사랑이라는 이름만 붙이면 자신의 모든 행동이 정당화 될 것이고 왕따에 대한 불안감에서 완전히 벗어날 것이며 더 이상 둘이서만 몰래 소고기를 먹은 엄마와 아빠를 원망하지 않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리라. 


소설의 중반부에 이르러 언니가 경리로 일하는 회사에 어느 날 장학사처럼 머물게 된 차장님의 차에 오르게 된 주인공은 변태성욕자의 피해자가 된다. 차장에게 따귀를 맞고 성적 노리개로 전락되는 폭력을 당하고도 주인공은 차장님의 차를 기다리게 된다. 차라리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한 차장님의 집에서 동오와 함께 살기를 바라는 화자의 바람은  무관심과 폭력에 노출된 예민한 나이 때의 소녀가 얼마나 쉽게 부서질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왜냐하면 화자는 달미와 급우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 자폐아의 속옷을 벗기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어린 시절 성폭력을 받는 상황 속에서도 아무도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좌절감은 자신이 타인에게 유사한 폭력을 행사함에도 주저함이 없어지는 이미 위태로운 선 자체가 없어진 혼돈이 지속되어 온 것이다. 


극심한 고통과 외로움에 오랜 시간 노출되어 살다보면 자신의 삶이 그렇게 된 인과 관계의 이유를 찾을 길이 없다보면 어느 순간 거짓된 기쁨과 행복을 만들어 내게 된다. 어차피 세상에는 원인과 결과가 항상 들어맞지 않기에, 차라리 게처럼 뼈가 피부가 되면 지독한 가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을 갖게 만든 이유 조차 명확하지 않을 거라면 러브장에 기입될 이름을 괄호로 만들고 그에 걸맞은 상대를 맹목적으로 만들어내면 되지 않을까. 그 상대가 나를 더 망가뜨리거나 심지어 죽인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파격적이다 못해 충격적인 행동의 결말에 이른 주인공은 다행히 주변 어른들의 세심한 관심의 도움으로 지옥에서 서서히 벗어나게 된다. 때로는 방관자가 구원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조력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 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화자와 같은 시기를 보냈던 이들이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애정에 목말라 숨이 막히더라도 자기 자신을 놓아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주변에 선을 긋고 그 선을 넘지 않기 위해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평범한 사람들이 그어 둔 경험의 한계선에는 언제나 성과 폭력이 걸려 있고, 그것을 대하는 가장 ‘어른스러운’ 모습은 선을 보지 않고도 침범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직 어른이 되지 않는 자들은 종종 그 선을 당겨 보고 밀어 보며 선의 장력을 시험하고, 이미 어른이 된 자들은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그 모습을 지켜본다. - 이소 문학평론가 추천의 글 중에서(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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