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통령 : 역사의 기초를 다진 위대한 리더들 미국을 만든 사람들 1
한솔교육연구모임 지음 / 솔과나무 / 2019년 9월
평점 :
품절


미국이 흔히 대통령이 모든 권위와 권력을 갖는 문화라고 생각하기쉽다.하지만 미국도 엄연히 삼권분립이된 나라고 지금도 법원은 트럼프의 유죄성를 주장하고 통치자에게 엄격한 자질을 요구하며 도덕과 여론의 잣대를 들이대는 나라다.미국이 왜 지도자의 축복받은 나라인지 했는지 이 책을 읽어보면 안다.
리더의 자질에는 요즘의 리더쉅,관용,화합,포용,책임감모두가 포함된다.역대제왕학의 교육에 수신과목이 포함된게 우연이 아니다. 지금도 역사에 이름남긴 대통령들은 자신을 단속하며 부단히 노력을 한 이들이다.

전통적인 덕목이 오늘날에도 대통령이나 각계각층의 리더들에게도 요구된다. 대통령의 아들들이 감옥에 간 일이나 자신이 구속된 일이 흔한 대한민국은 깊이 돌아볼 일이다.

미국대통령들이 명문가출신이 대부분인데 그런데도 초대대통령들이 자신뿐 아니라 친인척들의 단속에 가혹했는지 소문난 사실이다.역대 대통령들 국부라는조지 워싱턴같은 대통령들도 공직기강을 세운다는 목적으로 청탁금지법이나 공무원들에게 선물받기금지를 통해 주위를 정화한 걸보면 권력에 대한 경계가 굉장히 강했다. 근래 악질적 엽관주의로 퇴색되었다지만 아직도 미국공무원들이 10달러이상의 선물을 받지않는다는 전통이 남아있다.
요즘 대한민국대통령들이 친족에게 이렇게 엄격했으면 그 흔한 신문지상의 비리들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워싱턴처럼 초대 대통령이 스스로 권력을 버리고 낙향하여 독재정치의 싹을 경계한 것도 미국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업적이었다.
연방주의자인 존 애덤스나 해밀턴이 지방분권주의자인 제퍼슨과 그렇게 대통령직을 놓고 다투었지만 그들과 토마스제퍼슨도 정적임에도 미합중국연방을 위해 협력한 걸보면 상대를 존중하는 미국의 정치문화가 그들에게서 시작된 듯하다.
그가 영국을 따라잡기위해 시작한 미국의 산업화와 중앙은행의 건립은 미국의 국가적 부의 초석을 놓았다고 할수있다.식민지잔재의 농업위주의 경제에서 벗어나려한 제퍼슨의 식견은 시대를 넘어 미국을 산업화하게한 탁월한 선택이었다.
근래 미국의 트럼프대통령도 일가회사나 측근들의 비리가 살살 불거져 나오고 있다. 끝을 보면 알겠지만 정치인이었는지 장사꾼이었는지 그의 처신에 달려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고 수백년전 미국 대통령들에게도 같았다.
링컨은 가정적으로도 불우했고 남북전쟁의 내전중 대통령이니만큼 권력이 약했으나 공화당관료들을 키우며 남과 북의 조화를 모색했다.요즘 말하는 민주주의의 화합형 리더이다.그가 남부에 관대했고 정치보복을 거의 않은 걸보면 합중국의 화합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수있다.정권만 바뀌면 적패청산이니 정적제거니 정치보복이 흔한 대한민국은 각성할 부분이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도 실리형대통령이였다. 19세기말 세계가 제국주의의로 가는 시대에 외교적으로나 알래스카를 제정러시아에서 구입하여 국토를 넓히고 파나마운하개통에 개입하고 백색선단을 건조하여 천연자원을 확보하는등 현실적으로 그렇게 국제감각이 있는 이는 드물다.그의 재임시절 미국이 제국주의의로 나가게되었다는 비판도 있으나 국제정세에는 탁월한 안목이었다.요즘 중국과 미국의 알력에서 갈팡질팡하는 한국이 숙고할 부분이다.지난 정권들에서 대통령이 철학이 없어보이니 외무부장관도 중심이 없어보였다. 중국시진핑에 줄섰다가 미국에 괄시당하고 이제 트럼프이래 시작된 미국의 압박아래 인도태평양방위문제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대한민국..며칠전 북한이 미사일발사로 북한의 압박은 더 거세어졌다. 하지만 분명한 건 미국도 중국도 영원한 내편은 아니란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들의 조약돌이고 잇권대상일 뿐인 게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특히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소아마비와 2차세계대전의 비극을 겪은 대통령이다.그러나 승리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연합국과 관료들을 포용했다.그는 뉴욕월가를 주름잡는 은행가출신의 명문집안의 아들이었다.그러나 기득권계층인데도 금융에 통달한만큼 금융재벌들의 편을 안들고 개혁의 칼을 휘둘러 혼란을 가라앉히고 뉴딜정책으로 대공황을 잘 극복했다는 평가가 대세다.굉장한 노력파인만큼 노력을 안해도 될 일도 손수 책임지고 나서는 모습을 보인다.징집나가는 청년들에게 손수 부두에서 차를 건낸 이가 대통령이였다는걸 몰랐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맥아더와의 불화에도 파면않고 계속 장군으로 쓴 일이나 사기꾼이란 비난을 듣는 요제프 케네디를 증권감독관으로 기용한 것을 보면 요즘으로 말하면 여론포용형 대통령이라고 해야겠다.
여담으로 클린턴도 링컨처럼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대통령의 권좌에 올랐다.요즘말로는 자수성가형 출세한 사람이다.괄시받는 출신을 극복하기위해서 유권자의 호감을 얻기위해 얼마나 빡세게 노력했는지 그의 의료보험개혁이나 세금정책을 보면안다.

미국대통령들도 국민의 민심을 끌어안고 관료들의 지지를 얻기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 역사를 보면 안다 .물론 권력의 중심 , 일인위주의 독재정치는 현대의 민주주의와 거리는 멀다.하지만 대통령으로 산다는 것이 권력의 정점에서 쉬운 일도 아니고 책임과 중압감이 얼마나 막중한지 미국만 봐도 안다. 현대 한국의 대통령들에게 책임감이란 있었을까? 서민들보다 재벌들의 배만 불리던 대한민국정치이들은 미국의 대통령들을 돌아봐야할 것이다. 독선과 불통의 얼룩진 현대 한국의 대통령들..결국 한국의 대통령들은 다수가 수감자가 되었다.천재는 아니더라도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이 미국의 평범한 대통령들만큼만 되었더라면 이런 불상사들이 없었을까?
대통령이 구속되면서 리더쉽이 없이 표류한 적이 여러번이었던 대한민국,어쩌면 한국의 대통령은 과도기적인 성격의 정치인인지도 모르겠다. 민주주의와 전근대적 왕권정치와 유사한 성격의 징검다리노릇을 해야하는지도...그렇다면 자신의 주위와 친족부터 단속해야 할 것이고 더 넓게는 돈있는 사람들, 재벌보다 빈자와 서민들의 입장에 서야할 것이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권력형비리는 모두 잇권과 결탁된 돈때문이었다.이때문에 계층간 갈등도 극심했고 지역간감정도 골이 깊었다..독선 , 아집, 물욕..지저분한 선거운동과 흑색선전중의 한국정치에서 대통령들은 미국의 대통령들처럼 책임감위에서 화합과 포용의 정신을 본받았으면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시우행 2023-05-10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주주의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은 이유도 있겠지만 먼저 국민들의 평가 잣대가 건전하고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판단됩니다.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을 정치지도자로 뽑는 것은 아무래도 잘못된 결과라고 보여집니다. 대통령을 우리 국민들의 손으로 뽑는데 왜 거짓말쟁이를 뽑아야 할까요?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
유영익 지음 / 청미디어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승만만큼 한국 근대사에 왜곡된 인물이 없다.왜 그가 건국의 아버지인데도 대우를 못받는 것일까?
그의 측근기용과 국내정치의 실패때문이지만 한편으론 근대 대한민국국민의 정치의식부재도 큰몫을 한다.
그가 태어난 19세기말 조선의 사정을 보자.당시 조선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낙후된 나라였다.척족정치와 매관매직에 젖은 고종이나 민비같은 위정자들은 근대화를 할 의지가 전혀 없었다.
서양이나 일본은 19세기 민족주의의 각성아래 부국강병을 위해 근대화에 매진했고 일본이 메이지유신후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근대국가를 확립하는데 톡톡히 이용했는데 왜 조선은 그렇지 못했을까?조선의 권력자들은 오직 양반 지배층만을 위한 관습과 전근대사회에 집착했다.그들에게 입헌정치란 권력을 내놓는 것이었기때문이다.아니 개화에대한 의지자체가 없었다.
이승만과 서재필이 주관한 독립협회가 군주전제정치를 비판한 최초의 민간조직이었다.아이러니는 매국노로 유명한 을사5적중 하나인 이완용이 이 협회의 부단장이었다는 것이다.변절자였는데도 젊을 적에 개화사상을 접해 개화를 위해 서재필과 합세하여 계몽을 해나간 전력을 보더라도 그의 사고는 보수적이거나 전근대적이지 않았었다.문제는 그후였다.고종과 수구정치의 조정은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지는 못할망정 이승만이나 개화사상가들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려했으니..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이승만이 보수적유생에 가깝던 그가 선교사의 세례로 신문물을 접하고 열성개화파가 되었다.문제는 그후였다.
배화학당시절 이승만은 조선왕족의 방계후손이었는데도 이미 불온분자로 찍힌 사람이었다.이승만의 조선정부비판활동을 역적으로 몰아 사형선고와 종신형까지 받게 한 이 사건은 그에게 고종에대한 배신감과 충격을 주었을 것이고 결국 훗날 왕정을 없애고 공화정을 설립하게 했다.고문과 투옥 5년간의 감옥생활후 미국특사로 풀려난 이승만이 고종을 위해 일할 마음이 있었을까? 개화운동의 가장 큰 박해자가 고종이었으니 당시 조선은 근대화의 가망이 없었다.
미국으로 특사를 간후 약소국의 호소는 소용없다는 걸 그는 눈물겹게 깨달았다.세계는 이미 제국주의의로 가고있어서 조선이 강대국들의 세력다툼에서 설 자리는 없었다.일본만해도 메이지유신후 부국강병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지만 쇄국의 조선은 무지몽매했다.
애국지사들 그들에게도 근대화란 개념은 낯설었을 것이다.유길준과같이 유학파가 아니고는 입헌왕정이든 민주공화정이든 받아들이기가 쉽지않았을 것이다.시대사조에 앞서간 이승만은 평생 자유민주주의 정치사상을 추구한 것과 별개로 그들은 조국의 자주독립을 추구하는 젊은들이였다.
어찌보면 모두 우울안 개구리처럼 국제정세에 시야가 좁았다.일본의 위정자들처럼 영국이나 외국에서 유학을하고 세계열강의 제국주의의 흐름을 알아챘더라면 생각이 달랐을까?
이토히로부미나 후쿠자와 유키치같은 사가현의 정치인들이 메이지유신의 주역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것처럼 근대화를 할 영민한 정치인들이 없었던 데다 오히려 조선조정이 개화운동을 핍박하는 구한말의 상황에서 이승만같은 이들은 무엇을 할수있었을까?일본이 제국주의의 옹호자로 동양평화를 위해 영국과 결탁해 조선을 보호국화하겠다는 명분으로 한일합방을 하게될때까지 고종은 유유부단했었다.
이것은 일본뿐아니라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까지 유사한 제국주의의 명분이었다.
일본처럼 부국강병과 사민평등은 고사하고 조선은 여전히 전근대적 존왕양이적 사고에 매여 무지했다. 자유민권사상은 근대문명에서 가장 이른 민중계몽운동이자 입헌정치의 척도이나 조선의 지식인들조차 그걸 받아들일 사고가 준비되어 있지않았다.
일본의 식민통치가 악랄했지만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식민지가 된 원인은 조선을 근대화못한 고종과 유교에 젖은 대신들이 좌지우지하던 조선조정이 자초한 것이었다. 구한말 피폐해진 백성을 생각하기보다는 군주독재와 왕권의 유지에만 급급했던 조선왕조는 개화보다 외세에 기대어 왕조의 안위만 생각할만큼 한심했다. 민비에게 휘둘리며 매관매직을 일삼은 고종은 개화는 생각지않았고 황국협회따위나 만들며 군주가 군주로서의 책임감이 없었고 조정대신들이 무능하고 부패할때 문명개화에 앞장선 것은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같은 선각자들이였다.양반관료들은 파벌다툼에만 열을 올리고 중국과 러시아 일본의 러일전쟁이나 청일전쟁으로 국토가 유린되는 사이 백성들은 굶어죽거나 유리걸식하는 이가 부지기수였다.
한일합방이후 일제에의한 의병들의 토벌로 조선이 초토화될때 고종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궁중에서는 굿을 하며 이승만같은 개화사상가들을 투옥하여 죽이려한 것외에는 없다.
그나마 이승만이 국제관계의 역학을 깨달아서 조선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주장한 것이다.그것도 조선정부의 핍박에 결국 하와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해야했으니 얼마나 기구한가..,...
미국망명후 국제법을 전공하며 국제간에 힘외에는 법이 없다는 것을 그는 뼈저리게 절감했을 것이다.하와이에서 그가 ㅡ당시 밀입국이나 노예계약으로 이민온 조선인들이었던 ㅡ한민족을 계몽하려한 노력은 눈물겹다.강대국들의 외면속에 그는 투옥과 가난과 좌절을 수도없이 겪었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팔순이 넘도록 조국독립의 염원에 인생을 바치고 결국 조선은 용케 독립하여 이승만은 신생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하지만 대한민국의 앞길은 험난했다.
이내 6.25전쟁이 터지고 이기붕같은 그의 측근들은 부정부패에 휘말렸다.권력이 마약이라고 청렴결백했던 측근들의 변절과 배신은 그의 정치에 오점으로 남았다.결국 그의 국내정치는 독재라불릴만큼 문제가 많아서 정적을 양산했다.
그의 반려자인 프란체스카여사에대해 한줄 안쓸수없다.비록 오스트리아 출신이었으나 일국의 퍼스트레이디로 책임감이 강하고 훌륭했다.누덕누덕 기워입힌 이승만의 내의나 일국의 안위를 책임지는 남편대신 집안일을 챙기라며 장인이 보내준 망치와 공구를 보면 가문의 가정교육이 드러난다.그녀가 쓴 6.25전쟁당시 맥아더에게 쓴 편지를 보면 눈물겹다.ㅡ존경하는 장군.부디 우리 국민을 불쌍하게 여겨 도와주십시요.ㅡ그녀가 하와이망명지까지 동행하여 권좌에서 밀려난늘그막의 남편을 보살핀 것을 보면 보통 헌신적인 여인이 아니다.
훗날 부정부패와 비리로 시끄러워지지는 한국의 어느 영부인과는 비교할수없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6.25전쟁이후 한미안보협정이 대한민국국민의 운명을 갈랐다.강대국 미국을 노예계약으로 얽어넣을만큼 이승만같은 세계적으로 뛰어난 외교관도 드물다.그 안보조약으로 대한민국이 근대국가로 도약할 발판을 닦았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의 사랑 한반도야...하와이 망명중에도 불러댄 평생 그의 사모곡이었다.
정렬적인 독립운동에비해 이승만의 말로가 불운한것은 측근을 잘못 쓴 탓도 있지만 당시 한국의 국민의식이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무지한 탓이 크다고본다.왕정에서 식민지 그리고 갑작스런 민주주의는 친일이 친미가 되며 혼란을 야기했다.근래 이승만을 삼류독립운동가니 독재의 시초니하며 폄하하는 움직임이 있는데 그렇다고 이승만이 민족의 도살자인 김일성이나 핵으로 동족을 위협하는 북한의 공산당수뇌인 김정은보다 괄시받는다는건 이해가 되지않는다.
그는 엄연히 독립의 영웅이고 건국의 국부이다.그가 제시한 자유와 평등, 반공을 위시한 민주주의국가는 대한민국의 국시이다.
공은 공이고 실책은 실책이다.시대를 앞서간 한 인물의 객관적평가가 필요한 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흙수저의 반란
임소장 지음 / 스노우폭스북스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나라 최초의 흙수저탈출기..
작자는 경제투자를 공부하며 일생의 전환를 따라가게된다.물론 성공이 쉽지않다.한국에서는 인텔리라도 부모배경에따라 대우받는 일이흔하고 대한민국의 보수적인 사회에서 가난과 차별과 냉대받는 작자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능력과 전문성을 표방했지만 외면당한 가진자의 만행과 이중성을 드러낸다.
미국인들처럼 사고하길 원했던 주인공은 당찬 성격이 아니면 버터나질 못했을 것이다.결국 경제적 자립과 성공이 인생을 보장한다.
결국 그는 성공한다.
하지만 공짜는 없으니 이를 따라하려면 진취적 사고는 많은 것들을 감수하게한다.
우선 경제공부를 해야지.
영어는 필수.
인맥과 경험을 쌓아라.
그처럼 맹랑하고 저돌적이지않으면 성공은 힘들다.
작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평등과 자유는 저절로 이루어져 실행되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자신이 노력하지않으면 높은 차별의 유리벽을 깨기 힘들다. 스스로 자신의 인격을 존중하고 자신의 존엄을 자각하지않는다면 출세도 자신의 꿈도 실현되지 않는다는 명심하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립백 과테말라 우에우에테낭고 킨 #5 - 12g, 1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6월
평점 :
품절


오묘한 맛이 입안에 돌면서 향긋한 향을 남깁니다. 과테말라 우에우에테낭고를 손쉽게 즐길수 있어서 좋아요.추천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한제국멸망사 - 개정판 한말 외국인 기록 (개정판) 1
H. B. 헐버트 지음, 신복룡 옮김 / 집문당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폐쇄된 나라였다. 문제는위정자들이 근대화를 할 의지가 없었다는 데 있다.
서양이나 일본은 부국강병을 위해 학문과 기술을 근대화에 톡톡히 이용했는데 왜 조선은 그렇지 못했을까?조선의 권력들과 학문은 오직 지배층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아니 기술개발 자체가 없었다.
독립협회가 군주전제정치를 비판한 최초민간조직이었다.이완용의 유년기에 개화사상을 접해 개화를 위해 서재필과 합세하여 계몽을나간 전력을 보더라도 그의 사고는 보수적이거나 존왕양이적이지 않았었다.파란은 그후였다.조정은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지는 못할망정 이승만이나 개화사상가들에게 누명을 씌워 죄를 물으려했으니...이 사건은 그에게 고종에대한 배신감과 충격을 주었을 것이고 친일파로 변절하게 했다.
보수적 유생이든 선각자들이든 그들에게도 근대화란 개념은 낯설었을 것이다.비록 입헌왕정이든 민주정이든 정치사상의 자유를 추구한 것과 별개로 그들은 조국의 자주독립을 추구하는 젊은들이였다.
어찌보면 모두 시야가 좁았다.일본의 위정자들처럼 영국이나 외국에서 유학을하고 세계열강의 제국주의의 흐름을 알아챘더라면 생각이 달랐을까?
이토히로부미나 후쿠자와 유키치같은 사가현의 정치인들처럼 일본에서 근대화운동을 펼친 영악한 정치인들이 없었던 조선이 무엇을 할수있었나?일본이 제국주의의 옹호자로 동양평화를 위해 영국과 결탁해 조선을 보호국화하겠다는 명분으로 한일합방을 하게될때까지 고종은 유유부단했었다.이것은 일본뿐아니라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까지 유사한 제국주의의 명분이었다.
일본처럼 부국강병과 사민평등은 고사하고 조선은 여전히 유학에 매여 무지했다. 자유민권사상은 근대문명에서 가장 이른 민중계몽운동이자 입헌정치의 척도이다.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그런 근대정치를 근대화에 이용못한 건 고종과 머리가 굳은 대신들이 좌지우지하던 조선이 자초한 것이었다. .구한말 피폐해진 민생을 생각하기보다는 전제왕권의 유지에만 혈안이 된 조선왕조는 구태의연했다. 대원군에 떠밀려 왕위에 오른 고종은 국가안위는 생각지않았고 황국협회따위나 만들며 군주가 군주로서의 책임감이 없었고 조정대신들이 무능하고 부패할때 문명개화에 앞장선 것은 선각자들이였다.양반관료들은 굶지는 않지만 동학운동이나 청일전쟁으로 국토가 유린되는 사이 백성들은 굶어죽거나 유리걸식하는 이가 부지기수였다.
그나마 김옥균이나 서재필같은 이들이 국제관계를 깨달은 인간이어서 개화를 주장한 것이다.그것도 갑신정변실패이후 고종이 개화당에게 취한 냉혹한 자세가 얼마나 개화파에게 매몰차고 외세에 비굴했는지 알수있다.외국학자의 연구에는 조선의 혼란이 서글프게 묘사되어있다.
고종과 민비처럼 무능한 군주들이 제 자신의 치부와 권력에만 욕심이있으면서 근대화의 필요는 절감못하고 오직 사리사욕만 채우려했다는 것이 서글프다.
유교의 악습은 왕권신수설처럼 군주독재정치를 옹호하는 것인데 시대가 변해도 이를 타파하려는 노력도 하지않을만큼 경직되어 근대화에 실패했다.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를 비롯해 갑신정변직후 수십명의 개화파인사들을 무참하게 처형한 조선을보면 당시 권력층이 악랄하고 개화에 무지했는지 드러난다. 그만큼 개화가 일이 쉽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러고도 조선황실은 일제에 병합후 일제에 순응하며 호사하게 사는 삶을 택했다.망국의 책임은 아무도 지지않았다.
외국인들도 조선의 한심함을 느끼고 있었을까??
조선이 근대화에 실패하고 병합당하게 된 조선의 사정이 안타깝다.어느 나라도 조선의 억울함을 인정치않았다.뿐만아니라 제국주의의 정당함을 옹호하는 시대사조는 아무도 조선을 동정하지않았다.선각자들도 그한계를 분명히 느꼈을까?
분명한 건 역사는 세계는 아무런 호응도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의 현실도 녹녹치않다.일본과 한국의 쌓인 문제들.., 정신대부터 근래 미국을 위시하여 태평양방어선을 구축하며 일본의 보통국가화문제까지, ...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 현재를 해결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란 걸 깨닫게 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문학에길을묻다 2023-03-25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석열이의 구한말 觀과는 정말 다르네요 역사를 직시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