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천천히, 북유럽 - 손으로 그린 하얀 밤의 도시들
리모 김현길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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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 김현길 작가의 [혼자, 천천히, 북유럽]을 읽었다. 북유럽 여행기는 처음 보게 되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4개국을 익히 들어왔음에도 소개되는 명소와 자연 경관은 너무나도 생소하게 다가왔다. 더군다나 그동안 보았던 사진이 첨부된 여행기가 아니라, 저자가 직접 그린 드로잉화로 묘사된 모습들은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했다. 사진이 가진 현실성과 직관성은 평면적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는 자연과 건축물과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더욱 입체감 있게 다가왔다. 부제가 ‘손으로 그린 하얀 밤의 도시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흔히 북유럽을 백야의 도시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몇 번이 반복해서 북유럽의 살인적인 물가라고 표현을 하는데, 어찌보면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4개국은 유럽 여행의 끝판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서유럽과 동유럽을 다녀온 사람들은 많아도 북유럽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 많이 듣지 못한 것 같다. 유럽 여행에서 북유럽 4개국과 스위스, 영국은 바게뜨빵으로 연명할 것인지, 아니면 주머니를 두둑하게 하고 갈 것인지 선택해야 한 번 가볼 용기가 나지 않을까 싶다. 
예정대로 스페인 살라망카의 어느 기숙사에서 이 책을 봤더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티켓팅을 하고 서둘러 숙소를 알아보지 않았을까? 라는 씁쓸한 상상을 해 본다. 랜선 여행 대신 드로잉 수채화로 그려진 그림 여행을 대리 만족하며 아쉬움과 미련을 떨구어내어 본다. 여행기를 볼 때마다 여기는 꼭 가보고 싶다, 이건 꼭 먹어 보고 싶은데, 우아 그 미술관에 가서 저 그림은 꼭 봐야지 라는 결심을 하지만, 사실 그곳에 가지 않아도, 그 음식을 먹어보지 않아도, 아무리 유명한 명화를 보지 않아도 이곳에서 살아가는데 아무 변화가 없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무리를 해서라도 여행을 꿈꾸는 이유는 막연한 상상과 표면적으로만 보고 들어온 것들을 직접 경험하게 될 때의 추억의 간직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진 추억들은 내 삶이 먼지가 풀풀 날리듯 각박해져 갈 때, 긁혀진 마음이 쉽사리 아물지 않을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때 그 장면의 환영을 만들어 서서히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다. 

“여행을 하면 하루의 목표는 단순해진다. 현지인에게 말 한마디를 거는 사소한 일에도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되고, 끼니를 때우기 위한 식사가 아닌 이곳의 낯선 음식을 먹는 것 그 자체가 하루의 목적이 되기도 한다. 숨 가쁘게 다가오는 순간들에 집중하다 보면, 보이지 않는 먼 미래에 대한 염려는 잠시 설득력을 잃는다. 지금의 여정이 모두 끝나기 전까지는 너무 멀리 있는 시간에 대해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실체가 없는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 여행은 어쩌면 현재에 집중하는 법을 다시 배우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닐까.(85)”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은 학구열이 높기로도 유명했다. 그녀는 당시 저명한 철학자인 데카르트에 심취해 있어 여러 차례에 걸쳐 그를 초청하기도 했다. 데카르트는 여왕의 끈질긴 권유 끝에 마침내 스톡홀름으로 이동해 여왕의 철학 교사가 되었는데, 그의 선택은 불행의 단초가 되었다. 여왕은 매일 새벽 5시에 강의를 듣고 싶어 했다. 몸이 약했던 데카르트는 스톡홀름의 혹독한 추위에 시달리며 강의를 준비해야 했고, 반복되는 고된 일정을 소화하지 못해 결국 폐렴에 걸렸다. 끝내 병세가 호전되지 못해 그는 결국 다음 해인 1650년에 이곳 스톨홀름에서 생을 마치고 말았다. 근대 철학의 창시자 데카르트가 세상과 서둘러 이별한 데에는 이렇듯 여왕의 뜨거운 학구열이 한몫했다.(146)”
“피오르는 ‘내륙 깊이 들어온 만’이란 뜻을 지닌 노르웨이어로 빙하가 침식시킨 ‘U’자형의 깊은 골짜기에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바닷물이 유입되어 만들어진 좁고 기다란 만을 뜻한다.(208)”
“한자리에 멈춰 있는 듯 보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빙하는 끝없이 움직이고 있다. 다만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알아볼 수 없는 것이다. 빙하는 억겁의 시간 동안 서서히 미끄러지며 커다란 바위를 부수고 깊은 골짜기를 만들었다. 바닷물이 들어와 골짜기를 채우면 그것이 피오르가 된다.(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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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땅
김숨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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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작가의 [떠도는 땅]을 읽었다. 1937년 연해주 일대에 살던 조선인들 17만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동시켰던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요즘 가장 가까운 유럽 여행이라며 블라디보스토크로 짧은 휴가를 다녀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곤 했었는데, 그곳 일대에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1900년대 초 기근과 수탈로 굶주림에 허덕이던 사람들은 연해주에 주인 없는 땅이 많아 러시아에서 조선인들에게 거저 땅을 준다는 소문을 듣고 몇 달에 걸쳐 그곳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금도 삶의 터전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하물며 교통 수단도 변변치 않았던 그 당시에 소작농의 삶을 살던 이들이 세간을 짊어지고 먼 길을 떠난다는 것은 결국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한다는 것을 짐작했을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어려운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을 만큼 일제치하에 들어간 조선 땅은 절박한 상황이었다. 척박한 동토의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어느 정도 삶의 터전을 마련한 이들에게 스탈린은 다시 강제 이주 명령을 내린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회주의 사상을 넘어 레닌과 스탈린에 이르러 공산주의 국가체제로 변모한 소비에트연방은 몹시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17만명의 강제 이주는 그들이 죽던지 말던지 신경쓰지 않겠다는 잔인함을 보여준다. 지금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탄 등의 지역으로 강제 이송된 후대에 고려인(카레이스키)으로 불리게 된 이들의 이야기를 김숨 작가의 언어로 다시금 살아숨쉬며 우리에게 그들의 역사를 잊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것 같다. 
작품은 페르바야-레치카 역에 화물열차에 강제로 태워진 몇몇 가족들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여러 등장 인물 중에 주인공에 해당되는 금실은 배가 부른 임산부로 시어머니와 함께 열차에 올랐다. 남편은 떠돌아 장사꾼으로 국경을 넘나들며 간도 땅에 물건을 팔러 다녀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 없게 되었다. 금실 외에도 여러 등장 인물들이 나온다. 이들 중 상당수가 조선에서 태어나지 않고 러시아에서 태어나 러시아말을 조선말보다 더 잘하고 편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미 고향이 조선이 아닌 러시아였지만 얼굴은 조선인이기에 그들은 상황에 따라 배척받을 수 밖에 없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카자흐스탄까지 화물열차에 실린 채 사방이 가려진 채 낮인지 밤인지도 모른 상태에서 한 달 가까이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짐승 취급을 받으며 이동한 터라 열차 안에서 상당 수의 사람들이 병에 걸려 죽게 되었고, 그렇게 죽은 이들을 달리는 열차에서 밖으로 버릴 수 밖에 없는 처절한 상황이 그려진다. 
특히나 금실의 시어머니 소덕은 며느리에게 혹시 자신이 죽거든 시체는 아무데나 버리더라도 자신이 입었던 저고리와 치마는 반드시 챙기라고 당부한다. 저고리와 치마에 주머니를 잔뜩 만들어 곡식과 채소의 씨앗을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씨앗만 있다면 어느 곳에서든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그들의 간곡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소덕은 열차가 잠시 멈추었을 때 소변을 보러 간 사이 다시 열차에 오르지 못하게 된다. 한달이 지나 새로운 땅에 도착한 이들은 트럭에 실려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17만명이나 되는 이들을 이동시키려 했으니 아마도 상당히 넓은 지역으로 이송시켰을 것이다. 작품의 말미에 굴을 파고 집을 마련한 금실은 아이를 낳고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젖을 물린 채 열차 안에 함께 있던 이들을 떠올린다.
“지난겨울 그녀는 구덩이를 파고, 갈대로 엮은 멍석으로 그 위를 덮어 땅굴집을 지었다. 집이 완성되었을 때 그녀의 손톱 여섯 개가 빠져 있었다.(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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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스윙 - 울고 싶은 마음이 들면 스윙을 떠올린다 아무튼 시리즈 31
김선영 지음 / 위고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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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 님의 [아무튼, 스윙]을 읽었다. 아무튼 시리즈 31번째 책이다. 춤에 대해 문외한인 관계로 스윙이라니, 정말 아무튼 시리즈에 걸맞는 소재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현재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대학교 입학 후 우연한 계기로 스윙을 배우게 되었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 다시 스윙에 빠져들게 된 경위를 맛깔나게 전해준다. 그녀가 10년간 스윙을 놓을 수 밖에 없었던 그 보편적이면서도 너무나도 개별적으로는 특별한 상황들은 스윙이라는 춤이 결코 특별한 사람들만 좋아할 수 있는 부류의 취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스윙을 즐기는 저자의 삶 뿐만 아니라, 런던과 미국에서까지 스윙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부러울 뿐이다. 

뭔가를 새롭게 배우는 것이 쉽지 않고, 아니 낯선 사람들과 함께 배운다는 것 자체를 그리 즐기지 않다보니 새로운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 지난한 과정들이 상상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되는 반복된 패턴으로 인해 삶의 반경이 너무나도 좁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춤이라면 그저 학창시절 캠프파이어를 하다가 포크 댄스 스텝을 밟아본 정도, 또는 한 잔 걸치고 노래방에서 정신줄을 살짝 놓았던 몇 번의 기억들을 제외하고는 섣불리 넘 볼 영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작년 가을에 나답지 않게 청년 축제에 직장인 밴드로 찬조 출연하자는 후배의 달콤한 속삭임에 덥썩 넘어갔다. 처음 그 제안을 받았을 때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막상 밴드 연습을 하면서부터 엄청난 심리적 부담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처음 밴드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러보니 이게 노래방에서 부르는 거랑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점점 주눅이 들어 때려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왔다. 오랜만에 잡은 악기 연습에 매진하는 후배들을 보니 내가 그들의 노력을 망칠까 하는 두려움도 점점 커져갔다. 드디어 디데이 우리 밴드의 차례가 되었고,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마음을 부여잡고 그래도 열심히 연습한 덕분인지 큰 삑사리 없이 공연을 마무리했다. 생각보다 호응이 좋아서 ‘아 이맛에 가수들이 공연을 하는구나’라는 희열을 느끼기도 했지만, 나중에 공연영상을 들어보니 손발이 오그라들고 모니터 스피커의 소리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는지 음정이 몹시 불안한게 느껴졌다. 뭐 아무튼 그때 첫 번째 곡은 조용한 노래로, 두 번째 곡은 조금 신나는 ‘딜레마’라는 생활성가를 불렀는데 역시나 청년들이 다 아는 노래인지라 후렴구에서는 멋진 떼창을 해주었다. 공연을 마치고 축제를 주관했던 후배가 내게 와서 이런 말을 전했다. 청년들이 하는 말이 이렇게 신나는 노래를 한 치의 미동도 없이 끝까지 부르는 사람은 처음봤다고 말이다. 그게 나의 컨셉이었다고 둘러댔지만 귓등으로 듣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도 나름 발박자는 맞췄는데... 쩝~~

“그때까지 내가 무언가를 그렇게 은밀하고 대범하게 결정한 적이 없었다. 공간 시간에 노래방에 갈지 빵집에 갈지, 학교 모임이 끝나고 밥을 먹을지 술을 먹을지, 친구를 만나 홍대에 갈지 압구정에 갈지를 정할 때 한 번도 단호하지 못했다. 나는 엠티에 가고 싶은데 나 말고 또 누가 갈까, 난 여길 가고 싶은데 친구는 다른 델 가고 싶으면 어쩌지, 내가 먼저 내 의견을 말해도 될까 주저하느라 별것도 아닌 일들이 늘 조심스러웠다.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면서 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 태도가 배려나 양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줄만 알았지 그게 미덕이 되지는 않는다는 걸 그때는 몰랐기에 내가 원하지 않는 것들을 억지로 하면서 살았(고, 아직도 조금은 그렇)다.(24-25)”
“사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감정과 마음들이 활자의 힘을 빌려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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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조지아에 뭐가 있는데요?
권호영 지음 / 푸른향기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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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영 님의 [Georgia 대체 조지아에 뭐가 있는데요?]를 읽었다. 우리에겐 ‘그루지아’로 더 잘 알려진 나라로, 예전 소비에트연방 곧 소련해체 이후 독립한 나라 중의 하나이다. 지도를 찾아보니 정말 유럽도 아닌, 아시아도 아닌 경계상에 위치한 나라였다. 여행기를 읽으며 아마 교통이나 여러 숙박시설 등이 더욱 발전한다면 엄청난 여행객이 몰릴 수도 있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친절히 소개한 비용은 유럽 어느나라보다 훨씬 저렴하여 효율적인 여행을 할 수 있겠구나란 예상과 더불어 생각보다 여러가지 면에서 불편한 점들은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기는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서부터 시작하여 카즈베기, 시그나기, 메스티아를 소개한다. 사실 다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고 전혀 접해보지 못한 낯선 느낌이 많이 들었지만, 프롤로그에서 “스위스 사람들이 산을 감상하러 오고, 프랑스 사람들이 와인 마시러 오는 곳, 이탈리아 사람들이 음식을 맛보러 오고, 스페인 사람들이 춤을 보러 온다는 곳(5)”으로 소개될 만큼 충분히 매력적이 곳으로 그려진다. 

특히나 ‘시그나기’에 대한 내용에서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노래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옛날 옛적 그림 그리는 일을 업으로 삼은 프랑스인이 조지아의 작은 마을 시그나기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조지아에 놀러온 이웃 나라 러시아 여인에게 한눈에 반하고 만다. 그녀의 마음을 얻고 싶었던 프랑스 화가는 자신의 재산을 탈탈 털어 그녀에게 바칠 장미꽃 백만 송이를 준비했는데... 과연 그녀는 그의 사랑을 받아 주었을까? 이루지 못한 그의 사랑을 담아낸 도시, 시그나기.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래를 만든 러시아, 그리고 우리나라 역시 그 노래를 리메이크했으니... 이야기를 들려준 조지아 친구 바초와 러시아 친구 사샤와 다냐, 그리고 한국인인 나와 제이는 ‘우리들이 이렇게 만난 건 운명인 거야.’를 외쳤다.(137)”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곳에서 만들어진 전설이 노래가 되고 그 멜로디는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추억이 되어버리는 인연의 고리를 앞으로도 모른척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조지아는 남한보다 작은 나라임에도 기차를 타면 상당히 긴 시간을 탈 각오를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주그디디 열차는 주간이든 야간이든 6시간에서 9시간은 타고 이동해야 하는 말로만 들어도 피로가 엄습해오는 조금은 열악한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저자는 이렇게 묘사한다. “‘기차’라는 탈것이 주는 희미한 낭만에 대하여 -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는설렘,. 내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몇 걸음. 다른 여행자들의 어깨와 배낭에 닿은 시선. 창밖의 풍경을 담겠다는 의지. 사소한 시간의 흐름이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기차여행을 떠난다.(155)”

책을 덮으며 당장이라도 캐리어를 열고 짐을 꾸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현실은 항공사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예약해 놓은 비행을 취소하며 쓴 입맛을 다실 수 밖에 없는. 누구에게 하소연 할 수도 없는 그냥 그렇게 벌어진 일에 대하여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게 때로 삶이라는 걸 느끼게 되는 요즘이다. 그리고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도 말도 안되는 일을 겪으면서도 묵묵히 견뎌온 수많은 이들의 일상을 안다고만 말했을 뿐 진짜로는 모른척 하고 싶었던 날들이 왠지 모르게 조지아의 풍광을 사진으로나마 감상하며 떠올랐다. 어쩌면 그게 여행의 힘이고 직접 가보지 않아도 알아야만 하는 진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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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공장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79
이진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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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작가의 [카페, 공장]을 읽었다. 표지 그림이 아기자기한 4명의 소녀들이 시골 마을에서 우연한 계기로 방치된 공장터에서 카페를 만들어가는 이야기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카페공화국이다. 지도앱을 켜고 주변 음식점을 찾아보려고 검색을 하면 음식점 만큼이나 카페가 뜬다. 이제는 식후 커피 한잔이 공식이 되어버린지 오래이고, 심지어 밥값보다 더 비싼 커피값을 지불하면서도 분위기와 맛이 좋은 곳에서 서슴없이 지갑을 열게 된다. 특히나 스타벅스의 인기는 엄청나서 요즘 서머 프리퀀시 적립을 하면 받을 수 있는 레디백을 얻기 위해 아침부터 개장하는 스타벅스를 순례한다는 얘기를 들을때에는 나도 이제라도 스티커를 모아볼까라는 호기심을 발동시킨다. 2007년까지만 해도 인천에는 스타벅스가 부평역 앞에 하나 밖에 없었다. 어느 주일날 저녁미사를 마치고 후배와 함께 차 한 잔 하며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그 스벅 2층에서 만났다. 그때에도 빈자리가 별로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는데, 그 당시는 공부하거나 책을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수다를 떨거나 데이트를 하는 장소였다. 당시 즐겨 마시던 차이 티 라테를 마시며 주위를 둘러보니 남자 둘이 있는 자리는 우리 밖에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무슨 남자 둘이 커피를 마시러 왔지 라는 시선처럼 여겨져 후딱 마시고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때는 커피 맛이 뭔지도 몰라서 매번 다른 걸 마시곤 했는데, 이듬해 커피의 본고장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조금씩 커피에 길들여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에스프레소’라고 주문을 해야 하는 커피는 이탈리아에서는 그냥 ‘카페’라고 주문한다. 그 카페를 처음 마시면 더럽게 쓴 맛에 인상이 구겨지고 심지어 심장이 벌렁거리기까지 한다. 아니 대체 이런걸 왜 매일 그것도 하루에 몇 번씩이나 마시는건가 의아해하던 나는 얼마 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카푸치노와 카페를 즐기기 시작했다. 배가 고파서 꼬르네또(크로와상) 빵과 아침을 먹기 위해,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수없이 Bar(이탈리아에서는 카페를 보통 바라고 부른다)를 들락날락 거렸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신기하게도 다시 커피를 마시지 않게 되었다. 그냥 간혹 카페를 가게 되면 이런 저런 처음 보는 음료들을 테스트하거나 추억의 차이 티 라떼를 마시곤 했다. 그리고 본당이 아닌 사무실 근무를 시작하면서 드립 커피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사무실 직원들과 티타임을 하며 회의를 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그리고 당시 허영만 작가의 [커피 한 잔 할까요?] 만화책에 심취하면서 각종 드립 커피를 위해 기구들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더운물을 뜸뿍 머금은 커피 가루가 막 구워진 머핀처럼 둥그스름하게 부풀어 올랐다. 이른바 ‘커피빵’이었다. 커피빵은 물의 온도와 물 붓는 방식, 원두의 숙성도와 분쇄 입자 크기 등이 잘 맞아 떨어질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 커피빵이 생겨나면 제일 맛있는 커피가 내려진다는 속설이 마니아들 사이에서 상식으로 통했다. 커피빵과 커피의 맛은 별 상관이 없다는 과학적 반론도 있었지만 정이는 그저 원두가 동그랗게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흡족했다.(88)”
나도 아침마다 직원들을 위한 커피를 내리면서 원두를 전동 그라인더로 갈고 천천히 물을 내려 커피빵이 잘 만들어지는 날이면 뭔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보온병에 커피를 담아 사무실로 가서 함께 데워진 찻잔에 커피를 나누고 마시며 안부인사를 건네는 아침은 무엇인가 서로에게 활력을 주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정이, 영진, 민서, 나혜 이렇게 4명의 시골소녀가 도시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서 시작된 카페, 공장은 어이없이 문을 닫게 되지만, 그로 인해 그들은 소중한 꿈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카페에 쓰는 돈이 아깝다 여겨질 때도 있지만, 그곳에서 누군가를 만나게 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이야기를 전하며 나누었던 무엇인가가 있기에, 그리고 그 카페에 머물며 정성스레 준비된 음료를 마시는 순간만큼은 ‘내가 이렇게 대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이구나’라는 사실 하나로 충분한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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