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번째 와인 가이드북
조병인 지음 / 북오션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유럽의 여름 햇살이 빚은 예술품인 와인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기에 적합한

책이 나왔다.

 

예술작품이 그렇듯이 와인도 아는 만큼만 보이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알면

알수록 신비로운 와인의 가치를 발견하려면 와인에 대한 내공이 필요하다.

'나의 첫번째 와인 가이드'는 그런면에서 초보자들도 쉽게 지식을 쌓는데

도움이 된다.

 

세계 각지에서 생산되는 수많은 와인들을 역사와 문화적 맥락에서부터

살펴보며 와인의 종류와 쓰임새, 포도 품종과 경작요령, 와인 양조 과정,

와인을 마실 때 지켜야 할 에티켓, 와인의 등급 분류법,와인 레이블 읽는 법

등 각 분야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꼭 필요한 것을 일목요연하게

독자들 눈높이에 맞게 구성되어있다.

주요 와인 생산국과 산지에 따라 지도를 수록하여 지역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등 사진과 도표 같은 시각적인 이해를 돕는 자료들도 적절하게

정리되어 있다.

 

와인에 대한 정보도 유용했지만 인상적인 것은 포도나무의 끈질긴 생존 본능

에 대한 이야기였다.

비옥하고 기름진 토양에서는 게으르고 나태한 습성을 드러내는 포도나무는

오히려 척박한 환경에서 질좋고 훌륭한 와인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척박한

토양를  파고 내려가 자양분을 모아 줄기와 열매로 보내주는 강인한 근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바람이나 우박이 몰아쳐 치명적 타격을 입기도 하고 병충해가

찾아와 곤욕을 겪어도 굳건히 극복하고 충실한  결실을 맺는 것이  힘들고 고된

역경을 이겨낸 사람들이 강해지는 인간의 삶과 닮았다. 그래서 더욱 와인이

매력적인 가 보다. 

 

초보자 입장에서 보면 와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려고 하는데 무수한 걸림돌

중에 하나는 용어다. 와인은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지 않은 술이기 때문이다.

디켄딩, 떼루아, 바디 그리고 와인의 레이블에 적힌 뜻 모를 외국어 이름들은

절망스럽게 만든다. 영어로 쓰여져 있는 것은 그럭저럭 읽는다쳐도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에스파냐어,독일어 등으로 표기된 레이블은 암호처럼 호락호락

하지 않다.

 

이 외에도 와인을 접하다 보면 수많은 생소한 용어들이나 표현법들을 볼 수

있게 되는데 이를 단지 지식적으로 다가가려 무작정 외우려하면 아마 머리가

터져버릴 것이다. 이 책을 읽어도 애석하게도 외우는 방법에 대해서는 특별한

노하우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

다만 이름을 붙이는 몇가지 예를 보다보면 자연스럽게 습득이 가능하다.

레드와인 이름에 제일 많이 나오는 샤토(Chateau)라는 용어. 포도원을

가르키는 말이다. 그래서 샤토 라피트-로트칠드, 샤토 라투르, 샤토 마르고

등은 모두 포도원의 이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또 지역이름을 와인의 상표로

사용하는 것도 많다. 샹파뉴, 코트-도르,보졸레 등은 프랑스내의 지역이름이다.

 

얼핏 복잡해 보이지만 조금씩 와인의 문화와 언어를 이해하며 알고 나면

겉으로는 까다로워 보이지만 개성이 넘치는 다양한 와인을 즐기기가 훨씬

부드러워질 것 같다. 와인의 또다른 맛은 드넓은 유럽의 역사와 문화를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있으니까. 


 

가을, 깊고 그윽한 레드와인의 계절이 다가왔다. "산도와 바디의 조화가

훌륭하군","상큼한 꽃향기와 포도의 부케가 깨끗한 느낌을 주는걸"같은 근사한 

와인의 맛 표현법을 말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면 와인을 즐길 수 없다.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느낌을 공유하며 와인의 향과 맛에 취해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와인을 마시는 목적이다.

그냥 내 취향에 맞는 와인을 즐겁게 마시면서 자신만이 알고 있는 추억을

되새기며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하면서 와인 향기에 취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와인과 함께 가을을 만끽하고 싶다.





(이 서평은 북오션 출판사로부터 무료로 제공 받아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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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구의 문인기행 - 글로써 벗을 모으다
이문구 지음 / 에르디아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그런 책이 있다. 책을 읽고 있으면 활자들이 막 살아서 돌아다니며 가슴에 꽂히게

하는 책 . 오랜만에 그런 책을 만났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뭐니뭐니해도 사람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다. 그것도 사람

속내가 드러나는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즐겁다. 게다가 우리가 접하기 어려운 

문인들의 뒷담화를 미주알고주알 엮는 책의 재미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이문구의 문인기행'은 이문구가 김동리를 포함, 신경림과 고은, 황석영, 이호철

서정주 등 한국 현대문학의 문인 21명의 삶과 일화를 풀어놓은 글들을 엮은 책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이문구의 글들을 조카뻘인 시인 이흔복이 모아서 엮은

것이라 문예지뒤에 실었던 짧은 글에서부터 기자가 되어 취재한 것을 본격적으로

집필한 것 , 가신 분에 대한 애도의 글 등 다양한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책 속의 인물들은 한국 현대 문학사를 화려하게 장식하며 한시대를 풍미했던

김동리,신경림,고은 같은 문인도 있지만  염재만, 박용래, 임강빈 등 낯선 문인들도

있다. 현대문단의 뒤안길을 거닐었지만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그들도 이문구의

글에서는  체온을 느낄 수 있을 만큼 팔딱팔딱 살아움직인다. 그래서 모두 귀하고

마음을 풍성하게 하는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걸쭉한 입담과 정겹고 맛깔스런 사투리 표현, 수더분한 문체로 풀어놓는 인간미

넘치는 이야기에 때론 폭소가 터지기도 하고  가슴을 저리게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호호야(好好爺, 인품이 아주 훌륭한 늙은이를 뜻함) 같은 한문투의 말들이

속도를 내는데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예 처음부터 사전을 옆에 펼쳐놓고

쉬엄쉬엄 읽는것도 나쁘지는 않다. 이 기회에 우리말의 다채로움을 익혀서

풍성한 우리말 표현을 익히는 것도 이 책의 다른 미덕일 것이다. 

 

김동리 주변에는 문객과 식객이 들끓었는데, 식객들은 술과 밥만 축낸 것이

아니라 선생의 용돈과 원고료까지 나눠갔다고 한다. 젊은 시절 월급이 형편

없어서 집에서 수제비가 주식이었고 계란 프라이가 최고의 술안주였던 

김동리는 댁으로 찾아온 제자들에게도 반드시 계란 프라이부터 두 개 이상

먹인 다음 술잔을 건넸다고 한다. 김동리의 인간적인 면모와 아픔와 웃음이

동시에 가슴에 스며들게 하는 일화다.

 

"선생은 엄격할 데서 엄격하고 단호할 데서 단호하여 문득 서슬이 퍼렇지만

보통 때에는 부드럽기가 봄바람 같아서 아무에게나 호호야(好好爺)로 통한다.

미아리 너머 길음시장의 기름집 아줌마는 젊은 아저씨라고 불렀지만 국어책에서

'가난한 사랑의 노래'에 감동한 소녀들은 늙은 오빠 정도로 짐작할는지도 모른다."

신경림 시인에 대한 이야기는 애정을 담뿍 담은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사실 이 책을 보고 가장 먼저 펼쳐본 장은 서정주에 대한 이문구의 글이다.

이문구는 미당 서정주의 제자임에도 1980년대 중반 자신이 발행인으로 있던

실천문학사에서 펴낸 '친일문학 작품선집'에 미당의 작품을 넣어 미당과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마주친 공석에서도 속에 탈이 났다며 술자리를 피했는데 그때마다

미당은  “너는 왜 요새 잘 보이지 않느냐. 어서 속 고쳐 가지고 오너라,

아아, 우리는 어이튼 한 잔 해야 허거든!” 라고 말했다 한다.

스승의 하해지택(河海之澤, 물과 바다보다 더 넓고 큰 은혜)을 받들지 못한

회한을 뒤늦게 '이제야 술 한 잔 올리게 되어'라는 글로 풀어냈다.

 

친일행적으로 불편한 관계에 놓였고 뜻이 달라 멀어졌지만 스승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이문구의 인간적 고뇌가 느껴진다.

이것은 이문구 개인의 문제일뿐만 아니라 우리 문단의 곤혹이고 한국 현대사의

영원한 슬픔일 것이다.

 

문학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미당을 재단해야 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미당의 일생에서 친일행적이라는 사건만으로 그 사람의 삶 전체를

매도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지 고민거리를 안겨준다.

 

그런면에서 현대사의 이념의 소용돌이에서 이념을 떠나 문단의 좌우

양쪽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이문구의 위용은 더 훌륭해 보인다. 네 편

내 편으로 편가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 냄새 풍기며 다가갔던 그가 가진 인간적

그릇의 크기일 것이다. 

 

그와 함께 호흡했던 글쟁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으니 문학동네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그 중에서도 한결같이 따뜻한 시선으로 글쟁이들을 바라보던

이문구가 가장 그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서평은 에르디아출판사로부터 무료로 제공 받아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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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읽기의 즐거움 3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지음, 유혜자 옮김 / 개암나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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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동안 항상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만 해 왔어요. 다른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모습만 하고 다녔고, 말도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만 했어요.

텔레비전도 다른 사람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봤어요. 학교에서도 그랬고,

공부방에서도요. 집에서도 그랬어요. 난 내가 원하는 것은 한 번도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어차피 머리를 잘라야 한다면 머리라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요.”


드디어 케티가 변하기 시작했다.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부모입장에서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순간이

온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인 케티는 부모님이 이혼해서 6년째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런 케티에게 월요일은 특별한 날이다. 할머니 집에서 잠을 잘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미용사인 케티 할머니는 케티와 말이 잘 통해 할머니와

지낼 수 있는 월요일을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다.

 

긴머리때문에 머릿속에 이가 생겨서 머리를 짧게 잘라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도 월요일이였다. 늘 긴머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케티에겐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였지만, 이왕 잘라야 한다면 잡지에 소개된

펑크머리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자기가 하고 싶은 머리를 하려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할머니 말에 책임을

지겠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케티.

 

초록,분홍으로 스프레이를 뿌려 닭벼슬 머리모양의 파격적인 펑크머리는

아이들에게는 부러움을 사지만 어른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는 스타일이였다.

 

공부방에서도 학교에서도 펑크머리는 어른들에게 반항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결국 화가 난 엄마는 케티의 머리카락을 싹뚝 잘라버린다.

 

어린아이는 아무 힘도 없다고 케티는 생각했다. 어린아이니까 뭐든지 참아야

한다. 아직 작고, 힘이 없기 때문에 키가 크고, 힘이 센 사람이 가위를 들고 와

머리를 싹둑 잘라 버리는 것도 참아야 한다. 어른들은 권력을 휘두르고,

어린이는 복종해야 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누군가 가위를 들고 와 빨간색으로 염색한 엄마의 앞머리를 싹둑 잘랐다면

엄마는 그 사람을 경찰에 신고하고, 가위를 들고 그 짓을 한 사람은 교도소에

들어갈 거다.

하지만 케티는 어느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사실은 아직 작고,

힘이 약한 어린이들에게 도움을 더 많이 필요한데도 말이다.

 

이렇듯 권위주의에 반항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성장해가는 케티의

이야기는 한참 사춘기의 몸살을 앓았던 내 아이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어찌나 낯설게 보이는지..

아이와 고집 줄다리기를 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지금은 아이의 생각을

존중해주려고 하고 아이의 자존감을 살려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부모의 눈높이에 맞춰 행동을 강제하기보다는 아이의 성향을 이해하고

강요나 지시 대신 선택의 기회를 주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화를 가라앉히고 왜 하기싫다고 하는지, 그럼 다른 걸 해보는 건 어떻겠는지

차분히 설명해주다 보면 서로의 생각도 조율할 수 있고 상처를 주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유쾌한 케티의 반항이야기는 아이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수 있게 해준다.

아이에게 자유와 그에 따르는 책임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줄수도 있고 , 의견이

다를때 서로 조율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읽는 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는 ' 케티 이야기는

한뼘씩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줄 것이다.
 
 

(이 서평은 개암나무출판사로부터 무료로 제공 받아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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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여자집 2011-09-18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봤습니다.^^
 
푸른 영혼일 때 떠나라 - 떠남에 서툰 당신을 위한 청춘 여행법
노동효 지음, 안시내 그림 / 나무발전소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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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여행을 떠나고 싶지만 머뭇거리는 청춘들에게 말한다. 푸른 영혼일 때

길을 떠나라고. 마흔이 넘으면 그처럼 가난한 세계여행은 쉽지 않다고. 하룻밤

재워주거나 자신의 차에 태워주기는커녕 "그 나이 되도록 돈 안 벌고 뭐했냐?"

고 눈을 흘길 테니 말이다.

 

어쩐지 저자의 말에 길을 떠나지 못한 소외감과 서글픈 마음이 든다. 저자가

말하는 가난한 세계여행을 떠날 수 없는 마흔넘은 아줌마이고 '자본주의'와

'상업주의'에 이미 익숙한 나이이기 때문이다.

 

내 영혼은 과연 무슨 색일까? 적어도 푸른색은 아닐 거라고 고개를 재빠르게

저어본다.

푸른색보다 채도가 낮은 카키색? 반짝반짝 빛나고 생기어리기보다는 안정감

있고 편안한 카키가 나에겐 어울리는 색깔인 듯 하다.

 

푸른 스물...저자가 떠났던 푸른 스물이라고 표현하는 나이는 <살아남은자의

슬픔>책에서 처럼 무언가에 심취해야만 하는 나이고, 또한 무언가에 심취할 수

있는 유일한 나이다. 하지만 내가 푸른 스물이였던 때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가?

저자가 떠남에 서툰 청춘들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길 위에서 인류의 사랑을

맘껏 받을 수 있는것이야말로 청춘의 특권'이라는 말에 무작정 그의 여행에

무임승차하였다.

여행을 시작했던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을 지나, 프라하, 바르샤바,베니스, 로마,

바티칸,이스탄불, 코니아, 이슬라마바드, 히말라야 훈자, 중국 산동반도를 거쳐

인천항까지 마치 저자와 함께 여행동무가 된 듯 지구의 반, 1만 6천 km

유라시아 대륙길을 공유하며,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탔다.

 

출발지와 목적지만 정해지면 중간 경로야 가다보면 이어진다는 우주를 질주하고

싶은 푸른 영혼과 모험을 떠나며 내내 기분 좋은 설레임에 가슴이 뛰었다.

될 대로 되라는 '케 세라 세라'를 '다 된다. 다 돼!'라고 고쳐서 외쳤던, 푸른

스물을 버티게 한 그의 주문을 같이 외우면서.

 

여행은 새로운 일상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지만 그의 여행기를 접하다보니 나의

해마 어느 부위를 건드렸는지 가보지도 못한 장소가 눈에 아련히 그려졌다.

그건 아마도 그의 여행 이야기가 영화와 시와 소설, 그리고 음악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녹아내렸기 때문일 것이다.

 

프라하에서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빙글빙글 나선형 계단을 오를땐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가 생각났고, 황금빛으로 물든 지중해에서 수영을 하다가는

영화 '언더그라운드'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으며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를

지날땐 '자살의 송가'라는 '글루미 선데이'를 기억했다.

 

 '사과 맛을 보기 위해서는 사과를 베어물어야 한다'는 판타스틱 캠프에서

만난 히피 할아버지,  수피교의 성지인 '코니아'라는 낯선 마을까지 이끈 사기꾼

노인, 낯선 이방인을 선뜩 자신의 집에서 재우며 '우리 모두가 친구'라는 관용의

종교임을 보여주었던 무슬림 무샤프,돈이 없어 티켓을 사지도 않은 채 무작정

오른 기차에서 친절을 베푼 노인까지.

여행의 신이 만나게 해준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차곡차곡 가슴에 남는다.

 

비록 푸른영혼이지는 못했지만 저자의 여행기를 (여행기보다는 방랑기가 더

어울릴 듯하다) 읽다보니 나의 색깔을 바꿔놓은 것 같다.

경쾌한 푸른색에 편안한 카키색을 섞어 넣은 느낌?

 

단돈 200만원을 들고 그나마 100만원은 도둑맞아 잃어버린 그렇게 힘든

여행이었지만 저자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부정해 왔던 많은 것들을 긍정하게

하고, 무의식적으로 쫓던 많은 것들을 버리게 했다”고 말한다.

 

인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느낌이 나에게 전달된 걸까?

어쩐지 내 인생이 멋스러운 색깔로 채워진 것같다.

 

'여행자가 길을 떠나면 여행의 신이 어깨에 내려앉아. 그러니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

라는 그의 목소리가 속삭이는 듯하다. 이내 저 멀리서 저벅저벅 걸어오는 여행의

신 발소리도 들리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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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 사용 설명서
전석순 지음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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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 너무나 낯익은 그래서 올드한 이름이다. 나같은 386세대는 대번에 그럼

'영희사용설명서'은 어디에? 라는 조건반사처럼 나오는 영원한 영희의 파트너

(바둑이까지 하면 3종세트인) 이다.

그래서 그런지 책 표지에 늘어진 추리닝(트레이닝대신 이럴때 추리닝이라고 말해야

어울린다) 과 슬리퍼를 신은 철수 모습은 왠지 인사동에 있는 '토토의 오래된 물건'

에서 못난이 3형제와 마징거z사이에 있음직한 포스다. 

 
그런데 그런 철수가 20대 작가에 의해서 20대 담론과 문화를 이야기할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철수 사용 설명서. 가전제품처럼 사람에게 사용설명서라니? 신선하기도 하고

독특하기도 하고, 파격적이면서도 또한 도발적인 제목이다. 제목그대로 이 책은

‘철수’를 ‘사용’하는 설명서이다.  


‘ 제품명 철수, 29세 남자, 키 173㎝, 몸무게 65㎏, 발 사이즈 270㎜, (지방) 국립대

졸업, 원만한 성격을 가짐’

이처럼 철수는 평균적인 삶을 꾸리는 대한민국 스물아홉 살 청년들에게 붙여진

보통명사이자 취업준비생이다. 키, 학벌 뭐 하나 내세울 것은 없지만 취업모드,

연애모드, 가족모드, 학습모드 등 기본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어, 이 정도면 대한민국

표준이라고 생각해왔던 철수였다.

 

그러나 사용 설명서라는 말처럼 매장에 놓여있는 가전제품과 다름없이 제품화되고

상품화된 20대 청춘들인 철수는 선택되기만을 기다리는 신세이다.

 

그렇지만 취업 모드에서는 선택받지 못하고, 연애모드에서는 갖가지 사유로

반품된다. 가족모드에서는 “고장은 났지만 버릴 수도 없는, 어디에 써야 할지

막막한 물건”이요, “어느 날 갑자기 용도도 정해지지 않은 채 툭 던져진 물건”이

된다.


이처럼 주위사람들이 더 나은 스펙을 가진 사람들과 비교하며 스팀 기능이 없는

다리미나 얼음을 못 만드는 정수기 쯤으로 치부하며 업그레이드를 요하는

현실에서 점점 하자가 있는 상품으로, 불량품으로 취급되면서 철수는 자신감이

사라진다. 
 

“철수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용도에 맞게 쓰지 않았거나 주의

사항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썼을 수도 있다. 부적합한 사용 환경에서 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원인이 철수에게 있는 게 아닐 수도 있는 문제들은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짧은 연애 기간도, 재능이 없다며 두어 달만 다니고 그만두었던 피아노

학원도, 알고 보니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애구나 하면서 끝났던 우정도, 모두 철수의

잘못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철수는 어떤 일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이 사실은 고장난 게 아니라,

사용자가 잘못 사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의심하면서 ‘철수 사용 설명서’를 작성한다.

언제 어디서나 완벽한 제품은 처음부터 없었고 그건 철수도, 철수를 사용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고, 고장이 아니라 단지 제품의 고유의 특징을 모르고 잘못

사용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차츰 깨달으며 자신의 존재를 찾는다.

 
청년실업 상태를 시종일관 유쾌한 톤을 유지하면서 위트와 번뜩임과 꼬집기를

번갈아가며 가볍게 써내려갔지만  읽고 있는 나는 점점 가슴이 답답하고 불편하다. 

  
20대 철수에겐 당장은 취업의 현실이 짓눌러 오겠지만 그것은 점점 무언가로 계속

바꿔서 삶을 짓누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것이다. 결혼, 집장만, 자녀교육,

노후자금 등 20대 철수가 아니라 40대 영희인 나도 끊임없이 업그레이드 하라는

압력을 받으며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20대의 철수가 40대에는 덜 힘들고 더 웃을 수 있는 따뜻한 세상이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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