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 이야기
김솔 지음 / 민음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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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솔 작가의 [부다페스트 이야기]를 읽었다.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 가면 도나우강을 사이에 두고 국회의사당과 어부의 요새가 관광명소로 유명하다. 특히나 해가 지고 난 다음의 야경은 어쩌면 유럽 최고라고 할만큼 사진을 찍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이 소설은 어부의 요새 부근에 위치한 세인트버나드 국제 학교에서 매년 9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 인터내셔널 데이 행사가 열리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목이 부다페스트 이야기이긴 하지만 다른 도시의 이름을 붙여도 무방할 다양한 직업군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치부를 어떻게 과장하는지, 과연 인간은 각자가 선택한 직업을 통해서 무엇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인지 물음을 던진다. 인터내셔널 데이 행사는 다양한 직업군의 일일 교사를 선정하여 자신들의 직업 체험을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일일 교사로 선정된 이들은 행사 이후에 많은 면에서 큰 이득을 얻을 수 있기에 너도 나도 일일 교사가 되고자 시도를 했다. 

일일 교사로 선정된 이들의 직업은 군인, 요리사, 의사, 엔지니어, 여행가, 패션 디자이너, 공무원, 건축가, 영화배우, 첼리스트, 종군기자, 축구 감독, 보험 판매원, 변호사, 부자 등이다. 이들은 일일 교사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그리고 선정되는 과정 속에서 학교의 교장과 교사들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에 대한 정황이 묘사되고 이어서 일일 교사들의 강의가 펼쳐진다. 이야기의 구성은 원래 학교에서 그럴듯한 내용만 편집된 일일 교사들의 체험담 책이 출판되는데, 이 책의 화자는 편집된 체험담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의 이야기와 숨겨진 내용들도 낱낱이 밝히는 르포와 같이 익명의 이름으로 출판된다. 일일 교사로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경험한 놀랍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들을 학생들에게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전한다. 하지만 익명의 저자가 전하는 이야기는 그들이 어떤 추악한 과거를 숨기고 있는지,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 밝혀내기에 일일 교사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단지 지루하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예상하게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일일 교사들의 이야기 말미에 로마니와 관련된 사실들을 적시한다. 로마니는 부다페스트 외곽에서 거주하던 집시들을 말한다. 유럽 어느 나라에 가던지 집시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집시들은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며 직업을 구하지 않고 구걸로 삶을 연명해간다. 집시들의 역사적 배경은 따로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근래에 표면상으로 드러난 집시들은 그저 관광객들의 푼돈을 구걸하거나 지갑을 노리는 도둑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소설에서는 평소에는 신경도 안 쓰던 로마니들을 부다페스트 외곽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다른 곳으로 추방하게 되는 사건을 등장시킨다. 매 챕터마다 등장하는 로마니와 일일 교사들의 관계는 결국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진 이들이 소외된 이들을 어떻게 상대해 왔는지 비유적으로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단지 부다페스트라는 한정된 도시의 이야기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탈을 쓴 전세계의 수많은 도시들의 이기성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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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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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고양이를 버리다: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를 읽었다. 아주 짧은 에세이에 가오 옌의 삽화가 더해진 책이다. 글세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짧은 이야기가 단행본으로 출판되기도 쉽지 않았겠거니와 더군다나 우리말로 번역되기까지 했으니 그의 명성과 기대는 아직도 지속되는 것 같다. 짧지만 솔직하고 명료하게 하루키의 생각과 의중을 담백하게 담아낸 글로 느껴진다. 특히나 아무리 작가라해도 고백하기 쉽지 않았을 아버지와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심오한 성찰로 마무리하니 하루키도 어느덧 노년의 나이가 되어 그만한 용기와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이야기는 아버지와 함께 고양이를 바닷가로 버리러 간 것으로 시작된다. 최근에 이런 짓을 저질렀다고 말하면 사회적 지탄을 받겠지만 1950년대는 사람도 먹고 살기 힘든 때였으니 하물며 지금 강조되는 동물권과 같은 개념은 생각조차 못했던 때일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고양이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니 2킬로나 되는 거리를 고양이가 먼저 달려온 것인지 집에서 아버지와 하루키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신묘한 이야기이다. 하루키의 소설과 에세이를 읽다보면 그에게는 참 신기한 일이 많이 생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양이로 시작된 이야기는 어느덧 아버지의 군 징병에 대한 내용으로이어진다. 하루키의 아버지는 일본제국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지속된 전투를 치르던 때였다. 당연히 우리나라의 치욕적인 역사와도 긴밀한 연관이 되어 있다. 당시 일본 병사들이 적국에서 전투를 치르며 자행했던 만행들과 끔찍한 일들을 하루키는 그의 소설 속에서 자주 등장 시켰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혹시나 아버지가 난징 전투와 관련된 부대에 징병된 것은 아닐까 우려했던 대목이 나온다. 전쟁의 실상, 그리고 그 전쟁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을 너무나도 잘 알던 하루키는 혹시나 아버지가 그러한 일을 저지른 사람 중의 한 명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던 듯 하다. 하지만 다행히 하루키가 걱정하던 바와는 다르게 아버지는 다른 곳에 징병되었던 것으로 나온다. 이후 징집해제 되었다가 다시 징병되기를 반복하며 하루키의 아버지는 버마와 필리핀의 바탄과 레이테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수 도 있었지만, 놀랍게도 당시 장교가 하루키의 아버지는 대학으로 돌아가 국익을 도모하기 위한 더 큰 일을 하라며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하루키는 아버지의 이런 놀라운 일을 접하며 만일 아버지가 그곳의 전쟁에 투입되었다면 거의 전사했을 것이며 자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하루키의 어머니 또한 아버지를 만나기 전의 약혼자가 전쟁에서 죽지 않았다면 자신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을 반복한다. 이렇게 하루키는 자신의 존재가 그저 우연적인 일의 반복으로 생겨난 하나의 빗방울 같은 존재임을 말한다. 그런데 그렇게 우연적인 만남을 필두로 생겨난 존재임에도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사실적 존재로 받아들이게 되고, 나라는 존재가 남긴 역사적 사실이 반드시 누군가에게 이어질 것임을 믿고 있다. 아버지와 고양이의 에피소드로 시작된 하루키의 고백은 결국 ‘나는 누군이며, 어디로 가는 것인지’에 대한 존재론적인 철학적 성찰로서 마무리 된다. 끝머리에 소나무 위로 올라가 내려오지 못한 새끼 고양이에 대한 궁금증과 그리움은 우리가 살아가는 최종 목적이 결국은 내려오는 법을 배우기 위함이 아닐까라는 깊은 여운을 남겨준다. 

“나는 그런 체험이 없다. 나는 아주 평범한 가정의 외동아들로 비교적 애지중지 자랐다. 그래서 부모에게 ‘버려진다’는 일시적인 체험이 아이에게 어던 마음의 상처를 주는지, 구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머리로 ‘이런 것일 테지’ 하고 상상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유의 기억은 반드시 눈에 보이지 않는 상흔으로 남아, 그 깊이와 형상이 달라지는 일은 있어도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지 않을까?(34)”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 가령 그 한 방울이 어딘가에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가, 개체로서의 윤곽을 잃고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 사라져간다 해도. 아니,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가기 때문에 더욱이.(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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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부르는 이름
임경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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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선 작가의 [가만히 부르는 이름]을 읽었다. 이 가을에 어울리는 가슴저미는 영화 한 편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진, 혁범, 한솔이 보여준 사랑의 모습은 우리가 가만히 부르는 이름에 얼마나 온 마음과 힘을 다해야 하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특히나 건축사와 식물재배와 관리를 하는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는 색다른 배경을 자아내며 서로가 던지는 말과 행동들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듯 느껴졌다. 사람이 사는 공간과 더불어 결국은 우리가 돌아간 자연의 일부인 식물을 돌보는 일은 전혀 다른 듯 하면서도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30대 후반의 주인공 수진은 건축사무소의 일을 시작하면서 만난 직장 선배 혁범을 사랑하게 된다. 언제부터 어떻게 사랑이 시작된 것인지 설명하지 않지만 이미 이혼남이 되어버린 혁범과의 비밀스런 연애를 지속하고 있다는 정황부터 그들의 만남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이미 이혼을 했음에도 그리고 수진과의 만남을 지속하면서도 미래를 계획하지 않던 혁범의 모습에 아마도 수진은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한 가운데 수진에게 한솔이라은 8살 연하의 남자가 등장한다. 수진과 혁범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 로비에 식재 작업을 하러 온 한솔과 우연히 마주친 수진은 한솔의 적극적인 구애와 사랑을 고백하는 메일을 받게 된다. 한솔의 마음을 받을 생각이 없던 수진은 대사관저 리모델링을 마치고 초대받은 곳에서 혁범과 그의 전처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홧김에 한솔에게 연락을 하고 몸을 섞게 된다. 이는 한솔의 경우가 처음이 아니라 혁범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용기를 내지 못하고 주저하는 자신에게 내리는 형벌과 같았다. 그렇게 어른들의 행위는 하루밤의 기억으로 끝나고 수진의 의도를 아는 이전 남자들은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솔은 달랐다. 한솔의 사랑은 더욱 커져만 갔고 수진은 혁범을 떠날 수 없었다. 

런던에서 정원 관련 일을 하기 위해 머물던 한솔은 갑작스런 수진의 연락을 받고 다시금 그녀를 향한 사랑의 열정을 불태운다. 이미 수진에게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한솔은 멈출 수 없었다. 런던에서의 우연한 만남 이후 수진과 한솔은 가까워진 듯 했으나, 중국의 오피스 사무실 작업의 어려움을 겪던 혁범이 오랜만에 수진의 집에서 식사를 하며 깨진 컵에 손을 베는 모습을 지켜보던 수진은 마지막을 고하던 마음에서 완전히 무너져 버린 혁범을 다시 받아들이게 된다. 한솔에게 이별을 고하고 몹시도 힘겨워하던 한솔은 런던으로 떠나 정원 관련 공부를 할 것이라 연락하며 수진의 행복을 빌어준다. 혁범은 수진과 결혼을 하고 수진에게 아이를 갖자고 용기내어 말한다. 상투적인 러브스토리인 것 같으면서도 서로를 향한 세밀하고 조심스러운 배려의 말과 행동들에 대한 묘사는 점점 서로를 사용하려는 작금의 사랑에 대한 투쟁처럼 느껴졌다. 작가의 말에서처럼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서 소중한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중요한 때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도 한때는 이별이 구원할 길 없는 결말이라고만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내가 알게 된 많은 것들은 항상 ‘이별’이 알려주었다고 생각해. 자신의 의지로 버릴 때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버리고 가야 할 때도 있고 버릴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잃어버린 것들도 있지. 어쨌든 이제 그것들이 내 곁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그 무게나 선명함, 그리고 소중함을 보다 강렬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어. 살다 보면 알게 돼.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바로 그 잃어버린 것들 덕분에 얻은 것이란 걸.(136)”

“‘나보’보다 ‘너’를 연민하는 마음. ‘나’보다 ‘너’가 마음이 아프거나 상처 입을 것을 먼저 걱정하는 마음. ‘너’가 ‘나’의 마음에 보답해주지 못한다 해도 기꺼이 먼저 ‘나’를 내어주는 마음. ‘나’의 가혹함을 덜어내고 ‘너’의 취약함과 불완전함을 끌어안는 마음. 아마도 이러한 마음들이 다름 아닌 사랑의 감정일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부분을 이끌어내준다. 참 고맙고 다행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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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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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쿠다 마쓰요의 [종이달]을 읽었다. 읽는 내내 제목인 ‘종이달’이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소설 속에 두 번 초승달에 대한 배경 묘사가 나올 때마다 주인공 우메자와 리카의 불안한 심리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종이달은 말 그대로 종이로 만든 달이기에 진짜가 아닌 가짜를 말한다. 권남희 번역가는 옮긴이의 말에서 이렇게 부연 설명한다. 

“사진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 사진관에서는 초승달 모양의 가짜 달을 만들어서 그곳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가짜 달을 보며 찍었는지, 달 모양 위에서 찍었는지 모르겠지만, 한껏 포즈를 잡으며 행복한 얼굴로 가족 혹은 연인과의 추억을 사진으로 남긴 것이다. 물론 그것은 종이가 아니라 나무로 만든 달이었던 것 같지만, 거기에서 비롯되어 ‘종이달’이라고 하면, 연인이나 가족과 함께 보낸 가장 행복한 한때를 의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보니 ‘종이달’은 너무나도 이 소설과 잘 어울리는 제목이란 생각이 들었다. ‘종이달’이 ‘가짜’와 ‘가장 행복했던 한때’를 중의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라면.(353)”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이 소설은 우메자와 리카라는 평범한 가정주부가 한 은행의 시간제 업무를 담당하며 시작된다. 리카는 냉소적인 남편과의 관계에 환멸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남편과의 거리감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아이를 갖고자 하는 열망을 잠시 접어둔 채 은행에서 취직하며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한다. 어느덧 시간제 업무에서 좀 더 확대된 업무 배당을 받게 되고 우연히 고객의 집에서 고타를 만나게 된다. 고타와의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리카는 점점 나락으로 빠져들게 된다. 외근 후 복귀 길에 지나치던 백화점에서 충동적으로 사게 된 5만엔의 화장품을 계기로 리카는 고객의 돈을 횡령하며 고타와 외도를 하게 된다. 리카의 이야기가 중심적으로 펼쳐지지만 중간에 리카의 고등학교 동창인 오카자키 유코, 리카의 전남친 야마다 가즈키, 그리고 리카가 전업주부일때 다녔던 요리학원 친구인 주조 아키의 이야기가 조금씩 전개된다. 리카의 부정과 불륜이 주된 이야기의 흐름이지만, 리카의 주변 인물들 또한 돈에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리카의 어리석게만 보이는 연하남 고타를 향한 무조건적인 조공은 답답하고 위태롭게 보이면서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게 만드는 행복한 순간에 대한 의식의 흐름으로 횡령을 반복하는 리카는 물신숭배의 사회가 만들어낸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과연 무엇을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인지? 돈을 많이 소유해서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 것이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인지? 리카의 철부지 애인 고타와의 위험천만한 줄타기 연애를 보면서 가짜임을 알면서도 진짜인 것처럼 손에 쥔 행복의 시간을 카운트 하고 있는 애처로움이 느껴졌다. 

태국의 방콕으로, 치앙마이로 도망친 리카가 다시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망연자실함 속에서도 실낱같은 희망을 엿보며 되뇌이는 후회의 말이 가슴깊이 와닿는다. 나도 가끔 리카와 같은 과거를 거슬러 가는 가정을 하며 후회를 하지만 결국 같은 자리의 나를 만나지 않을까 싶다. 

“만약 고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까, 하고 리카는 강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니, 이렇게 된 것은 고타를 만나서라고 생각할 수 없다. 만약 편집 회사에 근무했더라면, 만약 아이가 생겼더라면, 만약 마사후미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 중고교가 같이 있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더라면, 추천으로 그 전문대학을 선택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 전문대학을 나오지 않았더라면 카드 회사에 근무하는 일도 없고, 은행에서 일할 거란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가정은 과거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무수히 흩어졌갔지만, 하지만 어떤 가정을 해도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있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34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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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 : 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 띵 시리즈 5
김민철 지음 / 세미콜론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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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철 작가의 [치즈: 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를 읽었다. 세미콜론 띵 시리즈 5번째 책이다. 좋아하는게 뭐냐고 물으면 바로 답할 수 있는 명징한 기호가 있다면 그것 또한 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치즈에 대한사랑은 우리나라 5대 음식에 넣어야 마땅하지 않느냐고 주장할 만큼 강력하고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맨 마지막 장에서 예로 든 16가지의 치즈를 한 번 맛보고 싶다는 충동이 생길 정도로 치즈에 대한 열렬한 애정을 가독성 넘치게 표현했다. 술술 넘어가는 책장은 허기를 몰고 오고 어딘가 고즈넉한 곳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와인잔을 기울이며 예쁘게 플레이팅 된 치즈를 맛보고 싶은 생각도 들게 만든다. 

저자가 어찌하다보니 치즈에 대한 이야기보다 여행기가 되어버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말하며 치즈에 대한 얘기를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유럽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는 말에 적극 공감이 된다. 어느덧 라떼는 말이야의 세대가 되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치즈에 대한 첫 기억은 그저 그냥 느끼한 외국 발효 음식이라는 생각만 있었다. 그래도 간혹 햄버거에 들어간 치즈를 먹을 때는 그다지 거부감 없이 먹곤 했는데, 막상 이탈리아에 머물려 먹게 되는 치즈는 생각보다 강력해서 처음에는 거부감부터 들곤 했다. 한동안 쳐다보지도 않고 코를 들어막던 치즈가 어느 순간 고소히 느껴질 때가 있었다. 외국 사람이 김치를 좋아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거나 아예 맛을 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외국 음식을 즐긴다는 사람들도 막상 열흘 이상 해외 여행을 하면 치즈가 들어간 음식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게 된다. 식습관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이다. 

몇 년 전에 업무와 더불어 다시 방문하게 된 이탈리아에서 당일치기 와이너리 투어를 다녀오게 되었다. 저자의 책에도 나오는 토스카나 지역의 피엔차라는 곳이었는데, 그곳은 와이너리 뿐만 아니라 pecorino 치즈가 꽤나 유명하다고 했다. 페코리노는 염소를 말한다. 염소젓으로 만든 치즈라니 더군다니 그 지역에서는 tartufo(트러플, 송로버섯)가 많이 발견되는 곳이라 트러플이 들어간 페코리노 치즈를 맛볼 수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이 끝나고 자유시간이 주어져 치즈를 사러 어느 가게에 들어갔다. 할머니 한 분이 친절히 맞이해주셨는데, 내가 이탈리아어로 페코리노 치즈를 달라고 주문하자 무척 놀라며 잠깐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랄게 어디서 왔느냐, 요즘 여기 날씨가 어떻다, 이 치즈가 맛이 있다 등등 간단한 대화였는데, 할머니는 내게 이탈리아어를 아주 잘한다고 칭찬까지 덤으로 해 주셨다. 치즈를 사고 나오며 이런 칭찬을 공부를 할때 들었더라면 그렇게 기죽지 않고 지낼 수 있었을텐데 라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아무튼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고이고이 포장해 온 치즈를 가까운 이들과 함께 와인을 마실 때 꺼내 장황하게 설명을 했지만 그들의 무덤덤한 반응이라니, 쩝! 그래도 지금은 그때가 몹시도 그립다. 편하게 지인들을 만나던 때가...

“외국을 여행할 땐 마음 놓고 피신할 음식이 필요하다. 여행은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고, 그 현실은 때론 냉정하고, 대체로 말이 안 통하며, 게다가 한국에선 평생 벗 삼았던 입맛까지 종종 떠나니 말이다. 그런 상황을 대비해 사람들은 여행 가방 속에 햇반과 라면, 깻잎 장아찌와 고추장, 김치와 미역국 등을 챙긴다. 여차하면 바로 거기로 피신하겠다는 심산인 것이다. 여행도 몸도 마음도 도무지 내 편이 아닌 것 같은 저녁, 숙소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익숙한 맛으로 피신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위로를 받곤 하니까. 때론 우리가 그 정도에 괜찮아지는 단순한 존재라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까지 드니까.(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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