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볼 드라이브 오늘의 젊은 작가 31
조예은 지음 / 민음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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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은 작가의 [스노볼 드라이브]를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31번째 작품이다. 마지막 장면은 10대 청소년 버전 ‘델마와 루이스’를 연상케 한다. 이미 회복 불가능한 상태의 세상을 저주하고 분노하면서도 어딘가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이모라는 이름의 ‘희망’을 찾아 모루와 이월은 녹지 않는 눈이 쌓인 길을 질주한다. 


“다 망했으면 좋겠다. 진짜 다 망했으면.”(15)


장래희망이 뭐냐고 묻는 담임에게 가짜 꿈인 공무원이라는 모범 답안을 내놓고 모루는 진짜 세상이 망하길 바라는 사춘기를 지나는 청소년이다. 어차피 나한테는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올 때 차라리 세상이 다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망상을 펼치게 된다. 내일 펼쳐질 일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차라리 아침에 눈이 떠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정도로 일상이 고통스러울 때, 차라리 종말을 기원하게 된다. 그런데 막상 녹지 않는 실리카겔 성분의 눈이 내리자 세상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마치 환경오염과 지구온난화로 언젠가 일어날지도 모를 끔찍한 일이 여름에도 내리는 가짜 눈의 모습으로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는다. 하지만 가짜 눈은 진짜 눈처럼 사람의 온기에 스르륵 녹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발진과 염증을 일으키며 살아 있는 생물체의 수분을 빨아들여 세상을 황폐하게 만든다. 마치 방부제 역할을 하는 실리카겔이 눈이 모습으로 세상에 뿌려져 우리의 영혼을 바싹 마르게 만들어버리는 듯 하다. 


이렇듯 가짜 눈이 내려 온전한 일상이 위협받게 되면 제도 안에 숨겨져 있는 타락한 본성이 눈을 뜨고 생존을 위해서 타인을 위협하고 약탈한다. 판데믹 초기에 생수와 휴지를 구하기 위해 마트에서 육탄전을 벌이던 모습만 보더라도 우리의 나약한 본성은 어디가 밑바닥인지 자기 자신조차 알지 못한다. 녹지 않는 가짜 눈을 태우고 묻기 위해 지정된 백영시는 고립되고 폐허로 변하가고 남겨진 사람들은 녹지 않는 눈을 처리하기 위해 폐기물 소각장에서 일하게 된다. 모루의 엄마는 그곳에서 일하다 급성폐렴으로 숨지게 되고, 이모 유진마저 어느날 사라지게 된다. 모루는 이모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 믿으며 엄마가 죽게된 눈을 소각하는 센터에서 일하게 된다. 가짜 눈이 처음 내리던 날 공황상태에 빠진 사람들에 의해 넘어져 죽을 고비에 처한 모루를 살려준 이이월은 중학교를 졸업하며 백영시를 떠나게 된다. 이월은 어쩌면 그 가짜 눈의 원인일지도 모르는 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쫓아갔다가 알아서는 안될 폐기물을 처리하는 곳을 보게 되고 아끼던 강아지 하루를 놓쳐 버려 인부들에 의해 죽게 되는 것을 본다. 충격에 빠진 이월은 하루를 잃은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더 큰 상처를 받게 되고 이후 하루의 환상을 보게 된다. 이월의 새엄마는 백영중 이사장이었지만 건물이 압류되어 매각되는 과정 속에 교통사고까지 당하게 되고 그로 인해 왼쪽 다리를 잃게 된다. 그 이후 집에만 머물며 스노볼을 수집하는 편집증 증세를 보이다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이월에게 눈 속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엄마를 눈 속에 묻어 주기 위해 모루의 이모 유진을 다시 만나게 되고, 강도를 만난 유진은 이월을 살리기 위해 강도를 유인하며 사라진다. 이월은 모루를 만나기 위해 센터로 가게 되고 이모를 기다리는 모루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알려줘야 할지 고민한다. 작품의 주인공 모루와 이월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판데믹 상황보다 더 심각한 재난의 한가운데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서로 다른 모습으로 한 접점을 이루고 있다. 예전과 같은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하더라도 완전히 뒤바뀐 세상 속에서도 인간은 새로운 삶의 법칙을 만들어가고 그곳에서 무언가를 찾기 위한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센터에서는 늘 거대한 기계의 부품이 되어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내가 아닌 상태로 존재할 수 있었다. 스스로 고민하지 않아도 일거리가 주어졌고, 정해진 일정을 끝내고 나면 진이 빠져 잡생각을 할 힘이 나지 않았다. 눈을 퍼내면 내 머릿속도 비워지는 것 같았다.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건 내 선택으로 후회할 일도 없다는 뜻이었다. 지루한 수업을 듣는 것처럼 무료하면서 또 안락했다. 구매 식당의 흠집 난 식판이나 주말이면 사람이 바글바글한 매점 같은 걸 볼 때면 내가 제대로 누리지 못한 시간들을 다시 사는 기분도 들었다.(198)”


눈 속에 덮힌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그래서 후회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는 기꺼이 가짜 눈으로 인해 진물이 나고 화끈거리는 아픔이 느껴지더라고 기꺼이 맨손으로 가짜 눈을 헤집어 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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