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펜의 시간 - 제2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유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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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원 작가의 [불펜의 시간]을 읽었다. 제2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다. 서평단 모집에 응모하여 운 좋게도 당첨이 되었고 단숨에 몰입되어 읽게 되었다. 한겨레문학상 수상작들이 해마다 많은 감동을 주었지만 이번 작품은 정말 놀라운 정도로 짜임새 가득한 이야기 속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로 고민해야 할 주제가 무엇인지 ‘단단한 공’처럼 내게 다가왔다. 

나는 지금 야구를 보지 않는다. 야구장의 스카이박스석에서 편히 음식을 먹으며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와도 애써 참석하려 하지 않았다. 도대체 3시간이나 지속되는 그 지루한 경기를 사람들이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밥을 먹거나 딱히 할 얘기가 없을 때 어제 야구 경기 결과는 논하는 이들 앞에서 꿀먹은 벙어리가 될 때가 많아 나도 한 번 열심히 야구에 관심을 갖아볼까라는 생각에 스마트폰을 열고 경기 결과를 쓱 살펴보지만 역시나 그때뿐 다음 날 경기에는 여전히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 아마도 지금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운동이랑 담 쌓고 살아온 혹은 운동을 경멸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까란 의구심이 든다. 

그런데 어릴 때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얼마나 야구를 좋아했느냐면 배트와 글러브는 당연히 가지고 있었고, 당시 내가 살던 아파트는 12동까지 있었는데 해마다 광복절 즈음에는 아랫동 아이들과 윗동 아이들이 대단한 경기를 하는 것처럼 야구 시합을 하곤 했었다. 당시 나는 아랫동 아이들 그룹에 속해 있었고 내 포지션은 투수였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경기를 하기에 유리창을 깨질까봐 실제 야구공을 사용하지 못한 표면적인 이유와 돌같은 야구공을 사용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무서웠던 초등학생들에게는 테니스공이 적격이었다. 그래야 포수 마스크도 쓰지 않고 경기에 임한 선수를 보호할 수 있기도 했다. 투수의 생명은 제구력이라고 생각해, 나는 친구들을 만나 야구 연습을 하지 않는 날에도 혼자서 투구 연습을 엄청많이 했다. 받아주는 사람이 없다보니 내가 스트라이크 존에 제대로 던지는지 알기 위한 좋은 방법으로 당시 프로판 가스 통을 넣어두는 시멘트로 만든 커다란 함이 있었는데, 그 커다란 함 아래 부분에 딱 스트라이크존 모양으로 구멍이 뚫여 있었다. 제대로 던지면 테니스공이 그 구멍으로 쏙 들어가곤 했다. 

그렇게 열심히 연습을 하고 시합을 해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며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한 번도 야구장에 가서 경기를 본 적이 없었다. 학교 친구들이 당시 유행하던 프로야구단의 어린이 회원이 되어 야구잠바를 입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야구도 못하는 놈들이 무슨 회원이라고’ 비웃으며 사실은 나도 그 옷이 무척이나 입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한 번도 부모님께 프로야구단 회원이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불펜의 시간]에는 세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중학생 때까지 야구를 했지만 우러러 보던 동창생 혁오의 투구를 보고 한계를 느껴 야구를 그만두고 회사원이 된 이준삼, 학생때부터 탁월한 실력을 바탕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프로구단에 입단하여 가장 촉망받는 선수로 기대를 받았던 권혁오, 초등학생때 오빠를 따라 야구를 시작했지만 여자 야구구단이 없어서 꿈을 포기하고 스포츠 신문기자가 된 이기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준삼은 회식을 하다가 ‘누구처럼 살고 싶냐’는 부장의 질문에 답을 못하고 끙끙대다가 우연히 TV에서 방송되는 중학교 동창 혁오의 경기를 보게 되고 얼떨결에 ‘야구선수 권혁오’처럼 살고 싶다고 대답한다. 책을 덮고 나니 소설의 시작에 나온 준삼의 대답이 결국 이 소설의 주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혁오와 같은 결정을 내리고 혁오와 마찬가지로 스스로에게 당당하고 싶다고 말이다. 

이후 준삼이 혁오처럼 야구부를 했었지만 야구부를 그만두고 회사원이 된 경위가 묘사된다. 그리고 이어진 혁오의 이야기는 준삼이 우상처럼 바라봤던 혁오가 어째서 선발투수로 승승장구하지 못하고 계투로 등판하여 쿠쿠다스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는지의 사연이 드러난다. 혁오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진호와의 비극적인 사건은 혁오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혁오는 야구를 계속하기 위해 현실 속의 리그와 진호 리그를 만들어 남들에게는 승부조작으로 비춰질 수 있는 볼넷을 던져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삶을 이어나가게 된다. 또 다른 등장인물은 기현은 혁오가 승부조작에 가담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고 특종 기사를 터트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하지마 기현이 왜 그렇게 특종에 목을 매는지, 왜 스포츠 기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준삼은 언제 프로야구 선수가 되고 싶었냐는듯이 6년차 회사원으로서의 일상을 잘 영위해 나간다. 하지만 불현듯 회사에서 풍겨오는 악취는 준삼의 내면적인 무엇인가가 서서히 부서지고 있음을 예고한다. 특히나 공채직원과 ‘여직원’의 관계애 대한 묘사는 정글같은 회사내의 폐단을 지적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 신입 딱지를 떼고 승진할 때는 ‘여직원’보다 일을 못 하는 자신이 먼저 승진한 걸 미안해한다. 회사의 진급 시스템이 엉망이라며 분노하기도 한다. 하지나 그 분노의 크기는 언제나 작아서 하룻밤 자고 나면 사그라든다. 두 번째 승진 때는 미안해하지 않는다. 분노도 없다. ‘여직원’과 공채가 다른 체계에 속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자신의 승진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리고 더 시간이 흘러 책임지고 일을 기획하는 위치가 되면 한 때 우러러봤던 선배, 자신에게 일을 가르쳐줬던 ‘여직원’을 평가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단순 업무를 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한계를 말한다.(79)”

이렇듯 악취를 풍기는 회사의 부조리함에 준삼이 동요하는 이유를 혁오는 야구팬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암시한다. “혁오는 오랫동안 수많은 야구팬을 접하면서 그들의 마음 저변에 삶에 대한 염증이 깔려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명확한 규칙없이 제멋대로 흘러가는 인생이 싫어서 규칙이 확실한 야구를 좋아하고, 삶의 불확실성을 잠시라도 피해보려고 야구장에 온다고 생각했다.(153)” 기현이 승부조작에 대한 제보자를 만나 특종거리를 갖고 편집장을 만나러 갔지만 언론, 구단, 브로커가 얽혀 있기에 기사를 내지 못하게 되고 결국은 혁오를 만나 인터뷰를 하지만 혁오가 볼넷을 일부러 던지게 된 이유를 듣고 특종에 목을 매었던 비굴한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또한 준삼은 회사 생활이 지속될수록 깊어지는 뻔뻔함과 모욕감에 지쳐가는 상황 중에 구조 조정을 계기로 회사에서 내쳐지게 된다. “월급이 주는 안정을 누리려면 월급과 세트로 묶인 악취와 모욕되 견뎌야 했다. 누가 나에게 예측할 수 없는 기쁨과 예정된 모욕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예정된 모욕을 선택할 것이다.(175)” 

‘예정된 모욕을 선택할’ 준삼에게 자유를 준 사람은 바로 혁오였다. “비열해질 기회까지 잡을 필요는 없다고, 놓쳐도 되는 기회도 있다고 일부러 볼넷을 던지는 사람이 알려주었다.(210)” 준삼에게 악취와 모욕을 벗어날 자유를 준 혁오의 반향은 이제 기현을 향하게 된다. “우린 쉽게 무너지지 않는 걸 만들고 싶어해. 작아도 단단한 거, 어쩌면 작아서 단단한 거. 네가 한 말은 그래서 멀어.(235)” 비록 준삼은 회사를 그만두고, 기현은 스포츠 기자에서 SNS 기자로 전락하고, 혁오는 프로구단에서 추방되어 독립구단의 투수코치가 되는 실패자가 되지만, 세 명의 주인공들이 선택한 길은 우리 삶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자기 자신 안에 있음에도 아직 찾지 못한 것을 어서 끄집어 내기 위해 용기를 내라고 손짓하며 ‘단단한 공’을 나에게도 던져주고 있다. 

“혁오가 필사적으로 지킨 아름다움이 자신의 조각을 자극했음을. 누구나 아름다움의 조각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에겐 서로의 조각을 자극할 힘이 있음을.(251)”

야구를 너무나도 좋아해 작은 구멍에 공을 집어넣기를 수없이 반복했던 소년이 시간이 많이 흘러 야구에 무관심에 어른이 되기까지 잡지 않고 놓아 버렸던 아름다움의 조각들을 다시 찾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준삼은 두 손으로 가슴을 꾹 누르며 말했다. -나도 있다.(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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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의 의자
사쿠라 모모코 지음, 권남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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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 모모코의 [원숭이의 의자]를 읽었다. 띠지에 ‘일본 3대 국민 애니메이션’ <마루코는 아홉살> 작가, 사쿠라 모모코의 여전히 웃음 터지는 코믹한 일상! 이라는 광고 문구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권남희 님이 번역했다는 걸 보고 구입했다. 웹서핑을 해보니 <마루코는 아홉살>은 지금 케이블 TV에서 절찬리 방영중인 꽤나 인기 있는 만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저자의 에세이가 3부작으로 한 번에 출간되었는데 그 중에 2권에 해당되는 것만 구입해서 제대로 보고 1권부터 사서 볼걸 이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리고 원작은 무려 30년 전인 1992년에 나온 책으로 저자는 동시대의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충분히 작품을 남길 수 있을텐데 몇 년 전에 병으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았는데도 띠지에 쓰인 ‘코믹한 일상’이라는 수식어를 충분히 붙일만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있고 유쾌했다. 코미디 작가를 했어도 대성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글에는 유머와 재치가 넘쳐났다. 그리고 그런 성격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보통 사람은 하나도 경험하기 힘든 이상한 일들이 그에게는 자주 발생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30년 전의 일상을 그리고 있어서 그런지 어떤 부분에서는 지금과 사뭇 다른 배경이 연상되기도 하며 짧은 시간 동안 참 많은 것들이 바뀌었음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아쉽게도 일본의 유명 인사들의 이름과 여러 문화적 요소들이 등장하는데 그런 사전 지식이 없으니 모든 부분을 공감할 수 없음이 조금은 아쉬웠다. 그럼에도 모든 인류가 공감할 만한 소재들을 저자만의 독특한 시선과 때로는 기인처럼 느껴지는 반응들이 폭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인도 여행기는 정말로 인도 여행을 다녀온 사람의 호불호가 정반대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입증시켜주었다. 아마도 당시에 일본에는 해외 여행기가 유행이었는지 대만 여행기가 히트가 되자 편집자는 저자에게 인도 여행을 권유한다. 인도를 엄청나게 사랑하는 가이드 오아사(한자로 대마라고 쓰임) 씨와 함께 좌충우돌 인도 여행이 시작된다. 가이드가 인도를 너무나도 사랑한다면 저자는 인도 여행을 다녀온 뒤 한 마디로 학을 떼게 된다. “거리의 지저분함과 거짓말과 물건 팔기와 구걸에 심신이 너더너덜해졌다.(76)”고 표현했다. 이 외에도 애든 어른이든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치질 이야기나 소변을 마시는 이야기는 폭소를 자아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자주 경험하는 소소한 일들을 겪으면서도 이런 게 이야기가 될 수 있나 싶은 소재들도 재미있게 풀어갔다. ‘이름 모르는 물건 사기’ 에피소드가 그러한데, 요즘 같으면 인터넷에 찾아보면 대부분 찾을 수 있지만 92년도만 해도 제목도 가수 이름도 모르는 앨범을 사기 위해서는 레코드 가게 점원에게 맞지도 않은 음을 흥얼거리며 이 노래가 담긴 앨범을 사고 싶다고 물을 수 밖에 없었던 향수를 자아냈다. 

이런 여러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들의 이어지다가 ‘이사오가 있던 날들’ 이야기에서는 감동을 훅 밀려왔다.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진심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마주하기 힘든 현실이라 그런지 저자의 고백이 고맙고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만화를 그린다면 어린이들이 아주 많이 보는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사오는 저자가 다닌 초등학교 특수학급에서 공부하는 친구였다. 그 나이 또래 애들이 조금 모자라 보이는 아이는 시비를 걸거나 놀리거나 했을 텐데 저자는 이사오를 처음 만난 3학년 때 “그날부터 이사오가 신경 쓰여 견딜 수 없는 날들이 시작된 것이다(172)”라고 말한다. 수학여행을 가는 버스에서도 저자 옆에 이사오가 앉는 것을 반기며 ‘이사오, 내 옆에 잘 왔어’라는 마음 속 인사를 떠올린다는 것은 보통의 마음과는 분명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졸업식 중에 교장 선생님께 졸업장을 받으러 단상에 올라가넙죽 절을 하고 방귀를 두 번 뀌고도 태연한 얼굴을 하는 이사오지만 그가 남긴 졸업문집을 보고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사오는 연날리기 대화에서 즐거웠던 추억을 썼다. 해변에 누워서 보던 자신과 다른 아이들의 연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 자신과 물통과 하늘로 올라간 연과 물가의 돌이 그려진 그림과 함께. 이사오가 쓴 글 속에 내가 잃어가던 것 전부가 있었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게 비쳤다. 해변의 돌도, 물통도 그대로 비쳤다. 선택하지 않았다. 중립적인 감성으로 사물을 비추는 마음이 얼마나 얻기 힘든 것인가. 이사오는 언제나 모든 것에 중립이다. 거기에 이사오의 절대적인 존재감이 있다. 
나는 졸업문집을 펼친 채 울었다. 엉엉 울었다. 진심으로 이사오는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때 이사오의 에너지가 내 마음속 어딘가의 채널을 돌려줬다고 지금도 믿고 있다.(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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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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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작가의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을 읽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기존에 없던 것이기에 신비롭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무엇인가에 독창적인 힘을 불어넣는 것이기도 하다. 김금희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로 그의 소설에 붙은 제목이 주는 힘도 무시하지 못할 것 같다. [너무 한낮의 연애]도 그렇고 이 소설집의 제목인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은 한 번 듣고 나면 좀처럼 잊히지 힘든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매력적인 제목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해 책을 펼치지 않을 수 없다. 


저자의 첫 번째 소설집에는 '아이들', '너의 도큐먼트',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집으로 돌아오는 밤', '당신의 나라에서', '차이니스 위스퍼', '우리 집에 왜 왔니', '장글숲을 헤쳐서 가면', '릴리', '사북(舍北)' 이렇게 10편이 실려 있다. [경애의 마음]을 읽고 저자가 인천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첫 번째 소설집에 담긴 단편에도 인천을 배경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경애의 마음]에서는 고등학생들이 몰래 다니던 2층 호프집에서 불이나 많은 학생들이 죽은 사건이 나온다. 실제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놀랐고 호프집 주인이 불이나 학생들이 술값을 내지 않고 도망갈까봐 문을 걸어 잠궜다는 말에 광분을 금치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글숲을 헤쳐서 가면'에는 역시나 인천에서 유명한 사학재단 비리의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지금은 거주자 수가 많이 줄었고 다른 지역이 개발되면서 예전과 같은 영화를 누릴 수 없지만 소설에 나온 표현대로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열개의 학교가 몰려 있고 도시 학생 중 절반은 거쳐가던 거대한 왕국이었다.(219)"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 한 곳에 많은 학교를 모아놓을 수 있었는지 설립초기의 배경부터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의 배경이나 소재에 실제로 있었던 중요한 사건들이 나오면 잊고 지냈던 분노와 정의와 같은 낱말들이 떠오른다. 어째서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그러한 사건들을 다시 접하면 똑같은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아마도 시대를 관통하는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게 합당한 벌이 내려지지 않기 때문에 생겨가는 형이상학적 체증 때문일 것이다. 납득이 되지 않는 상태가 오랜 시간 지속이 되다보니 선과 악에 대한 구별이 모호해지고 언제든 나 또한 그런 피해자가 될지 모르다는 두려움은 일상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리고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혈연, 지연, 학연의 고리가 철퇴를 맞아도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러한 강력한 고리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은 구차한 일이 되고 주류를 이루는 계급에 편승되지 못하면 낙오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면에서 저자의 소설에 등장한 인생의 나락을 발 밑에 둔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벌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소소히 견디며 구석진 곳에서 희미한 불빛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맙게 느껴진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우리 주변에 흔히 있을 법한 완전히 폭망하지도 그렇다고 재기할 가능성도 별로 없어보이는 그런대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성공하고 주류를 이루는 이들의 시선에서는 그렇게 사는 삶이 비루해 보일지 몰라도 곳곳에 떨어진 작은 폭탄 파편 같은 위협들이 산재해도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며 살아내기에 우리는 공존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제 나이 때마다 할 일이 있는데 감상적으로 굴지 마라.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이지." 김의 말은 내 뺨을 한대 올려붙이듯 지나갔다. 말투는 따뜻한 것도 차가울 것도 없었지만 센티멘털이라는 단어가 마음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무심하게 붙은 듯한 '하루' 이틀'에도 가시 같은 것이 있었다. 그간의 날들과 결별은 해야 하지만 그렇게 해도 크게 좋아질 건 없을 거라는 닳고 닳은 냉소였다. 나는 연민에서 센티멘털까지 말의 온도 차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86)"


""만화가들한테 사람 얼굴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근육이란 주름이에요. 그게 표정을 만들거든요. 얼굴에는 슬픔의 근육이랑 기쁨의 근육이라는 게 있는데," 나는 코의 옆부분에서 입의 가장자리를 지나 턱까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가 슬픔을 나타내는 근육이에요. 양치할 때 입을 벌리게 하는 근육이기도 하고요. 기쁨의 근육은 광대뼈 밑에 있는데 옆이 아니라 위로 움직여요. 이렇게 위로, 위로." M이 스케치와 내 얼굴을 번갈아 봤다.(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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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
라미 현 지음 / 마음의숲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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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미 현 사진작가의 [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를 읽었다. 부제는 ‘어느 사진작가의 참전용사 기록 프로젝트]이다. 올해 초 ‘유 퀴즈 온 더 블럭’ 프로그램에 출연한 라미 작가의 사연을 보게 되었다. 지난 몇 년 간 사비를 들여 전세계의 한국 전쟁 참전용사들의 사진을 찍으러 다닌다는 내용이었다. 방송을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해지고 사진 액자를 선물로 받은 어떤 참전용사가 비용은 얼마나 되냐고 물었을 때, 저자의 책 제목이기도 한 ‘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라는 대답을 했다는 내용에는 눈물방울이 맺힐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몇 달 후 그의 책이 발간되었다는 것을 알고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어 읽게 되었다.

국민학교라는 이름의 시기를 보낸 세대는 반공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무찌르자 공산당’ 같은 표어와 포스터를 학기마다 제출해야 했고, 호국 보훈의 달인 6월에는 한국 전쟁에 대한 다큐멘터리나 기념식 같은 것을 해마다 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6월이 되어도, 6.25 당일이 되어도 전쟁에 대한 이야기나 방송은 점점 보기 힘들어졌다. 이제 전쟁을 겪은 세대는 대부분 고령의 어르신이 되셨다. 아직도 남과 북이 대치중이고 징병제가 지속되어 엄청난 국방비가 소요됨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우리와는 아주 먼 일처럼 느끼고 살고 있다. 실제로 외국에 나가서 살다보면 그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굉장히 위험한 곳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곤 한다. 세상에 우리나라처럼 치안이 잘 되어 있는 나라가 드물텐데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들에게 우리나라는 아직도 전시중으로 보이는 것이다. 
 
특히나 우리나라가 처한 분단 상황은 너무나도 자주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심지어 북한의 도발이 일부 정치인들과의 협잡으로 악용된 것이 아니냐는 의심까지 받는 장면이 영화 속에서 연출되기도 했다. 그리고 잊을만 하면 선거때마다 등장하는 빨갱이 프레임은 남과 북의 교류에 커다란 장애물로 남아 있다. 이런 악순환의 연속으로 국정농단 사건 이후로 태극기 부대가 극단적인 시위에 태극기를 흔들며 군복을 입고 행진하는 어르신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세대의 갈등은 얄팍한 수를 가진 이들에게 농락당하며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건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라미 작가님이 만나 전해주는 참전용사들의 각각의 사연들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갈등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깨닫게 해 준다.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우리에게 자유의 시대를 열어주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참전 용사분들이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PTSD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으면서도 한국 전쟁에 참여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저자와 같이감사의 마음을 전하려는 이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와 영국, 호주, 네덜란드 그리고 우리나라의 국군 참전용사들의 사진을 보며 저자가 말하려 했던 그들의 눈빛에 담긴 이야기를 들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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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또 무슨 헛소리를 써볼까 - 책상생활자의 최신유행 아포칼립스
심너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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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너울 작가의 [오늘은 또 무슨 헛소리를 써볼까]를 읽었다. 저자의 이전 작품을 하나도 읽지 못했지만 제목만으로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에세이만 써온 무명의 작가가 아니라 소설을 발표했던 아주 젊은 소설가가 스스로 이런 제목을 용납했다는 사실이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표지 그림은 꽤나 현실감 있게 절묘해 이야기 속 내용의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켰다. 그런데 막상 읽다보니 글쓰기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의 처절한 자기 투쟁의 역사를 낱낱이 고백하고 있어서 조금 놀랍기도 하고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는 것인가란 우려의 마음 또한 들었다. 그런데 저자가 전해주는 꼰대의 나이에 이르러서는 쉽게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의 업데이트를 아주 손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서 설명하기에 오히려 저자의 솔직함이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정기적으로, 규칙적으로 어딘가에 칼럼에나 에세이 혹은 발표문을 작성해야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할 것 같은데, 바로 PC 화면에서 깜박거리는 커서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멍을 때리는 순간이다. 그러한 순간은 순백의 MS워드와 한글 프로그램의 화면에 글자로 가득 채워 프린터 명령어를 누르거나 첨부파일 메일을 보내는 시간이 닥쳐오기까지 나의 목을 죄어 오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게 해 준다. 더군다나 글을 쓰는 사람인 전업 작가로 생계를 이어가려고 하는 이들에게는 아마도 소수의 천재적인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고뇌의 시간을 충분히 채웠을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닥달하고 낭떠러지까지 몰아세워 한 방울의 수분까지 짜내어 나온 한 페이지가 쌓인 책이 어마어마한 부귀영화를 가져다 준다면 그렇게 고통스러울 만한 가치가 있다고 동조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가 스스로 고백하듯이 연봉 2,500원 정도의 벌이를 목표로 삼고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그 정도의 연봉은 결코 높은 수준이 아니며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고 그저 월세로 자신의 한 몸을 돌볼 정도 되는 수준이다. 그러니 저자의 목표는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우리가 아무리 작가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는 입에 발린 칭찬을 반복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삶은 너무나도 쉽게 궁핍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아마도 효율성을 따지고 좀 더 생산적인 일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될 게 아니라면 다른 일을 택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쉽게 말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오래 현인들의 가르침인 한 우물을 파야 한다는 전통적인 이론을 가볍게 건너 뛰고 멀티태스킹을 즐기며 글쓰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글쓰기는 약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성인 ADHD를 극복해나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글쓰기는 단지 생계의 수단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위해 수단으로만 용납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치유할 길로, 그리고 그 솔직한 고백을 읽는 이들에게 남들과는 다르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한 자신감을 갖을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다. 


특히나 저자가 전해주는 핫한 이슈거리들에 대한 해석은 좀처럼 포털뉴스 기사를 통해서도 접하기 힘들고 이해하기 어려웠던 소재들을 재미있으면서도 분석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곽재식 작가가 추천의 말에서 언급했듯이 SNS의 알고리즘 광고에 대한 글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시선을 일깨워주었다. 


"시간이 갈수록 실력만 오르는 게 아니라 작품을 즐기는 식견, 감식안도 성장한다. 그 성장의 방시근 판이하게 다르다. 감식안은 전문적인 선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연속적으로 꾸준히 상승하는 듯하다. 반면에 실려근 불연속적인 계단형 그래프를 그리면서 늘어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벽 앞에서 온갖 고뇌를 곱씹다 보면 갑자기 그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이, 5년에 한 번쯤은 오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감식안과 실력의 차이, 그 면적이 오롯한 질투와 고통으로 화한다. 나는 정말 훌륭한 작품들을 즐길 수 있는데, 정작 그 작품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어! 물론 감식안은 항상 실력보다 더 높은 선을 유지하기 때문에 고통이 발생하지 않는 순간은 없다.(40-41)"


"'입은 재앙을 불러오는 문이고 혀는 몸을 토막 내는 칼'이라는 유명한 문구에서 틀린 구석을 찾아내기 쉽지 않았다.(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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