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한국에서는 산업 현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철학 연구에서조차 장르를 창출하지 못하고, 선진국에서 만든 장르를 대신 수행하는 ‘생산자 역할만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소위 학계에서는 ‘한국의 철학‘이 아직 건립되지 못했다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하든지 간에 창의의 기운을 통해서만 질적으로 한 단계 더 상승하고 전진하며 튼튼해질 수 있습니다. - P33

시대를 앞서서 인간이 움직이는 방향에 맞게 생각을 잘하고, 그 결과를 논리에 담아 잘 남긴 사람들을 우리는 철학자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주로 생각의 결과들을 시간의흐름에 따라 기록해 놓은 것을 또 철학사라고 하지요. - P40

인문적 통찰은 대답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데서 비로소 열립니다. 
질문하는 활동에서 인문적 통찰은 비로소 시작됩니다. 
선견지명의 빛은 자신에게 이미 있는 관념을 적용하는 데서 나오지 않고, 질문을 하는 곳에서 피어오릅니다.
모드가 대답하려고 할 때 외롭게 혼자서 질문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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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3월 로스앨러모스가 완공되자, 
100여 명의 과학자, 엔지니어, 그리고 지원 인력이 새로운 공동체로 모여들었다. 

그로부터 6개월 후에는 약1,000명, 
1년 후에는 3,500명 이상이 메사 위에서 살고 있었다. 

1945년 여름이 되면, 오펜하이머의 연구 단지는 
최소한 4,000명의 민간인과 2,000명의 군인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 되었다. 

그들은 300여 개의 아파트 빌딩, 52개의 기숙사, 
그리고 200개의 트레일러에 살았다. 

"기술 구역(TechnicalArea) " 만 해도 플루토늄 정제공장, 주물공장, 도서관, 강당, 그리고 수십 개의 실험실, 창고, 사무실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 P357

라비는 이에 덧붙여 자신이 프로젝트에 참가하지 않기로 결정한 보다 깊이 있는 이유를 댔다. 

그는 오펜하이머에게 
자신은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드는 것으로
 "물리학 300년의 정점을 찍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이것은 커다란 의미를 지닌 말이었고, 
라비는 오펜하이머처럼 철학 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비가 이미 원자폭탄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던 데 비해 오펜하이머에게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친구의 이의 제기를 외면했다.  - P360

그는 라비에게 

"나 역시 이번 프로젝트가 ‘물리학300년의 정점‘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네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네. 나에게 이것은 전쟁 중에 상당히 중요한 무기를 만드는 일이야. 나치스는 우리에게 신택의 여지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라고 썼다. 

오펜하이머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였다. 
나치스보다 먼저 무기를 만드는 것이었다. - P360

로스앨러모스는 항상 예외적인 곳이었다. 
50세 이상은 거의 없었고, 
평균나이는 25세에 불과했다. 

버니스 브로드는 그의 수기에서 
"그곳에는 병약자도, 시댁이나 친정 식구도, 실업자도, 유한계급도, 가난한 사람도 없었다." 

운전 면허증에는 이름 없이 숫자만 적혀 있었고, 
그들의 주소는 단지 사서함 1163번지라고만 되어 있었다. - P429

오펜하이머는 보어가 곁에 있다는 것에 대단히 감사했다. 57세의 덴마크 물리학자는 1943년 9월 29일 코펜하겐에서 몰래 보트를 타고 탈출했다. 

스웨덴 해변에 무사히 당도한 그는 스톡홀름으로 보내졌는데, 거기서 독일 요원들이 그를 암살하려 시도했다. 

10월 5일, 보어를 구출하기 위해 파견된 영국 공군이 
그를 영국군 모스키토 폭격기 폭탄 발사대에 실었다.
합판으로 만든 비행기가 고도 6,096미터에 도달하자, 
조종사는 가죽 헬멧에 붙어 있는 산소마스크를 쓰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보이는 지시 사항을 듣지 못했고 
그는 나중에 헬멧이 그의 머리에 비해 너무 작았다고 말했다. 곧 산소부족으로 기절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는 무사히 비행을 마쳤고, 
스코틀랜드에도착했을 때는, 
낮잠을 잘 잤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 P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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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인물 탐구는 [로버트 오펜하이머] 이다.

독후 활동으로 8월 15일 개봉하는 영화 <오펜하이머>를 감상할 생각이다.

"자신의 의견에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진실을 모색하는 중인 것처럼 말하는"
 보어의 태도에 매료되었다. 
오펜하이머는 나중에 
보어를 "나의 신"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 P104

 "나쁜 철학이 생지옥으로 이어지는 이유는, 네가 위기에 몰렸을 때 나오는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평소에 무엇을 생각하고, 원하고, 소중히 여기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야."  - P152

미국의 상류 사회에서 반유태주의는 
1920년대와 1930년대를 거치면서 고조되고 있었다. 
많은 대학들이 1920년대 초에 
하버드가 유태인 학생의 수를 제한하는 정책을 
세우는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뉴욕, 워싱턴, 샌프란시스코에서 
엘리트 법률 회사들과 사교 클럽들은 
인종과 종교에 따라 분리되어 있었다. - P195

1941년 봄 무렵부터 FBI는 오펜하이머를 
"다른 정보원들의 보고에 따르면 공산주의 사상에 공감하는" 대학 교수로 지목하기 시작했다.

FBI는 그가 "공산당의 위장 단체"로 분류된 미국 시민자유연맹의 집행위원회 소속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들은 곧 오펜하이머에 대한 수사 과일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7,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 되었다. - P242

하지만 1943년이면 오펜하이머가 노조 조직화 활동에 등을 돌린 지 이미 오래된 상태였다. 그가 태도를 바꾼 것은 정치적 신념이 변했기 때문이아니라, 로런스의 조언에 따르지 않으면 나치스 독일을 무찌르는 데 필요한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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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것은 그의 유일한 치료법이었다. 
번하임은 어느 겨울 밤 그와 함께 새벽 3시까지걸어 다녔던 것을 회고했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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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이 볼 수 있는 왕국을 점검하는 예술가 - P98

미국은 크고, 인종에 대한 편협함과 폭력으로 이곳저곳이 얼룩져 있었다. 조지아의 친척을 방문한다고? 살아서 지나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인종차별 마을과 백인들만의 지역을 돌아가는 안전한 길, 목숨이 귀하다면 피해야 할 마을과 카운티에 대한 정보가 여기 있다. - P106

뒤로 한 걸음 물러나서 보면 세상이 전부 교실이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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