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서는 베르사체를 입고 도시에서는 아르마니를 입는다 - 패션 컨설턴트가 30년 동안 들여다본 이탈리아의 속살
장명숙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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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숙 님의 [바다에서는 베르사체를 입고 도시에서는 아르마니를 입는다]를 읽었다. 얼마전 ‘유 퀴즈 온 더 블럭’이라는 TV프로그램에서 ‘밀라논나’라는 유튜버로 나온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가 10여년 전에 나온 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이 처음 출판된 당시 나 또한 이탈리아에서 지내고 있었기에, 그 때 읽었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더불어 잊고 있었던 그 당시의 정황들이 떠올라 지금도 어디선가 나와 동시대의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며 삶의 족적을 차근차근 남기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30년 동안, 이제는 어느덧 40년이 되었겠지만 저자가 이탈리아를 오가며 유명 백화점의 바이어이자 무대 의상 디자이너로서의 커리어를 쌓기까지의 과정을 뽐내기 보다는 친근한 이모가 이탈리아 친구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듯이 정감있게 과거 유럽 사회를 제패했던 이탈리아 사람들의 역시와 문화를 들려준다. 저자의 글을 읽으며 새삼스럽게 우리나라가 정말로 급발진하듯이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저자가 유학을 떠났던 1970년대만 하더라도 유학을 가기 위해서는 시험을 보고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니, 그것도 반공교육까지 정말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간난 아기를 떼어 놓고 원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먼 나라 생소한 곳으로 떠나야 했을 신혼 부부의 모습이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저자가 책에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유학 초창기에 느꼈을 설움과 그리움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책 전체의 분위기가 마치 이탈리아 어느 도시의 축제 현장을 옮겨놓은 것처럼 생동감이 넘치고 당장이라도 밀라노의 어느 바에서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저자가 소개하는 이름만 대면 옷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유명 상표들 또한 대부분 디자이너의 이름을 따서 생겨났고 그 디자이너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간간히 전해주는 것 또한 이탈리아의 새로운 매력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이탈리아에서 남자가 스키니진을 입어도 아무렇지도 않고 슈트 마저 몸에 딱 붙게 입어 맵시를 드러내고자 했다면, 영국을 여행할 때 현지 유학생에게 들은 얘기로는 영국에서는 남자들이 옷에 신경을 별로 쓰지 않는데 가장 큰 이유가 이탈리아에서처럼 몸에 붙는 옷을 입게 되면 대부분 동성애자로 보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쩐지 이제는 그런 말도 다 옛말이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행의 흐름은 점점 빨라지고 다양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의 글을 읽으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화적 차이가 심할지라도 세상 어디든지 다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하다는 것이다. 먹는 음식이 다르고 표현하는 방법이 다를 뿐 사람들은 모두 정에 굶주려 하고 친구를 만들기를 원하며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단지 내가 마음을 열기만 한다면 말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서양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패션 하우스의 제품에 ‘명품’이라는 단어를 붙여 부르고 있다. 자기 이름이 있는 제품은 다 명품이련만, 이젠 그 말에 특별한 뜻이 뒤따른다. 우선 비싼 제품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사회적인 위치와 안목을 드러내는 고급품이라는 것. 이것이 명품에 대한 공감대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정의를 내리자면, 이러한 인식 외에 사회적으로도 공헌한, 나아가 의생활 역사의 변천에 기여한 제품이라야 진정한 의미의 명품이 아닐까 한다.(38)”

“돈이 있으나 없으나 똑같다는 말은, 아무리 좋은 옷이나 보석으로 치장을 해도 젊음이 사라졌으니 빛 또한 사라졌다는 얘기 아닐까? 하지만 사람에게서 빛을 발하는 건 좋은 옷이나 보석이 아니다.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즉 삶의 자세에서 빛이 우러난다. 자식의 양육과 출가 등 인생의 과제를 마친 후, 다른 이들을 위해 돈과 시간을 쓰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분들. 그분들을 보며 멋있게 늙어가는 법을 배운다.(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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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축제자랑 - 이상한데 진심인 K-축제 탐험기
김혼비.박태하 지음 / 민음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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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혼비, 박태하 작가의 [전국축제자랑]을 읽었다. 부제는 ‘이상한데 진심인 K-축제 탐험기’이다. 전국노래자랑을 연상시키는 제목을 보고 우리나라에 이렇게 축제가 많다고? 라는 호기심이 생겼다. 열두 곳의 축제를 소개하고 있는데, ‘충남 예산 의좋은형제축제’, ‘전남 영암 영암왕인문화축제’, ‘전남 나주 영산포홍어축제’, ‘경남 의령 의병제전’, ‘경남 밀양 밀양아리랑대축제’, ‘충북 음성 음성품바축제’, ‘강원 강릉 강릉단오제’, ‘충북 청주 젓가락페스티벌’, ‘전북 완주 완주와일드푸드축제’, ‘강원 양양 양양연어축제’, ‘전남 보성 벌교꼬막축제’, ‘경남 산청 지리산산청곶감축제’ 등이다. 이렇게 제목만으로도 스펙타클한 축제들이 전국에서 펄쳐졌는데 난 한 군데도 가본 적이 없다니, 대체 뭘 하고 살아온 것인지란 급 자아반성의 시간이 밀려온다. 

여러가지 그럴듯하기도 너무나도 생소하기도 하고 아니 이런 축제는 대체 왜 라는 의문이 저절로 생기는 다양한 축제들을 생동감있게 전해주기 위해서인지 김혼비, 박태하 부부 작가는 감칠맛 넘치는 글재주를 넘치도록 보여주며 혼자서 킥킥거리며 책장을 넘기게 해 주었다. 지역적 특색을 살리는 축제도, 역사적 연관성을 영혼까지 끌어모아 얼토당토 되지도 않는 인연을 만들어낸듯한 축제의 면모도, 쇠퇴되어가는 지방 소도시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지역 관, 구 관련 축제 진행자들의 애틋하 모습도 대도시의 각박한 삶에 익숙해진 시간들을 돌아보게 만들어준다. 이 모든 전국의 축제들이 각각의 목적 달성을 위해 또는 단 며칠간의 축제로나마 지역민들의 단합과 유희를 위한 시간일지라도, 저자가 말했듯이 사람들이 전혀 신경쓰지 않을 것 같고 전혀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도 묵묵히 지역만의 색깔이 담긴 이야기들을 나누는 시간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김하나 작가의 추천사처럼 난생처음 단오를 쇠고 곶감을 주문해서 먹고 싶게 만든다. 경험해보지 못한 축제임에도 왠지 모르게 묘하고도 아주 오래전에 나의 DNA에 새겨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을씨연스러운 축제 천막 부스에서 사람들을 기다리는 어르신들의 묵묵한 기다림도, 축제의 장에서는 모두가 일가친척이라도 된 것처럼 이것저것 맛보라고 초대하는 이들의 모습도 막연히 그려진다. 그럼에도 연어축제에서 신랄하게 비판했던 모습에 이어지는 산천어축제에 대한 지적은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순간적인 유희를 위해서 살아있는 것들을 하찮게 대해왔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그러니까 개막식이라는 이름하에 국민의례를 하고, 시장이나 군수, 도지사, 국회의원을 비롯한 조직위원장청년회장조합장각종유관기관장 이런 장 저런 장 각종 장장장장 등의 소개와 인사말을 긴 시간에 걸쳐 듣고, 우리 축제는 이래서 짱 저래서 짱 각종 짱짱짱짱 등의 자화자찬을 들은 다음, 트로트나 전통 공연 같은 짱자라짜라장짱 축하 무대를 감상하는 일련의 과정이 아예 없다는 말이다.(141)”

“우리가 아는 세계, 아니 상상할 수 있는 세계의 바깥에서 생각보다 수많은 취향과 노력이 질서를 이루어 이 세계를 떠받치고 있다. 우리 또한 누군가들이 아는 세계의 바깥이겠지.(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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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엔딩 (양장)
김려령 외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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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엔딩]을 읽었다. 김려령 “언니의 무게”, 배미주 “초보 조사관 분투기”, 이현 “보통의 꿈”, 김중미 “나는 농부 김광수다”, 손원평 “상상 속의 남자”, 구병모 “초원조의 아이에게”, 이희영 “모니터”, 백온유 “서브” 이렇게 8명의 기성 작가들의 후속편 혹은 프리퀼에 해당되는 이야기 모음이다. 작가들의 전작을 읽었다면 더욱 이해가 잘 되고 이야기의 흐름을 금방 따라잡을 수 있다. 마치 전작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실제로 지금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것처럼 어디선가 작가들이 그들의 삶을 엿보고 있다가 독자들에게 그들의 새로운 삶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만 같다. 어차피 ‘두 번째 엔딩’이라는 제목으로 모아진 새로운 이야기의 주인공들도 전작의 소설들과 연관성이 있다하더라도 다 창조된 인물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드라마와 영화를 보고 있다보면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짧은 시간 안에 이야기를 전개해야 하기에 중요한 사건들만 나열되고 극적 긴장감을 야기시키는 대사들이 주를 이루지만 주인공들이 갈등을 사건을 겪는 시간 이외에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다. 아마도 어떤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일상적인 면을 영화와 드라마에 내보낸다면 무척이나 지루하고 도대체 이런 걸 왜 편집하지 않았느냐고 시청자의 입장에서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소설 또한 마찬가지여서 주인공들의 내면 묘사와 정황들이 드라마와 소설보다 더욱 세밀하고 농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모든 일상들을 구구절절이 늘어놓지는 않는다. 그랬다가는 아마 벽돌책 정도가 아니라 수백, 수천권의 전질로도 부족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지난 장편 소설을 읽고 남겨진 여운을 채워주기라도 하듯이 짧은 단편 소설들은 소설 속 주인공들의 숨겨진 일상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작가들이 창조해 낸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곳 어딘가에서 나처럼 묵묵히 일상을 살아내고 있지는 않을까란 막연한 상상을 해본다. 


“- 아니, 그런 답 말고... 형, 나 그동안 형한테 한 번도 물은 적 없어. 그럴 용기가 없었거든. 근데 알아야겠어. 알고 싶어. 만약... 만약 그날로 다시 돌아가면 어떻게 할 거야? 

이미 눈물이 차오르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고집부리듯이 물었다. 오늘만큼은 끝까지 답을 듣고 싶었다. 그 아이에게 내주지 못한 답을 나도 알아내고 싶었다. 형은 쓰게 웃었다. 

-있잖아, 이미 일어나 버린 일에 만약이란 건 없어. 그건 책임지지 못할 꿈을 꾸는 거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지. 어떻게 하든 누군가는 아프게 된다고. 

형이 나를 바라봤다. 

-반대로 말하면 누군가는 기쁘게 되는 거야. (184-185)”


우리 삶에 벌어질 수 밖에 없는 불행한 일들이 있다면, 그 불행의 결과로 떠맡아야할 엄청난 삶의 부채를 타인을 대신하여 짊어지고 갈 자신이 있는지? 그러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나의 불행으로 타인이 기뻐할 수 만 있다면 나는 과연 심장이 바라는 용기 있는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손원평 작가는 침대 위에 누워 몇 마디 말도 하기 힘든 삶을 선택한 형의 모습을 통해 증오와 분노에 가득찬 동생이 결국은 형의 선택으로 살아난 소녀가 누구가의 생명을 살리는 모습을 바라보게 만든다. 우리 삶은 이렇게 돌고 돌아 나와 너에게 연결될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닌지..


“그의 마음속에는 이시아가, 시와의 마음속에는 벽안인이, 흉터처럼 남아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가끔씩 오래된 흉터가 비바람에 쑤시거나 꿈틀거릴 때 그것을 어루만지는 공조자의 삶을 선택했다는 것을.(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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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 위스키의 향기를 찾아 떠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성지여행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윤정 옮김, 무라카미 요오코 사진 / 문학사상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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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을 읽었다. 벌써 출판된지 20년이 되었지만 오히려 하루키의 젊고 왕성한 필력을 느낄 수 있어서 최근 출판된 소설과는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하루키의 팬이라면 당연히 알 수 있는 그의 음악과 여행과 술에 대한 사랑은 그의 작품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그가 그렇게 전세계를 여행하는 방랑가의 삶을 살면서도 규칙적인 습관을 가졌다는 것은 분명 인간을 더욱 잘 이해하려는 그만의 노력이 담겨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여행이 불가능한 시기를 보내고 있어서 그런지 위스키 탐방이라고 할 수 있는 이번 작품을 읽으며 수년 전 방문했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가 눈앞에 선연히 펼쳐지는 듯 하다. 에딘버러의 어느 펍에서 먹었던 너무나 신선했던 피쉬앤칩스와 호가든 생맥주가, 코크의 어느 음식점에서 먹었던 램쉥크가, 더블린의 기네스 팩토리를 견학하고 마셨던 기네스가 오래전 기억임에도 마치 그날을 떠올리기 위해 하루키가 전해준 마법의 주문처럼 느껴진다. 하루키처럼 술을 즐기지 못하지만 그가 전해준 아일레이의 싱글 몰트의 알싸함과 감칠맛이 느껴지는 고유한 향을 언젠가 나도 한 번 느껴보고 싶은 충동이 밀려온다. 


하루키가 책의 제목을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이라고 정한 이유는, 우리가 언어라는 매체를 사용하여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어떤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언어는 우리 삶을 매도하고 곤두박칠 치도록 내버려두어 혹독한 배신감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하루키가 아일랜드의 어느 펍에서 만난 노신사처럼 낡고 오래된 양복을 차려입고 마치 출근하듯이 펍에 들러 바텐더에게 아무 말 없이 동전을 건네며 받은 위스키 한 잔의 여유를 누리는 것처럼, 그저 위스키 한 잔을 건네고 말 없이 그것을 받아 마시며 위스키에 담긴 진심을 몸으로 체득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거짓과 위선이 자리할 공간은 전혀 없을테니 말이다. 


“레시피란 요컨대 삶의 방식이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에 대한 가치 기준과도 같은 것이다. 무언가를 버리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44)” 


“모두들 아일레이 위스키의 특별한 맛에 관해 이런저런 자잘한 분석을 하지. 보리의 품질이 어떻다느니, 물맛이 어떻다느니, 이탄의 냄새가 어떻다느니 하고 분명 이 섬에서는 질 좋은 보리가 나지. 물맛도 훌륭해. 이탄도 풍부하고 향이 좋아.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일레이 위스키의 맛을 설명할 수 없어. 그 매력을 해명할 수가 없는 거지.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지, 무라카미 씨, 가장 나중에 오는 건 사람이야. 여기 살고 있는 우리가 바로 아일레이 위스키의 맛을 만드는 거야. 섬사람들의 퍼스낼리티와 생활양식이 이 맛을 만들어내는 거지. 그게 가장 중요해.(72)”


“아일랜드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내미는 것은 감동이나 경탄보다는 오히려 위안과 진정에 가까운 것이다. 세상에는 입을 열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말문이 트이면 온화한 어조로 몹시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있는데(그리 많지는 않지만), 아일랜드는 그런 느낌이 드는 나라다.(78)”


“그럴 때면, 여행이란 건 참 멋진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레 든다. 사람의 마음속에만 남는 것, 그렇기에 더욱 귀중한 것을 여행은 우리에게 안겨 준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느끼지 못해도, 한참이 지나 깨닫게 되는 것을. 만약 그렇지 않다면, 누가 애써 여행 같은 걸 한단 말인가?(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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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 드라이브 오늘의 젊은 작가 31
조예은 지음 / 민음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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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은 작가의 [스노볼 드라이브]를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31번째 작품이다. 마지막 장면은 10대 청소년 버전 ‘델마와 루이스’를 연상케 한다. 이미 회복 불가능한 상태의 세상을 저주하고 분노하면서도 어딘가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이모라는 이름의 ‘희망’을 찾아 모루와 이월은 녹지 않는 눈이 쌓인 길을 질주한다. 


“다 망했으면 좋겠다. 진짜 다 망했으면.”(15)


장래희망이 뭐냐고 묻는 담임에게 가짜 꿈인 공무원이라는 모범 답안을 내놓고 모루는 진짜 세상이 망하길 바라는 사춘기를 지나는 청소년이다. 어차피 나한테는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올 때 차라리 세상이 다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망상을 펼치게 된다. 내일 펼쳐질 일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차라리 아침에 눈이 떠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정도로 일상이 고통스러울 때, 차라리 종말을 기원하게 된다. 그런데 막상 녹지 않는 실리카겔 성분의 눈이 내리자 세상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마치 환경오염과 지구온난화로 언젠가 일어날지도 모를 끔찍한 일이 여름에도 내리는 가짜 눈의 모습으로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는다. 하지만 가짜 눈은 진짜 눈처럼 사람의 온기에 스르륵 녹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발진과 염증을 일으키며 살아 있는 생물체의 수분을 빨아들여 세상을 황폐하게 만든다. 마치 방부제 역할을 하는 실리카겔이 눈이 모습으로 세상에 뿌려져 우리의 영혼을 바싹 마르게 만들어버리는 듯 하다. 


이렇듯 가짜 눈이 내려 온전한 일상이 위협받게 되면 제도 안에 숨겨져 있는 타락한 본성이 눈을 뜨고 생존을 위해서 타인을 위협하고 약탈한다. 판데믹 초기에 생수와 휴지를 구하기 위해 마트에서 육탄전을 벌이던 모습만 보더라도 우리의 나약한 본성은 어디가 밑바닥인지 자기 자신조차 알지 못한다. 녹지 않는 가짜 눈을 태우고 묻기 위해 지정된 백영시는 고립되고 폐허로 변하가고 남겨진 사람들은 녹지 않는 눈을 처리하기 위해 폐기물 소각장에서 일하게 된다. 모루의 엄마는 그곳에서 일하다 급성폐렴으로 숨지게 되고, 이모 유진마저 어느날 사라지게 된다. 모루는 이모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 믿으며 엄마가 죽게된 눈을 소각하는 센터에서 일하게 된다. 가짜 눈이 처음 내리던 날 공황상태에 빠진 사람들에 의해 넘어져 죽을 고비에 처한 모루를 살려준 이이월은 중학교를 졸업하며 백영시를 떠나게 된다. 이월은 어쩌면 그 가짜 눈의 원인일지도 모르는 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쫓아갔다가 알아서는 안될 폐기물을 처리하는 곳을 보게 되고 아끼던 강아지 하루를 놓쳐 버려 인부들에 의해 죽게 되는 것을 본다. 충격에 빠진 이월은 하루를 잃은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더 큰 상처를 받게 되고 이후 하루의 환상을 보게 된다. 이월의 새엄마는 백영중 이사장이었지만 건물이 압류되어 매각되는 과정 속에 교통사고까지 당하게 되고 그로 인해 왼쪽 다리를 잃게 된다. 그 이후 집에만 머물며 스노볼을 수집하는 편집증 증세를 보이다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이월에게 눈 속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엄마를 눈 속에 묻어 주기 위해 모루의 이모 유진을 다시 만나게 되고, 강도를 만난 유진은 이월을 살리기 위해 강도를 유인하며 사라진다. 이월은 모루를 만나기 위해 센터로 가게 되고 이모를 기다리는 모루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알려줘야 할지 고민한다. 작품의 주인공 모루와 이월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판데믹 상황보다 더 심각한 재난의 한가운데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서로 다른 모습으로 한 접점을 이루고 있다. 예전과 같은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하더라도 완전히 뒤바뀐 세상 속에서도 인간은 새로운 삶의 법칙을 만들어가고 그곳에서 무언가를 찾기 위한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센터에서는 늘 거대한 기계의 부품이 되어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내가 아닌 상태로 존재할 수 있었다. 스스로 고민하지 않아도 일거리가 주어졌고, 정해진 일정을 끝내고 나면 진이 빠져 잡생각을 할 힘이 나지 않았다. 눈을 퍼내면 내 머릿속도 비워지는 것 같았다.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건 내 선택으로 후회할 일도 없다는 뜻이었다. 지루한 수업을 듣는 것처럼 무료하면서 또 안락했다. 구매 식당의 흠집 난 식판이나 주말이면 사람이 바글바글한 매점 같은 걸 볼 때면 내가 제대로 누리지 못한 시간들을 다시 사는 기분도 들었다.(198)”


눈 속에 덮힌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그래서 후회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는 기꺼이 가짜 눈으로 인해 진물이 나고 화끈거리는 아픔이 느껴지더라고 기꺼이 맨손으로 가짜 눈을 헤집어 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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