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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구의 문인기행 - 글로써 벗을 모으다
이문구 지음 / 에르디아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그런 책이 있다. 책을 읽고 있으면 활자들이 막 살아서 돌아다니며 가슴에 꽂히게
하는 책 . 오랜만에 그런 책을 만났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뭐니뭐니해도 사람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다. 그것도 사람
속내가 드러나는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즐겁다. 게다가 우리가 접하기 어려운
문인들의 뒷담화를 미주알고주알 엮는 책의 재미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이문구의 문인기행'은 이문구가 김동리를 포함, 신경림과 고은, 황석영, 이호철
서정주 등 한국 현대문학의 문인 21명의 삶과 일화를 풀어놓은 글들을 엮은 책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이문구의 글들을 조카뻘인 시인 이흔복이 모아서 엮은
것이라 문예지뒤에 실었던 짧은 글에서부터 기자가 되어 취재한 것을 본격적으로
집필한 것 , 가신 분에 대한 애도의 글 등 다양한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책 속의 인물들은 한국 현대 문학사를 화려하게 장식하며 한시대를 풍미했던
김동리,신경림,고은 같은 문인도 있지만 염재만, 박용래, 임강빈 등 낯선 문인들도
있다. 현대문단의 뒤안길을 거닐었지만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그들도 이문구의
글에서는 체온을 느낄 수 있을 만큼 팔딱팔딱 살아움직인다. 그래서 모두 귀하고
마음을 풍성하게 하는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걸쭉한 입담과 정겹고 맛깔스런 사투리 표현, 수더분한 문체로 풀어놓는 인간미
넘치는 이야기에 때론 폭소가 터지기도 하고 가슴을 저리게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호호야(好好爺, 인품이 아주 훌륭한 늙은이를 뜻함) 같은 한문투의 말들이
속도를 내는데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예 처음부터 사전을 옆에 펼쳐놓고
쉬엄쉬엄 읽는것도 나쁘지는 않다. 이 기회에 우리말의 다채로움을 익혀서
풍성한 우리말 표현을 익히는 것도 이 책의 다른 미덕일 것이다.
김동리 주변에는 문객과 식객이 들끓었는데, 식객들은 술과 밥만 축낸 것이
아니라 선생의 용돈과 원고료까지 나눠갔다고 한다. 젊은 시절 월급이 형편
없어서 집에서 수제비가 주식이었고 계란 프라이가 최고의 술안주였던
김동리는 댁으로 찾아온 제자들에게도 반드시 계란 프라이부터 두 개 이상
먹인 다음 술잔을 건넸다고 한다. 김동리의 인간적인 면모와 아픔와 웃음이
동시에 가슴에 스며들게 하는 일화다.
"선생은 엄격할 데서 엄격하고 단호할 데서 단호하여 문득 서슬이 퍼렇지만
보통 때에는 부드럽기가 봄바람 같아서 아무에게나 호호야(好好爺)로 통한다.
미아리 너머 길음시장의 기름집 아줌마는 젊은 아저씨라고 불렀지만 국어책에서
'가난한 사랑의 노래'에 감동한 소녀들은 늙은 오빠 정도로 짐작할는지도 모른다."
신경림 시인에 대한 이야기는 애정을 담뿍 담은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사실 이 책을 보고 가장 먼저 펼쳐본 장은 서정주에 대한 이문구의 글이다.
이문구는 미당 서정주의 제자임에도 1980년대 중반 자신이 발행인으로 있던
실천문학사에서 펴낸 '친일문학 작품선집'에 미당의 작품을 넣어 미당과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마주친 공석에서도 속에 탈이 났다며 술자리를 피했는데 그때마다
미당은 “너는 왜 요새 잘 보이지 않느냐. 어서 속 고쳐 가지고 오너라,
아아, 우리는 어이튼 한 잔 해야 허거든!” 라고 말했다 한다.
스승의 하해지택(河海之澤, 물과 바다보다 더 넓고 큰 은혜)을 받들지 못한
회한을 뒤늦게 '이제야 술 한 잔 올리게 되어'라는 글로 풀어냈다.
친일행적으로 불편한 관계에 놓였고 뜻이 달라 멀어졌지만 스승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이문구의 인간적 고뇌가 느껴진다.
이것은 이문구 개인의 문제일뿐만 아니라 우리 문단의 곤혹이고 한국 현대사의
영원한 슬픔일 것이다.
문학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미당을 재단해야 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미당의 일생에서 친일행적이라는 사건만으로 그 사람의 삶 전체를
매도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지 고민거리를 안겨준다.
그런면에서 현대사의 이념의 소용돌이에서 이념을 떠나 문단의 좌우
양쪽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이문구의 위용은 더 훌륭해 보인다. 네 편
내 편으로 편가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 냄새 풍기며 다가갔던 그가 가진 인간적
그릇의 크기일 것이다.
그와 함께 호흡했던 글쟁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으니 문학동네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그 중에서도 한결같이 따뜻한 시선으로 글쟁이들을 바라보던
이문구가 가장 그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서평은 에르디아출판사로부터 무료로 제공 받아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