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 사용 설명서
전석순 지음 / 민음사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철수. 너무나 낯익은 그래서 올드한 이름이다. 나같은 386세대는 대번에 그럼

'영희사용설명서'은 어디에? 라는 조건반사처럼 나오는 영원한 영희의 파트너

(바둑이까지 하면 3종세트인) 이다.

그래서 그런지 책 표지에 늘어진 추리닝(트레이닝대신 이럴때 추리닝이라고 말해야

어울린다) 과 슬리퍼를 신은 철수 모습은 왠지 인사동에 있는 '토토의 오래된 물건'

에서 못난이 3형제와 마징거z사이에 있음직한 포스다. 

 
그런데 그런 철수가 20대 작가에 의해서 20대 담론과 문화를 이야기할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철수 사용 설명서. 가전제품처럼 사람에게 사용설명서라니? 신선하기도 하고

독특하기도 하고, 파격적이면서도 또한 도발적인 제목이다. 제목그대로 이 책은

‘철수’를 ‘사용’하는 설명서이다.  


‘ 제품명 철수, 29세 남자, 키 173㎝, 몸무게 65㎏, 발 사이즈 270㎜, (지방) 국립대

졸업, 원만한 성격을 가짐’

이처럼 철수는 평균적인 삶을 꾸리는 대한민국 스물아홉 살 청년들에게 붙여진

보통명사이자 취업준비생이다. 키, 학벌 뭐 하나 내세울 것은 없지만 취업모드,

연애모드, 가족모드, 학습모드 등 기본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어, 이 정도면 대한민국

표준이라고 생각해왔던 철수였다.

 

그러나 사용 설명서라는 말처럼 매장에 놓여있는 가전제품과 다름없이 제품화되고

상품화된 20대 청춘들인 철수는 선택되기만을 기다리는 신세이다.

 

그렇지만 취업 모드에서는 선택받지 못하고, 연애모드에서는 갖가지 사유로

반품된다. 가족모드에서는 “고장은 났지만 버릴 수도 없는, 어디에 써야 할지

막막한 물건”이요, “어느 날 갑자기 용도도 정해지지 않은 채 툭 던져진 물건”이

된다.


이처럼 주위사람들이 더 나은 스펙을 가진 사람들과 비교하며 스팀 기능이 없는

다리미나 얼음을 못 만드는 정수기 쯤으로 치부하며 업그레이드를 요하는

현실에서 점점 하자가 있는 상품으로, 불량품으로 취급되면서 철수는 자신감이

사라진다. 
 

“철수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용도에 맞게 쓰지 않았거나 주의

사항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썼을 수도 있다. 부적합한 사용 환경에서 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원인이 철수에게 있는 게 아닐 수도 있는 문제들은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짧은 연애 기간도, 재능이 없다며 두어 달만 다니고 그만두었던 피아노

학원도, 알고 보니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애구나 하면서 끝났던 우정도, 모두 철수의

잘못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철수는 어떤 일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이 사실은 고장난 게 아니라,

사용자가 잘못 사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의심하면서 ‘철수 사용 설명서’를 작성한다.

언제 어디서나 완벽한 제품은 처음부터 없었고 그건 철수도, 철수를 사용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고, 고장이 아니라 단지 제품의 고유의 특징을 모르고 잘못

사용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차츰 깨달으며 자신의 존재를 찾는다.

 
청년실업 상태를 시종일관 유쾌한 톤을 유지하면서 위트와 번뜩임과 꼬집기를

번갈아가며 가볍게 써내려갔지만  읽고 있는 나는 점점 가슴이 답답하고 불편하다. 

  
20대 철수에겐 당장은 취업의 현실이 짓눌러 오겠지만 그것은 점점 무언가로 계속

바꿔서 삶을 짓누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것이다. 결혼, 집장만, 자녀교육,

노후자금 등 20대 철수가 아니라 40대 영희인 나도 끊임없이 업그레이드 하라는

압력을 받으며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20대의 철수가 40대에는 덜 힘들고 더 웃을 수 있는 따뜻한 세상이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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