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빌제 카펠레‘는 1882년 3월 16일에 자신들을 이끌어줄 지휘자로라이프치히의 루트비히 폰 브레너를 선출했다. 5월 5일의 음악회에는 슈테른 성악협회가 함께했고, 9, 10월에는 독일의 각 도시들을 돌며 순회연주를 했다. 그리고 곧 유명한 콘서트 기획자인 헤르만 볼프를 영입한다.
볼프는 카펠레에게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라는 새로운 명칭을 선사하고, 오케스트라는 이제 베른부르크 가에 안정적인 보금자리를마련한다.
롤러스케이트장이던 센트럴 스케이팅 링크를 수리하고 ‘필하르모니‘라 부르기로 한 것이다. 필하르모니는 1898년에 다시 한 번 보수공사를 하고 1944년까지 베를린의 대표적인 공연장으로 쓰인다. - P120
뷜로는 전문성을 갖춘 최초의 세계적인 지휘자였고, 그와 함께한 시절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첫 번째 전성기였다. - P123
마침 권력을 잡은 히틀러 정권이 이문제를 해결한다.
1933년 11월 1일자로 베를린 필하모닉은 ‘제국 오케스트라로, 다시 말해 선전선동부 장관 괴벨스가 관장하는 정권의 한 부서로 탈바꿈한 것이다.
주식회사의 지분은 독일 제국으로 넘어가고, 이로써 국가가 오케스트라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이제 국가와 당의 엄격한 통제와 지배를 받아야 했고, 자율적인 운영의 시대는 끝났다. 정권의이양이 오케스트라에게 큰 변화를 안겨준 셈이다. 지금까지 지켜온 자유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다.
브루노 발터, 클렘페러, 블레히 등의 지휘자와 후베르만, 크라이슬러, 메뉴인, 슈나벨 같은 솔리스트들이 인종적인 이유로 필하모닉 무대에서 밀려났고, 에리히 클라이버나 프리츠 슈는 자진하여 포디엄에서 물러났다. 푸르트벵글러가 백방으로 애를 썼지만, 결국 바이올린 주자 둘과 첼로 주자 둘등 4명의 유대인 단원들이 오케스트라를 떠나야 했다.
결국 1935/36시즌부터 베를린 필하모닉은 ‘순수한 아리아인의 오케스트라가 된다. 한편 푸르트벵글러는 추밀원 고문및 문화 생활을 통제하는 국가기관인 제국음악국의 부총재로 추대된다. - P129
1954년 12월 13일,
베를린 필은 결단을 내렸고 베스터만의 제안으로단장은 상임지휘자 자리를 놓고 카라얀과 협상에 들어갔다. 푸르트벵글러의 기대가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베를린이 손을 내밀었을 당시, 카라얀은 밀라노 스칼라 극장의 예술감독이었다. 다행히 그곳의 극장장기링겔리는 그를 보내주었고, 카라얀은 뛸 듯이 기뻐하며 베를린 필하모닉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 P141
1989년 10월,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렸다. 28년 만에 드디어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것이다.
독일이나 베를린만이 아니라 베를린 필하모닉에게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라이프치히에서 대대적인 집회가 열리기 시작하던 무렵, 56세의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베를린 필의 새로운 지휘자로선출되었다.
오케스트라의 온전한 자율적 선거를 통해서 이루어진 첫 선택이었다.
사실 아바도는 의외의 후보였다.
카라얀이 지지하던 러바인무티, 바렌보임, 래틀, 마젤 등이 후보 명단에 올랐다. 래틀은 영광이긴하지만 자신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이 자리를 고사했다. 반면 마젤은깨끗지 못한 패배자였다. 새로운 지휘자에게 집중적으로 일할 기회를 주겠다는 핑계로 베를린 필의 모든 음악회와 녹음 작업에서 손을 뗐기 때문이다. - P152
결국 베를린 필이 아바도의 후임으로 선택한 지휘자는 래틀이었다. 그는 기꺼이 이 자리를 수락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오케스트라가 보조금을 주는 시 정부에 굽실거리면서 동시에 자유로운 권리를 내세우는 이중적인 모습을 버리고 재단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의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10년간의 계약이 맺어졌다.
이렇게 해서 베를린 필하모닉은 ‘재단법인 베를린 필하모닉‘으로 전환한다. 복권기금으로베를린 시의 지원을 받고, 독일 은행이 주요 후원자로 나섰다.
2002년 가을,
베를린 전역이 "사이먼 경을 환영합니다!"라고 적힌 포스터로 뒤덮였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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